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민철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민철 교수는 서울대 서양사학과에서 학부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의 역사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이화여자 대학의 사학과 강사를 거치면서 현재는 성균관대 사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볼테르와 콩도르세와 같은 당시 정치와 사회에 진보적 발자취를 남긴 사상가들과 그들이 관여했던 지성사에 전반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그는 공화주의를 비롯, 민주주의와 근대에서의 인민이 처한 문제, 엘리트가 기반이 된 대의 민주제 등 소위 계몽주의가 '접착제'가 된 당시의 급격한 변화와 혁명의 과정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는데요. 바로 여기의 이 글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서 도출된 논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글은 2023년 5월, 저명한 출판사이기도 한 창비에서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비롯된 소위 민주제는 저자의 분석대로 '민치제'와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된다고 여겨지는데요. 일전에 읽은 한스 포어랜드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이 글의 저자와 비슷한 입장이었습니다. 다만, 고대 그리스 이후,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는 '민주제', 혹은 '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하자면 민치제와 상당히 다른 개념임을 먼저 인지하고 나서, 저자의 이 논저를 일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저자는 글 서두에서 이와 같은 오해의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근대 이전까지 유럽의 수많은 사상가들이 왜 '민주주의'를 극적으로 혐오했는지 이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한 데요.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정치체로서의 민주주의는 인민의 주권이 제도적으로 위임된 형태의 소위 '대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 정치사상가들이 기본적으로 인지하는 이 대의 민주주의는 다수를 통치하기 위한 엘리트 계층의 간접적인 체제로서, 이를 아주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우리의 주권'을 이들 엘리트 계층에게 위임하여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 책에 대해 놀라웠던 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루소의 전반적인 이해가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견고한 도덕철학자이기도 했던 애덤 스미스를 그저 자유 시장의 화신으로 강요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그릇된 인식과도 유사하다 볼 수 있습니다. 3장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공화주의와 그것을 옹호했던 장 자크 루소를 결부지어 분석해 본다면, 루소가 왜 현실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거의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이유를 작게 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시대의 공화주의를 너무나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는데요. 어느 정도는 14세기 르네상스 이전의 '군주의 권리' 혹은 다수를 통치하는 '지배 계층의 권리'까지 포함된, 공화주의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나아가 공화주의를 그저 다수의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정치적 맥락으로만 제한적으로 받아들여 전반적으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쉽게 동일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일전에 제가 몇 번 이나 읽은 '귀스타브 르 봉'에 대한 오역까지도 포함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공화주의는 전반적인 사회 계층 가운데 여성을 전부 배제하고 어느 정도 재산을 보유하고 사회적 계급을 보유한 남성들이 주도해서 체제를 견인하는 일종의 정치 인식이라 평가할 수도 있는데요. 물론 공화(共和)에 대한 이미지는 지금도 누구에게나 강력한 것이어서, 다음 4장에서 언급되는 자연법의 기초에도 이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저자에 의해 다시금 인정되는 루소의 '일반 의지'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 기본 관념으로 오독하는 것보다, 이 일반 의지가 '견고한 이성이 슬기롭게 통치할 수 있는' 기본 배경으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물론 공화주의의 이상이 철두철미하게 현실로 이식될 수는 없었지만 일제의 불법적인 조선 강점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요인들이 기본적으로 공화주의를 표명했던 점은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본격적으로 루소의 사상을 점검하고 있는 5장,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저자의 분석대로 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는 역설을 거듭 강조한 논저라고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계약론'의 위상은 이보다 시대를 초월하는 혁명적인 평가로 우선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5장 서두에 등장하는 "인간은 민주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그의 평가는 상당히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가 도출한 '인민 주권'과 이를 통한 정부의 '유토피아적 관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루소는 "공화주의적 인식에 바탕을 둔 혼합정체를 추구했다"고 보는 관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계약론 자체가 이해하기 너무나 난해한 논저임을 감안하더라도 여기에서 도출된 여러 사회학적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뒤에 이어지는 '보통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체'에 대한 기반이 되었던 점도 분명 사실 일 겁니다. 어느 정도는 엘리트 지배 계급이 연루된, '혼합 정체'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산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18세기 이후, 전세계 민주주의의 사상적 근간이 되기도 했던 계몽주의는 이 시기의 애덤 스미스조차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인정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과 같았습니다. 이는 9장 이후 등장하는 '인민의 습속'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혁명 이전의 프랑스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콩도르세처럼, 인민이 정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강구한 사상가는 당시에도 매우 보기 드문 케이스이기도 한 데요. 특히 인민의 처우 뿐만 아니라,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 그는 실로 상식적인 진보주의자고 불려도 거의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이어 콩도르세의 바통을 이어 받은 자들로 사뭇 이해되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민주파'들은 특히나 우리가 여전히 경원시하고 있는 '평등'에 집중합니다. 이전의 콩도르세가 마치 존 듀이처럼 인민의 교육에 집중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인민의 습속을 개선하고, 평등의 요구를 본격적으로 사회에 피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경제적 측면에서 이들 민주파들이 '중도적 평등'을 도출하게 됩니다.

이미 이 글에서 볼테르를 통해 비판적으로 분석되기도 합니다만, 재산을 가지지 못한 인민들의 사회적 처우 개선이라는 문제는 민주제를 위한 중요한 해결 과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의 심각한 추락과 결여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 프랑스 혁명이 미국의 독립 혁명과는 상이한 차이가 있지만 대다수 인민의 삶을 휘청이게 만드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에 빠트리는 것은 물론, 소수를 핍박할 수밖에 없는 다수 인민들의 횡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울인 그 노력들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매우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서 저자가 다소 비판적인 어조로 언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자유경제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자유 민주주주의'의 기만성을 짤막하게 나마 폭로하고 있는 배경에는 어떻게 보면 앞서 언급한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인민의 습속'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정당한 보상을 받고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굳이 닦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사람이 정직하기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확실한 논점을 거듭 인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1장에서 비판적으로 인용된 '자유 민주주의'는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오역 되어 왔는데요. 저자는 도식적으로 민주주의의 무늬를 띤 투표제 위에 수립된 자유주의 정부라는 실체를 드러내고 있지만, 저는 이 자유 민주주의가 부유층이 주도한 경제적 이득이라는 관념을 바탕으로, '개인의 이기심'을 더욱 확대하는데 오용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의 공화주의자들과 전통적인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은 지배 계급 뿐만 아니라 다수 인민의 덕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 덕성을 공익의 맥락과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다만 인민들 혹은 오늘날 시민들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선택에서 쉽게 속고 말고, 소위 막대한 부와 권력을 보유한 소수의 상위 계층과는 달리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즉, 이는 일반적인 자유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동일한 맥락이기도 한 데요. 저자의 언급대로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 만은 아니라, 자유를 가져야만 사람들이 독서, 토론, 선거를 통해서 진정으로 이성과 도덕에 부합하는 신적 법률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는 중요한 평가는 우리에게 자유는 무엇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만드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이는 사회가 시민의 삶을 개선시키고 스스로를 교육한 평범한 이들이 우리의 정치와 나아가서는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존속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과거에도 끊임없는 실패를 초래한 엘리트주의적 대의제를 개선시켜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 글 서두에 수차례 등장하는 '혼합 정체'는 지난 시대들을 거쳐, 거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과두제로도 읽히는데요. 더불어, 글 후반부에 자유와 평등을 대체하는 '자유와 정의'라는 인식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저자의 논증 과정이 기존의 논저들보다 창의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류가 이룩한 민주주의적 맥락에 대해, 제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 책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인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이론, 나아가 로크나 루소의 유명한 사회계약 이론들은 민주정을 최선의 정부형태로서 처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론들은 인민주권론이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아니라 민치정), 혼합정과 모두 결합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러나 훗날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로마제국이 모두 몰락한 뒤의 유럽 사상가들은 민주정에서는 법치도 이루어질 수 없고 국가도 존속할 수 없다고 믿게 된다.

자연적 사회성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점은 인간이 사회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사회를 이루고 살도록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자연적 사회성을 거부한 루소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극히 희박하게만 품었고, 집단으로서 인류의 미래가 절망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랬기 때문에 루소는 민주주의가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당시 유럽의 주요 국가들에 민주정을 수립하는 행위는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오늘날 학자들은 그 책에서 루소가 근대사회의 부패를 일소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핵심 내용은 그가 제시한 인민주권 이론에 있다고 해석한다.

루소는 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입법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인민은 누구인가?" 즉 자유국가를 수립하고 유지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인민이란 어떤 조건을 갖춘 인민인가?

오히려 그들이 주로 걱정했던 것은 엘리트 과두제가 쉽게 부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까지 투표권을 주면 그들이 모든 재산을 몰수, 재분배하는 볍률을 만들 것이라는 공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부터 19세기 유럽에까지 횡행했던 것이다.

고대 민주정의 역사와 근대 계몽사상이 18세기 말 혁명의 현실과 버무러져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핵심이 되는 초석이 놓인 것이다.

자유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가져야만 사람들이 독서, 사색, 토론, 선거를 통해서 진정으로 이성과 도덕에 부합하느 신적 볍률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12-19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입니다.

베터라이프 2023-12-20 00:03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3-12-20 00: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하셔요~~

베터라이프 2023-12-20 00:42   좋아요 1 | URL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호시우행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

미미 2023-12-20 0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님 오랜만에 별 4개나 주셨군요. 제가 작년에 읽으려고 사두었던 얀 베르너 뮐러의 <민주주의 공부>가 떠올랐어요. 검색해보니 베터님은 벌써 읽으셨네요! 이 책은 조금 어려워보이니 저는 그 책을 읽어보겠습니다. 24년에요ㅎㅎ
연말 감기조심하시고 평화롭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베터라이프 2023-12-20 00:4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근래 서평을 쓴 것 중에 이 책이 저의 별 4개를 받았습니다 ^^;; 지금도 이 책의 여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후반부가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손에 잡아 보세요 ^^ 아.. 언급하신 민주주의 공부도 자주 생각나는 논저입니다. 역자분이 훌륭하게 번역하셔서 그 부분도 기억이 납니다. 미미님도 연말 잘 마무리 하시고 독감 항상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래도 미미님 서재에 종종 들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

추풍오장원 2023-12-20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라는 말만큼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걸면 코걸이 식으로 사용되는 말도 드문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텅빈 깡통처럼 들리기도 합니다(어쩌면 그게 민주주의의 본질아닌 본질일 수도 있겠습니다). 민주주의를 현실에 없는 이상향처럼 만들어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모조리 반민주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하구요. 민주주의는 통치체제의 문제이고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인지하는것도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가치를 내포한 개념으로 민주주의를 포장하고, 모든 조직이나 집단에 민주주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은 아주 위험하지요....

베터라이프 2023-12-20 14:4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오장원님 ^^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정치가 과두제와 유사한 형태로 변질되는 건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이 대의제 민주주의가 현재로선 최선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부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능력과 지위, 사회적 자원 그리고 더 노골적으로 돈의 차이에 따라, 민주주의가 제한적으로 유지되고 있닥고 생각하는데요. 어쩌면 이 부분은 대의제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로 읽힐 수도 있을 겁니다. 오장원님이 쓰신 내용중에 ‘권력의 문제‘가 사실 현실 정치의 명확한 한계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다만 저는 현재의 시대가 민주주의 과잉의 시대라는 논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러 세대에 걸쳐 변질되었고 거기에는 신자유주의가 이바지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자원과 권력이 상대적으로 결핍된 시민들에게는 실질적으로 민주 정치 만을 바라볼 수 받게 없는 이 사회 구조 자체도 어떻게 보면 큰 문제라고 판단됩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민주주의 자체를 포함한 정치 전반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구조적으로 부서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 사실 다수의 정치가 실질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많은 분들이 더욱 좌절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쓰신 내용에 공감합니다..

추풍오장원 2023-12-21 08:18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민주주의가 구성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부산물들이 진보적 레토릭의 가면을 쓰고 충실히 신자유주의에 봉사하는 시대가 온 것 같아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무서운 점이지요.

베터라이프 2023-12-21 18:12   좋아요 1 | URL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위해 민주주의가 이를 사회 체제로서 보태는 조력자의 입장이 되었죠. 일전에 후쿠야마가 언급한 대로 자유를 외치는 보수주의자들의 염원이 바로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시민들에 대한 사회 보장을 정비하는 것이었죠. 그것의 결과로 미국의 사회 복지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일관되게 주장했듯이, 시민들의 삶이 더 이상 자본주의 하에서 건전하게 영위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알다시피 과두제 밖에 있지 않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극우 포퓰리즘이 적나라하게 분탕질을 치고 나서 과두제가 오던가요...
 
풍요의 시대, 무엇이 가난인가 - 숫자가 말해 주지 않는 가난의 정의
루스 리스터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 노동당의 정치인이면서, 사회 보장과 여성 시민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인 루스 리스터는 동시에 러프버러 대학의 사회정책학 명예 교수입니다. 그녀는 에섹스 대학에서 사회학 학사를 마치고, 서섹스 대학에서 다인종 연구에 관한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또한 1992년부터 94년까지 영국 사회 정의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영국 국가 평등 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시민권과 빈곤, 독점적 지위 사회 등에 관한 논저 등을 발표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는데요. 특히나 현재 그녀는 사회 정책과 관련된 이론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지난 2021년에 원제, "Povert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2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리스터의 기념비적인 저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글은, 빈곤 poverty 이 주로 제3세계와 남반구에 국한된 문제로 오랫동안 치부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단순한 개념화를 넘는 중요한 의미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조금 이른 결론 일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논저를 통해, 저자인 그녀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빈곤에 처한 일반 시민' 혹은 일부 국가에서 '하층민'으로 취급되는 심각한 저소득에 처한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에 있어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1장에서도 드러나듯, 빈곤을 어떻게 하면 객관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겠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과 함께, 서두에서 "물질적 자원인가 아니면 역량인가"라는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비교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빈곤에 대한 실질적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는 부분도 이 글의 미덕으로 읽히는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빈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C. 누스바움의 역량 접근법을 통한, 행복과 삶의 질 개념이 거의 무력화 된다는 점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아마르티아 센은 거의 원초적인 측면에서, 시민들의 삶을 좌지우지 하는 기본적인 생계의 측면에서, 이런 기본적인 자원들에 집중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역량'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전세계 빈곤 국가들의 근본적인 실패를 규정하는 소위 사회 경제학적 지표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1장의 면밀한 논증 가운데서, 빈곤의 관점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졌는데요. 이처럼 불평등의 근본적인 결과물은 빈곤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상대적인 차이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이는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의 만연 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요. 뒤이어 나오겠지만 각 사회의 부유층들이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구축하고 빈곤 계층과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조건이 열악한 다른 시민들과 구조적 평행선을 유지하며, 이들 다수가 이러한 사회 현실에서 유리 되어 있다는 2장과 3장의 분석은 그야말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글에서는 다소 설명이 부족하지만, 충분히 사회적 자원을 누리고 있는 소위 특별한 계층은 이처럼 '빈곤의 문제'가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전제하고, 삶을 통제하지 못하는 다수의 시민들을 경멸의 눈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인데요. 이 부분은 명백히 찰스 테일러와 리처드 세넷과 같은 학자들이 일찍이 분석한 바대로, 신자유주의와 첨예한 개인주의, 그리고 노골적인 금융 자본주의가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굳이 이러한 파국을 '세계화의 암울한 측면'으로 그 의미를 반쯤 축소시키고 싶지는 않은데요. 그렇지만 지난 30년 이상의 세계화가 남반구를 비롯, 소위 잘사는 북반구에도 그러한 '사회적 분절'을 초래했다는 점은 거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특히 이 빈곤의 거침없는 낙인은 인종적으로 동일한 백인들에게서도 경제적 차이에 따라, 혹은 일부 시민들을 처참하게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규정 짓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백인 쓰레기'와 같은 모멸적 관용어구는 아무리 인종적 기득권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빈곤의 상황에서는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흡사 그런 폭력적 현실이 저의 이목을 끌었는데요. 4장에서 '20세기 후반과 21세기의 꼬리표 붙이기'로 설명되는 일련의 논증들이 빈곤이라는 낙인 자체가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작용하는지 이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회에서 빈곤이라는 낙인 자체가 시민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데 이르렀고, 단순히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인정 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능력과 쓸모 없음이라는 그야말로 배제의 결과를 초래하는 이런 사회적 낙인들이 본질적으로 시민이 보장 받아야 할 삶의 영위와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인간적인 권리 조차도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현실을 더욱 고착화 하기에 이릅니다. 더욱이 미국의 푸드 스탬프와 같은 제도들이 사활적인 조건에서 '복지 수급'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반대의 경우, 다수의 빈곤 계층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모멸감을 안기기도 했는데요. 이를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탁상 행정과 치밀하지 않은 공무원들이 사회에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상당수 빈곤 계층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각각의 시민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차이와 상대적인 자원의 접근도를 따져가며 어떤 한 개인을 사회 경제적으로 판단해 보려는 행위 자체는 '경제적 인간'의 화려한 탄생 뒤에 가려진 음울한 현실을 다시금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가 리스터의 이 논저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던 부분은, 현재의 시점에서 빈곤의 상황과 하층민이라는 평가를 받고 받고 있는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 속한 사회에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인정 받고 싶어하는 근본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그래서 4장 이후, 드러나는 '행위 주체성'의 기본적 인식은 이처럼 보다 면밀히 탐구해 볼 이유가 된다고 판단되는데요. 물론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시민들이 죄다 노동에 처해졌다."는 자본주의적 일상을 자조한 바와 같이, 노동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경제적으로 고통스러워지는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기 위한, 정치적 차원의 행위 주체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빈곤의 문제는 그저 개인적 차원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아우르는 삶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으로, 무엇보다 이를 공론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 역시, 빈곤에 처한 사람들의 정치적 요구가 결코 폄훼 되어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5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저자는 견뎌내기와 조직화를 통해, 사회에 정당한 요구를 주장할 수 있도록 빈곤층과 사회적 하층민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당위를 인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끝으로, 빈곤을 통한 타자화와 일부 계층에 대한 분리는 헌법에서 보장된 우리의 인권과 기본권을 위해서라도 지양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위 '불가결한 인권'이라는 구호로 결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후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우리가 이들의 활동에 대해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은 '시민권의 보장'과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이행 가운데 경제적으로 분절된 사회에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점은 빈곤을 받아들이는 방법과 태도에 있어 어느 정도 잘못된 접근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 데요. 이는 사회 보장과 복지에 대한 담론을 무참히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자유를 맹신하도록 시민들을 부추긴 경제학자들을 비롯, 다수 지식인들이 펼친 왜곡된 주장이 한 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시민 연대의 문제를 우리가 다시 고심해야 봐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스스로 수치심에 빠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시민들을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사회로 이끌 수 있는지를 무엇보다 고심해 봐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노엄 촘스키의 비판적 인식대로 모든 시민이 이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쉽게 빈곤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금언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민 개개인은 스스로 존엄성을 갖는 인간으로서 사회에 기여하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보편적 가치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점에서 빈곤층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물질적 및 비물질적 츠면에서 다중적인 불이익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것으로 빈곤 상태를 이해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재분배와 인정 recognition을 빈곤과 결합시켜 분배적 평등과 관계적 평등을 통합하는 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적극적인 자유를 보장받는 차원에서 사회참여의 전제 조건이라고 볼 만한‘,‘자기 몫의 최저 소득을 배부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상대적 빈곤과 불평등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할 뿐 아니라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면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일 수 있다.

이것이 명백한 빈곤 정의에 담긴 도덕적 힘을 약화시켜 정치인들이 그 중요성을 묵살하기 쉽게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한 이들이 있었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최상층은 빈곤의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거나 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구조적 변화와 보호 목적의 재분배 정책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공감할 가능성이 낮아질 수 있다.

요컨대 열악한 물리적, 사회적 환경은 개인에게 빈곤이 미치는 영향을 증폭하고, "저소득 생황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미 주장했듯이 빈곤은 물리적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하나의 개념으로서나 생생하게 존재하는 현실로서나, 빈곤은 사회적 관계로 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을 모질게 대하는 것은, 상대를 자기와 아주 근본적으로 다르게 바라볼 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자 2023-12-01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12-01 23:0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봐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ㅡㅜ

호시우행 2023-12-02 0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가 느껴집니다.

베터라이프 2023-12-02 10:48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에 너무 후한 평가시네요 ㅜㅜ 하여튼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디스 워튼은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축복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가 4살이 되던 해에 가족을 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이미 어린 소녀 때부터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 재능을 바탕으로 그녀는 1921년에 장편인 '순수의 시대'로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가 됩니다. 워튼은 40세가 될 때까지 첫 소설을 출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봤을 때, 꽤 생산적인 이력을 쌓게 되는데요. 총 15편의 장편, 7편의 중편, 85편의 단편을 제외하고도 여행, 문학 및 문화 비평, 회고록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녀의 대표적 중편 소설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 작품은 1916년에 최초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9월, 초역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워튼의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완독 후에 들었던 감상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우선은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인 앤 엘리자의 심리 변화, 내면의 갈등 그리고 스토리상 중요한 변곡에서의 치밀한 감정 묘사가 너무나 인상 깊었는데요. 더욱이 안온하고 평범한 일상에 어떤 전환과 변화를 바라는 사람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배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행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마치 평범한 일상 자체가 누구에게나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는 일종의 분석은 '인간의 삶'이라는 본질에 대해 새삼 겸허히 숙고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앤 엘리자와 에블리나, 즉 이 버너 자매는 당시 뉴욕에서 터를 잡고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 갑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는 앤은 자신의 동생 만큼은 결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데요, 다만 이 두 자매 모두,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없는"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언니인 앤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갖고 있었는데요. 그러다 우연찮게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독일 이민자 출신의 '시계공' 허먼 래미였습니다. 독일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래미는 그녀들에 의하면 당시에 보기 힘든 소위 '교육을 받은'사람이기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그녀들의 입장에서 교육의 문턱을 넘은 이성의 존재란 그만큼 특별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당시 미국은 초기 자본주의 사회와 유럽의 계급적 문화가 뒤섞인 상태로 독일 태생의 래미는 그 존재 자체로 그녀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여기에 래미는 신체가 다소 병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좀 시원찮아 보이고 더욱이 잔병을 달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기도 한데요. (물론 이 부분은 후에 충격적인 반전으로 드러납니다.) 이 자매에게는 이렇게 홀로 지내는 가여운 남자의 모습이 어떤 모성애를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극에서 신중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고 자신의 어투에 신경을 쓰는 앤 엘리자와 약간 직선적이기도 하지만 소탈하고 마음 씀씀이가 있는 에블리나는 남자 주인공인 래미와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캐릭터인데요. 그의 어색한 독일식 억양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는 그것조차 색다른 인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인물 설정이 어떻게 보면 후반부에 작가가 의도한 파국의 전조로도 읽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적 호감을 받는 이성에게 보다 냉정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 부분도 어떻게 보면 남녀 관계의 여러 본질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예전에 먼 발치에서 어느 연애 칼럼니스트가 남자친구에게 좀 더 수월하게 결혼 고백을 받을 수 있는 소위 치밀한 방법들을 적은 문장들이 떠오르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여성에게 고백과 결혼은 감성적인 측면에서 새삼 자신의 존재를 내면에 각인시키는 일종의 열망으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아는 남성에게 한번도 변변한 고백을 받아보지 못한 여성은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괴감이라든지 혹은 절절하게 느끼는 초라함이 의외로 문학적인 방식으로 쓰여지기도 하는데요. 물론 앤 엘리자가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고백이 제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인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뜻밖의 생경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도 이렇게 고백을 받을 수 있는 여자다'는 감정적 충만감보다는 먼저 동생인 에블리나의 관계를 좀 더 이성적으로 고려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대목에서 더욱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 같은데요. 또한 후반부에 드러나는 래미의 실체를 고려해 봤을 때, 앤이 그렇게 아끼는 자신의 동생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만들었기에 두 사람에게 가해지는 그 같은 불행이 어쩌면 보다 비극적인 차원으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됩니다. 

워튼의 이 작품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게 돈과 지위가 없는 계층의 사람들의 삶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의 고언을 다시금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저 평범한 삶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그런 판에 박힌 교훈을 독자들에게 주려고 워튼은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겉으로 나마 관계로 인식되는 어떤 한 인간의 본질은 그만큼 불확실성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철학적인 관념과 함께 동시에 그로 인한 예기치 않은 가족의 붕괴는 그것의 구성원 모두를 직접적인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현실 자체가 얼마나 냉혹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 현인들이 "네가 너의 인생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삼으라"고 조언했던 건 바로 그런 연유일 겁니다. 제가 워튼의 이 중편을 읽으면서 비통했던 점은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 인간의 사소한 결정으로 비롯될 수 있다는 경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사를 부여된 이성으로 매번 가늠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워튼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워튼의 이 소설은 꽤나 오랫동안 제 기억에 자리를 잡을 것만 같습니다.



래미 씨는 세상에 자기 혼자 뿐이라고 했고, 그녀가 아는 한 외로운 남자들은 먼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여태껏 수정처럼 맑은 그녀의 영혼 안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계획은 한번도 구체화된 적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웃자 줄지은 누런 잇새로 한두 개 빈틈이 보였다. 하짐만 앤 엘리자는 그런 빈틈을 보고도 그의 미소가 무척이나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에블리나의 사랑을 위해 심부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기에 혈관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방울의 젊음마저 메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껏 스스로 만들어 온 삶이 영원히 그녀에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좀 더 심오한 내적 의미에서 보면 동생과의 유대감은 이미 사라졌고, 겉으로 보이는 친밀함, 목소리와 눈빛으로 주고받던 외적 교감도 곧 사라져 버릴 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부가 없다 - 이태원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
정혜승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국민소통수석비사관실 디지털소통센터장을 지낸 정혜승 작가는 연세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 후 1994년부터 2008년까지 문화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이후 포털 다음에서 인터넷 정책과 대외협력 등을 담당하기도 했는데요. 카카오에서는 홍보 등으로 경험을 넓히며 부사장을 역임합니다. 2019년에 청와대를 떠난 뒤에 메디치포럼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후에 뉴미디이어스타트업 얼룩소를 창업해 15개월을 일했습니다. 추측하건대 저자는 뉴미디어 시대에서 앞으로 새로운 소통과 홍보가 나아갈 길을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듯했습니다. 또한 정 작가는 팟캐스트와 독서 모임을 운영하면서 여러 시민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2023년 10월, 국내 출간되었습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이라는 비극적 사건 이후, 국가는 국민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를 새삼 인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재난 사태를 컨트롤 하기 위한 조직 구축에 무엇보다 힘썼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인데요. 이어지는 정권 교체 이후, 새롭게 들어선 윤석열 정부에서 모두가 예상치 못한 비극적 사고가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 이태원 참사는 소위 정치 초짜, 즉 검찰이라는 중요한 조직의 고위 공무원 출신이었던 대통령의 정치력이 무엇보다 요구된 상황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대통령이 그 기대를 저버린 과정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 불행한 정치적 과정과 관련해, 저자가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내용도 여럿 있었는데요. 대통령 경호와 관련된 문제들을 기존에 종로 경찰서가 관행처럼 해왔던 업무들을 미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용산 경찰서가 도맡게 된 문제라든지, 위기관리센터 재난재해 실무진들이 이전 정부와 일했던 이유로 싹 교체된 일들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살 날이 많은 젊은 목숨들이 희생 당한 이태원 참사는 무엇보다 피해자 가족들에게 소위, '피해자 다움'을 강요한 정치권과 언론이 있었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더 이상 자신들과 같은 불행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 발생하지 않도록 연대하여, 정부와 정치권의 마땅한 역할을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정혜승 작가는 일부 언론이 주도하여 비판한 '피해자 가족들의 정치화 낙인'에 대해 유독 꼬집어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지난 영국의 힐스버러 참사도 당시 시민들에 의해 어느 정도 연대와 조직화 되었고, 정부에 마땅한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런 노력 끝에, 영국 EPL의 리버풀 구단 뿐만 아니라 리그에 참여하는 모든 구단들과 많은 축구팬들이 피해자들의 명복을 위해 지금까지도 노력하는 것인데요. 그렇지만 이와는 상반되게 우리의 이태원 참사에서 정부와 서울시가 피해자 가족들이 서로 모이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 정황들이 드러나는 등의 정치적 의도가 밝혀졌습니다. 더욱이 대통령이 장관에게 책임을 묻기는 커녕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비호하고 거듭 신임을 유지한 것은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사례로 볼 수 있겠는데요. 말로만 책임 정치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민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작금의 대통령 부인이 보기보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저는 지난날 후보 시절 윤대통령의 '전두환 미화 발언'을 잠재운 '개 사과'의 숨겨진 정치적 맥락을 2장 후반부에서 새로이 알게 되었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된 진술이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대통령 여사에 의한 사실상 정치 개입에 대해, 어느 정도 그 신빙성을 뒷받침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역사상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정부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지지율이 40%만 올라가도 좋아한다는 용산의 분위기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이 책에 실명이 나와있는 여러 극우 유튜버들의 유튜브를 본다는 대통령의 개인적 일화도 참으로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앞선 부분은 지난 2021년에 도널드 트럼프 자신이 주관한 집회에 참석한 지지자들을 충동질하여, 국회 의사당을 무법 천지로 만든 사건을 지켜 보며, "저것이 세계 민주주의의 큰 형이라 불리는 미국 정치의 참모습"과 이상하게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저 참담한 사건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가 전세계에 걸쳐, 심각하게 병들어 있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끝으로 윤 정권의 출범으로 비롯된 소위 '검찰 정치화'는 이곳에서 거의 다루지 못했는데요. 검찰 출신 뿐만 아니라 법조인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정치적 문제들을 저자의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모든 검사들과 판사들 가운데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더 많은 다수라고 믿어 왔습니다만 그럼에도 한국에서 검찰 개혁을 비롯, 사법 개혁이 왜 시급한지 다시금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이 나서서 새롭게 이룩한 민주주의가 이토록 평범한 국민들과 더 멀어지고 있는 현실은 단순히 현실 정치의 무용론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할 텐데요. 그리고 가족을 불행한 사고로 잃은 피해자들에게 정치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점이 바로 이 책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용산에 있는 어떤 부부는 확실히 이 책을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본문 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글을 읽는 가운데 문득 머릿속에 카를 슈미트가 떠올랐는데요. 내 편과 그렇지 않은 적대적인 다른 편이라는 이분법은 그야말로 정치를 붕괴 시키는 것 만으로는 끝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연유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세대는 실로 불행한 역사의 순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글 초반에 지난 정부의 총리였던 김부겸 총리의 인상적인 일화가 언급되고 있는데요. 그가 장관 시절, 어떤 상황이길래 장관까지 호출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일단 출동했다는 과거 행적이었는데요. 이는 고위직으로서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의 기본적으로 갖춰야 될 태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울시가 참사 유족 사이에 연락처를 공유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은 한 달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당시 박근혜 정부와 보수 여당은 유가족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며 사회적 애도조차 방해했다.

국정조사를 둘러싼 공방만 전하던 언론은 정작 실제적 진실에 무심한 쪽에 가까웠다. 책임 있는 기관의 상급자들은 불성실한 자료 제출, 책임 회피성 발언으로 공분만 남겼다.

이들 극우 유튜버들의 영상을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종종 본다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온다.

‘놀러갔다가 죽었다‘는 식으로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여전히,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인근 다른 경찰서, 구청, 소방서에 발령 받아 일하는 이들이 참사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수가 좋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이념적이라고 배제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념을 가졌다는 딱지를 붙여 전문성을 폄훼하는 것이야말로 이념적이고 정치적 행위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주권 선언에 이어 국민의 기본권을 국가가 지키겠노라 천명한 헌법, 멋지지 않은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에 더욱 압력을‘가하라고 주장한 아베 정권은 한반도 유사 사태 (전쟁)이 발생하기를 기대했고, 그렇게 할 이유가 있다"는 내용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자 2023-11-07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베터라이프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별이 3개인 점은 평가가 평소에 까다로우신 이유일까요 아니면 ‘검찰정치화‘부분을 거의 다루지 않은 이유에서일까요?

베터라이프 2023-11-07 19:43   좋아요 3 | URL
안녕하세요 달자님. 약간 논외지만, 기본적으로 정혜승 작가가 이 책을 출간하는 데, 본인 스스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4장부터 6장까지는 이 이태원 사태의 원인과 관련된 직접적인 분석과 밀접하지 않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데요. 이건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그리고 저는 보통 읽어볼 만한 책들에 대부분 3점을 매기고 있습니다.

미미 2023-11-08 1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박근혜 때보다 더하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PD수첩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극우 유튜버들과 이번 정부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발한 방송이 있었습니다.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라는 표현이 일종의 손쉬운 낙인찍기가 되고 언론이 거기 부응해서 중요 이슈들이 본래의 명분과 힘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극우에 유리한 지형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잘 읽었습니다.^^

저는 베터님 별3개를 저의 별4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ㅎㅎㅎ

베터라이프 2023-11-08 12:0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미미님 ^^
사실 대통령이 극우 유튜버들 영상을 자주 본다는 내용은 저도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검찰 수장 출신의 소위 엘리트 대통령이 설마 그 정도의 정치적 변별력이 없을까 싶었는데요. 이게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걸 보면 그냥 낭설은 아닌 모양이에요.

부끄럽지만 이쯤에서 자기 고백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성향 상 서평을 이런 식으로 쓰면 안되었는데 저도 모르게 ‘자기 검열‘이 작동했습니다. 그냥 무난하고 평이한 글이 되었는데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제 개인적인 억측일 수도 있겠는데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다른 서점 사이트의 서평들을 검색해 봤는데,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yes**를 제외하면 교*, 영*에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없더군요.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제 개인적 해석 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을 겁니다. 더불어 이 글의 저자를 통해, 과거 이태원 참사에 대해 국민 대부분이 안타까움을 갖고 있지만 나서서 유족들과 연대하는 것은 내심 꺼리고 있다는 분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개개인들이 갖고 있는 이유야 어떻든 간에 말이죠.

미미님이 쓰신 글대로 정혜승 작가의 이 책에서도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정치적 낙인 찍기, 진짜 눈뜨고 못 볼 정도입니다. 저는 이 유족들을 언론이 정치적으로 견제해야 할 만큼 이분들이 무슨 정치적 세력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이 점도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별점은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 별 3개 정도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께 적극 추천을 드리고 싶은 책들은 그 이상의 평점을 매기기도 합니다. 위에 달자님께 이러한 취지의 설명이 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하여튼 이렇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
 
군중심리 - 사회심리학의 고전!1895년 초판본 완역! 탑픽 고전 3
귀스타브 르 봉 지음, 김수영 옮김 / 탑픽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 북부 로장르로트루에서 태어난 귀스타브 르 봉은 동시대 인물들 가운데, 가히 선도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브르타뉴 인의 혈통을 갖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정부의 지방 공무원이기도 했습니다. 르 봉은 후에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의학, 생물학, 물리학 등 다방면의 지식을 쌓았던 인물인데요. 그는 1866년 파리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정식으로 의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글쓰기에 전념합니다. 졸업 후에 르 봉은 파리에 남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각 언어로 읽었고 그런 연유로 영어와 독어를 독학합니다. 1870년 보불 전쟁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입대하기 전에 생리학 연구에 관한 여러 논문과 유성생식에 대한 서적을 저술하게 되는데요. 전쟁이 끝난 후, 1871년에 파리 코뮌을 생생히 목격한 르 봉은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사고관과 더불어,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가 평생을 견지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바로 위의 사건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1870년부터 당시 프랑스 학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던 인류학에 르 봉은 열정을 보이게 되는데요. 심지어 188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아시아를 여행하고 그곳의 문명에 대해 보고하라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이후 1890년에는 인류학에 다소 거리를 두고, X선 연구와 같은 물리학 현상에 관심을 돌리게 되는데요. 한참 뒤인, 1922년에 르 봉은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질량-에너지 등가성에 관한 서신을 주고 받게 됩니다. 이런 자신의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하기에 이르는데요. 그는 1908년부터 심리학에 관심을 두고, 1920년경까지 파리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일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다방면의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은 르 봉은 1931년 프랑스 서부 지역의 교외인 마른라코케트에서 90세의 일기로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sychologie des Foules"로 1895년에 출간되었고, 이 국내번역본은 2023년 11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군중심리에 대한 사회학 논문을 쓸 것도 아니면서도 또 이렇게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데요. 제 기억이 맞다면 르 봉의 이 논저에 대한 서평은 벌써 3번째가 되겠습니다. 다시 르 봉의 이 군중심리를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마치 르 봉과 허버트 스펜서가 너무나 닮아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글의 1장에서 스펜서는 따로 인용되기도 하는데요. 또한 프랑스 철학자인 이폴리트 텐 역시 저자인 르 봉에 의해 몇 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큰 틀에서 르 봉은 자신의 이 글을 통해, 그의 시대에 대두하고 있는 군중들이 끝내 문명을 붕괴시킬 수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먼저 펜을 들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글의 2장에서 "여성과 원시인, 어린이 등"을 열등한 진화 형태로 규정하는 부분에서는 역시나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1장의 도입을 지나 본젹적인 '군중의 주요 성격'을 논증하는 2장 초반의 저런 논의는 지금의 가치관으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르 봉 역시 과거 프랑스 혁명에 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는데요. 본문에서 로비에스피에르가 언급되는 부분도 그렇거니와 1871년 파리 코뮌 시기 파리의 혼란도 그에게 있어 '군중'은 개념적 분석이 먼저 필요한 사회학적 파급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특히나 군중을 논증하는 중후반부까지의 내용 대부분은 제가 보기에 최근 극우 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되었던 '분노에 가득 찬 그 군중들"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르 봉 특유의 편협하고 굴절된 의식은 2부 1장, '군중과 교육'에 대한 부분에서 더욱 도드라집니다. 이 부분을 대충 요약해 보자면 군중에게 교육은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한 목적이면 되는 것이고, 교육 자체가 군중에게 어떤 '도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선 지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비틀린 논리적 전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존 듀이와는 완전히 상반된 입장이기도 한 데요. 르 봉은 스스로 보기에 꽤 성공적으로 보이는 영국과 미국의 소위 직업적인 교육을 프랑스의 상황과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내세울 것 없는 프랑스를 여실히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에 "기계의 일개 톱니 바퀴가 아니라 기계의 모터가 되는 것"이라는 아주 직접적인 진술은 저런 직업 교육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간 본연에 본성에 부합하는 교육에 이를 수 있을지 회의적인 판단이 듭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의 전문적 직업 교육만이 군중에게 유용하다는 르 봉의 핵심적 분석은 유대인과 라틴 인종들에 대해 갖는 그의 다소 차별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불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를 탐독한 후대의 히틀러와 같은 파시스트에게 어떠한 영감을 주었을 지는 대충 추측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군중들은 피암시성과 맹신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폭력에 이른다는 결론에서, 르 봉이 보기에 그들이 앞서 말한 '문명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폴리트 텐과 더불어 수차례 등장하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군중을 특유의 카리스마로 휘어 잡고 끝내 프랑스를 손에 넣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황제는 더욱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몰락했다가 엘바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해 파리로 돌아왔고, 다 쓰러져가던 프랑스 군을 단신으로 결집하기에 이릅니다. 르 봉의 언급대로, 당시 나폴레옹은 좌중을 압도하는 위엄과 아우라로 사람들을 휘어 잡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누구보다 죽음을 넘나드는 수많은 전투를 겪은 인물에게 그 정도의 위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나폴레옹이 독단과 편협함에 빠진 수많은 군중들을 끝내 제어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공화국을 무너뜨린 과정은 르 봉의 서사대로 본다면 거의 운명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글의 전반부에서 이성이 결여된 군중이 주축이 된 민족이 정치적 무대에 들어서면서 유독 독재적 성향에 있는 지도자들이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진술 되는데요. 프랑스 혁명 당시 이성을 잃은 군중들을 끊임없는 암시로 폭력에 이르게 한 소위 '위엄 있는 지도자'의 존재는 앞선 일반적인 군중과 가히 독재적 상황과 맞물려, 그 부정적 파급을 실로 짐작케 합니다. 여기에서 르 봉은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군중은 이성을 상실한 무리들로 오로지 감정적 감염을 통해 확산되고, 그러한 비정상적인 감정 고양 상태가 군중을 묘사하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성을 상실한 이 군중들이 자기들만의 왜곡된 신념을 갖게 된다면 그만큼 사회에 끼치는 위험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되는데요. 이에 "민족은 언제나 일반적 신념을 얻어야 유리하다"는 그의 평가를 인정한다면 이성의 범주 밖에 있는 신념이 초래하는 파국이란 어느 정도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어느 정도 무신론자로 이해되기도 하는 르 봉은 기독교가 지난 천 년 간, 무지한 하층민들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고 언급하고, 이러한 '종교의 시대'에서도 군중의 그와 같은 굴절된 확신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했다고 평가합니다. "종교적 확신은 반드시 편협함과 맹신이 따른다"는 앞선 1부 4장의 분석은 지금의 시대에도 어느 정도 이해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이 종교적 확신이 군중의 타협할 수 없는 신념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르 봉은 무엇보다 인간에게 있어 이성의 존재와 지식의 긍정적인 영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개인의 신념이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는 형태로 존재할 때, 그것의 위험성은 거의 부정할 수조차 없을 겁니다. 더욱이 신념 자체는 "그 신념이 철학적 부조리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신념이 승리하는 데 걸림돌이 된 적이 없다"고 르 봉은 냉정히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또한 뒤이어 나오는 진술인 프랑스 내의 정치 제도가 군중의 완곡한 다른 이름이라 볼 수 있는 민족의 정신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분석을 마찬가지로 동의하고 있다면 군중과 그것을 둘러싼 지도자들의 그 영향력까지 포함한, 군중이 사회에 끼치는 파급이 그만큼 가벼워 보이지 않은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르 봉이 "제도가 사회의 결함을 개선할 수 있고, 헌법과 정부가 완전해지면 민족도 진보하며, 법령으로 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는 발상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고 먼저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이것에 대한 불합리성을 그동안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이 애썼지만 헛수고였는데, 왜냐하면 이런 굳건한 믿음이 나중에는 제도의 개변도 이뤄내지만 사실상 이런 장시간의 과정이 민족(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는 회의로 마무리 됩니다. 결국 앞서 상세히 열거한 개인과 다른 군중의 비이성적인 속성이 민족을 도출하고 사회와 제도를 변혁시키기에 이르지만 (물론 때에 따라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만큼 논증으로 도출된 '민족성'이라는 개념은 르 봉의 말마따나 꽤나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앞으로 사회를 좌지우지하게 될 사실상 군중의 대두는 르 봉에 있어 복잡한 문제였을 겁니다. 이 글을 통해 그가 민주주의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없는 진술도 몇 가지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와 사회가 함께 만들어 온 전통의 관점에서 군중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과 그것의 기반이 된 충동과 터무니 없는 확신 그리고 막무가내의 자기 암시 등은 그야말로 위험한 문제일 겁니다. 결국 2부 3장에서 르 봉이 피력하는 대로 "결국 세상을 이끄는 것이 인간의 지성"이라면 군중의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회피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이미 그가 인정하는 바대로 "붕괴의 시간을 일각이라도 늦출 수 있는 건 출렁이는 여론과 일반적 신념에 군중이 보이는 무관심일 것이다"라는 귀결 역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자신은 결코 군중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본주의가 조장한 엘리트 지배 체제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라 확신하고 즉시 군중과 자신을 분리하려는 사람도 존재할 겁니다. 그 무엇보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얼마나 스스로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을지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의 회의적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 면에서 르 봉의 공격적 발언들은 어느 정도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군중에 이르는 과정을 터무니 없는 허언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동시에 선동하는 정치인이 정치적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다수의 시민들을 분노와 폭력으로 내모는 현실과 별 반 크게 다르지 않겠는데요. 이미 시민을 한낱 군중으로 취급하는 냉혹한 자본주의적 굴절과 시민을 그저 '노동에 처하게 만드는 현실'은 신자유주의 식으로 그것을 온전히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르 봉의 반쯤 불쾌한 이 논저를 더욱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 96페이지에 인용된 부분의 따옴표가 편집상의 오류 때문인지 오직 하나만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1895년 초판 번역에 출판사의 이러한 편집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을 수 없게도 르 봉은 민주주의와 공화제(공화주의)를 서로 대립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의 지적 능력, 그러니까 그들의 개성은 집단정신 안에서 사라진다. 이질성은 동질성에 자리를 내어주고 무의식과 얽힌 특성이 주도권을 잡는다.

뛰어난 사람들도 모두가 지닌 열등한 자질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군중 안에 축적되는 것은 지성이 아닌 우둔함이다.

동요하는 군중 속에 한동안 빠져 있던 개인은 군중이 내뿜는 악취처럼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현혹 상태에 놓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상생활의 급선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조절장치 역할을 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결코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암시는 언제나 한 개인이 다소 모호하고 어렴풋한 기억으로 착각을 만들어내고 이 착각이 증언을 통해 전염되면서 시작된다.

나폴레옹이 모든 자유를 억압하고 춸권통치를 시작했을 때 가장 열렬히 환호한 사람들은 바로 자코뱅파 가운데서도 가장 오만하고 다루기 힘든 자들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잔인하고 무질서하며 가혹한 측면에 경악한 텐은 이 위대한 시기의 영웅들이 그저 본능에 빠져 미쳐 날뛰는 광폭한 야만인 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제도가 사회의 결함을 개선할 수 있고, 헌법과 정부가 완전해지면 민족도 진보하며, 법령으로 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는 발상은 지금도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이런 생각은 프랑스 대혁명의 출발점이었고 여러 사회이론의 근거가 되었다.

허버트 스펜서를 포함해 저명한 철학자들은 교육을 받는다고 인간이 행복해지거나 도덕 수준이 높아지지 않으며, 교육이 인간의 본성과 대대로 물려받은 열망을 바꾸지 못할뿐더러 잘못된 방향으로 게획되면 유용하기보다 도리러 독이 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증명해 보였다.

또한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사람들 무리가 어떻게 해서 이상주의자와 수사학자들의 암시에 언제라도 복종할 수 있는 불평분자 세력으로 서서히 변모해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따라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거나 신념이 바뀌어서 군중이 어떤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이미지에 극심한 반감을 느낄 때, 진정한 정치인이라면 가장 먼저 그 단어부터 다른 단어로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도 군중의 의견이나 신념은 이성적 추론이 아닌 전염을 통해 확산한다. 노동자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도 선술집에서 확언과 반복, 전영을 통해 굳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군중의 힘이 세졌기 때문에, 하나의 의견이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위엄을 획득한다고 해도 곧 전제적 폭군이 되어 모두를 무릎 꿇게 하는 통에 자유로운 토론의 시대는 오랫동안 중단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