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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평점 :
영어권 독자들로부터 영어 소설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헨리 제임스는 1843년 4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은 총명하고 사려 깊은 인물로 아버지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고, 모친도 오랫동안 뉴욕의 정착했던 부유한 가문의 출신이었습니다. 헨리가 태어난 지, 1년이 되지 않던 해에 그의 부친은 워싱턴 플레이스에 있던 집을 팔고 자신의 가족을 한동안 영국에서 지내게 하는데요. 그들은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 있는 별장에서 한동안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 이들은 1845년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고, 특히 헨리는 올버니에 있던 친할머니 집과 맨해튼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냅니다. 1855년부터 1860년 사이의 기간에는 그의 부친의 관심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본 등을 여행하고, 틈틈이 경비가 부족해 질 즈음에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후 1864년에 이들 가족은 미국 메사추세츠의 보스턴으로 이주하게 되는데요. 헨리는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다녔으나 법학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 즈음에 문학에 관심을 돌리게 됩니다. 이에 같은 해인 1864년에 익명으로 단편을 출간하고, 1869년부터 70년까지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리스, 조지 엘리엇 등과 만납니다. 이처럼 그의 인생 절반은 미국 바깥으로의 여정과 발길이 닿았던 곳에서의 사색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데요. 1875년부터 이어지는 활발한 집필 활동과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되는 영국에서의 여러 활동들이 그의 문학적 영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회 통념과 그에 따른 개인의 심리적 변화와 타락, 한 개인의 이상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비틀어 내는 그의 주제 의식은 특유의 긴 심리 묘사, 그리고 그런 배경의 더할 나위 없는 점층된 서사로, 당시 평단으로부터 문학가로서의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여러 작품들 중, 중기에 속한 이 장편은 원제, "The Bostonians"로 지난 1886년에 처음 출간 되었고, 펭귄 클래식의 2000년 판을 바탕으로. 2024년 2월, 국내에 초역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올리브 챈설러, 버리나 태런트, 베이질 랜섬, 이 세 인물이 극을 주도하고 이들의 엇갈린 행보와 더불어 당시 시대상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큰 틀에서 진보에 관한 주제 의식을 독자들의 고유한 양심에 맡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진보의 대한 주제란 이 시대의 여성의 자유, 남녀 평등에 대한 요구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번역본이 출간된 직후에 여러 기사나 소개글로 헨리 제임스의 이 소설을 단순히 페미니즘적 작품으로 홍보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1865년의 남북 전쟁의 종결 이후, 노예 해방이 미국 사회에서 명목상으로는 완수됨으로써, 이제 여성의 차례라는 점을 올리브 챈설러라는 인물로 드러내며, 그녀가 원하고 지향하는 이 거대한 이상에 대한 치밀한 서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과거 이력으로 보았을 때, 그가 기존의 '결혼 제도'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인물은 아닌 것은 분명해, 이런 여성 해방 운동이라는 주제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앞선 올리브 챈설러는 독신을 무엇보다 스스로 신념의 증거로 체화하면서 억압 받는 여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에 대한 야망을 매우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하는데요. 즉, 이는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운동에 있어 결혼은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녀 자신의 확고한 의지이기도 합니다. 물론 극중에서 이런 그녀를 좀 별난 인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집안 언니인 루나 부인을 통해서 말이죠. 또한 올리브가 극중에서 자신의 언행을 통해 보여지는 기존 남자들에 대한 일종의 '혐오'도 그런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여성의 앞길을 막는 남자' 라든가, '여성의 역겨운 파트너들'이라는 직접적인 어구들은 올리브라는 인물의 남자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 체계를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것인데요. 이것은 당시 편협한 사회 구조에 대응하는 비판이기도 하면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소유(몸과 마음 전반)하고 있다는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깨어 있는 여성'의 인식이기도 합니다.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비판과도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올리브는 자신과 같은 여성들이 좀 더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각성하길 바라면서, 당시 누군가의 정치적 의견 피력에 있어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던 '대중 연설'을 소위 점진적 여성 해방의 방편으로서 이를 연결 시키는데요. 남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 있어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던 버리나 태런트를 올리브가 우연히 만나게 된 장면이 바로 이 극의 중요한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당시 남녀 평등 운동의 대모로 읽히는 미스 버즈아이에 준하는 인물로, 그리고 그녀보다 좀 더 친화적이며 대중적인 여성 리더로서, 버리나를 그렇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본 올리브는 어리석지만 음흉한 야망을 갖고 있던 그녀의 부모로부터, 자신의 수표를 통해 버리나를 항유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작가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사고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나이 어린 소녀를 자신의 이상을 위해, 내면과 의식을 함께 조형하고자 하는 이런 시도가 사실 지금에있어서는 상당히 불편한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버리나는 어느 정도 영악한 친부모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시켜 준 올리브에 대한 고마움과 그런 그녀가 갖고 있는 내면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그런 이상을 가진 그녀와 함께 한다는 만족감을 느끼기도 하는데요. 다만 버리나 태런트의 이런 불완전한 이상의 한계 자체는 후에 나타날 극의 반전과 교묘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난 치열한 전쟁에서 자신의 고향인 미시시피 주가 속한 남부 연방이 북부에 무참히 패배해, 소위 전통을 망각한 몰지각한 북부인들의 연방으로 회귀한 현실에 스스로 어느 정도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베이질 랜섬은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올리브의 신념과 정반대로 대치되는 인물입니다. 랜섬은 그 자체로 정치적 구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다시 연방 체제로 복귀한 작금의 미국에 있어, 여실히 사회적으로 패배자이자 동시에 낙오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부가 노예 노동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자신들의 문화적이고 귀족적인 측면에서의 특수성으로 항변해 왔던 것처럼, 남녀 간의 차이 혹은 소위 '성별의 임무'가 마땅히 서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기존의 소리를 마찬가지로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올리브는 극중에서 꽤 애매한 언급으로 이런 랜섬을 사람 자체로 싫은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와 발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으로 그를 갈음하고 있기도 한 데요. 이것은 분명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의도된 설정으로도 읽힙니다. 이런 측면에서 랜섬과 버리나의 마치 운명과도 같은 - 아니면 약간 작위적이라고 볼 수 있는 - 애정이 독자들에게 정황상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일 겁니다. 즉, 올리브의 영향력 하에 있던 불완전한 버리나가 완전히 다른 성향의 인물인 랜섬의 상당히 이해 되지 않는 구애에 굴복했다는 단순한 전개를 넘어, 결과적으로는 극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올리브를 처절하게 몰락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그저 단편적인 생각이 초반에 들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제 예상과는 반대로 이 결말의 여운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여성을 위한 운동 그 자체에서 역사가 되었던 한 인물의 죽음은 작중 세 인물의 경로를 완전히 틀어 놓습니다. 자신이 진정 스스로 원했던 바가 그 '진보의 운동', 그 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그녀와 그런 운명을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한 어떻게 보면 그의 일관된 의지와 ,이 남녀의 결합은 '남녀 간의 애정'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견고하게 보였던 이상이 함께한 관계를 처절히 붕괴시켰습니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은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거듭 강조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거창한 대의라도 사람 사이의 단순한 감정이라는 자연물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 없다는 점과 동시에 자신의 삶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며, 대의거나 혹은 거창하지 않은 편협한 소의라고 할지라도 이를 누가 대신 짊어질 수 없다는 당위와 가까운 관념은, 현실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대의에 대한 냉소나, 이상에 대한 명확한 반론이라는 의견 만으로는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는데요. 올리브가 가고자 했던 길이 사실 현재에 많은 여성들이 바라 마지 않는 대의가 되었다는 것은 거듭 말하지 않더라도 거의 분명합니다. 다만, 현란한 말 뿐인 대의는 쉽게 주변을 불타오르게 할 수 없으며, 일말의 공감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불꽃이 되어야 사회에 대한 변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진보를 위한 중요한 맥락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오히려 올리브의 여느 결말을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따로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 크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러한 설정이 많은 독자들에게 삶에 있어 사소한 여운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존 스타인벡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신념이 전무한 인간은 그 존재 이유를 어디서 찾아야 하냐고 우리에게 되물은 바가 있었죠. 이는 여기서 말하는 노예 해방이나 여성 해방이나 정치적 평등보다 더 우선해야 하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봤던 4시간 22분짜리 영화 게티스버그에서 남부군에 속한 장군들과 병사들의 남부 억양을 개인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요. 역자도 이미 뒤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베이질 랜섬의 '미시시피 억양'의 설정과 이에 대한 충실한 번역이 우리 말로는 어려웠다는 점에서 원서를 일독해야 될까 고민입니다. 이와는 논외로, 이 번역된 작품도 상당한 분량이어서 일상 속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읽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이듦은 그것에 비례하여 집중력을 더욱 소진시키는 것만 같습니다.
그중 하나는 인간을 가장 단순하게 분류하면 만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자와 쉽게 받아들이는 자로 나눌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제 남부의 낡은 관념은 막을 내렸다는 말을 그녀에게 얼마나 귀에 못 박힐 정도로 했는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고투하는 목표는 국가의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고 모든 남자에게서 술이 넘쳐흐르는 잔을 뺏는 것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미스 태런트라는 젊은 여성이 과연 놀랄 만한 재능의 소유자인지, 아니면 단지 나서기 좋아하는 말괄량이에 지나지 않는지 자문하고 있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모두 여성의 온유함과 선량함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것, 오랜 시대를 걸쳐 어떻게 여성들이 남성의 강철 뒤축에 짓밟혀왔는가 하는 이야기였다는 것뿐이었다.
잔 다르크는 어디서 프랑스의 고통에 대한 통찰을 얻었냐고 물었다. 이 말을 하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올리브는 그녀에게 거의 키스할 뻔했다.
연설이란 건 거의 누구나 아무 대가가 없어도 기꺼이 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 분야에서는 사심이 없는 걸로 눈에 띄기는 쉽지 않다.
"당신의 사명은 개개인에게 기분 전환용으로 자신을 전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 나라 전체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에요."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녀는 악이 일소되지 않고 눈앞에 여전히 있어서 과업과 보상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대에 태어난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녀는 여성의 속박 상태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성 개개인이 걸출한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호방한 마음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 역시 여자가 본질적으로 남자보다 못한 존재이고 남자가 그들을 위해 정해준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여자는 한없이 짜증이 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서 랜섬이 남부 열한 개 주의 탈퇴를, 그리고 올리브의 용기와 비교하기 위해 당시 궐기한 남자들의 태도(그 용기가 어쨋든 가상했던)를 은근히 언급한 것은 그로서는 지극히 점잖은 농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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