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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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에 타계한 전세계로부터 존경받는 사회학자이자, 근대성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정립하고 그러한 근대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약간 적절하지 않은 번역 제목의 ‘모두스 비벤디’를 읽었습니다. 모두스 비벤디는 여러분 모두가 익히 아시다시피 사전적으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뜻하지만 국제정치학에서는 구두나 사전합의 된 국제합의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지난 2007년에 출간된 원서의 원제는 Lquid Times : Living in an Age of Uncertainty 입니다.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의 중요한 사회학에서의 근대 개념, ‘액체 근대 Lquid Modernity’ 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유동하는 근대, 유동성 근대’로 번역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어감차이가 있어보이진 않는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이 ‘액체 근대’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에 개념만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액체 근대를 규정하는 많은 논의들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 나와있는 ‘불확실한 미래, 불안한 사회적 지위, 실존적 불안’을 일단 꼽고 싶군요.

우선 이 책은 총 5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광범위한 글로벌화에 따른 강제로 개방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살펴보고, 2장은 배외되고, 구분되어 제도 바깥에 있는 난민들에 대해, 3장은 근대화를 추진한 국가들의 사회 문제들과 정치적 권리의 결여가 초래하는 우리들의 일신의 권리 문제 등을, 4장은 우리 삶의 공간인 도시 생활에서의 양가적 측면과 더불어 파편화되고 있는 삶의 문제, 5장은 오늘날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과연 무엇이며, 이것은 미래의 실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바우만의 서평은 3번째인데요.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국내에 번역된 그의 책들 중에 가장 바우만의 사상과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본래 알고 있던 토마스 홉스의 시민들의 권한을 부여받은 공화주의적 정부가 거의 국가 개조와 다름없던 근대화를 시도하면서 발생한 많은 문제들이 오늘날 어떤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더욱 더 배제당하고, 시민들의 부의 존재 여부에 빈부 격차의 사전적 의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마땅한 권리를 제한당하게 되기도 하는 현실을 특유의 탁월한 언어로서 잘 보여주고 있는 점이 지그문트 바우만의 특별한 점일 겁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2013년경부터 그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시작해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이죠.

이처럼 “정치적 통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 해방된 권력을 심오하고 원리상 길들일 수 없는 불확실성의 근원이 된다”는 문장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가 주된 요소로 작용하는 유동된 근대에 정치적 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불편한 상황이 시민들 삶에 영향을 끼치고, “정치적 권리가 없으면 일신의 권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단언 또한 우리가 어떠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행동이나 연대 행동을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하는 것도 이제 개인의 몫이 되었다”는 불편한 토로와 정부는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보장 장치의 일정한 붕괴를 마땅히 재구축해야하지만 그동안 이러한 체계의 정부 기능을 오로지 비대한 정부로 몰아세워 신자유주의자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이 정부의 해체에 힘써왔고 그 대가는 오직 시민들이 치루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극명하게 드러난 난민 문제도 바우만이 보기에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속성에 있는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소위 ‘인간 쓰레기’로 지칭된 경제적 계급의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과 모국을 떠나 이주에 나선 수많은 난민들의 현실적 삶, 즉 차별받고 분리되어 수용되고 영국 관료가 말하듯이 “난민들을 전부 그들이 살던 지역 인근에 모조리 모아 수용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은 결국 국민국가 범주 안에 있는 시민들이라고 할지라도 가진 돈의 유무에 따라 마찬가지로 배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익히 현실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바우만의 발언에 따르면 “지구화로 인해 나타난 가장 안 좋은 결과는 전쟁의 탈규제화”로 이러한 인식하의 세계에서는 누구든 언제든지 난민의 상태에 처해질 수 있는 실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난민의 문제는 특정 부국들의 매우 노골적인 이중적인 태도로 밝혀져 왔고 “본래의 기득권들은 이렇게 유입되는 아웃사이더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바우만의 통찰로서 알려주는 진정한 본질일 것입니다.

근래 테러리즘에 대한 공포의 시대로서, 우리는 국가의 기능이 전통적인 시민에 의한 시민의 권리를 지키고 제도적 혹은 헌법적 보호로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보다 이것에서 거의 확실하게 후퇴하여 ‘개인적 안전 보장 국가’로 국한되어 가고 있습니다. 안보를 잣대로 시민의 자유는 계속 축소되어 가고 있고, 지금도 베트남과 같은 국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정치적 논의와 토론이 금지되고 있습니다. 저 세계 패권국 미국에서도 시민의 삶의 보장과 그 권리가 나날이 제한되고 있는 이 상황이 우리가 1900년대 이후 그려왔던 유토피아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최소한의 경제적 안락을 제공하면서 여타 시민과 시민 사이를 자본주의적 계급선으로 분류하여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게 하는 모든 권력들에게 더 이상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게 해서는 분명 안됩니다. 이제 바우만의 말대로 우리가 그동안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인간의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했듯이 기본적인 시민과 시민의 연대를 바탕으로 토크빌이 시민들에게 기대했던 대로 활발하고 역동성있는 시민권적인 정치 참여가 매우 필요한 때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바우만이 목놓아 말하는 우리 근대의 광범위한 변질과 악취에 적절한 권력에 대한 견제와 정치 권력 사이의 명확한 분립, 자본주의 체체에 대한 면밀한 재구성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다 시민의 삶을 보장하는 전반적인 복지 제도에 대해 이것 자체가 시민의 기본적인 일상을 답보하고 그로인한 사회정치적 참여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명백한 시장자본주의적 오판들을 적절하게 관리할 지적이고 행동하는 양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시민들이 강력하게 연대하고 합일해야 이러한 국민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권력들을 마땅히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거대한 결여의 시대에 우리가 온전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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