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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사회학적 연구 국가란 무엇인가 4
프란츠 오펜하이머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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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일찍이 의학을 공부하고 뒤이어 경제학 및 사회학의 학자로 세계 양차대전의 시기를 보내면서 ‘자유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프란츠 오펜하이머의 플라톤의 국가론에 이어 널리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는 ‘국가’를 일독했습니다. 이 글의 오펜하이머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있게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책의 소개글에서는 그가 2차대전시기에 독일에서 설 곳이 없어졌다고 완곡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독일을 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이 글의 특이한 부분은 제3판의 머리말이자 1929년의 서문에서 저자인 오펜하이머가 밝히고 있듯이 그의 유명한 두 편의 주저, 국가 The State와 사회학 체계 system der soziologie 와 관련해서 번역된 이 글이 발췌본 내지는 편집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원저에 비해 분량을 줄인 것은 860쪽 분량의 큰 판은 독서 대중에게 너무 무겁고, 독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비싸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첨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근사할지도 모르는 이 이유의 변에 개인적으로는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더군요. ^^ 참고로, 거의 동시대의 핵물리학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물론 착각하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요. 덧붙여 이 글은 번역출간한 출판사의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의 연작물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국가란 무엇인가’ 연작의 세번째 서평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전통적인 민주주의 형태의 정치체를 혐오하고 주민들에 대한 강제와 개입을 지지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플라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론으로 삽입된 국가의 우상숭배라는 짧은 글에서 “국민들이 해야 할 과제는 남은 원초적인 폭력의 산물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중간계급 혁명이라는 과업을 완수해 진정한 자유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실로 자유적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주장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돌아와서 우선 저자는 그 이전의 여러 사상가들의 국가론들을 돌아보면서 고대 수렵시기의 인간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서 이 시기에도 경제계급과 경제적 측면의 이익이 존재했다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잉여 자원과 관련된 익히 알려진 기본적인 자본주의적 경제 개념을 따로 논하지는 않고, 한정된 자원을 소위 약탈하기 위한 부족주의적 초기 국가 형태의 양상을 꽤 자세히 1장과 2장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 권력구조와 관련해 군장 내지는 부족장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어쩌면 자원 배분과 관련된 인센티브와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들 초기 부족적 사회에 노예를 자본적 재산으로 포함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약탈시도와 혹은 반대의 자위권의 시도로 발생된 단순한 자연발생적 부산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오펜하이머는 전자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원시 정복국가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이 넓을수록, 이 국가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이들이 밀집해 살수록, 경제 분업이 더 많이 전개되고 또 항상 새로운 욕구와 충족 수단이 더 많이 생겨난다”고 정의하며 농경지의 농민 국가에 비해 수렵을 목적으로 삼는 광범위한 목축민들의 목축 국가가 그 초기 사회 발달 과정에서 경제적 요인을 더 추동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원시 국가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목축민들의 기질과 성향, 확장성 등을 기반으로 이들의 인류 역사적 영향에 대한 부분과 유사하게 전개시키고 있는데요. 꽤 설득력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들 초기 사회에 대한 발달 단계적 해석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이어 3장의 해양국가에서는 전통적인 육지국가들과 비교하여 “육지국가는 물물교환 경제 상태에 매우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반면에 해양 국가는 매우 빨리 화폐 경제로 넘어갔다”고 그는 분석합니다. 이것은 초기 유럽의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후에 지중해 상권을 부흥시킨 이탈리아와 이슬람 상인들 및 영국의 발전을 예로 삼을 수 있으며, 이 화폐 상업의 발전은 국가의 형태마저 바뀌게 만든 중요한 인류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초기 자본주의적 형태이거나,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상품과 관련하여 “인간은 노동력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논리에 가장 부합되는 과정의 실례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초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노예 시장 및 노예 거래의 초기에 비인간적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와 관련된 혁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바다를 통한 무역과 상업 거래들이 유럽의 봉건 시기에 토지를 둘러싼 다툼에도 이는 별개의 과정으로 발전했고, 다만 육지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해양국가에서도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동일하게 통치했다”는 유사성 또한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육지국가에서 해양국가로의 이행 과정은 전통주의적 고정된 복종 관계를 더욱 더 느슨하게 만들었고 어쩌면 이를 기반으로 뒤이어 입헌 국가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 아닌가 판단해봅니다.

5장과 6장의 입헌 국가에서는 앞선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이 해방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숙명적인 이원화가 외형적으로 고착화 됩니다. 봉건주의 시대에 자유민과 평민들간의 갈등, 이 시기의 자유민들이 결국 자유민이 아니게 되는 봉건 영주들의 교묘한 개입 및 납세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입헌국가의 시기에는 피지배층들이 더욱 ‘자연법주의 및 자연법 사상’에 기대게 됨으로써 단순히 정치적 지배-피지배 관계를 후에 벗어나게 되는 원동력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바로 이러한 사상에 기반하고 있고, 근대를 다른 이전 시기들과 다르게 명백하게 설명해주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의 지배계급은 획득한 통치권이 자신들의 손에 쥐어준 모든 수단을 이용해 투쟁했으며, 종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특히 사회계급적 및 정치적인 실질적 행위로써 피지배계급의 계몽주의적 각성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실패 이후 구체제에 대한 회귀와 귀족 계급의 특권, 단순한 경제자산적 차이 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진출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일했습니다. 사실 저는 엘리트 정치와 기득권 정치는 엄밀하게 구분해야된다는 입장인데요.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의 말대로 절대주의와 전제정치는 엄격한 구분법이 필요하고, 앞서 언급한 부분과 관련해서도 여기에 소개된 계급 이해적 산물인 계급사법 즉, 상위 계층에게 휘둘려지는 법의 칼날은 하위 계층에게 향하는 것이 상이하게 적용된 것은 과연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또한 이 ‘계급사법’이 유감스럽지만 현재에도 법치주의적 기반으로 탄생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국가와 역사적 연대기적 서술을 마무리하면서 오펜하이머는 근대 이후 비로소 과거의 자본주의적 노예 상태가 종식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국가의 의미와 본질과 관련해서 단순한 야경 국가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이들과 더불어 단순하게 개인의 안전 국가로 축소되고 있는 경향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즉 시민의 환경이 전후를 거쳐나가기 바로 이전 시기를 살았던 사회학자인 저자에게 다소 생경한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고민해봅니다. 그는 국가를 통해 인간 자유의 점진적 보장을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자유의 보장이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와 결합하여 다소 복잡한 국가의 모습에 의해 시민들의 삶 전반이 변화게 된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맨처음 이 글에서 제가 언급한 그의 ‘중간계급’의 혁명으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를 바란 것이 우리에게 실현되었는지는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끝으로 역자인 이상률씨의 번역은 이 자리에서 따로 언급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역자의 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날 정도네요. 열일하시는 번역가에게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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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과 군중 - SNS는 군중의 세계인가 공중의 세계인가? 지성의 향연 1
가브리엘 타르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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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밀 뒤르켐과 함께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뒤르켐과의 논쟁(확실한 정보를 찾을 수 없어 관련 책을 따로 주문했습니다)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가브리엘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2013년에 나왔던 구판의 개정판인데요. 아마도 이번 판은 프랑스에서 출간된 1989년판을 참고해 다시 출판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뒤르켐은 물론 베르그송, 들뢰즈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타르드도 역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역자인 이상률씨도 뒤의 해설에서 이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타르드의 이 책을 먼저 읽고,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읽는 것이 두 저서의 이해를 서로 돕는데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네요.

이 책은 크게 3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공중과 군중에 대한 해석을, 2장은 여론,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론과 욕망 전체의 의지라는 측면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이 여론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대화에 대해 그 기원적 분석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해석의 연계’를 보여주며, 3장은 군중, 특히 범죄 집단과 다름없는 악마적 형태와 과거 프랑스 역사에서 나오는 이 집단들의 분석을 통해 좀 더 면밀한 이해를 수반하고 있습니다.

서평을 쓰기에 앞서, 저는 예전에 이 곳을 통해 일전에 쓴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잠시 살펴봤습니다. 당시에는 집단지성에 관심이 있었던 시기라 앞선 군중심리를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요. 현재 민주주의 체제에서 앞으로 대중의 역할과 관련된 사전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만, 군중심리를 다루고 있는 타르드의 이 책은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 보다는 좀 더 본질적이고 상세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군중을 양가적 입장에서 그리고 어쩌면 가류주의적 태도와 관련있다고 볼 수 있는 ‘공중’의 의미와 서로 연계하여 꽤 설득력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역자의 번역도 나무랄데가 없어서 정독인데도 책을 받자마자 거의 몇시간 만에 읽을정도로 호흡이 매우 빨랐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 가류주의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을 통해 소개된 일종의 주지주의인데요. 즉,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이나 언제나 논박당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항시적으로)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정할 수 있는 주의 내지는 이념”입니다. 이것은 군중과 공중을 연계해서 구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여기에서 군중과 공중이 극명하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군중의 양가적 측면’ 그러니까 받아들일 만한 점과 이해될만한 점 그리고 마땅히 제거해야 하는 요소 등을 함께 서술하고 있는 점도 타르도 스스로 나름의 객관적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에 군중은 ‘정신이 지배하는 국민의 큰 불관용적인 측면’이 보이며 이것은 페쇄적이고 봉쇄적이다 라고 분석합니다. 공중도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집합체로서 각각의 공중은 군중보다는 훨씬 동질적이라고 서술합니다. 이러한 동질의 상태의 공중은 바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데, 반대로 군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것에는 원천적으로 타르도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군중은 선동되고, 많은 반론이 봉쇄됨으로써 양자가 서로 구분되지만, “공중이나 군중은 질투심과 증오심에서 선동당하는 매우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다”고 밝히고, ”신념을 지닌 이상주의적 군중은 열정적이며 수선스러운 군중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는다”는 첨언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군중의 분류 자체에도 경제군중 및 산업군중이 농민군중과 그 동질성이 다를바 없다는 평가에서처럼, 공중과 군중의 구분은 대체로 상대적이면서 동일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공중과 군중의 핵심은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느냐의 차이이며, 군중은 공중보다 곧잘 선동된다는 측면으로 구분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3장에서 나타나는 이 군중의 악의 측면은 어떻게 보면 프랑스 혁명 시기의 ‘상퀼로트’를 꼭집어서 설명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짧은 파리 코뮌의 시기에 이 상퀼로트들의 역할이 지대했는데요. 이들을 무정부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과 동일한 잣대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억압적인 전제 정치를 시민의 힘으로 타도한 것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라고 봤을 때, 로비에스피에르와 같은 자코뱅주의자들이 혁명을 심대하게 왜곡시킨 것은 혁명을 일으킨 다수의 억압받는 사람들, 그들의 진정성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타르드의 해석대로 이들이 선동되었느냐 아니냐의 관점의 문제가 존재하는데 이 억압받는 자들이 선동되었다는 것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공화주의를 왜곡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정치사회학자들도 바로 이런 전자의 왜곡 인식에 반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는 그 ‘군중심리학’의 개론을 차치하더라도 대체로 부정적이고 체제의 위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군중 정치 자체가 오늘날에는 우파 포퓰리즘적 정치와 맞닿아 있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군중의 대부분의 매우 폐쇄적이고 어떤 왜곡된 주제에 대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상적으로 번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이것은 결국 선동하는 선동정치가의 언설에 더욱 왜곡되고 이끌릴 가능성이 있어 집단지성이 태동하는 지금의 시기에도 매우 위험한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군중이, 그리고 일반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고 규율도 없는 집합체들이 그 대부분의 구성원들보다 얼마나 더 변덕스럽고 더 잘 잊으며 더 잘 믿고 잔인할지는 언제나 상상하기 어렵지만 증거는 넘쳐난다”고 타르드는 이 3장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의 유럽에서 솟아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과 그것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매우 궁금합니다. 희화적으로 바라볼지, 디스토피아적 감상에 젖어들지 말입니다.

2장은 따로 떼어 다른 주제로 내놔도 될정도로 ‘여론과 대화’에 대한 탁월한 근원적 분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문을 통한 저널리즘의 발전이 여타 살롱을 비롯한 계층들의 대화의 확대에 일조했고, 점차 상류층의 격식있는 대화를 복제하려는 그 밑의 여러 계층들의 수용을 독특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류층의 자기 권력적 대화 행위와 미국인들이 유럽인들과 달리 토크빌의 말대로 더 조밀한 평등체제에 의한 다른 대화 방법 내지는 여론 형성이 있었다는 것은 절로 숙고에 빠져들게 합니다. “권력의 진화는 여론의 진화로, 여론의 진화 자체는 대화의 진화로 설명된다”는 인식 또한 그가 여론과 대화를 얼마나 밀접하게 여기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 타르드는 글 중간에 ‘공공정신’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데요. 지도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공공정신이 당시 사회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그것은 전파되는 여론 형성에서도 어느 정도 기여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평등한 시민들의 집단지성이 이 공공정신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차별적인 계층 교육에 따른 전반적인 교양 여부에 따라 아마도 권력계층이 이러한 공공정신을 펼쳐내는데 자연적으로 주도했으리라 파악됩니다. 글 전체적으로 딱 한가지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타르드가 글에서 다소 여성차별적인 인식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당시에 타르드와 같은 사회학자들이 이러한 면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역사가 진보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타르드를 비롯한 당시의 권위있는 남성 지식인들을 옹호하고자 넣은 구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싶군요.

그리고 개인적인 약간의 감상이랄까요. 짓궂은 장난기 때문일까요. 글중에서 “로비에스피에르가 루소를 계속 읽어 궁극적으로 그가 루소와 동일시되었다”는 취지의 해석에 얼마간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문득 로비에스피에르의 공과 패착은 장 자크 루소의 한길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다소 막연한 한줄과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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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을 가다 - 실천적 사회학자 장 지글러의 인문학적 자서전
장 지글러 지음, 모명숙 옮김 / 갈라파고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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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으로 제네바 대학과 소르본 대학의 사회학 교수를 역임하고 한때 스위스 연방 의회의 의원으로 재직하는 등의 우리에게 실천적 사회학자로 이름을 높인 장 지글러의 ‘인간의 길을 가다’를 일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유엔을 말하다’ 에 이어 지글러의 3번째 서평이 되는데요. 그의 여러 일화중에 가장 인상이 깊은 것은 스위스 은행의 갖가지 탈법, 불법 운영과 관련된 학자적 양심으로 쓴 글,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로 겪은 법정 투쟁과 그로인한 경제적 곤란을 겪은 일입니다. “지식인의 양심은 저절로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끊임없이 살펴볼 ‘지식인’인 장 지글러에게 명백하게 잘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원제는 지난 2014년 독일어로 출판된 “Andere die Welt”이며, 국내에는 위의 번역 제목으로 2016년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의 구입은 작년 여름쯤이었는데요. 중간에 읽다가 중단하고 이제서야 완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국내 번역된 출판사가 임의로 만든 부제인 ‘장 지글러의 인문학적 자서전’에 거의 들어맞는 주제와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평등한 세계의 모습과, 이데올로기의 악의 측면, 자유 시장론에 의한 인간의 소외, 국민, 국가 권력 등을 각 주제에 맞는 현실 사례와 여러 사상가들의 주장을 연계시켜 스스로가 사회학자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데요. 뿐만 아니라 역사 및 철학과 같은 인문학적 인용도 적잖이 소개되어 있어서 근래 세계화와 국민주의, 국가 권력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분들이라면 책을 통해 익히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지글러는 “사회학자의 임무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이해관계를 밝히는 것”이라 표명하며, 사회학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키기도 하지만 억압하기도 한다는 이 양가적 측면의 판단을 앞의 인식과 함께 우리 인간 사회에 사회학과 사회학자가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 당위성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학의 쓸모를 더욱더 한정시키는 이 불평등이라는 악과 관련하여 ‘악의 중요한 근원은 불평등이다’는 장 자크 루소의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수용한 사회의 쳬계가 시장의 ‘자연적 상태’를 계속 중시함에 따라 경제적 불평등에 의한 전반적인 정치사회적 계급 불평등이 심화 되어 왔고, 오히려 이런 상황을 각각의 시민들이 받아들이고 체념함으로써 특히 지식인들이 이러한 모습을 비판하지 않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책 3장의 주장인 이데올로기의 두 얼굴이 즉, 이데올로기가 악의를 증명하는 경우로서 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세계화의 강요’에 따른 시민 계급의 이 이데올로기 수용을 당연시했으며, 여기에서 도태되는 많은 시민들을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빌려 ‘인간쓰레기들 (바우만의 부정적 인식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기득권과 권력이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는)’ 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글러의 표현대로 “선별과 인식적, 사회적 위계구조의 재생산은 논박되어야 하며, 인권의 가치는 결코 논박되거나 비판받아서는 안된다”고 밝혀집니다. 마찬가지로 5장의 인간 소외의 목적은 바로 “인간을 순전히 상품사회에 기능하는 것으로 축소하는 것”으로 해석되게 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 인간이 노동을 제공하여 바라는 것은 자유이며, 일정 소득으로 인한 그 결과는 인간 기본적 삶의 보장과 그로인한 삶의 자유일 겁니다. 이런 토대를 뒤흔드는 것은 점차 확대되고 고착화되고 있는 인간 불평등의 심화이며, 이것은 작게는 각각의 사회 문제로서 크게는 대륙별로 발생하는 차별과 극심한 빈곤의 문제로까지 연결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노력은 더욱 강조되고 있으나, 6장에서 밝히듯이 중세시대 이전의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로 작용했던 국가가, 프랑스 혁명 이후 공화주의와 국민국가 개념을 덧붙이면서 정교 분리와 삼권 분립과 같은 권력으로부터 인간 자유를 보장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자리잡혔지만, 일전의 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그와 관련된 이데올로기는 ‘선출되지 않는 기득권’ 개념으로 옮아가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이와 관련해 “사회가 기득권에 의해 그 계급 구조가 고착화 되는 것은 실로 시민의 자유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주장했고, 이런 기득권 장치나 기득권 이해관계를 교묘히 언설하는 것은 그것의 의도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되짚어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지글러는 6장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괴테의 인용을 앞세워 약간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유럽의 민족국가개념과 전제정치에 대한 반대급부로 변혁을 일으킨 점은 크게 인정할 만하나, 나폴레옹 자신이 과연 그러한 것을 염두해 두고 대륙 전쟁에 나섰는지는 곰곰히 살펴봐야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7장은 근대의 국민이야 말로 기적이라 불릴만하며, 이와 반대로 오늘날 인종주의적 주장을 하고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인종주의는 무조건 범죄이고, 증오의 최고 형태이며, 국민을 형성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세계의 민영화에 방치된 국민은 소멸할 우려가 있다”고 동시에 진단합니다. 일찍이 에릭 홉스봄은 “자발적으로 가장 중요한 공공 서비스를 축소하고, 일반적 이해 관계에서 생기는 과제를 사적 영역으로 옮김으로써 이윤의 최대화라는 법칙에 굴복한 국가는 파탄 국가 Failed State” 라고 언급했습니다. 자본의 이익에 민감한 이 신자유주의화를 계속 이론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시민들에 자유와 권리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조금이라도 숙고해본다면 그 답은 명확한 것이죠.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의도는 바로 지글러의 소름끼치는 표현 즉, ‘의식의 균질화’로 모든 사회를 신자유주의적 멸균 상태로 만들어 얻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레이건과 대처가 주장했던 소위 낙수효과가 어떻게 판명났는지는 그 결과가 명확하지 않던가요.

끝으로 지글러는 앞으로 세계의 시급한 문제로 세계 금융 자본의 활개와 악랄한 독재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의 독재 정권을 꼽고 있습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지글러는 자원에 대한 개입으로 아프리카 독재 국가에 대한 프랑스와 벨기에의 용병 지원 등을 언급하고, 또한 극도의 굶주림 상태에 놓여 있는 아프리카 국민들에 대한 설명을 적잖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라늄과 같은 희소 자원의 안정적인 관리라는 미명하에 전세계 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비도덕적 개입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익히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비인간성의 현실일텐데요. 전세계의 진정한 민주주의화는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시켜 나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에 의한 권력 위임을 정치인 스스로 자임한다면, 그렇지 않은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나서서 불식시켜야 합니다만 이해관계가 달려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아마도 꿈같은 일이겠죠. 즉, 이러한 분위기의 진정한 해결책은 서로 인류애로 가득찬 ‘거부전선’의 행동으로 달성될 수 있다고 지글러는 보는 듯 한데요. 스스로 사회학자의 소명을 인지하고 있는 저자가 결국에는 이상주의적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뭔가 마음이 아립니다. 동시에 시민적 계몽주의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지만, 이렇게 ‘강요된 불의의 시대’를 개인의 삶과 인생으로서 건너가야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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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1-0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구입과 관련된 약간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작년 여름쯤에 이 책을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구입을 했는데요. 구입할 당시 모르고 있다가 얼마전에 책 앞장에 출판사 이름이 도장으로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무료로 기증된 책에 찍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책을 구입해 다시 되파는 것은 조금 문제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알라딘 중고 서점 직원분들의 좀 더 꼼꼼한 검수를 부탁드려봅니다.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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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에 타계한 전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사회학자이자, 근대성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정립하고 그러한 근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약간 적절하지 않은 번역 제목의 ‘모두스 비벤디’를 읽었습니다. 모두스 비벤디는 여러분 모두가 익히 아시다시피 사전적으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뜻하지만 국제정치학에서는 구두나 사전합의 된 국제합의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지난 2007년에 출간된 원서의 원제는 Lquid Times :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입니다.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의 중요한 사회학에서의 근대 개념, ‘액체 근대 Lquid Modernity’ 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유동하는 근대, 유동성 근대’로 번역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어감차이가 있어보이진 않는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이 ‘액체 근대’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에 개념만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액체 근대를 규정하는 많은 논의들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 나와있는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사회적 지위, 실존적 불안’을 일단 꼽고 싶군요.

우선 이 책은 총 5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광범위한 글로벌화에 따른 강제로 개방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살펴보고, 2장은 배외되고, 구분되어 제도 바깥에 있는 난민들에 대해, 3장은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들의 사회 문제들과 정치적 권리의 결여가 초래하는 우리들의 일신의 권리 문제 등을, 4장은 우리 삶의 공간인 도시 생활에서의 양가적 측면과 더불어 파편화되고 있는 삶의 문제, 5장은 오늘날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과연 무엇이며, 이것은 미래의 실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바우만의 서평은 3번째인데요.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들 중에 가장 바우만의 사상과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본래 알고 있던 토마스 홉스의 시민들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주의적 정부가 거의 국가 개조와 다름없던 근대화를 시도하면서 발생한 많은 문제들이 오늘날 어떤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더욱 더 배제당하고, 시민들의 부의 존재 여부에 빈부 격차의 사전적 의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땅한 권리를 제한당하게 되기도 하는 현실을 특유의 탁월한 언어로서 잘 보여주고 있는 점이 지그문트 바우만의 특별한 점일 겁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2013년경부터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해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이죠.

이처럼 “정치적 통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 해방된 권력을 심오하고 원리상 길들일 수 없는 불확실성의 근원이 된다”는 문장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가 주된 요소로 작용하는 유동된 근대에 정치적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불편한 상황이 시민들 삶에 영향을 끼치고, “정치적 권리가 없으면 일신의 권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단언 또한 우리가 어떠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행동이나 연대 행동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하는 것도 이제 개인의 몫이 되었다”는 불편한 토로와 정부는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보장 장치의 일정한 붕괴를 마땅히 재구축해야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체계의 정부 기능을 오로지 비대한 정부로 몰아세워 신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 정부의 해체에 힘써왔고 그 대가는 오직 시민들이 치루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극명하게 드러난 난민 문제도 바우만이 보기에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속성에 있는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인간 쓰레기’로 지칭된 경제적 계급의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과 모국을 떠나 이주에 나선 수많은 난민들의 현실적 삶, 즉 차별받고 분리되어 수용되고 영국 관료가 말하듯이 “난민들을 전부 그들이 살던 지역 인근에 모조리 모아 수용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결국 국민국가 범주 안에 있는 시민들이라고 할지라도 가진 돈의 유무에 따라 마찬가지로 배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익히 현실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바우만의 발언에 따르면 “지구화로 인해 나타난 가장 안 좋은 결과는 전쟁의 탈규제화”로 이러한 인식하의 세계에서는 누구든 언제든지 난민의 상태에 처해질 수 있는 실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난민의 문제는 특정 부국들의 매우 노골적인 이중적인 태도로 밝혀져 왔고 “본래의 기득권들은 이렇게 유입되는 아웃사이더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바우만의 통찰로서 알려주는 진정한 본질일 것입니다.

근래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의 시대로서, 우리는 국가의 기능이 전통적인 시민에 의한 시민의 권리를 지키고 제도적 혹은 헌법적 보호로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보다 이것에서 거의 확실하게 후퇴하여 ‘개인적 안전 보장 국가’로 국한되어 가고 있습니다. 안보를 잣대로 시민의 자유는 계속 축소되어 가고 있고, 지금도 베트남과 같은 국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정치적 논의와 토론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저 세계 패권국 미국에서도 시민의 삶의 보장과 그 권리가 나날이 제한되고 있는 이 상황이 우리가 1900년대 이후 그려왔던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최소한의 경제적 안락을 제공하면서 여타 시민과 시민 사이를 자본주의적 계급선으로 분류하여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게 하는 모든 권력들에게 더 이상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게 해서는 분명 안됩니다. 이제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가 그동안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인간의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했듯이 기본적인 시민과 시민의 연대를 바탕으로 토크빌이 시민들에게 기대했던 대로 활발하고 역동성있는 시민권적인 정치 참여가 매우 필요한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바우만이 목놓아 말하는 우리 근대의 광범위한 변질과 악취에 적절한 권력에 대한 견제와 정치 권력 사이의 명확한 분립, 자본주의 체체에 대한 면밀한 재구성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다 시민의 삶을 보장하는 전반적인 복지 제도에 대해 이것 자체가 시민의 기본적인 일상을 답보하고 그로인한 사회정치적 참여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명백한 시장자본주의적 오판들을 적절하게 관리할 지적이고 행동하는 양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시민들이 강력하게 연대하고 합일해야 이러한 국민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권력들을 마땅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거대한 결여의 시대에 우리가 온전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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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 빅데이터 시대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가이드
브루스 슈나이어 지음, 이현주 옮김, 김보라미 감수 / 반비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미국 명문 로체스터 대학 출신으로 저명한 테크놀로지 잡지인 와이어드에서 세계최고의 보안전문가로 인정받으며 컴퓨터 공학과 암호학에서 특히 명성을 쌓은 브루스 슈나이어의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를 일독했습니다. 저자에 대한 소개를 약간 더 말씀드리면 과거 국방부와 벨 연구소에서 일했고, 최근에는 NSA의 유명한 ‘내부 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이 유출한 기밀 자료들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원제는 ‘Data And Goliath’ 이며, 지난 2015년 출간된 것을 2016년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사실 지난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이 NSA에 대한 폭로를 하기 전까지는 미국 정보국에 의한 세계 감시 내지는 도청이 거의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더욱이 네오콘들은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빅브라더’에 대해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깎아 내렸는데요.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등으로 어쩌면 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을 대중들이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1999년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최고 경영자인 스콧 맥닐리의 “이제 사생활이란 아예 없을 것이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다”는 발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소개되는 감시와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이 현재 미국의 모습이지만, 우리 역시 이것을 무조건 반면 교사로 삼아야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대체로 이런 저의 당위성에 대해 결과적으로 회의적인 느낌이 드는 건 지울수가 없습니다.

이 글에서 슈나이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프라이버시가 없으면 그것은 자유가 없는 것과 같다”는 인식입니다. 일찍이 파놉티콘을 고안한 제러미 벤담은 “사람들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믿을 때 순응하고 고분고분해진다”는 것을 언급했는데요. 이것은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인 감시 사회가 시민들에 미치는 영향이 과연 어떤것인지 반증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가 박탈당하고 이어 시스템에 고분고분해지는 것, 즉 이것은 민주주의의 필연적 종말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바로 이러한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 지난 1952년 해리 트루먼에 의해 만들어진 국방부 소속의 NSA가 인터넷의 이메일과 휴대폰 등과 연관된 전면적인 감시쳬계 및 데이터 축적이 사법부와 의회의 견제 없이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정부 기관과 기업 및 데이터를 발생시키는 많은 개인들과 중간 거래자 등의 소위 비즈니스 관계에 따른 사례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9.11 테러 이후 인터넷을 포함한 시민들의 사생활 권리에 대한 모범적인 국가였던 미국이 어떻게 노골적인 정부 감시 체제로 변화되어 왔는지 그 과정을 목격할 수 있는데요. 이 9.11 이후 미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민 모두가 보안을 위해 프라이버시는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 우려할 수 밖에 없습니다. “FBI는 5200만 명의 얼굴이 담긴 데이터베이스와 아주 훌륭한 얼굴 인식 소프트웨어 까지 갖고 있다”며 언급하고, 뿐만 아니라 이메일과 검색 데이터에 대한 접근을 위해 구글과 야후에 FBI를 비롯한 정보 당국이 관여한 사례들을 밝히고 있는데요. 특히 “2013년 FBI가 단 한 사람의 이메일을 위해 라바비트 Lavabit 사용자에 접근할 수 있는 마스터 키를 요구” 한 것이나 검색 포털이나 이메일 서비스 업체에 감시를 위해 보안을 우회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한 것도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중국 정부에 의해 백도어를 심은 화웨이에 대한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시장 진입 금지는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정부와 정보 당국에 협력하는 미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 바로 이러한 연유로 제한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는데요. 오히려 탈법적인 측면에서 NSA가 상업적인 측면의 첩보활동을 통해 미국 기업들의 이익을 지켜냈다는 이러한 발표는 어불성설이라 할 만합니다. NSA 자체는 법적으로 국가 안보 목적으로만 존립이 가능한 것이지 정보국이 이런 식으로 비즈니스에 관여한다면 각국의 정보단체 또한 이런 식으로 관여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겠죠. 산업스파이나 국가 군사 기술에 관련된 문제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 말이죠.

이 대테러 문제와 관련해서도 지난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 당시에도 FBI를 비롯한 정보 단체들이 테러범에 대한 감시와 대응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감시한 결과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판명났다면 기존의 체계를 재검토해 볼 만한 여지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면밀하고도 강력하게 이들을 견제해야만 하는 사법부와 의회가 행정부에 책임 떠넘기기만 하고 있는 것은 각 권력기관의 합법적인 견제의 책무를 갖고 있는 위임받은 권력기관의 책임 회피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의회 의원들이 NSA와 관련된 자료를 열람하는 것 자체도 꺼려한다는 저자의 언급을 보면서 저같은 한국인이 미국 시민들을 걱정할 처지도 못 되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의 모범 사례로 일컫는 미국의 현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시민 자유’의 시기에 저자인 슈나이어는 정부와 기업 및 시민들에게 몇가지 해결책 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민들을 위한 팁을 제시하면서 그나마 현실적인 방안은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감시에 관하여 입을 열면서 여론을 형성시키고 이러한 현실을 포기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결국에는 여론을 환기시켜 이들 국가 정보 단체들에 대한 투명성을 재고해 의회와 사법부의 의지를 확약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말로는 쉬워보이지만 매우 지난하고 힘든 일이라 생각됩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종의 물리력 확보는 군사력과 맞먹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어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안보를 잣대로 삼아 결국에는 강고한 권력화가 될 가능성의 문제겠죠. 미국은 현재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고 거대한 권위주의 국가인 러시아, 중국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차츰 고도화되는데 우리의 권리와 자유는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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