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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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생각이 났다. 부실하고 무관심한 기억이 마치 작년이었는지, 재작년 이었는지, 정확히 언제인지도 이미 아득한 옛 이야기처럼 까마득하게 여겨지게끔 해준다. 다시한번 그때를 생각해보며 시간을 되짚어보니 그때는 2008년 여름이었다. 집에도 아무얘기도 하지 않았고, 같이갔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도 모르게 행해졌던 일. 2008년 여름, 시청광장을 비롯한 광화문 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정부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위해 몰려들었다. 외신기자도 놀랄정도로 그 물결은 거대하게 타올랐다. 사실 나는 절대 그런곳에 참여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고작)두어번 참여한적이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의지가 나를 행동하게 했다. 하지만 사실상 나는 그때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힘을보태는 것과는 약간 미묘하게 다른 이유로 나섰던 것 같다. 분명 그때의 쇠고기협상과 대운하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반하는 의사를 갖고 있었지만, 나를 정말로 움직이게 했던것은, 내가 분명 옳다고 생각하는 혁명이 가져올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무임승차 하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때에 나는 그 촛불집회가 분명한 승리를 거두리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허나 별 시덥잖은 일상을 핑계삼았는지 나의 참여또한 오래가지 못했고, 집회또한 가능성은 보여줬지만 실질적으로 원하는 성과를 이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에겐 고작 이정도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상처를 가져다준 이 사건이 나를 비롯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을까. [빵과 장미]는 실제로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과 그때에 내가 느꼈을, 행복에 대한 방법적인 고민또한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했다. 

20세기초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의 거대 방직공장들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다루는 [빵과 장미]는 실제로 그 파업을 일으킨 주체인 어른들이 아니라 그 테두리안에서 어쩌면 그 어른들보다 더 깊은 현실적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 -로사와 제이크-를 통한 시선으로 보여진다. 활활 타오르는 행복이라는 불꽃을 거뭐지기 위해서 뜨거운 열기속에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있던 어른들의 입장이 아니라, 그 어른들에게 드리워질지 모르는 죽음과 그로인해 자신들이 실제 피부로 느껴야했던 배고픔과 추위를 걱정해야 했던 순수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한 이야기 인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마치, 고리끼의 ‘어머니’ 같은 역동적이고 치열한 혁명의 모습보다는 좀 더 차분한 시각을 보여준다.  

선생님에게서 파업은 결국 법을 어기는 폭동이라고 배우는 로사는 자신의 엄마를 비롯한 수많은 어른들의 열성적인 행동을 보며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것인가 라기보단,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서 어떤행동이 더 옳은가로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피해서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자기도하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제 꾀를 십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하는 제이크 또한 파업의 열정적인 현장에 고무되기도 하지만, 결국 제 자신이 눈앞에 맞닥뜨린 추위와 배고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분명 성장의 시기에서의 이런 고민은 어른보다 좀더 혼란스럽겠지만, 실제 우리사회의 현실에서는 이것들이 비단 아이들만이 갖는 고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실문제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결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지에 따라 혁명과 집회의 주체자인 어른들또한 이 책에서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모습처럼 나눠진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갖는 신념과 믿음의 혼란은 훌쩍 자란 어른들에게도 풀리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가치관의 차이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에 대한 찬반으로 인해 참여여부가 갈리는 것이 아닌) 파업이나 집회에 참여여부를 갈라놓는 것 아닐까. 그러니깐 연대의 성공여부는 실제적으로 반대의사를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는일 뿐만아니라, 의견에 공감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눈앞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하는일에 달려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법적 가치의 혼란은, 마치 미국 토박이와, 이탈리아계, 기타 등등 국가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뒤죽박죽이 되기도 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촛불집회에 장기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눈앞에 맞닥뜨린 내 자신의 현실의 문제들 때문이었는지, 옅어져 가는 희망때문이었는지, 무참히 짓밟히는 시민들을 보고 느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저 게을렀던 것인지 예나 지금이나 확신이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참여했던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친구들 둘과 시청앞에서 촛불을 켜고 거리를 행진했다. 소심한 성격에도 친구들과 함께 사람들이 열창하는 노래와 구호들을 크게 외쳤다. 누가 시작한지도 모르게 들려오면, 큰소리로 따라했다. 행진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아주 천천히 천천히 진행되었고, 우리들이 그 페이스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군중들이 갖고있는 제각각의 두려움들이 그들의 걸음을 붙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경찰의 저지선에 다다랐을때 나와 친구들은 거의 맨 앞줄에서 그것들을 맞닥뜨렸다. 모두가 연대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지만 적잖은 두려움은 내내 나를 두드려댔다. 그러다 물대포를 연상케하는 무언가가 그 저지선 높은곳에서 우리를 향했고, 나는 더이상 앞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 혼자 뒤로 빠질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친구들을 잡아다가 함께 뒤로 가려했다. 물대포를 뒤집어쓸 각오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것들을 머리위로 이고서 앞으로 향했다. 허나 그것은 맥빠지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일이었겠다. 그것은 후에 검거를 용이하게 하고, 국가의 녹을 받을 사람에게는 족쇄가 될지도 모를 채증용 카메라였다. 그후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진 모르겠지만, 집에는 가야할 것 아니냐는 친구의 의견에 의해 우리는 어느틈엔가 군중속에서 살짝씩 벗어나고 있었다. 겉으로는 마치 몇날 몇일을 세울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그런 이야기를 해주길 바랬었을 것이다. 분명히. 나는 그만큼의 의지도 열정도, 용기도 없었을테니깐.

파업과 집회, 즉 작던 크던간에 혁명을 위한 참여에 대하여 어른에게는 그것들이 책임이 따르는 선택일지 모를지언정, 이 순진한(그럼에도 현실적일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는 행복을 위해 결사항전 하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이고, 어떤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않은 성장의 과정이다. 그렇게 이책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어떤 가치를 갖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에따라 어떻게 행동할것인가의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삶을,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어른이 되기위한 과정중에 굉장히 중요한 점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환기시켜 주고있다. (물론 어른이 되기전 확고한 신념을 세웠다 하더라도 후에 끊임없이 그것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올테지만 말이다.) 

허나, [빵과 장미]는 행복을 위한 가치추구에 대해서 아이들이 보는 시선과 혼란, 순수성, 성장과정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요소에 대하여 먹는 것을 넘어선 질문을 던진다. 그 부분은 아이들이 버몬트로 향하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는다. 그리고 그동안 대비되었던 로사와 제이크의 삶에 대한 차이를, 둘을 한집에 붙여놓음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나마 돌아갈 따뜻한 가족이 있는 로사가 던지는 질문들과, 그렇지 못한 제이크가 던지는 질문들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자신은 배불리 먹으면서도,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는 로사와, 아버지가 죽은게 제 탓으로 여겨질까봐, 뉴욕으로 도망치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제이크의 상황또한 분명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확실한 공통점은, 결국 모든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공간은 가정이라는 곳이라는 것. 이로써 타인이 가진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면은, 조금 덜 가진자든, 조금 더 가진자든 저마다 비슷한 깊은 고민이 있다는 것 또한 보여진다. 

그리고 마지막 메세지는, 버몬트를 떠나면 정말 어디에도 제 자신이 마음놓고 쉴 수 없는 상황의 제이크를 통해 이뤄진다.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돌을 살려내려고 작정한 듯 거기에 꽃을 새기며 살아가는 제르바티와 이제는 자신의 모든 가족이 사라지고, 어린나이에도 너무나 치열한 문제와 싸워야만 했던 제이크가 진심으로 서로를 채워주는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결국 연대는, 결국 공장주들에 대항하여 승리한다. 오로지 빵만을 위해, 그저 동물적 생존본능에 의해서만 이뤄진 파업이 아니라, 더 나은 인간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파업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이것이 승리한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때문이다. 파업에 현장에서 로사의 엄마와 연대했던 이들을, 그들이 파업을 계속할 수 있게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을, 제르바티의 상처입은 가슴에, 제이크의 얼어붙은 가슴에 장미꽃을 새겨준 이를 가리켜, 우리가 그것을‘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거뭐지기위해 하나가 아닌 둘 이상(연대)이 필요하다면, 이 [빵과 장미]에서의 제르바티와 제이크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모습은 연대의 기초가 믿음과 진정성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함을 말하고, 로사를 통해 보여지는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한 방법적 고민과 혼란을 통한 내적성장은 연대를 이루는 개인구성원이 거쳐야할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와 고민들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올려진 구성원간의 빈틈없는 연대가 행복을 향해 앞으로 전진할때야말로, 돌같은 희망위에 장미를 새겨넣을 수 있다는 것을 로렌스 지방의 모든 이들이 온몸으로 증명했다.

[빵과 장미]가 보여주는 이 강한 연대와 그로인해 이들이 얻을 수 있었던 행복이야말로, 2008년 여름 서울의 한복판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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