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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봤다.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큰 붓의 궤적처럼, 꼬아진 줄처럼도 보이는 그것은 분명 이 단편들이 그러하듯, 어느 꼭대기에서 매듭지어져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여기에 수록된 단편들은 보편적으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편집자와 옮긴이의 재량껏 선택/배열되었다. 표제작인 ‘킬리만자로의 눈’이 제 죽음과 마주한다면, ‘인디언 마을’은 타인의 죽음과 마주한다. ‘알게되는 순간’이, ‘알았다고 생각하던 순간’으로 거슬러 가는 과정이다. 최후의 죽음에서 최초의 죽음을 더듬어가던 인물처럼, 배열은 죽음으로 연결된 최전방과 최후방의 꼭짓점 사이에서 의식의 흐름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양쪽 세계의 죽음 사이에서, 살아있던 만물들의 우직한 ‘어떤 순간들’은 필연적이며 역설적으로 삶을 이야기한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처럼,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본 삶은 마치 신기루 같다. 살아갈 날에 대한 맹목적 확신은 죽음을 거짓말로 받아들이게 하지만 그 경계 앞에 서는 순간, 흉내 낼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을 지난 삶이 거짓말이 되고 오로지 남아있는 것, 죽음만이 참말이 된다.
하지만 내가 느낀, 그(헤밍웨이)가 그려낸 죽음들은 여성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와 다시 여성의 세계로 들어가고야 마는 (대부분) 남성의 운명과, (거의) 필연적으로 다른 생명의 세계를 파괴하는 태도에 대한 대조로 확장되었다.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와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이하 ‘프랜시스..’)의 머콤버는, 진작에 한 (자궁의) 세계를 빠져나오며 태아였던 자신과 죽음을 선언하지만 결국 같은 (여성의 품인) 세계로 돌아가고야 마는 (대부분의) 남성들이었다. 자신을 극복하거나 상대를 부정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 세계의 균형을 깨트리고자 하는 그들은 결코 정복한 적도, 하나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세계를 벗어날 뿐이다. 이야기 사이의 공백을 재량껏 메우며 좀 더 되짚어 봤다. ‘인디언 마을’에서 최초와 최후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어떤 일의 끝’에서 여성의 품에 들었다 벗어나지만 ‘사흘간의 바람’에서 결국 그것이 실패했음을 은연중 알고, ‘살인자들’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이를 보고 ‘가지 못할 길’을 통해 다시금 떠나, ‘이제 내 몸을 뉘며’에서 결혼이 모든 것을 고쳐줄 것이라고 믿는 이를 약간은 측은히 바라보며 ‘심장이 둘인 큰 강 1,2부’선 낚시를 즐길 수 있는 날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으리라 확신하지만 ‘온 땅의 눈’속에서 아내의 임신으로 인해 그런 날들을 약속할 수 없음을 알고 (닉 애덤스의 시리즈는 끝인듯 하지만 흐름을 이어가자면) ‘하얀 코끼리 같은 산’에서 위태로운 감정들을 건너기도 하며,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처럼 타인의 허무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결국은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에서 처럼, 마지막 세계의 죽음을 지나서야 비로소 아무도 알 수 없을 자유로 향한다. 가장 멀리 왔을때, 가장 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의 울타리를 원하면서도 또 벗어나고자 함은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생명의 본능인걸까.
‘프랜시스..’를 다시 ‘심장이 두개인 큰 강’과 연결해보면, 끝과 끝의 연결을 통해 서로를 근사치의 힘으로 잡아당기는 낚시와 달리, 필연적으로 손을 벗어나 폭발적인 힘으로 찰나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사냥의 차이를 본다. 사냥은 낚시처럼, 죽음 앞에서 서로의 생이 최대로 응축되어 발현될 순간이 생략되며 한 생이 한 생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느낄 틈조차 없다. 죽음 바로 직전, 생명이 가장 강하게 빛을 발하는 그 순간이 부재한다. 낚시는 ‘당김’으로써 죽음을 만들지만, 사냥은 ‘밀어냄’으로써 죽음을 만든다. 거짓 같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삶을 느끼는 방식과 삽시간에 삶과 죽음 모두 거짓 같은 일이 되어버리는 방식은 죽음과 자유의 연계를 생각게 한다.
생(生)이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 어떻게 자유 혹은 파괴로 넘어가는가. 밀어내는 죽음은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서로의 생 간의 연결과 긴장이 없는 죽음은 그저 파괴로 전락할 뿐. 해리는 아내가 계속해서 그의 생을 바라고 당김으로써 평온한 자유로의 과정을 거쳤지만 머콤버의 삶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해리가 [신의 집]에 도달하는 그 과정은, 거짓의 계단을 올라 이윽고 진실이라는 꼭대기에 닿고자하는, 헤밍웨이 자신처럼 거짓을 보태 진실을 그려나가는 창작자의 운명을 대변하는 걸까. 정말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킬리만자로의 평평한 꼭대기’는, 온갖 의미의 끝에서 무의미의 ‘낙원’을 발견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곳은 아닐까. 무엇이 그들을 그곳으로 이끄는지, 얼어붙은 표범 시체를 보듯, 타자인 우리는 그저 올려다 볼 뿐이다. 해리의 죽음과 동시에 울먹이던 하이에나의 소리가 그녀를 깨웠음에도 이내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 때문에 더 듣지 못하듯, 인간 또한 타자의 죽음으로 잠시 깨지만 이내 잊고 살아간다. 살아있는 자의 숙명이기라도 한 듯.
인간은 늘 단편의 죽음과 마주하고 언젠가 한번 장편의 죽음과 마주한다. 늘 한 순간의 소멸과 한 순간의 탄생으로 이루어진다. 수면이라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행위 전 하루를 돌아보듯 최후의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자유인가 소멸인가.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갖는 많은 것들은 찰나의 빛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가 진정 발현되는 순간은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찰나의 순간인지도 모른다. 놓여진 것은 자유뿐인 그 죽음 직전의 순간, 지난 삶을 온전히 보낼 수 있는 그 순간이 진정 자유의 순간아닐까. 죽음 후의 삶을 결국 우리의 거짓말이 증명할 수 있다면 죽음 직전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진실이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