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서 2판 전면개정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6
레이먼드 웍스 지음, 이문원 옮김 / 교유서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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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웍스는 홍콩대학의 법학 및 법이론 명예교수로, 1986년부터 1993년까지 동대학의 법학과장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 소재한 위트워터스랜드 대학에서 학사를 마치고, 런던정경대학에서 법학 석사를, 옥스포드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문학 석사 취득 후,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연방 공립 연구 대학인 런던 대학에서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칩니다. 그의 주요 전문 분야는 법철학과 인권, 특히 개인 정보 분야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개인 사생활 권리와 그에 따른 법철학 이론으로 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홍콩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현재 홍콩의 정치 상황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큰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한 데요. 2000년대 이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발생한 홍콩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그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중국 공산당의 홍콩 특별법 등에 그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그는 홍콩 법률 저널 Hong Kong Law Journal의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w : A Very Short Introduction -Second Edition-"으로 2008년 초간의 재간행 판으로 지난 2015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번역은 2017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이미 글 서두와 역자 후기에서 드러나고 있듯, 레이먼드 웍스의 이 글은 법과 법률에 대한 일반 독자들을 위해 쓴 소위 알기 쉬운 개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장 법과 도덕, 그리고 6장의 법과 미래를 좀 더 집중해서 읽어야 될 부분으로 여겨졌는데요. 특히 3장의 법과 도덕은 나름대로 법에 대해 제법 생각할 것들을 남겨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법과 도덕의 연관성과 도덕이 배제되어 법이 그저 합리적인 측면으로만 존재한다면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 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 역시 저자의 논증대로 법은 절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습니다. 더욱이 법이 어느 정도는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 명목상 마땅하다고 볼 수 있지만,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정의를 지켜내는 것이 더욱 '사적 이익화'와 맞물려,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형법의 체계적 고도화와 나날이 어려워지는 민법의 판결 등은 과연 법원과 사법 체계가 과연 정의에 이를 수 있겠는가를 매번 시험하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글 서두에서 인류가 제정한 법의 기원은 크게 대륙법과 영미법으로 갈라지고, 이것은 서로간의 독특한 문화권 만큼이나 구분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먼저 영미법은 원칙적으로 법문으로 작성되지 않는 불문법이 다수 있으며, 애초에 이전 영미법의 계승자들은 성문법화에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둘째로 영미법은 판례법으로, 판례에 대한 일종의 맹신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 다음은 선례구속의 원칙으로 이는 동일 또는 유사한 사건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는 경우에 선판례에 의하여 구속을 받으며, 상급법원의 판결은 하급법원을 구속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선결례의 원릭이라고 합니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상급 법원의 판결은 사법적 위계 질서하에 하급 법원을 구속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미법은 '구제책이 있는 곳에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대륙법의 전통은 정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법원의 심리 결과 구금이 법적으로 정당하지 않을 경우에 법관은 피구금자의 석방을 명할 수 있는데, 이는 앞선 영미법의 주요 법적 가치로, 현재는 대륙법 체계의 국가들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토머스 홉스를 통해서도 한번 더 드러나고 있지만 법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보루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만인 대 만인'이라는 자연 상태의 투쟁에 준하는 상태에서는 모두가 원칙적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사회 규칙이라는 것이 그저 말 뿐으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 국왕과 봉건 영주 간의 소위 명예로운 계약 이후, 계급과 사회 제도 유지를 위한 기초적인 법의 형태가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보호하고 그리고 자유에 대한 헌신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법관들의 사명은 단순한 법집행과 법원의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들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는 저자의 우려와 경고대로 각 판사들이 정치적 이익에 가까워지는 것이 그 사회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법관들의 '자유에 대한 헌신'이라는 뭔가 이상적인 가치보다도, "왜 나날이 우리가 사법제도를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판사 스스로의 역량이라든지, 혹은 법을 여실히 잘 이해하는 것과 법이론과 현실과의 균형 감각 등 판사의 재량에 사법 제도의 건전성이 달려 있다는 원론적인 주장들보다는 판사에게 허용치 이상의 권력 허용과 판사는 곧 법이라는 소위 법 권력 지향적인 합의 없는 이행이 사회에 가속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4장 법원'에 이르러 저자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각 국가의 법원을 고찰해보고, 특히 미국 연방 법원 판사 제도와 같은 선출직 판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투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선호하는 민주적 인사들이 '미국의 판사 선출 제도'에 반색을 할지도 모른다며 논평하고, 저자 자신은 이 제도에 대해 일종의 의구심을 표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일종의 엘리트 선발 제도로서의 광범위한 사법 시험을 통해 선발된 법관들이 단순한 시험 고득점자가 아니라, 법원과 사법제도, 그리고 시민에게 필요한 인물인지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자격 심사' 같은 것이 실질적으로 전무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판사를 선출 하는 것 이상의 의회 인사 청문회, 더 나아가 전문가 그룹의 이력과 사법 제도에 대한 이해 및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등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는 일종의 '검토 프로그램'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저자는 3장에서 법과 인간의 생명, 그리고 윤리 문제를 거듭 분석 진단해 보고, 안락사 문제와 낙태 문제를 법의 해석과 제도 규범에서 이를 마찬가지로 살펴보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후반부에는 개인 사생활 문제에 대한 저자 스스로의 관심 답게, 2000년대 이후 미국의 테러 와의 전쟁과 그 이후 진행된 NSA와 같은 안보 조직의 비대화, 그리고 에드워드 스노든을 통해 폭로된 CIA를 비롯한 미국 정보 조직의 전세계 감청과 도청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이렇게 나날이 비대해진 정부 조직의 권력화와 여기에 사법 제도가 과연 어떠한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이를 논하고 있었는데요. 앞선 광범위한 도청과 같은 개인 사생활의 무분별한 수집이 '시민의 사생활 소멸'로 이어지고, 이는 곧 정치 전반의 위기로 내몰릴 수 있다는 엄중한 예측으로까지 연결됩니다. 물론 가까운 미래에 '법이 소멸될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발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정보 조직이 아니더라도 정부의 권력 조직이 국가의 비상 사태 등을 들어 시민의 권리와 기본권을 사실상 침해하려는 어떤 메커니즘이 단계 별로 진행된다면 여기에 법원이 맹렬히 대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법원과 그 구성원들 역시, 어떻게 보면 '관료'이기 때문에 이들이 어느 정도까지 '양심의 건전성'과 '확고한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확실히 예단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소위 법의 소멸과 같은 망상은 바로 이런 복합적인 문제가 혹여 파국으로 치달을 때, 무조건 배제할 수 없는 위기일 것입니다. 사법 제도가 시민의 자유와 안녕에 봉사하지 않고 체제 현상 유지를 위한 소수 권력의 편의에만 몰두한다면, 사법 제도 뿐만 아니라 민주 사회의 지속성은 그때부터 소멸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논증 가운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대목은 '4장 법원'에서, "법관은 비선출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에서 특히 자유의 수호자로서 우월한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논증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양심적인 문장으로 여겨집니다만, 비선출직이 어떻게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 있는지는 이어지는 후술에서도 역시나 딱히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른바 독일 통일민법(BGB)으로 알려진 이 법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중국, 일본, 한국, 대만, 그리스, 발트 해 국가들에서 도입된 민법전의 모델이 되었다.

법과 법적 절차에 대한 숭상은 현대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렇다면 판사가 사법공무원이라는 사실이 법체계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 심지어 불의로부터 이익만을 취하는 사람과 판사를 구별할 이유가 되는가? 판사를 다른 사람들, 특히 변호사와 도덕적으로 달리 취급해야 할 설득력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현대적인 정부는 법적 강제 외에도 다른 수단으로써 시민들을 설득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판사는 판결문에서 사건의 주요 사실과 무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혹은 사건이 발생한 사회적 맥락에 대하여 자신의 지식을 늘어놓고 싶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영미법은 실용주의적이고 상업적이라고 평가되는 반면, 대륙법은 윤리적 측면을 좀 더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다.

바로 적용 가능한 규칙이 없을 때 또는 확립된 규칙들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미흡할 때, 판사는 서로 대립하는 원리를 비교형량한다.이때 원리는 규칙이 아니지만 법의 일부가 된다.

법원도 실수를 한다. 판사도 인간적 나약함을 면하지 못하며, 따라서 과오를 정정할 필요가 있다.

(미국만을 제외하고) 영미법계에서 판사는 일반저긍로 고참 변호사 중에서 선발되는 반면 대륙법계에서는 공무원처럼 임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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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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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독자들로부터 영어 소설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헨리 제임스는 1843년 4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은 총명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고, 모친도 오랫동안 뉴욕의 정착했던 부유한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헨리가 태어난 지, 1년이 되지 않던 해에 그의 부친은 워싱턴 플레이스에 있던 집을 팔고 자신의 가족을 한동안 영국에서 지내게 하는데요. 그들은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 있는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 이들은 1845년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고, 특히 헨리는 올버니에 있던 친할머니 집과 맨해튼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냅니다. 1855년부터 1860년 사이의 기간에는 그의 부친의 관심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본 등을 여행하고, 틈틈이 경비가 부족해 질 즈음에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후 1864년에 이들 가족은 미국 메사추세츠의 보스턴으로 이주하게 되는데요. 헨리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다녔으나 법학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 즈음에 문학에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이에 같은 해인 1864년에 익명으로 단편을 출간하고, 1869년부터 70년까지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리스, 조지 엘리엇 등과 만납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 절반은 미국 바깥으로의 여정과 발길이 닿았던 곳에서의 사색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데요. 1875년부터 이어지는 활발한 집필 활동과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되는 영국에서의 여러 활동들이 그의 문학적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회 통념과 그에 따른 개인의 심리적 변화와 타락, 한 개인의 이상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비틀어 내는 그의 주제 의식은 특유의 긴 심리 묘사, 그리고 그런 배경의 더할 나위 없는 점층된 서사로, 당시 평단으로부터 문학가로서의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여러 작품들 중, 중기에 속한 이 장편은 원제, "The Bostonians"로 지난 1886년에 처음 출간 되었고, 펭귄 클래식의 2000년 판을 바탕으로. 2024년 2월, 국내에 초역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올리브 챈설러, 버리나 태런트, 베이질 랜섬, 이 세 인물이 극을 주도하고 이들의 엇갈린 행보와 더불어 당시 시대상을 절묘하게 배치하며, 큰 틀에서 진보에 관한 주제 의식을 독자들의 양심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보의 대한 주제란, 이 시대의 여성의 자유, 남녀 평등에 대한 요구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번역본이 출간된 직후에 여러 기사나 소개글로 헨리 제임스의 이 소설을 단순히 페미니즘적 작품으로 홍보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1865년의 남북 전쟁의 종결 이후, 노예 해방이 미국 사회에서 명목상으로는 완수됨으로써, 이제 여성의 차례라는 점을 올리브 챈설러라는 인물로 드러내며, 그녀가 원하고 지향하는 이상에 대한 치밀한 서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이력으로 보았을 때, 그가 기존의 '결혼 제도'에 적극적으로 편입된 인물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여, 이런 여성 해방 운동이라는 주제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근본적 배경이 아닌가 저로서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앞선 올리브 챈설러는 독신을 무엇보다 스스로 신념의 증거로 체화하면서 억압 받는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에 대한 야망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내기고 하는데요. 즉, 이는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운동에 있어 결혼은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녀 자신의 확고한 의지이기도 합니다. 물론 극중에서 이런 그녀를 좀 별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집안 언니인 루나 부인을 통해서 말이죠. 또한 올리브가 극중에서 자신의 언행을 통해 보여지는 기존 남자들에 대한 일종의 '혐오'도 그런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여성의 앞길을 막는 남자' 라든가, '여성의 역겨운 파트너들'이라는 직접적인 어구들은 올리브라는 인물의 남자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체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인데요. 이것은 당시 편협한 사회 구조에 대응하는 비판이기도 하면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소유(몸과 마음 전반)하고 있다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깨어 있는 여성'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비판과도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올리브는 자신과 같은 여성들이 좀 더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각성하길 바라면서, 당시 누군가의 정치적 의견 피력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던 '대중 연설'을 소위 점진적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서 이를 연결 시키는데요. 남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있어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던 버리나 태런트를 올리브가 우연히 만나게 된 장면이 바로 이 극의 중요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당시 남녀 평등 운동의 대모로 읽히는 미스 버즈아이에 준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녀보다 좀 더 친화적이며 대중적인 여성 리더로서, 버리나를 그렇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본 올리브는 어리석지만 음흉한 야망을 갖고 있던 그녀의 부모로부터, 자신의 수표를 통해 버리나를 항유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사고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나이 어린 소녀를 자신의 이상을 위해, 내면과 의식을 함께 조형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가 사실 지금에있어서는 상당히 불편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버리나는 어느 정도 영악한 친부모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시켜 준 올리브에 대한 고마움과 그런 그녀가 갖고 있는 내면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그런 이상을 가진 그녀와 함께 한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다만 버리나 태런트의 이런 불완전한 이상의 한계 자체는 후에 나타날 극의 반전과 교묘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난 치열한 전쟁에서 자신의 고향인 미시시피 주가 속한 남부 연방이 북부에 무참히 패배해, 소위 전통을 망각한 몰지각한 북부인들의 연방으로 회귀한 현실에 스스로 어느 정도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베이질 랜섬은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올리브의 신념과 정반대로 대치되는 인물입니다. 랜섬은 그 자체로 정치적 구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다시 연방 체제로 복귀한 작금의 미국에 있어, 여실히 사회적으로 패배자이자 동시에 낙오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부가 노예 노동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자신들의 문화적이고 귀족적인 측면에서의 특수성으로 항변해 왔던 것처럼, 남녀 간의 차이 혹은 소위 '성별의 임무'가 마땅히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기존의 소리를 마찬가지로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올리브는 극중에서 꽤 애매한 언급으로 이런 랜섬을 사람 자체로 싫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와 발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으로 그를 갈음하고 있기도 한 데요. 이것은 분명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의도된 설정으로도 읽힙니다. 이런 측면에서 랜섬과 버리나의 마치 운명과도 같은 - 아니면 약간 작위적이라고 볼 수 있는 - 애정이 독자들에게 정황상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일 겁니다. 즉, 올리브의 영향력 하에 있던 불완전한 버리나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인물인 랜섬의 상당히 이해 되지 않는 구애에 굴복했다는 단순한 전개를 넘어, 결과적으로는 극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올리브를 처절하게 몰락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그저 단편적인 생각이 초반에 들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제 예상과는 반대로 이 결말의 여운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여성을 위한 운동 그 자체에서 역사가 되었던 한 인물의 죽음은 작중 세 인물의 경로를 완전히 틀어 놓습니다. 자신이 진정 스스로 원했던 바가 그 '진보의 운동', 그 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그녀와 그런 운명을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한 어떻게 보면 그의 일관된 의지와 ,이 남녀의 결합은 '남녀 간의 애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견고하게 보였던 이상이 함께한 관계를 처절히 붕괴시켰습니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은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거듭 강조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거창한 대의라도 사람 사이의 단순한 감정이라는 자연물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점과 동시에 자신의 삶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며, 대의거나 혹은 거창하지 않은 편협한 소의라고 할지라도 이를 누가 대신 짊어질 수 없다는 당위와 가까운 관념은, 현실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대의에 대한 냉소나, 이상에 대한 명확한 반론이라는 의견 만으로는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는데요. 올리브가 가고자 했던 길이 사실 현재에 많은 여성들이 바라 마지 않는 대의가 되었다는 것은 거듭 말하지 않더라도 거의 분명합니다. 다만, 현란한 말 뿐인 대의는 쉽게 주변을 불타오르게 할 수 없으며, 일말의 공감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불꽃이 되어야 사회에 대한 변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진보를 위한 중요한 맥락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오히려 올리브의 여느 결말을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따로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설정이 많은 독자들에게 삶에 있어 사소한 여운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존 스타인벡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신념이 전무한 인간은 그 존재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냐고 우리에게 되물은 바가 있었죠. 이는 여기서 말하는 노예 해방이나 여성 해방이나 정치적 평등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봤던 4시간 22분짜리 영화 게티스버그에서 남부군에 속한 장군들과 병사들의 남부 억양을 개인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요. 역자도 이미 뒤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베이질 랜섬의 '미시시피 억양'의 설정과 이에 대한 충실한 번역이 우리 말로는 어려웠다는 점에서 원서를 일독해야 될까 고민입니다. 이와는 논외로, 이 번역된 작품도 상당한 분량이어서 일상 속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읽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이듦은 그것에 비례하여 집중력을 더욱 소진시키는 것만 같습니다.   



그중 하나는 인간을 가장 단순하게 분류하면 만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자와 쉽게 받아들이는 자로 나눌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제 남부의 낡은 관념은 막을 내렸다는 말을 그녀에게 얼마나 귀에 못 박힐 정도로 했는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고투하는 목표는 국가의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고 모든 남자에게서 술이 넘쳐흐르는 잔을 뺏는 것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미스 태런트라는 젊은 여성이 과연 놀랄 만한 재능의 소유자인지, 아니면 단지 나서기 좋아하는 말괄량이에 지나지 않는지 자문하고 있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모두 여성의 온유함과 선량함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 오랜 시대를 걸쳐 어떻게 여성들이 남성의 강철 뒤축에 짓밟혀왔는가 하는 이야기였다는 것뿐이었다.

잔 다르크는 어디서 프랑스의 고통에 대한 통찰을 얻었냐고 물었다. 이 말을 하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올리브는 그녀에게 거의 키스할 뻔했다.

연설이란 건 거의 누구나 아무 대가가 없어도 기꺼이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 분야에서는 사심이 없는 걸로 눈에 띄기는 쉽지 않다.

"당신의 사명은 개개인에게 기분 전환용으로 자신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 나라 전체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에요."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녀는 악이 일소되지 않고 눈앞에 여전히 있어서 과업과 보상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에 태어난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녀는 여성의 속박 상태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성 개개인이 걸출한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호방한 마음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여자가 본질적으로 남자보다 못한 존재이고 남자가 그들을 위해 정해준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여자는 한없이 짜증이 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랜섬이 남부 열한 개 주의 탈퇴를, 그리고 올리브의 용기와 비교하기 위해 당시 궐기한 남자들의 태도(그 용기가 어쨋든 가상했던)를 은근히 언급한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점잖은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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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으로서의 정치 정치+철학 총서 3
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 / 후마니타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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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작센 지방의 에르푸르트에서 태어난 막스 베버는 유구한 섬유 산업 가문의 상속자이자 변호사였던 부친과 프랑스 위그노 출신의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던 모친의 보살핌으로 자라납니다. 이 가족은 1869년에 베를린으로 이주를 하게 되는데요. 베버는 1870년, 샤를로텐부르크의 되벨린 사립학교에 입학합니다. 이 시기의 베버는 지루한 수업 강의를 견디지 못해, 괴테의 40여권이나 되는 저작들을 섭렵합니다. 이후 임마누엘 칸트, 스피노자, 쇼펜하우어 등을 탐독하면서 자신을 위한 학문적 기초를 구축하게 됩니다. 또한 1892년에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법학 전공으로 등록하고, 나중에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도 수학합니다. 전반적으로 그는 사회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요. 1893년부터 1899년까지 베버는 폴란드 노동자들의 독일 내 이민을 반대하는 켐페인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189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경제 및 금융학 교수로 일하지만, 1897년 부친의 사망으로 인한 자책감으로 우울증, 초조함, 불면증에 점점 더 취약해지고, 교수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는 여러 요양소들을 전전하면서 1918년까지 교직에 복귀하지 못합니다. 물론 이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50세의 베버는 자원하게 되는데요. 그는 하이델베르크의 육군 병원 조직을 담당하는 예비군 장교로 임명됩니다. 전쟁의 종료 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로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짧은 정치 이력을 뒤로하고, 1918년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과 뮌헨의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뮌헨에서 사회과학, 경제사, 정치경제학의 학과장을 맡게 되었고, 당시 혼란스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의 학자들간의 정치 세미나와 토론 등에 활발히 참여하는데요. 여기에 제1차 대전 이후, 독일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그는 깊은 고민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1917년부터 1919년은 그가 학자인 동시에 정치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고민했으며, 1919년에 그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이듬해인 1920년 6월 갑자기 걸린 감기 때문에 수업을 취소해야만 했는데요. 그의 병은 곧 심각해졌고, 1920년 6월 14일 뮌헨에서 그는 끝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k Als Beruf"로 지난 1919년에 출간되었고, 이 번역본은 2011년 4월 초도 번역, 이후 2023년 5월에 개정1판2쇄로 이어집니다. 이 후마니타스 판에는 최장집 교수의 해제가 실려있습니다.

아마도 위그노인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모양인지 베버는 '칼뱅주의적 사고'에 깊은 감화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요. 바로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소명'은 어떻게 보면 앞선 맥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국내에 출판된 다른 여타 번역본들 가운데, 소명이 아니라 '직업'으로 번역된 것들도 있긴 한데요. 뒤에 나오는 최장집 교수의 해석처럼, 직업이 아니라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제목이 이 책의 전반적인 논증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이 책과 관련된 개인적인 소회는 과거 우연히 읽었던 어떤 기사를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요. 당시 유명한 모 정치인이 베버의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정치 이력과 현재의 한국 정치가 몹시 부끄럽다는 식으로 의견을 내비친 바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그 정치인의 전형적인 수사에 그치더라도 저자인 베버가 말하고자 했던 정치와 정치 권력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누구보다 현재의 정치인들이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관련된 권위와 그를 바탕으로 구축된 행정 체계 자체는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 베버가 언급한 '카리스마적 리더'에 대한 분석과 심지어 군주정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리더'를 숭상하고 추앙하는 추종자들이 소위 궁정을 이끌었다는 부분은 어느 정도 의미심장한 맥락이라고 여겨지는데요. 바로 이러한 근대 이전의 정치적 환경은 당시에도 다수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수많은 사상가들이 집중한 주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고찰속에 "정치적으로 우세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는가"로 이어졌고, 소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전통적 지배 체제'에서도 효력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저자는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결국 자신에게 헌신하는 보좌 인력과 좀 더 넓게 해석해 볼 수도 있는 '사익'을 위해, 이런 리더들에게 자신의 충성과 그에 따른 봉사를 제공하는 추종자들의 존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정치'와 상당히 대치되는 서술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뒤에서 보충 설명하고 있는 최장집 교수의 언급대로, 베버의 다른 저작들과 동일하게 이 논저 역시, 논증의 행위와 구조 자체가 병립되고, 각각의 비교되는 개념들은 모두 '이율배반 antnomy'적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먼저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현실 정치의 본질 그리고 여기에 대치되는 윤리적인 이상과 의식적인 부분이 서로 대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베버가 현실과 이상, 그리고 사익과 도덕간의 상충이 아니라 체제에서 서로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그만의 시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음 2장에서 논의되는 정당에서 미국의 정당이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이해 관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베버의 분석은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당의 실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베버는 앞선 (진정한) 정치가에 대한 개념적 정의를 논하면서, '대의에 대한 헌신', '대의에 대한 책임'과 (사물과 현상을 분석하는) 객관성에 기반한 정치 권력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는 앞선 정당들의 실체가 자본주의적 이익에 매몰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속한 정치인들 각자는 최소한 '대의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소위 '이율배반적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특히 베버는 정치인들의 '허영심'을 정치 전반에서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런 허영심에 빠진 정치인들 자체는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논증을 이어가는데요. 근대 이전의 봉건사회로부터 근대화 이후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정치에서의 이 행위자들의 '사익 추구'는 거듭 말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많은 정치적 이상주의자들은 직면한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그저 정치적 이상을 크게 부르짖고 있지만, 베버의 말마따나 이러한 정치적 현실과 이에 기반한 정당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상과 현실은 그만큼 더욱 괴리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나 저는 1장에서 이어지는 논증들 가운데, 민주주의가 법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여기에 종사하는 잘 교육받은 법률가 집단들이 갖는 함의, 그리고 이들과는 반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언론인들의 존재와 그런 언론인들이 사실상 추구해 마지 않는 '상류 계급으로의 열망'은 현재에까지 비교대입해 볼 수 있는 그의 '실체적 분석'으로까지 이해됩니다. 당시로서도 매우 드문 대학 교육을 거친 법률가 집단이 사회 전반에서 누리는 계급적 견고함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역할과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해, 사익과 이상 사이의 균형을 흩트리는 언론인들의 존재는 작금의 현실과 교묘히 부합되는데요. 단순히 언론인들에게 가진 것 이상의 능력을 초월한, 의무를 떠 넘기고자 저런 일방적 분석을 시도한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그리고 정치에서의 집단적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정당은 1장 중후반부터 2장까지의 분량에서,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 '정당의 출현' 자체는 베버의 말마따나 반쯤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기 정당에 대한 이런 역사적 궤적은 C. 라이트 밀스의 언급대로 정치의 사익화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베버는 1장에서 이미 인간은 '권력과 소위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 이해했고, 이러한 관념 자체를 단순히 선악론으로 구분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익화에 있어 베버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내면적 신념 윤리'로 개선될 수 있을지 그것을 고려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베버는 현실과 유리된 '도덕주의'에 대해선 분명 경계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에 움직이는 정치인들의 존재와 그러한 이행이 더욱 복잡하게 이뤄진 지금의 현대 정치에서는 이런 이상주의적 접근과 비판은 거의 실효성이 없다고 봐야 할 텐데요. 물론 어느 정도 민주주의에 공감한 베버가 공화주의에 기반한 '공익'에 대해 눈을 감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러한 언급이 일절 없는 부분은 단순히 논증에 국한해 살펴봐도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뒤이어 3장에서 '전형적인 권력정치형 인물들'이 내적으로 일순간 붕괴되는 것은 한 개인의 불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봐도 큰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베버의 강조대로 "정치가가 권력을 추구하고 또 권력을 활용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그 대의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는 신념의 문제"라고 보는 것은 한편으론 아쉬운 진술이기도 합니다. 신념은 그것 자체로 중요하지만 앞에 '정치적'이라는 단어가 붙을 때는 그만큼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데요. 반대로 '잘못된 신념'에 근거한 전체주의가 어떠한 인류에게 파국을 초래했는지는 충분히 역사가 증명한 바가 있습니다. 앞선 베버의 진술에서, 대의는 아마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바대로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의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물론 이 대의 앞에 많은 수사가 달릴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적 대의'란 사회를 개선시키고 진보에 이르게 하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분명 반동에 가까운 것은 결코 아닐 겁니다. 따라서 다음 이어지는 "정치와 윤리는 서로 무관한 것일까?"에 우리 모두가 적절한 답을 알고 있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선 1장에서 치밀하게 분석되는 정치와 권력, 특히 권력이 그게 무엇이든 간에 폭력을 수반하다는 점에서 정치가 분명 최소한의 윤리적인 기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도 거의 명확해 보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저자는 자신의 이 논저를 통해, 정치와 그것의 체제에 있어 이상과 현실에 대한 균형적인 감각을 일관되게 강조하기는 했지만, 혹여 정치가 끝도 모를 종교적 자비 관념에 빠져, 현실이 가진 실체를 과도하게 해석할 수 있는 위협도 역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의 무모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베버가 말하는 신념 윤리와 더불어 언급되고 있는 '책임 윤리'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는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정당과 그것을 지지하는 모두의 이익 뿐만 아니라, 반대의 신념 체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이익까지 고려해야 하는 점도 체제 유지에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리더가 없는 민주주의'라는 정확한 본질과 이를 과연 대중 투표에 기반한 정치 권력이 모두의 이익은 물론, 혹여 발생할 수 있는 혼란까지 잘 제어할 수 있을지는 우리의 면밀한 감시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버는 글 후반부에서 소명을 망각하지 않는 어떤 영웅과도 같은 리더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는 영웅적 기질을 가진 리더가 마땅히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출 될 수 있어야만 하겠죠.    

끝으로 베버는 글 후반부에 '대중 투표로 결정된 정치 권력'과 그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권력이 모두의 합의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점과 사실상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취급해야 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가까운 과거로부터 '혁명'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그 시대의 인물로서, 자신의 조국이 패전을 통해, 서방 국가로부터 제재를 받은 상황에서 그가 맞이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가 어떠한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논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저로서는 민주주의가 변호사와 법관들과 깊이 관련있다고 언급하는 부분과 정당이 권력의 한 방편으로서, 정치인들의 '사익 추구'에 가깝다고 보는 분석은 실로 기꺼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베버가 정치적 현실주의에 가까운 시각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고, 신념에 대한 문제와 더 나아가 대의에 대한 중요성을 지나치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히 대립되는 각각의 '인식'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정치에서 정치인들이 왜 대의와 사익 추구에 현실적 균형을 찾아야 하는지, 이것의 본질이 바로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상 보다 건전한 정치인들과 정치 전반이 우리에게 매우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이 시대의 불행한 자화상이 아닐까 글 말미에서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우리가 희생을 통해, 구축한 의외 민주주의와 선출 민주제의 본질 자체에서 그만큼 '대의'와 '최소한의 윤리적 제한'을 많은 정치인들이 이를 '소명'하는 것이 매우 시급한 시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결과론적인 양태일 수도 있지만 베버가 이렇게 정치의 본질에 있어 '자격이 없는 자들의 정치'가 독일에서 어떻게 파국을 초래했는지 우리는 이를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약간 논외이지만, 1차 대전 이후 패전의 책임을 진 자신의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서의 승자의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폭력/강권력이라는 관념 없이 사회가 조직되었더라면 ‘국가‘라는 개념은 진즉에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Anachie로 규정할 만한 상황이 벌써 출현했을 것이다.

물적 행정 수단의 전부 혹은 일부가, 통치자와 종속관계를 맺은 행정 관리의 수중에 있는 정치 결사체를 우리는 ‘신분제적으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산가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생활의 경제적 ‘안정성‘을 그의 인생 설계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을 안다.

이런 이유에서 변호사는 직업 정치가로서는 다른 직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역할, 때로는 지배적인 역할을 해올 수 있었다.

정당정치는 극히 단순화해 말하자면 이해 당자자에 의해 정치가 운영된다는 것을 뜻한다.

구체제하에서 국가 내지는 정당의 지배 권력과 언론의 유착 관계가 저널리즘의 질적 수준에 엄청난 해를 끼쳤다는 사실은 별도로 다룰 문제이다.

의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라고는 단지 투표에 참여하고 당을 배반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직업 정치가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자신이 어떤 자질을 갖춰야 이 권력을 제대로 다루고, 그래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객관성의 결여는 그로 하여금 진정한 권력이 아니라 권력의 화려한 외관만을 추구하게 한다.

전형적인 권력정치형 인물들이 내적으로 일순간 붕괴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웅장하지만 내용은 없는 자태의 이면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기력한지를 목격한 바 있다.

정치가가 권력을 추구하고 또 권력을 활용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그 대의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는 신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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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 - 우크라이나전쟁, 그리고 평화가 당연하지 않은 미래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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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이진우 교수는 195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연세대 독어독문과를 졸업합니다. 이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9년부터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는데요. 그는 2005년에 국무총리실산하 인문정책위원을 지냈고, 한국니체학회 회장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2010년부터는 포항공과대학의 인문사회과학부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같은 대학의 인문사회과학부 학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논저들 가운데, '한국 인문학의 서양 콤플렉스'와 '지상으로 내려온 철학' 등을 접했는데요. 저자에 대해선 학자로서, 꽤나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는 요즘 여러 방송 강의에도 출연해 대중들을 위한 철학 강의에도 매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지난 22년 7월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진우 교수와 같은 정치철학자가 현실 정치나 왜곡된 정치 상황에 대해 소신껏 말을 해야 하는가, 혹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양심의 문제로 국한해야 되는지, 아마도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일찍이 막스 베버가 깊이 탐구한 정치철학을 그저 학문의 한 분야 정도로 취급해야 되는지 아니면 현실 정치와 우리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위해, 다각도로 연구하는 실질적인 학문이 되어야 하는지는 현실 상황과 맞물려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저는 학자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정치적 지향을 차치하고 그저 기계적 중립을 외피로 두르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인가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진우 교수의 이 책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생각할 꺼리들을 안겨준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야욕 내지는 저자가 분석한 러시아의 노골적인 '유라시아주의'를 비평하기에 앞서, 논증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해석이었습니다. 즉 지금의 전통적 연대기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관점과 함께, "2차 대전은 1930년대 초 중국에서 시작되어 1945년 이후 10년 만에 중국, 동남아시아, 동유럽 및 중동에서 끝났다"고 저자는 이처럼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뒤이어 중국의 경제적 대두와 미국의 전세계 패권에 도전하는 '강고한 민족주의적 체제 중국'의 시작은 기존과는 상이한 '1979년'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이란 팔레비 왕조의 붕괴, 독일과 일본의 변화 및 미국 주도 아래의 서구 통합 등이 서로 맞물려, 소위 '중국의 시간'에 매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라는 정치적 선언은 중국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마련된 중국의 국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됨에 따라, 세계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향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할 텐데요. 바로 오늘날 중국의 토대가 되었던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블라드미르 푸틴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지 고찰해 보는 것이 아마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작전'이 시행된 그 이면의 감춰진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먼저, 저자의 이 책은 러시아의 푸틴이 서방 세계와 이론과 현실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분리되고자 하는 의도를 차분히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푸틴이 강조하는 '유라시아주의'는 바로 그런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유럽인이 아닌 러시아인, 아시아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라는 관념은 자신들을 유럽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이러한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우크라이나를 응징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적 관계를 크게 왜곡한 푸틴의 그 문제의 논문도 그렇거니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러시아인들이 허락했기에 가능했다는 식의 서사로도 왜곡될 수 있습니다. 구소련이 미국과 유럽에 의해 붕괴되었기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일방적인 인식론에 러시아인들의 이성이 마비될 수도 있는 것인데요. 물론 러시아인들 대부분이 이런 민족적 광기에 휩싸여 푸틴에게 전쟁을 요구한 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마더 러시아'라는 허황된 꿈과 자신의 지속가능한 정치적 이익에 함몰된 푸틴이 바로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인데요. 일전에 '푸틴 치하의 러시아'라고 러시아 정치를 분석한 독일 언론인인 후베르트 자이펠의 인식은 이처럼 명확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의 여러 논증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주의 깊게 봤던 부분은 "자유주의 대 민족주의"라는 흡사 대결 구도 논리였습니다. 이것을 무슨 신념처럼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오판 가능성을 여기에 대입해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앞서, 시진핑에게 의견을 구했던 것은 좀 더 다른 각도로 살펴보면, 이들의 정치적 지향과 국가 운영 논리가 서로 유사하다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는데요. 단순히 핵보유국과 비핵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푸틴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단순한 대결 구도가 아니라 정말 전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고 갈 수도 있는 현실의 심각한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핵전쟁의 후과가 결코 승리나 패전 따위가 아님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의 궤멸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민족주의는 바로 이점을 저울질한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큰 문제로 여겨집니다.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정치가 추구하는 것이 고도의 이성적 행위에 기반한 어떤 결과물이라면, 특히 국제정치에서는 이렇게 비이성적이고 극단적인 대결과 파국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세계화 수준의 개방적 환경이 일차적인 평화 조성의 만능 키가 될 수 없다는 점도 거의 명확해 보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어느 정도 논증에서 인정하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와 그것과 버금가는 상대적 도덕주의가 결합되었을 때, 전세계 평화와 질서에 상당히 해가 될 수 있다는 맥락의 이해는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충분히 중요하고 사활적인 문제이지만 일부 권위주의 국가들의 현실 정치를 어떻게 부분적 자유화 내지는 정치 권력의 교체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를 모색하는 것 자체가 파국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단일한 시장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물건이나 사고팔고 경제 금융 거래만 제한없이 이뤄지는 '극한의 자유화' 또한 지속적인 평화의 조건이 될 수 없는 점도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신자유주의처럼 어디에서든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그것대로 기업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는 이성적 해결의 원칙과도 근본적으로 대치되는 것인데요. 바로 이러한 구조 속에 정치철학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오바니 아리기의 의견대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지배하는 세계 질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 많은 국가들에게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푸틴 치하의 러시아'가 인류를 절멸시키고도 남을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기에, 이 유라시아주의 국가에 대한 면밀한 제어와 통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이 비상한 정치적 해법을 도출해 낼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선 극히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이것은 저자의 비교처럼 칸트와 헤겔을 넘어서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인류가 절멸에 이르는 것을 그저 바라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 오늘날 세계 질서를 만든 미국과 서구 유럽에 대한 비판도 이 책에 담겨 있어,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진정한 함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언급한 '도덕적 상대주의'라는 의미는 꽤나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떻게 끝나든지 ‘지정학적 대분기‘를 야기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유럽 대륙의 중앙부에서 나치독일과 소비에트러시아는 약 1,400만 명의 사람을 살육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커다란 위협은 중국과 러시아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평화를 만든다. 이는 강력한 국가가 없었다면 살인과 가난, 무지가 일상생활의 규칙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홉스의 입장을 반영한다.

칸트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영원한 평화‘는 이성에 의해 자유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원한 평화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가 전통적으로 중우정치와 민중의 독재를 함축하는 까닭에 칸트는 민주주의보다는 공화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공화주의에 기반한 ‘시민법 ius civitratis‘, 국가 간 민주적 관계를 규정한 ‘국제법 ius gentium‘, 그리고 환대와 우호에 기반한 ‘세계 시민법 ius cosmopoliticum‘은 영원한 평화의 조건이며 기반이다.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우리는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 전체가 자유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이라면,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는 주체는 "세계정신"이다.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제창하지만 전쟁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헤겔은 전쟁의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평화가 역사의 목적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는다.

전쟁의 폭력적 행위마저 어떻게 해서든 도덕적으로 통제하려는 이상주의의 관점 역시 전쟁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전쟁의 위험이 긴박한 상황에서 런던과 베를린, 그리고 베를린과 모스크바 사이에 소위 ‘투디키데스의 함정‘이라는 구조적 역학이 작용했을 수 있다.

유럽연합과 나토의 확장 자체가 평화 지역의 확장이라는 생각은 자유민주주의의 오만이다.

자유주의 국가들이 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보는 것이 바로 도덕적 보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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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니콜 크라우스는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계 유대인인 어머니와 미국계 유대인인 아버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외조부모는 독일과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나중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고, 친조부모는 각기 헝가리와 벨로루시 태생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지명들은 2005년에 출판된 '사랑의 역사'에서 그 배경이 됩니다. 크라우스는 1992년에 스탠포드 대학에 등록했고, 그 해 가을 그곳에서 조셉 브로드스키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와 브로드스키는 근 3년 동안 교류를 지속합니다. 이후 1996년에는 마샬 장학금을 받고 옥스포드의 서머빌 칼리지에서 석사 과정에 등록하고, 미국 예술가인 조셉 코넬에 대한 논문을 작성합니다. 그녀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4편의 작품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간다','사랑의 역사'.'그레이트 하우스','포레스트 다크'로 유대인들의 역사와 그들의 정체성 문제 등을 다루면서, 특히 언어로 매개된 기억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통 그녀를 평가할 때, 포스트모던 문학으로 자주 그녀의 작품 세계를 한정하기도 하는데요. 다만, 여기에서 밝히고 싶은 부분은 이 '유대인의 정체성' 이라는 부분 역시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문학적 주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Great House"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7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서사 형태는 4명의 화자가 서로 두번씩 자신의 이야기를 건네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각자가 지난 삶에서 체화된 경험과 그런 기억이 긴 나레이션을 통해, 온전히 재발견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 부분이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다니엘 바스키라는 인물과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상'은 서로 맞물려, 이와 연관된 인물들의 숨겨진 배경이 곳곳에 드러나 극은 마치 음악의 절정처럼 몹시 요동치게 됩니다. 전자의 다니엘 바스키는 태생이 유대인으로 직접적으로 두 명의 인물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비극적인 실종과 더불어, 후자의 책상은 30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몇 명의 소유주와 상이한 지역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서 책상은 일종의 '상실의 비극'을 은연중에 내포합니다. 즉 책상의 '전해짐과 상실'은 극에 등장하는 소설가인 로테 버그와 시인인 나디아의 뜻하지 않은 불행을 초래하는데요. 또한 책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중부 유럽 유대인의 역사적 비극, 그리고 당사자인 '미스터 와이즈'의 가족사는 분명 우리 인류가 기억해야 될 상흔이기도 합니다. 작중 어떤 화자의 독백에서, "유대인은 항상 죽음과 가깝다.","유대인에게 죽음의 의미는 기독교와 불교와는 상이하게 다르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전체 역사에서 이들이 얼마나 거짓된 모함과 편견으로 여타 다른 민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는지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한 민족이 마땅히 누려야 될 삶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 항상 음습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맥락의 아픈 서사는 저의 마음을 절로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했던 자신의 유년 시절과 당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소재한 '가족의 집'에 불현듯 나치 독일의 재앙이 들이닥쳤던 그 날의 기억은 마땅히 안온함으로 채워져야만 했던 어린 와이즈의 삶을 그대로 산산히 부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성년이 되어서도 필생의 과업으로 지난날 조부와 아버지가 구축한 가족의 세간살이 즉, 유산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게 되는데요. 이런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자식들은 이렇게 '인간의 정'을 상실한 아버지와 결코 가까워질 수 없게 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유일한 자식들인 요아브와 레아 남매의 억눌리고 주눅든 성격, 이 뿐만 아니라 요아브의 여자친구이자 4명의 화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한, 이사벨이 이런 와이즈을 평범한 사람의 감각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자신의 가족사를 쉽게 털어놓을 없었던 요아브를 그녀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데요. 요아브와 잠시 떨어졌던 이사벨이 결국 다시 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지한 고백은 그럼에도 이 둘 사이에 놓여진 사랑의 끈이 그만큼 굳건했다고 봐야 할 텐데요. 이에 저자는 한편으로 지난날 비극적인 유대인의 가족사를 치유하는데 있어 중요한 힘은 서로를 진정 이해하게 만드는 사랑이며, 이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에 의한 치유는 굴절된 기억, 몸에 새겨진 슬픔과 상처, 그리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증오를 역사의 진정한 치유와 함께, 중요한 회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극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 다니엘 바스키는 칠레 출신의 유대인으로 자신의 모국이 곧 중대한 위기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CIA와 시카고 보이스가 협력한 피노체트의 불법적인 군부 쿠데타 획책이었습니다. 바스키는 결국 극에서 몇번이나 중요하게 언급되지만 결국 피노체트 군에 끌려가 행방불명 됩니다. 칠레가 아닌 미국의 폐쇄적 이익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쿠데타에 나섰던 피노체트는 훗날 영국에서 등 수술을 받다가 당국에 체포되었다는 짤막한 기사를 통해, 이날의 비극이 얼마나 보잘것 없이 희화화 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데요. 작가인 크라우스가 신변의 비밀을 안고 있는 바스키의 실종을 피노체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점은 유대인으로서 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분명 대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극중에 하인리히 힘러가 짤막하게 언급되는 부분은 그대로 의미심장하다고 느껴지는데요, 또한 다른 화자들의 서사를 통해, 피노체트가 벌인 극단적인 군사 행동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바스키의 안위의 문제와 결부되어, 당시 칠레의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것을 보면 칠레 사태가 그저 한 자락의 뉴스꺼리만은 아닌 것으로 이해됩니다. 작가인 크라우스 본인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적 운명 자체에 있어, 이들 민족이 역사의 부침에 의해 산산히 흩어지는 것을 도식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닐 겁니다. 역사가 유대인의 궤멸을 바란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아닌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느끼기에도 이들이 겪은 지난날 역사의 고난은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고통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말입니다.   

또한 작게는 이 '책상을 둘러싼 복잡한 기억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이것의 여파가 때에 따라 화자들과 연관된 인물들의 말 못할 비밀과 면밀히 연계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의 남편이자 화자 중 한 사람인 아서 벤더가 아내가 죽음으로써 드러난 충격적인 '비밀'이 이 부부의 삶에서 떠난 그 책상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화를 맞게 되고, "과연 아내를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라는 자포자기한 감정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예전의 삶을 숨기고 이중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는 바로 2차 대전 당시의 '뉘른베르크에서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증오의 전쟁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고, 동시에 처절한 현장에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마음의 골에 아로새기게 됩니다. 단순히 신문 기사나 티비 뉴스에서나 등장하는 전쟁은 몸소 체험해 보지 않는 이상, 이것의 파멸적 의미를 누구든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요. 바로 이 책상의 복잡한 의미가 앞서 제가 설명한 '비극적인 상실의 의미'를 폭력적으로 내포하게 된 연유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치에 의한 유대인들의 학살과 그로 인한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파괴와 절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책상과 매개되어 있고, 이것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책상을 '상실한' 화자들의 불안한 삶과 더 나아가 예기치 않는 불행으로까지 귀결됩니다. 그저 일상에서 봄직한 사소한 불행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이들의 삶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요. 소설가 아내의 굴곡진 인생과 그것을 수동적으로 대면한 어떤 화자, 자신의 삶에 오롯이 서지 못한 인물들의 서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들이 만만치 않다는 점은 마치 우리의 불안한 삶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는 그런 불확실성 말입니다. 분명 이 책상의 주인이기도 했던 다니엘 바스키, 그의 생사불명과 존재성을 두고 얽히게 되는 숱한 오해의 문제들은 화자 한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파생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실종과 갈 곳을 잃은 책상의 존재는 단순히 오고감의 단절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극의 서사를 이끄는 이 축은 결국 4명의 화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러면서 이들 각자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것은 진실의 대면이거나, 과거의 드러남이거나, 혹은 추악한 비밀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작가는 이 노련한 작품을 쓰기 위해, 어느 정도 자신의 외가와 친가의 불행한 가족사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현재 이런 유대인들이 정착한 이스라엘이 어떤 의미로 '불완전한 정착지'라는 점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의 불행은 근본적으로 그 끝을 맞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뭐 이것을 단순히 역사에서 예정된 '유대인의 고난'쯤으로 가볍게 치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다른 누군가에게 쉽게 전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증오'이며, 이것을 지워내고 희석시키는 것에 필요한 요소는 무엇보다 '더할 나위 없는 큰 사랑'과 이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인류에게 사랑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는 자기 파괴적인 폭력과 증오를 제어하고 제한하는 역할이라고도 읽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중 요아브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이사벨의 사랑과 그 결실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울림을 안겨준다고 여겨집니다. 이와 상반된 결말을 맞이한 인물들인 로테 버그와 나디아의 사뭇 의미심장한 파국은 극의 중요한 문법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의 나무랄 데 없는 번역과 그에 따른 밀도 높은 서사의 울림 자체는 이 작품의 크나큰 장점으로 여겨졌는데요. 여기에 여러 의미로 쓰인 상징적 장치들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꽤나 훌륭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처음엔 듣지 못한 어떤 배경음 같은 것. 혹은 아침에 일어날 때, 잠에서 빠져나와 깨어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가 들린 적도 있어요.

무슨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자기가 읽은 모든 문학 작품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면, 머리와 영혼에서 지워진다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너의 눈이나 살짝 기울어진 입꼬리에 무언가가, 고통, 아니 정확히 고통이라곤 할 수 없고,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아내는 자신의 자유에 대해 이런저런 요구를 하지 말 것을 분명히 했고, 내 쪽에서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와이즈 씨는 1944년의 그날 밤 게슈타포가 부모님을 체포해 갈 당시, 부다페스트의 아버지 서재에 있던 물건들을 되찾으려고 애썼고, 자신의 서재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은 모두 그렇게 되찾아 온 것들이었다.

그때, 왜 바로 그 순간에 움슐라그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 사진이 떠올랐는지 생각났다. 그러니까, 링겐블룸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던 바로 그 시기에, 게슈타포가 추방 혹은 처형을 당한 유대인의 집에서 약탈해 온 가구나 가재도구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한 유대인 사원이나 공장 사진들도 함께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한때는 닮은 점이 있었지만, 삶에서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 때문에 뒤틀려서, 이젠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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