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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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는 자유를 빼앗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선량한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아왔다. 이 독재가 결국, 개인의 어느 바닥에서 발현되는지부터, 인류의 어디까지 침몰시킬 수 있는지 <염소의 축제>는 매우 다양한 접근방식과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소설기법으로 펼쳐낸다. 

 

이 소설은 독재가 한참전에 끝난 시대, 우라니아가 모국 도미니카로 돌아와 노쇠한 아버지에게 과거를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두번째는 수십년 전, 견고한 독재가 언제까지고 계속 될 것처럼 트루히요의 군더더기 없는 모습에서 시작하고, 세번째는 안토니오 임베르트 무리가 독재자 트루히요를 암살하려는 날로 시작한다. 여기에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까지 합쳐져 '독재'와 '독재자' 그리고 그 독재에 '저항하는 자들'의 특성과 심리를 바닥부터 관찰하며, 각 시대를 온전히 담아내는 이 세개의 하루는 30년이 넘는 시간을 간결한 글에 압축하여 펼쳐낸다.

 

트루히요의 예처럼, 으레 독재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재자를 도움으로써 보장받을 수 있는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 그 지배층 뿐만 아니라 피지배층 모두가 갖고 있는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그로인해 발생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만족, 하나뿐인 목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밥그릇 뒤에 놓을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함, 언론의 결탁 등등. 하지만 작가는 독재의 지속성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고, 통찰력 있는 근거들을 그려낸다. 독재자에게는 잘못된 아버지 상을, 피지배자에게는 고통을 행복의 과정이라고 보는 잘못된 인식과 두려움을 통한 수긍-길들여짐에서 찾아낸다.

 

그건 그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이었어. 아이가 권위적인 부모를 사랑하면서 채찍질과 구타가 결국은 그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야.

 

트루히요는 스스로 시민들의 진정한 아버지, 아버지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온갖 더러운 욕망을 가진 ‘의붓아버지’ 다. 더러움을 속으로 흐르게 해야할 하수도에서 넘쳐나온 오물에 그가 그렇게도 신경이 곤두섰던 것은, 자신과 하등 다를바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우라니아의 아버지가 가족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 딸의 처녀성을 멋대로 희생시킨 것은, 트루히요의 모습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가족에서 국가로 넘어가면서 희생의 범위와 강도가 더 커지는 것은 자명한 것. 권위적인 부모의 폭력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독재자의 무분별하고, 국민을 향하지 않은 국가운영에 대해 국민은, ‘우리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 이라고 믿었던 것은 얼마나 끔찍한 오해인가.

 

그는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 비록 총통이 몸은 죽었을지라도 그의 영혼이나 정신 같은 것이 계속해서 그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꼈다.

 

게다가, 트루히요의 죽음을 확인하고서도 오랜시간 세포하나까지 지배당했던 로만 장군은 정권을 잡지 못했다. 길들여진 개가 목줄이 끊어졌음에도 도망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을 지배했던 독재자의 아우라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사에 참여했던 여러 인물들과 함께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독재자의 아우라를 끔찍하게 뒤집어쓴 것은 과연, 로만 장군 뿐일까?

 

이 나라는 짧은 시간동안 남부럽지 않은 독재자들을 배출했다. 트루히요를 찬양했던 많은 도미니카 시민들은 억압뒤에 따라오는 경제의 혜택으로 말미암아, 독재시대를 더 살기 좋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법 및 기간에 대한 간섭과 제재가 거의 없는 독재가 경제적 성장마져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독재자 스스로의 수치아니겠는가. 독재 뒤의 콩고물과 같은 경제혜택을 좇는다면, 언제어디서 또 다른 독재자가 탄생해도 이상할 게 없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가치이고 평등이다. 어떤 통치도 독재를 바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밥한그릇은 우리 노동의 대가이다. 자유대신 주어진 밥 한그릇에 만족하는 것은 절망적이다. 그것은 동시에, 누군가가 받았던 고통에 대한 침묵의 대가이기도 했으니깐.

 

그럼에도 우라니아가 제 가슴속에 꼭꼭 감춰둬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를 사촌들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대답없는 그의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우리가 용기있게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고 다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자신, 사회,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유/무형의 독재자는 인류사에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한명에게 다수에 대한 책임과 동시에 권리를 쥐어주는 것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리스크 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켜봐야한다. 독재에 저항하기를 머뭇거리거나 포기함은, 서로의 비극을 방관하는 것이며, 그것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건너편 동료의 고통을 외면하고, 바로 앞의 밥그릇을 핧을때 머지않아 우리는 건너편의 위치에 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목에 걸린, 아름다운 무늬로 세련되게 치장된 독재의 목줄을 그저 바라보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다.  

 

우라니아가 무표정으로 고백한 과거의 진실이 그 사촌들을 무너뜨렸듯, 무표정의 글에서 독재는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독재자의 모습들은, 예상보다 큰 분노의 감흥이 없었다. 문득 스스로에게 놀라며, 허탈해졌다. 비극에 길들여지는 비극, 이 얼마나 끔찍한가. 자유의 훼손을 방관했던 시민들은 독재자의 가장 큰 피해자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건, 그 지난한 싸움에서 결코 길들여져서는 안된다.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점철된 시대에 서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시대의 저항방식을 통해 잠시나마 세상을 바꾸려는 물결에 함께했었다. 그리고 결과에 좌절했고, 나또한 내 밥그릇 찾아 자연스레 뒤돌아 가는 것을 보며 스스로에게 좌절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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