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 퇴보하는 기업, 조직, 국가에 대한 반응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강명구 옮김 / 나무연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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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에 세상을 떠난 세계적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였던 앨버트 O. 허시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학자들의 삶과는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유수의 학문 전당이었던 베를린, 소르본, 런던 정경대에서 수학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2차대전에도 참전 그리고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에 일하면서 마셜플랜에 참여하고, 남미 콜롬비아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내기도 했는데요. 시대의 뒤틀림과 파편에 스스로 몸을 던져 경험하고 중요한 직무를 맡으며 적지 않은 경험이 그가 일률적인 경제학자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학문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적인 합리성을 찾으려고 했던 열망에 이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뭔가 약간의 가당찮은 헌사처럼 느껴지지만 구글과 위키 등에서 허시먼의 삶을 찾아보니, 거대한 전환기가 몇차례나 중첩된 시기를 살아갔던 한 사람의 삶의 족적이 보여졌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지난 2015년에 출간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는데요.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의 이론서에서 허시먼의 글이 인용되기도 합니다.

이 책은 허시먼이 지난 1970년에 출간된 ‘Exit, Voice, Loyalty’를 번역 출간한 것인데요. 아마도 1980년대에 판권 개념이 전무했던 것과 같은 당시의 관행으로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열심히 구글링을 해봤지만 딱히 자료가 나오지는 않아서 혹시 제가 잘못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음 좋겠군요.

허시먼은 본디 경제학을 먼저 오래 연구했던 것처럼, 일종의 경제학을 배경으로 시장과 기업조직, 국가의 퇴보에 대한 소비자 및 시민 등의 이탈과 항의 그리고 충성도 개념과 이후의 이탈과 항의의 최적 조합과 이와 관련된 도표와 부록 등을 책 후반부에 제공하고 있는데요. 이를 제가 단순히 해석한다면 인간이 경제활동에 따른 시장과 그러한 이들의 조직된 기업 및 사회와 이것이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된 국가의 정부 부문의 퇴보와 후퇴에 대한 개개인들이 할 수 있는 즉, 그에 따른 인간 합리성 측면의 ‘공인된 권리’ 에 대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대체로 여기에 논의된 부분들이 경제와 정치 및 사회학 개념들을 차용하고 통합해 독창적으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바탕은 경제학에의 원리이고 글의 전반은 시장과 기업을 통한 해석이 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시먼이 이와 같은 글을 쓰게 된 큰 이유는 아마도 “완전 경쟁 담론의 가장 큰 문제점인 경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했고, 대다수의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이러한 밀도 높은 경쟁이 인간 사회의 내부 모순까지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자유 시장의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의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곤 있지만, “이러한 기업들간의 자유 경쟁 마저도 이들 기업이나 행위자들이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있는데요. 사실상 기업의 내부 모순이나 수많은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이유들로 기업 자체가 시장에 최선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이것은 인간이 항상 합리적일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자유 시장의 원리가 만능이지 못하다는 것에서 출발해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이유로 각각의 퇴보가 발생한다면 그것들에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소비자나 시민들이 이탈과 항의라는 수단으로 그 조직을 건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허시먼은 이에 시장에 국한된 측면의 기업에서 이러한 예민한 소비자와 덜민감한 소비자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설명하며, 마찬가지로 사회나 정부로 눈을 돌리면 이탈과 항의가 서로 동시에 발생하면 해당 부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허시먼은 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무관심이 정치 체제에 보완적인 이점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안정성과 유연성에 기여함으로써 위기 상황에 대비해 정치적 자원을 ‘예비적 축적’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정치학에 있어서 전통적인 이론을 저자는 언급하지만, 오늘날 민주주의 정체체제에서 날로 기득권의 이익이 노골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정치적 불신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며, 현실에서의 전반적인 정치 불신을 방조하는 것은 사실상 여러 사례를 보더라도 현실 민주주의에서는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견고한 양당제 하에서 정치 모순이 발생하거나 한쪽의 부류가 반동을 초래하더라도 시민의 힘으로 혁명이 나오기는 힘들다고 짤막하게 인용하지만, 이 부분도 사실 얼마전에 시민의 혁명으로 정권을 퇴출시킨 경험이 있지요. 몇몇 이론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순수한 불합리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결국 허시먼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이탈과 항의라는 수단이 기업과 정부 차원에서의 상이함이 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 말로서 우리나라를 등지고 이민과 같은 수단으로 떠나는 이탈은 남아있는 내부 시민들의 공공재와 공공익의 측면에서는 내부 변화와 개선을 일으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분석으로 항상 만능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겠죠. 그와 관련해 거대 패권을 갖고 있는 미국이 내부의 시민들이 보다 작은 충성도를 갖고 있는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허시먼의 이 책이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탈과 항의에 관한 한계가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명확했던지라 그것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부분적으로는 미흡하고 실망스런 주장도 있긴 했지만(경제학과 관련된 인용해서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들과 같은 것), 대체로 합리적인 면으로 이해되는 허시먼의 특유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글었습니다. 완벽한 도덕주의 입장에 있는 학자들은 허시먼의 이런 주장에 크게 반대할 수도 있지만 경제와 정치 및 사회의 면밀한 연구를 진행해 왔거나, 각각의 학문적 구조와 현실 연구에 어느 정도 도가 튼 학자들은 심지어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되기까지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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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유럽의 시민들? -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재발명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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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지성계에 자크 랑시에르와 더불어 인정받고 있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국민, 시민권, 이주문제, 국가를 광범위하게 면밀히 분석한 ‘우리, 유럽의 시민들?’을 읽었습니다. 발리바르의 이 책은 특히 요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데요. 요즘 제주에 입도한 예맨 난민들의 처리 문제와 관련된 국내 여론에 대한 것인데요. 지금 유럽이 목도하고 있는 각 지역내의 ‘제2국민들’ 과 관련된 인식과 문제를 함께 고찰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이 책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1장에선 동서 냉전이 첨예화된 시기의 의미일 수 있는 ‘국민’과 ‘국민 국가’를 짚어보고, 이들이 오늘날 어떻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멸의 입장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나름의 분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부는 공산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유럽과 그 이후의 유럽과 전세계에 닥친 거대한 ‘세계화의 파고’와 그로인해 파생된 여러 문제들 중, ‘저렴한 노동력’의 수입 차원의 이민 유입 문제와 전통적인 유럽의 공화주의와 기본적인 시민권의 입장에서 이들 ‘새로운 민족’에 대한 분석을 역사 분석적이고 전통적인 정치 관념적인 부분에서 평가와 예측을 하고 있고, 마지막 3부는 ‘유럽의 아파르헤이트’의 시도라는 측면에서 도래하고 있는 배타적 인종주의의 분위기에서 유럽의 시민과 시민권의 장래를 그려보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미리 결론을 지어 보면, 발리바르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한 명백하게 이상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여러가지 정치적인 측면의 틀에서 과거 ‘국민’에 대한 개념이 임의로 설정된 국경이라는 범주안에 거주하고 있는 국민국가론적인 시민 해석의 틀이 독일의 통일과 이후 구소련의 붕괴, 그리고 유럽의 통합 모색 등으로 현재의 유럽에서 앞의 ‘국민국가’라는 의미가 급변하게 되었고, 이제 인종주의적 구분으로 유럽의 각 국가에 뿌리를 내린 ‘검은 피부의 이방인들’에 대한 시민권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발리바르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데요. 사실 그가 이렇게 판단하게 된 연유에는 단순히 노동시장에서의 단순 노동력을 해당 지역에 제공하는 것으로 ‘이민 인구’의 단순한 시민권 부여가 아니라고 보고 있는데요. 즉, 거침없는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와 그로인한 세계화가 ‘2등국민’ 이라는 계급을 만들었고, 이러한 상황은 이익을 위해 ‘분명한 착취’가 필요한 자본의 비인간성이 초래한 결과라고 보고 있는 듯 했습니다. “특히 시민권의 개념과 사회적 권리의 인식은 과잉 착취와 지배의 가능성을 제한했기 때문에, 자본이 자신의 수익성을 감소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일으켰다” 고 보고, “이러한 거대 자본의 이해는 ‘세계화된’ 시대의 각각의 행위자들에게 그 어느때보다 더 경제구조가 정치를 강하게 결정하도록 만들었다”는 세심한 통찰력을 발리바르는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좀 더 단순하게 풀어보면, 이들 이민의 유입이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해 해당 국가와 자본 양자가 이득을 얻었다는 측면에서 특히 유럽의 정부가 이들 ‘검정 피부의 2등 국민들’에게 이제 정당한 시민권 부여에 대한 논의를 해야한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차별받는 비유럽 사람들에 대한 문제는 제1차대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식민주의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과거 제국주의 유럽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오늘날 성공적인 이민 사회 국가로 여겨지는 미국 조차도, 과거 내전이었던 남북전쟁 이후에 흑인들에 대한 권리를 비롯한 기본 권리가 헌법의 재해석으로 가능해졌지만, 실제적으로 아직도 인종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차별이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유럽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외부의 이민 후손들’의 근본적인 기원이 단지 몇십년의 제한된 시기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또한 “동서 냉전 이후, (동유럽 등의) 각 국가의 시장 편입,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이 이 지역을 갈갈이 분열시킨 배경”에 서유럽이 있다는 것은 다소 명백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독일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주의적 물결’은 과거의 국민국가로의 회귀나 다수의 2등 국민들을 국외로 추방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요. 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족주의가 과연 양립할 수 있느냐는 별개로 삼는다 하더라도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는 남아있는 충분한 역사가 있으며, 이렇게 배제시키고 제외시키는 방법 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고, 정말로 국경이 점차 허물어지는 ‘세계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유럽 스스로가 평가한다면 좀 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런 측면에서 미래의 유럽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발리바르의 전망이 이 책의 후반부에 실리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정치체와 시민권의 형태와 목표를 다시 사고하고 시민과 활동가, 투사들의 접합을 다시 사고하여 전국민적 관점에서 관점을 확대시키는 것에 ‘유럽의 민주주의의 장래’가 달려있다고 발리바르처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명한 정치학자인 허시먼은 “민주주의가 갈등으로 먹고 산다”고 표현했는데요. 저는 앞서 익히 경험한대로 발리바르의 이 글은 충분히 많은 사상가들과 이론가들을 인용하고 있고, 특히 한나 아렌트가 피력한 시민권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는데요. 자크 랑시에르와 프랑스의 공화주의 및 프랑스 대혁명과 유럽 이민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발리바르의 전체적인 사고의 틀을 이해하는데 기본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저의 짧은 머리로도 숙달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많은 페이지를 정독에 따른 집중에 쏟아부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역자가 발리바르가 고안한 몇가지 개념에 대해 해제를 첨부했는데요. (경계와 국민사회국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또한 적지않은 분량으로 발리바르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어 저 역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대략 3일간에 14시간 이상을 이 책을 읽는데 소모했는데 아직도 이해가 미진한 것 같아 매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아무래도 나쁜 머리를 탓해야겠죠. 끝으로 난민이나 저개발국가의 이민 문제를 바라보는데 세계 민주주의 체제의 입장에서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상황은 우리와는 다소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다른 아시아 각지역에서 유입된 불법체류자들을 감안한다면 이 ‘짧은 역사의 민주주의 국가’ 가 어떻게 관련된 잠재적 문제를 해결하는지에 대한 약간의 바로미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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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여행일지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문예총서 4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지음, 김대권 옮김 / 인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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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당시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교육자였던 사상가로서, 주변국인 프랑스와 달리 낙후된 독일 문학을 위해 헌신했고, 교육자로서 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전수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였던 인물입니다. 근래 국내에서 괴테와 비교되며 문단을 비롯한 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운좋게도 숭실대학교 독어독문과 김대권 선생이 국내에서 처음 번역한 이 책을 알게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1769년은 서유럽에서 꽤 의미있는 해였는데요. 사실상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헤르더가 몸담고 있던 리가는 1721년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한자 동맹의 주축 도시이기도 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에도 러시안들과 라트비아인 독일인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고 있었는데요. 헤르더는 리가에서 처음엔 교인이자 신학자로 지내다가 총독으로부터 한 학교의 교장으로 권유를 받으면서 부임 중간의 공백을 이용해 리가에서 헬싱괴르, 영불 해협, 낭트를 거쳐 파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헤르더가 거쳐간 경유지를 잠깐 소개해드렸지만, 여기 이 책은 괴테나 로렌스 등의 기행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기획된 계획서 같은 성격의 글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주변 풍광이나 도시에서의 인상 등은 거의 없고, 마지막 파리에서의 도착도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독일과 주변 국가들의 관계에서의 지리학, 철학, 언어, 역사, 교육, 종교를 담은 헤르더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유럽 전체에서 농노가 사라지며 사회 개혁이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에서 리가와 자신의 조국인 독일 지역은 아직도 농노제를 유지하고 있는 수준의 미개함을 갖고 있었고, 이런 정치사회적인 후퇴 뿐만 아니라 언어, 문화적으로도 독일과 독일 민족이 일종의 계몽이 되어 있지 않다고 헤르더는 판단합니다. “모든 계몽은 목적이 아니라 항상 수단이다.”는 자신의 궤변을 늘어놓지만, 프프랑스어에 대한 예찬과 히브리어의 실용적인 측면을 언급하며 아직도 구태연연한 라틴어 중시를 하고 있는 독일과 그 주변 국가들을 비판하는데요. “프랑스어는 유럽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꼭 필요한 언어이며, 최고의 교양 언어이다” 라고 극찬한 반면, “라틴어는 용기와 힘, 그리고 모든것에 대한 전망을 앗아간다”며, 라틴어만 교육하는 것은 옳지 않고, 특히 프랑스어와 히브리어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과 그런 프랑스어로 시작된 프랑스 문화 전반의 높은 평가를 헤르더는 하고 있습니다. 볼테르와 루소를 배우고 답습하자고 주장하고, “몽테스키외의 정신으로 봐야하고, 루소의 정열적인 펜으로 써야하며, 볼테르가 누리고 있는 행운처럼 충언을 들어줄 왕이 있어야 한다. 우리 세기가 이때다.” 라며 독일 문화와 정신의 도약을 전망하고 있는데요. 지금에야 문화 상대주의에 입각해 다소간의 정신의 부족이나 문화의 결핍과 같은 것이 무조건 배격의 대상은 아니지만 헤르더가 살던 이 당시에는 소위 선도하는 선진 문화에 대한 평가가 어떠한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가 독일과 프랑스를 비교하여 양자의 우월을 명확히 구분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헤르더의 주장을 살펴보더라도 당시 문화 선진국의 전반적인 것을 답습해 독일 문화의 증진으로 삼자는 주장은 약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의 입장으로 헤르더가 칸트를 비판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논의를 시작한 것은 독일인들의 교육으로 넘어가서 파리 방문을 마치고 돌아갈 리가에서의 학교 운영과 교육 방침에 대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들과 소년들과 청년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교육에 대한 철학적인 공모를 하게 되는데요. “아름다운 젊은이는 올바른 느낌만을 가져야 하고, 자신에게 아직 적합하지 않는 모든 이념을 지녀서는 안 될 것이다.” 라는 등의 주관과 자신이 몽테스키외와 루소에게 영감을 받았듯이 비슷한 측면에서 청년들이 가져야 할 신념과 포부에 관해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 등을 논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책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 “책을 읽게 되고 갖게 될 생각에 흥분되고, 얼마간 책 없이 지내야 한다” 는 등에서 그가 얼마나 독서와 글쓰기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글 초입에서는 “마지막으로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저술가로서의 활동이다.”라고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꽤 역설적이고 반어적인 표현을 좋아했던 것이 아닌가 약간의 실소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파리에서의 기대를 마지막으로 글은 대충 마무리 되는데요. 괴테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살던 지역에서 잠시 탈출해 지난 시간을 돌아보거나, 앞으로의 계획을 재충전하는 시기로 여행을 꼽았던 것처럼, 헤르더에게도 이처럼 자신과 독일인들에 대한 염려와 기대, 앞으로 만나게 될 소년들에 대한 교육, 철학과 언어학, 자신이 접했던 당대 사상가들의 역작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그가 스스로 얼마나 문자와 책에 집착하고 몰두한 인문주의자였는지 간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글 곳곳에 러시아인들에 대한 비하가 보였는데요.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다소간 인종 차별처럼 느껴질 만큼 어리석고 무지하고 구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헤르더의 이런 시각을 지배적인 관습적 시각으로 치부해야하는지에 대한 난감함이 있었는데요. 이런 비범한 인문주의자가 얼마간의 ‘편견’을 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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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 제1차 세계대전부터 트럼프까지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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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영국 내에 촉망받는 정치학자인데요. 주로 정치사상, 국가론, 대표제론과 특히 현대 정치문제와 민주주의론에 대한 것을 주제로 현재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정치적 이슈와 관련된 글을 여러 언론을 통해 기고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런시먼이 이 글을 읽으면서 그가 토크빌과 관련된 연구를 오래 해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제는 The Confidence Trap : A History of Democracy in Crisis from World War 1 to the Present 로 지난 2013년 첫 출간 되었는데요. 국내에는 최근에 후마니타스에서 번역 출간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세계 제1차대전이 종전한 1918년부터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까지의 시기로 저자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여기는 각각의 분기점을 주제로 분석과 그 과정의 여파를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덧붙여서 개정판에 수록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포퓰리즘 시대를 책의 마지막에 담고 있습니다. 책의 수록된 시기는 1918년, 1933년, 1947년, 1962년, 1974년, 1989년, 2008년 까지입니다. 각각의 해당하는 연도를 보시면 몇몇의 굵직한 사건들이 떠오르실겁니다.

런시먼은 여기 글을 통해 분석하는 민주주의는 인류 사회의 정치 체제로서 다른 체제들과 달리 무언가 뛰어나서가 아니며, 오히려 과거 기록된 전제 정치체제와 달리 그 행동력에 있어 굼뜨고, 나약한 일면이 있으며, 국가의 소리가 통일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요. 토크빌은 ‘다수의 폭정’을 경고하면서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정치학의 일반적 진실 (만주주의가 진보하고 있다는 진실) 을 약화시킬 수 있는 개인적 믿음을 (시민들이)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 유지된다”고 밝혔는데요. 민주주의 자체가 내부의 불안 요인 즉, 시민의 불만 등과 같은 체제의 양면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역사상 다른 체제들과 달리 오히려 안정성을 더 갖고 있었던 측면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소제목들로서의 각각의 연도에는 그 당시의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불리울 만큼의 사건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민주주의 체제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몰락과 인류 멸망을 불어일으킬 뻔했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저자 역시 “현대 정치에서 가장 심각한 위기의 순간” 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뿐만 아니라 이 때의 미국 민주주의는 민주 정치의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아슬아슬함에서 기인하다고 런시먼은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당시 케네디와 케네디 행정부가 민주 정부인 자신들이 국민들에게 나약하게 보일 수 없어서 겉으로는 강경하게 뒤로는 대화와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며 ,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와 함께 그 와중에서도 당시 선거와 여론에 민감해 했다는 것은 민주 정치가 어떤 일면을 갖고 있는지, 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위기에서 불안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마도 생생한 증거일 겁니다. 물론 런시먼 자체가 이런 해석들을 토대로 민주주의 자체를 불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1989년의 동유럽이 붕괴되고, 베를린 장벽과 철의 장막이 무너지면서 공산주의의 붕괴로 인한 민주주의의 승리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대로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그 시기에 민주주의는 자제하지 못했고, 사회 전반에 있어서 소련의 붕괴를 통해 민주주의 자체를 돌아보지 못한 하이에크와 같은 사례들을 우리들에게 또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체로 런시먼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명확합니다. 시기별로 있었던 각 정부들의 부패, 커넥션, 뇌물 수수 등과 칠레의 합법정부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한 미국과 닉슨의 원터게이트 사건 등은 민주주의가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케넌이 말한대로 “민주국가들이 어리석고 무모할 수 있다”는 평가와 뷰캐넌이 말한 “서구 민주사회의 현대인은 자기 운명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만들어 내거나 정부의 제약을, 정부가 진정한 홉스적 주권자로 변형되지 못하게끔 하는 제약을 가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의 진정한 답이 앞으로 우리들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지향점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후 2008년의 전세계에 파급을 미친 뉴욕 발 금융위기가 결정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에 악영향을 끼쳤고, 5개월여 임기를 남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대규모의 금융 지원에 대한 문서에 싸인을 함으로서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와 시민의 삶에 강하게 작용했던 신자유주의를 사망에 이르게 하면서 그것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주의와 결합된 자유시장의 ‘자유로운 손” 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해보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금융 세계화를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반성 없이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막는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런시먼은 이에 “2008년에 전개된 위기는 민주주의의 실패였다”고 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 대전과 냉전에 따른 민주주의의 경직화, 핵위기, 베트남전 개입, 냉전의 붕괴에 따른 여파, 세계 금융 위기 등을 순차적으로 서술하며 그 시기가 내포하는 의미를 비교적 실증적으로 저자는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2001년 이후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제한적인 전쟁’과 ‘대테러 전쟁’에 대한 평가가 부족한 것은 뭔가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입니다. “조지 W. 부시가 민주주의 체제의 확대를 통해 평화를 추구했다”는 짤막한 ‘민주평화론’ 과 더불어 언급되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부족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마지막의 거대한 포퓰리즘은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기존의 체제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이 인기 영합주의가 앞으로 민주주의에 어떠한 영향으로 다가올지는 오늘날 서유럽의 상황과 더불어 다같이 지켜봐야 되는 문제일텐데요. 결국 이 포퓰리즘에 맞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지는 토크빌과 홉스가 지적한대로 각자의 시민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죠.

책에 인용된 주를 합쳐 48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모두의 인내심을 요구할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들은 꽤나 이해를 크게 도우며 설득적이고, 각각의 시기를 개괄적으로 그려내고 있어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습니다. 사실상 런시먼은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았나 글 말미에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얼마간의 집중을 내내 요구하는 책이지만 읽는 분들께는 충분한 생각꺼리들을 안겨주는 고마운 글이 되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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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란 무엇인가 - 차별은 언제 나쁘고 언제 그렇지 않은가
데버러 헬먼 지음, 김대근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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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헌법학 교수로 있는 여성 법학자인 데버러 헬먼의 이 책은 지난 2008년 “When is Discrmination Wrong?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던 것을 서해문집에서 2016년에 소개되었는데요. 이 책의 저자 데버러 헬먼은 발표한 논문과 글이 대부분 ‘차별’에 관한 주제인데,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같은 분야의 연구로 천착해온 학자가 내는 글들은 항상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저자가 주장하는 차별에 대한 정의는 간단히 설명하면 “비하가 수반되어 도덕적으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을 뜻합니다. 원칙적으로 합당하다는 평가를 받는 ‘구별’과는 구분해서 해석하는 것을 권유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구별은 비하나 부당한 평가와는 상관없는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체의 구분같은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여기에 많은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가장 일례인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알파벳으로 구분하여 강당에 분류해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분류 행위가 비하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특정 맥락에서 특정한 구별을 짓는 사회적 또는 관습적 의미에 따라 좌우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요, 저자가 속해있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는 아주 대표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 문제가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성립된 초창기 헌법이 사실상 “백인 남성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이후 토크빌이 언급했듯이 “토지 보다 노동력이 더 높은 비용으로 차지했던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노예의 수입에 대한 필요불가결성”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의 지위 문제를 야기했고, 지금도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대체로 심각한 편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이곳을 통해 리뷰했던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에서도 이러한 실제적인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즉, 미국법에 있어서의 인종 분리와 관련된 규정이죠.

미국 사회에 있어서 흑인들과 관련된 관행이 관습법적으로 흑인에 대한 교묘한 ‘인종 분리’에 법적 근거가 되었고, 이것을 차별로 인식하고 이론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법학계 내에서 시작된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차별을 규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차별의 인식적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비하’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는데요. ‘비하가 평등의 문제인가?’ , ‘정말 비하만으로 충분한가’ , ‘모든 비하는 부당한가’ 등으로 면밀한 관찰을 하고 있는데요. 다만, 실제 범죄자를 법적인 처벌로 인한 교도 시설에의 구금이 그걸로 끝나지 않고 시설 내의 다른 죄수들에 의한 폭행과 강간 등을 용인함으로써 범죄자를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처벌 자체로는 범죄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등의 사례들을 인용하며 약간의 예외적인 측면들도 소개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차별과 관련된 사례들은 대부분 흑인과 여성에 대한 것으로 할애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법과 관행이 어느 정도인지 저와 같은 독자들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더군요.

이렇게 앞선 1부가 차별에 대한 여러 사례와 해석이었다면 2부는 맹목적인 차별들에 대한 대안으로 소개하고 있는데요. 여기 내용들에서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차별 금지법’과 관련하여 대체로 올바르게 금지되는 합리적 차별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데, 위의 차별 금지법은 이러한 합리적 차별까지 금지한다는 측면에서 저자는 부정적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엇보다 객관성의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자는 일정 부분 평등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지 않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부당한 차별을 어떻게 정확히 객관화 시킬 것인가는 문제도 어려운 부분이고 관행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인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도덕적으로 덜 통제되며, 더 폭력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관점을 지지하는데 사용되어 왔다면 이것에 대한 부당성의 측면에서 실제 법과 현실의 괴리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더 중요할텐데요. 이것을 일일이 흑인들이 비하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따져서 차별의 유무를 따지자는 것은 물론 개념적으로는 그렇게 해야하지만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떠한 실제적 효력을 가질지는 저로서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유색 인종과 같은 소수자의 자녀들이 학과 공부와 관련된 차별과 소수자의 입학을 고의로 낮추는 것에 대한 비판 등은 꽤나 인정할만 했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선 이 합리적 차별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그 경계를 정확히 설정해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차별의 의도가 사회적으로 고착화되고 파급효과가 큰 것임에도 객관성의 문제나 각 개인의 비하 여부, 의도와 확인 등을 따져서 가려보자는 것과 같은 것은 인종적이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거나 계급적 차별 의식을 갖고 있는 반대에 있는 다수의 경종을 올리기에는 미흡해보이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사회의 다수 의견이 법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사법 체계가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법관들과 법 자체의 정당성을 신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하는 ‘법의 판단이 곧 옳다는 측면’의 집단인식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비판이나 모욕 등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 것을 시민 도덕으로 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저자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좀 더 우리가 법앞의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일상화 된 차별 의식을 무비판적으로 여기는 것을 반성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차별의 당사자가 느끼는 비하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분석과 실례가 있어야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그 각각의 전개가 충분히 설득적이긴 합니다만 앞에서 “객관성에 대한 고려가 시급해 보인다”고 저자가 밝힌대로 추후에 논의를 보강한 글을 저자가 냈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람을 가져봅니다. 끝으로 편집상의 문제인지 1곳의 오탈자가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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