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너는 아니? 그것들은 곧 사라지게 돼 있어. 언제나 무너지고 부서지고 잊힐 뿐이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 되버리는 것만큼 우주는 광활하단 표현만으로도 부족하다. 그 공간속에 우리는 결국 지구라는 공간에 사는 아주 작은 미물일 뿐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면서도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우주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존재다. 더불어,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는다. 김연수 작가는 일련의 논리와 비논리로 우리 인간이, 세계가, 나아가 인류가 어떻게 성장해왔고, 어떻게 더 성장해야만 하는지 한 소년의 지난한 삶을 통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소년이 살았던, 죽고 다친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하늘의 별이 아니라, BH에 있는 별을 보고 고통보다 더 큰 두려움에 침묵했던 80년대. 그때의 밤의 어둠은 더욱 짙었고, 우리 가슴속의 어둠도 더욱 짙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한 소년의 이야기이면서, 시대의 관한 이야기이고, 나아가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대부분 나이를 먹어가며 어느 시점에서 외부와의 문을 걸어잠그고, 자신의 세계를 탐험한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문을 열고 나왔을 땐, 태초에 가졌던, 외부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관찰의 능력을 잃어버린 후다. 잃고, 잊었던 그 능력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고독에 함몰되어 고단한 삶을 버텨내며 중요한 그 어떤 능력을 이제는 초능력이라 부른채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왔던 인류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은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약간은 다르게(결국은 같게) 겪은 한 소년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타인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게 아닌, 대부분을 스쳐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천개의 별이 나를 위해 멈추고, 비추는 것처럼 그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일생에 한번쯤 있었음직 함에도, 인류는 그동안 너무나 고독해왔다. 

 

결국 인류의 유전자가 택한 최선의 방법은,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타인의 눈물로 시작해서, 자신의 눈물로 끝나는 과정은 그렇다. 우리는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지금껏 존재해왔던 인류에 비한 자신의 비율만큼 타인과 다른 삶을 살아왔거나, 살아가기 때문이다. 먼지같은 시간, 때로는 그것조차도 공유할게 없어보이는 타인과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얼핏보기엔 비극이다. 거기에 우리가 유일무이하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류가 여태껏 병처럼 끌어안고 살아왔던 고독뿐 이다. 하지만, 그 고독과 더불어 그렇게 서로에게 비어있는 시간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다가갈 수 있는 열쇠였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여백을 공유하다보면, 그것이 어느덧 사회가 되고 시대가 되듯이 말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비극으로 남은 한 시대는 부족했던 그것들의 합이었던게 아닐까.

 

“어느 쪽이든 나의 시간과 다른 사람의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른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인류를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첫걸음은, 그 살아온 시간의 양과 비례한 시간을 요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주어지진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을때, 그러니까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 타자와 나란히 생을 걷게 되는 것 아닐까. 소년이 자신의 아빠를, 엄마를, 희선, 무공/재진아저씨를 이해하는 과정은 결국,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더듬어 가는 것이었듯 말이다. 마치 기어이 소주를 두병째 따고서야 그 안에서 슬픔이 새어나오듯, 늦었지만 또 늦지 않은 일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시대나 밤은 어두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외롭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여전히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바 일 것이다. 어둠으로 인해, 우리는 어딘가를 건너기 위해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만 하고, 맞잡은 손의 체온을 느끼고,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타인이 살아온 시간을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결국, 소년이 깨닫는 것은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 중요한 것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들이는 것이었으니깐.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경계를 넘어가며 성장하니깐.

 

“... 이해란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야.” 소년의 짧은 일대기를 중심으로 엮어나간 이 이야기 자체가 바로 ‘이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갔던 것 아닐까. 소년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었으니깐. 이해라는 단어를 이해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 이 이야기가 바로 이해 그 자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는 내면의 우주, 타자라는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비행사와 다름없다. 인류는 나름의 이해를 통해 지금껏 살아왔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부족하다. 자신의 집을 등지고 서있는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동상 뒤로 숨겨진 그의 왼손엔 꽃 한송이가 쥐어져있다. 멀고 먼, 크고 큰 우주를 유영한 우주비행사가 인류에게서 가장 먼곳에서 느낀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를 바라본 인류가 우주라는 먹먹한 고독앞에서 알게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어쩌면 우리의 답은 그 작은 손 안에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연약해서 사라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잊힐 뿐이라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도 알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