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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1 - 안드로메다 하이츠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반짝이는 하늘색. 묵묵하면서도 듬직해 보이는 선인장.
진한 녹색의 글씨로 선명하게 다가오는 <왕국>
건물이 가득한 도시에서 사는 나 자신에게,
살아갈수록 더욱 답을 알 수 없는게 사람 관계라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
시즈쿠시이의 곁을 맴돌며 그녀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라고 느꼈다.
시즈쿠시이.
잠시 그녀의 말을 빌려보자면 자신과 가에데를 둘러싼 재미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특별한 시각과 후각 덕분에 내게는 색다른 발걸음이 되었다.
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할머니와 산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개발로 인해 산이 조금씩 변하게 될 쯤 산에서 떠나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일본을 떠나 몰타 섬에 있는 남자와 같이 살기로 정했기에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속에서 혼자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의 왕국은 크게 사람과 식물, 그 중에서도 선인장이 숨을 쉬고 있는
특별한 세계다.
나는 그녀와 가에데의 첫만남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시즈쿠시이는 누군가를 만날 때 첫인상을 넘어서
사람에 대한 냄새를 느끼고, 색깔을 보고, 내면의 감정들을 본다.
앞이 잘 안보이는 점술가 가에데의 어시스턴트가 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간 날,
가에데는 사람이 지닌 물건으로 상대방을 아는 능력이 있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시즈쿠시이의 물건을 하나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시즈쿠시이는 가방 속을 뒤적거리다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린다.
- 그런데 막상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기고 보니, 다루기 벅찬 크나큰 감정이었다.
밀려오는 그리움, 애틋함,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이 사람이 늘 있는
세계야말로 내가 원했던 세계였다고, 온몸의 세포가 파르르 떨었다.
50p -
사람의 인연이란 이런것일까.
사람 관계는 만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이 사람이다.'라고 할 만큼 확신이 드는 인연도 있었으면 한다.
그것이 동료든,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말이다.
그녀에게 있어 가에데는 특별한 존재다.
사랑이지만 그것은 연인들의 사랑과는 다르다.
그녀는 가에데의 말을 녹음하면서 목소리를 통해 평온한 세계를 느끼고,
행동, 눈빛, 표정에서도 차분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시즈쿠시이에겐 선인장 공원에서 만나게 된 신이치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와 함께 앉아만 있는데도 그녀는 외로움과 고통이 사라지는 걸 느낀다.
신이치로는 선인장이 빌려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녀.
둘의 사랑은 고요하면서도 투명하다.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집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세계는 어느새 점차 조금씩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즐거운 사람.
맑고 좋은 사람.
시즈쿠시이의 시선대로 가에데와 신이치로를 바라보면 그 기분에 전염되어
작은 것들이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솔직하고 순수한 느낌마저 든다.
진실되고 포근한 내음이 마음에 내려앉는 기분이 지속되어 사람을 알고, 만나고,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풍요로움 그 자체라는 걸 시즈쿠시이는 내게 넌지시 알려준다.
참 따뜻하다.
신기하게도 사람이란 따뜻한 존재다.
그녀의 아파트가 불에 타서 잠시 놀랐던 시즈쿠시이에게 힘을 내라고 손으로 브이를 그려주는 술집 아저씨.
평소엔 심한 말을 했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저녁을 만들어주는 카타오카.
심장의 온도가 1도 높아진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음을 발견한다.
자, 이제는 내 왕국에 숨을 불어 넣을 때다.
느려도 좋으니 하나씩 하나씩 이루고 넓혀가야겠다.
난 내 왕국을 위해 여행을 시작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