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불평등을 낳는가 - 세계화를 해부하는 아홉 가지 질문
피어 몰란더 지음, 홍지수 옮김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OECD와 국제통화기금, 유엔개발계획 등의 국제기구에 정치경제학 관련의 컨설턴트로 스웨덴의 명문인 호로닝헌 대학과 룬드 대학에서 수학한 후 오늘날 스웨덴에서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피어 몰란더의 전세계적 이슈인 불평등과 관련 이 책 ‘무엇이 불평등을 낳는가’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몰란더는 세계 각국의 불평등 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는 전문가인데요. 마찬가지로 과거 뉴욕 타임즈와 같은 언론 매체에도 앞선 주제와 같은 글을 기고하며, 세계에 불평등에 의한 문제에 관해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하였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다음의 세가지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합니다. 바로 왜 사회는 하나같이 불평등하고, 이러한 불평등을 과연 완화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정치철학 이념들은 현상으로서의 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같은 불평등에 대한 중대한 질문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위의 질문들에 대해 저자가 충분한 답을 내렸다고 평가하기는 다소 미흡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의 불평등 문제를 오래전 역사의 ‘생존 문제’ 내지는 ‘생존 게임’ 정도로 원론적인 해석에 그치고 있다는 점과 불평등의 진정한 해결책은 일정 부분 부족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글의 서두에서 저자는 “사회의 주변 환경이 불평등을 제약하게 하는 것”으로 불평등을 다소간 방지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으로 밝히는 점은 고유한 식견으로 느껴졌는데요. 이와 같은 불평등을 방지하는 저자의 이론적 해석이 설득력있게 느껴졌지만 뒤이어 “사회 체계가 바람직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해주는 정책이나 제어 장치는 절대로 완벽하지 않다”는 것과 사실상 “불평등은 정치적으로 조정하기 어렵다”는 측면의 논리 전개는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꽤 실망스러 기분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사회적 협상이라는 주제에 대한 이론적 근원을 찾아가던 중에 일찍이 장 자크 루소가 ‘정부와 시민은 각자 사회적 계약 관계’에 의한 대의적 공화주의로 묶여야 한다는 오늘날 시민 혁명으로 인한 근대 민주주의 사회의 이론적 근거였던 이 ‘계약론’을 잠정적으로 실패로 보는 점도 물론 그동안의 수많은 고안된 사회적 제도들이 불평등과 관련된 제대로된 해법을 내놓지 못한 결과에서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판단이지만, 데이비드 흄의 입을 빌려 사회계약이 허구라고 보는 점은 저로서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시민과 정부 사이의 균일한 사회 계약적 관계는 많은 정부가 시민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고 그것을 ‘국가 개입의 터부’로만 여겨 개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적절하게 절제시키지 못하고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 쭉 경제적 시스템의 불편한 우위와 독점적 정보를 제공받은 남들과 다른 거대 자본이 이를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부자들을 시장 경제주의적 방탄막으로 차별적 옹호의 수단으로 해석해 근원의 ‘인간의 이기심’을 가볍게만 본 것이 누적된 현재의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만약 저자의 다음과 같은 판단 즉, “자유주의자는 전통이 아니라 이성이 모든 사회 제도들의 기반이 되어야 하며, 이성이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제도나 관습은 그 어떤 것이라도 파기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옳다면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은 마땅히 각 개인의 이성으로서 제어해야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흡하다면 제도로서 구축해야 하지만, 과거 토크빌이 우려했던 대로 ‘제어되지 않은 개인들의 이기심이 많은 사회를 사실상 분열로 빠트린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이에크와 칼 포퍼의 주장대로 각 사회를 이성의 제어로 넘치는 제도들을 수시로 조정과 개조를 하는 것이 과연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또 의문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에게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면 그 개인들로 이뤄진 사회가 유토피아적 가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그러한 천국은 세계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각 국가에 만연된 불평등 문제를 다소나마 해결 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글 말미에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근본적인 딜레마에서 정당한 결론을 도출하고 협상에 내재된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제어할 장치로 국가를 이용한다”고 아마 모국인 스웨덴의 축적된 경험으로 이렇게 단정하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이 강고한 국가들에게는 ‘사회민주주의’가 주는 어감을 극복하기 위한 일차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마찬가지로 사회보장과 복지와 관련해 태생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는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을 먼저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등의 선행 작업이 필요합니다.

결국 우리가 처해 있는 엄밀한 불평등의 문제를 점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각 제도와 시민들, 정부간의 신뢰가 쌓여야 하며, 이 지점에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시민들간의 의견 통합과 문제 인식의 공유, 시장 만능주의에 대해 이제는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등도 필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이 당면한 과제들은 협상과 설득이 중요하고, 모두가 공감대의 장에 올라섰을 때, 법과 제도, 특히 헌법을 시민들의 삶에 맞게 다시 살펴보는 시간이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 그것을 경제적 시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해석상의 한계가 명백하니 정치사회적인 입장의 통합의 의견으로 실마리를 먼저 찾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소모적인 정치 대결로 몰고가서 종전의 훔볼트의 입장과 동일한 불평등과 차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폐쇄성으로 이끄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를 위한 아주 짧은 안내서
버나드 크릭 지음, 이혜인 옮김 / 스윙밴드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2008년 작고한 버나드 크릭은 하버드, 버클리, 런던정경대 등에서 강의하고 후에 셰필드대학의 정치학과 교수를 거쳐 노동과 교육 부분에 다앙한 활동을 하고, 이어 영국 교육노동부 자문위원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영국 등지에서는 그를 정치학 뿐만 아니라 인문학에서 석학이라 인정하고 있는데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강의까지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2년 Democracy : A Very Short Introduction 으로 출간된 후 영미 문화권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많은 판매고를 올린 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불어 1962년에 출간된 ‘정치를 위한 변호 In Defience of Politics’ 도 매우 유명한 글입니다. 위의 정치를 위한 변호는 과거에 정식 판권이 아닌 번역으로 출판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는데요. 현재는 이 책과 관련해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버나드 크릭의 이 글은 제목대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역사와 더불어 이론적인 기원과 고찰을 동시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거쳐 중요한 영국의 입헌주의 군주제의 시작과 계몽주의,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 혁명 등의 시대 배경을 거쳐 근대 민주주의의 성립까지 공화정과 혁명, 여러 사상가들의 이론을 빠짐없이 열거하며 민주주의라는 큰 그림을 매우 객관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부정 보다는 조심스런 낙관를 예측했는데 이것은 ‘제제가 없는 민주주의의 난관’을 그가 인식했던 것으로 어쩌면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을 끄집어 낸 것은 즉, 무분별한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소간 시민들의 규율과 제한을 기본으로 두고 일종의 조정을 통한 민주주의가 더 지속 가능하다는 것을 여기의 글로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저는 느껴졌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토크빌이 “다수에 의한 폭정”을 경고하면서 “어쩌면 그가 민주주의보다는 자유를 중시했는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인식은 꽤 신선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근거없는 낙관주의 대신 이성적 회의주의를 기반으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의 민주적 자유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것도 비판적 인문주의자로서의 저자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입장과 약간 다른것으로 홉스 이후로 오늘날의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해야한다는 기본적 정명에서 약간 벗어나 좀 더 개인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외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허버트 스펜서의 언급대로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비판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계몽주의 이전, 절대군주제를 거쳐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권리 확보를 통한 영국의 정치 실험이 입헌군주제의 색다른 정치를 초래했고, 다른 앵글로 색슨의 미국은 이주민들의 수월한 토지 확보 이후, 재산권의 부여에 의한 이들의 정당한 투표권 행사가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결정적 차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1인 1표의 기발한 정치적 전환이 미국이 독립시기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권력의 견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재산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행사를 했던 다수의 미국의 일반인들이 미국 고유의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도 경제적 풍요에 기반한 부르주아의 성장이 민주 정치의 힘이라고 본 것처럼 크릭의 이 글에서도 이런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토크빌은 미국을 부분적으로 오해해 민주주의를 거의 평등과 동의어로 보았는데 초기 미국의 민주주의는 평등의 개념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사회적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고 오늘날 복지와 의료개혁에 대한 기본적인 개인의 선택 내지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다수의 미국인의 중요한 관점이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유럽과는 달리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하는 특유의 자유민주주의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된 원인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주의의 위험성이라는 측면의 토크빌의 선험적 입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토크빌은 조건들의 평등에 기반해 개인의 이기심을 적절히 조절해야 민주 정치가 안온해 질 수 있다고 믿었는데요. 이것이 민주주의에서 평등을 강조하기 위함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단 미국의 ‘중산층 무계급’에 의한 민주주의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다수에 의한 지배가 다수에 의한 폭정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고 추측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민화에 대한 가능성 등을 불길하게 예측한 토크빌의 입장은 최근의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저자는 보이면서 토크빌의 자유에 대한 입장과 관련해서 “민주적 다수결주의와 자유 사이에 알맞는 균형을 맞출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는 그 장점을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는 토크빌의 결론으로 약간의 희망적인 태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의 명백한 긴장 관계 보다는 민주주의의 왜곡된 변형이라 지칭될 만한 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체제의 최대 위협이라고 저자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의 강력하고 흉악한 무기인 ‘선동’과 기존의 체제와 엘리트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 선동가적 포퓰리스트를 제거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민주주의의 과제일텐데요. 사실 개인적으로는 기득권과 밀접한 기존의 엘리트주의가 너무 과도하면 좋지 않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엘리트 계층의 진입에 대한 모든 시민들의 기회가 보장되어야만 하고 가진바 능력대로 발휘하고 정체되지 않고 수시로 변화를 줄 수 있는 그런 조건이 필요해 보입니다. 포퓰리즘이 융성하게 되는 요인들 중에 하나는 고착화되고 폐쇄되어버려 자본주의적 계층 이동을 포함한 민주주의 사회 내의 건강함이 사라져 일반 시민들에게 좌절감을 더욱 더 안겨주고 이런 여론과 방향성을 선동과 폭력적 언어로 유인하는 포퓰리스트에게 유인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인 크릭이 특별히 소개한 한나 아렌트가 인민과 군중을 구별했다는 점은 이 후자의 군중들이 우민화와 포퓰리즘을 확대하는 경로가 되는 만큼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국에는 데모스라 지칭되는 민주사회의 시민들이 각자 스스로 사색과 면밀한 독서, 활발한 토론 등으로 무장해야만 민주주의 정체가 오염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존경받는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의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조건들을 언급하며 시민성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급진적으로 더 민주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까?로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즉, 이 질문의 대답은 권력의 분산이며 크게는 전세계의 가짜 민주주의 체제를 구분하는 수단이자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조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민주주의의 확대만이 우리의 삶과 자연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람직한 공화주의적 민주정치를 저자 역시 크게 바란 것처럼 이것을 지켜나가기 위한 우리 시민들의 노력이 더 엄중해지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로는 충분하지 않다 - 트럼프의 충격 정치에 저항하고,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얻는 법
나오미 클라인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캐나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북미 지역의 대표적인 사회참여적 시민운동가로서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요. 특히 그녀의 몇몇 저서들은 이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고 진보주의 운동과 관련해서도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에게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노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 책 역시 나오미 클라인의 중요한 관심과 연구에 놓여 있는 글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선동정치가’와 ‘우익 포퓰리즘’을 배경으로 미국 정치와 경제를 분석하고 있지만 큰 틀에서는 ‘약탈적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미국의 보수 정치의 일관된 폐해를 알리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관련된 주장들은 명확하고 일관되어 있으며 특히 번역의 질이 매우 훌륭하여 독자들에게 정확한 의미 전달을 하는데 몇박자가 갖춰진 글이라고 여겨집니다.

우선 미국 정치 무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여러모로 정치경제적인 전면적인 후퇴를 내포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의미 부여를 내릴 수 있을듯 보입니다. 미국이 세계 민주주의를 차지하는 위상으로 봤을 때, 트럼프와 같은 거대한 선동주의 정치인이 본무대에 등장한 것은 여러모로 반동 정치의 현실화로 봐야겠죠. 저자는 이에 ‘공직을 이용해 엄청난 수익을 뽑아내는 정치’라고 트럼프 정치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트럼프 자신의 직계 가족을 포함한 자신의 사업 구상과 확대에 시민이 부여한 권력을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과거 미국 정치에서 어떠한 사례도 찾아볼 수 없는 현재 유일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트럼프의 장녀인 이방카와 그의 남편 쿠슈너의 일련의 사례들로 매우 부정적 파급 효과가 큰 왜곡된 직계 정치 행위이고, 선거를 통한 선출된 관료나 임명된 관리가 아니라 대통령의 자녀가 아무런 검증없이 무자격으로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있어서 안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트럼프 본인의 본심이 뭔지 의심될 정도로 회자되는 파행적 정치 언어와 많은 시민들이 ‘역겹다’고 말할 정도로 인종주의적 편견, 아무런 근거 없는 여성차별적인 입장 등이 미국의 정치 상황에 얼마나 시한폭탄이 되고 있는지 근래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오히려 트럼프 만의 국한된 문제라기 보다는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관련된 금융인들을 기소하지 않은 점과 미국 시민들에 대한 안보상의 이유로 일어날 수 있는 불법적인 통화 도청과 같은 것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보이는 등의 과거 행정부 시절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영향력은 유효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약탈적 자본주의’와 날로 강화되는 소득 불평등의 사회 가치적 분열과 왜곡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매우 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강경한 보수파가 기후 변화를 부인하는 이유는 기후 행동 때문에 잃을지 모를 수조 달러의 부를 보호하는 것을 넘어서서 훨씬 더 귀중한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 바로 신자유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다’라고 통찰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한때의 ‘월가 점령 운동’이 정치 기득권과 기존의 경제 세력에 대해 충분한 교훈이 되지 못한 것이 이러한 보수 정치권의 근본적인 신자유주의적 가치 보호에 있습니다. 주도적인 정치경제 이데올로기는 끊임없는 비판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결국 과거 행정부가 신자유주의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고 그러한 배경에는 저자가 판단한 대로 보수 (기득권) 정치 세력이 금권 정치에 기반한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외에도 트럼프가 보이는 인종 위계적 정치 행위, 이미 무효임으로 판명된 ‘낙수 효과’를 맹신한다든지 자유 무역의 가치를 앞세운 기존의 TPP를 ‘미국을 겁탈하는 행위’라고 판단하는 등의 정말로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 수반의 언행과 사고라고 믿을 수 없는 왜곡 정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다른 말로 ‘이미 미국 정치의 주도권이 상당 부분 진보에서 우파에게 넘어갔다’는 판단으로 귀결되며, 여기에서 또 광범위하게 논하기는 어렵지만 바로 진보 세력의 유명 무실이 이러한 ‘미국의 우익 사이비 포퓰리스트’를 잉태하게 만든 진정한 원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우파 만의 정치 집중이 아니라 여기에 극단적인 포퓰리즘이 가세한 것으로 봤을 때 정말 진보주의 운동에 있는 사람들의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즉, 이러한 현실 정치 왜곡의 해결로 저자는 ‘정당 없는 정치’를 제시하고 있는데요. 이는 금권 정치의 산실로 여겨지는 수많은 이익 단체에 의한 로비 정치를 제한하는 형태로 시민들이 기존의 정당주의 없이 자발적인 기초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그 틀을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더해야 될 살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을 순진한 도덕정치적 입장으로만 몰아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전에도 정치학자인 존 던, 로버트 달 등이 비슷한 논리를 우리에게 보인적이 있습니다. 사실상 지금 필요한 것은 더욱더 많은 민주주의의 확대이고 시민의 자발적인 정치 의식 개조와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요구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원론적인 입장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시급한 ‘시민 강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나오미 클라인의 이 책을 일독하면서 그녀의 오늘날 정치 상황에 대한 탁월한 분석과 반대의 유용한 결과물에 대해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배경의 주무대가 미국과 그녀의 모국인 캐나다인 것이 우리 정치와는 해석상의 차이가 있는데요. 이를테면 미국에서 빈자 계층의 실질적인 투표 제한을 위해 사진이 들어가 있는 신분증을 요구한다는 것에는 우리와의 현실 차이가 있어 보였습니다. 정부의 합법적인 신분 상태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미국에는 많다는 점이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이죠. 애초에 우리는 일반 선거에서 스스로의 신분증 제시를 명확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으니까요. 다소 이런 점을 제외하면 우리 역시 정치와 경제를 위해 반면 교사로 삼을 만한 유익한 것들이 적지 않게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덫에 걸린 유럽 - 유럽연합, 이중의 덫에 빠지다
클라우스 오페 지음, 신해경 옮김 / 아마존의나비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을 쓴 클라우스 오페는 독일내의 명망있는 정치사회학자이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위르겐 하버마스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훔볼트 대학과 같은 독일의 여러 유수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 그리고 도미하여 프리스턴과 하버드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 일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할애했고 그래서 쓴 많은 저서들이 이런 맥락 위에 있습니다.

저자는 오늘날 통합 유럽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사전 조율없이 잘못된 공통의 통화 정책, 그리고 정책적 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하는 그 정치적 및 사회적 한계가 그렇습니다. 현재 유럽 내부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여러 정치적 성향과 전략들마다 시급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는 일은 역시 극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은 바로 유로 문제와 궤를 같이 합니다. 즉, 지금 통합 유럽이 시급히 해결해야 될 부분이 바로 유로 문제 및 그 주변의 모든 제반 사항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현재 독일의 일종의 소극적 거부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요. 이 통화 문제는 EU의 중심 세력이라 볼 수 있는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의 일종의 단일 통화 효과로 그들이 얻는 이익이 분명한 반면 그외의 그리스나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같은 주변부의 국가들이 경상수지 악화와 국가 부채 등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보호되어야 할 것은 보호 수단과 특혜를 ‘살 수 있을’ 만큼 자원이 풍부한 이들의 신분이 아니라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의 안전이다”라고 말하는 이들 나라의 소외 계층의 사회경제적 결핍을 더 심화시킨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단일한 그리고 동일한 제도적 계획이 (말하자면 유로가) 법적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불이익과 고통을 부과하는 반면 다른 일부에게는 이익을 주는 식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판명났다”고 저자는 다시 판단합니다.

사실상 그리스와 포르투갈 등의 PIIGGS 문제는 유럽 지역의 단일 통화 유로의 제한적인 한계에 기인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근래 유럽에 자생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이 유럽 통합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로 이 ‘유로’를 재앙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글의 저자도 언급하지만 이미 많은 유럽인들은 통합 유럽을 자신들의 내재적 생활 양식에 까지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어 예외적으로 극우 정치인들이 나타나고 있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시민들도 바로 이러한 점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결국 유로가 “적자국 통화정책 수립자들의 손발을 묶어 예전처럼 자국 통화를 방어하는 조치들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고 여기에 독일인들이 “다른 이들이 나를 상대로 도덕적 해이를 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태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유럽 시민들의 여론과 유럽 통합의 의의와 발전으로 봤을 때, 저자가 말한대로 “독일은 공통화폐를 보전해야 한다는 생사가 걸린 이해 관계를 추구하면서 패자들에게 적자를 메울 자금을 꿔주는 방안을 제시하는 짓은 그만둬야 하고, 결국에는 그만두게 될 것이다.” 라고 강하게 말하는데요. 여기에는 독일 정치권에 대해 일종의 잠정적 지도국으로서의 신뢰적 역할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현재 유럽 내의 비유럽 이민들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혐오가 나날이 부각되고 이를 기반으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저자가 ‘현상’으로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쉬웠습니다. 일종의 이들 모두를 사회적 약자로 넣고 미국과 다른 대륙의 시민들과 달리 ‘자기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는 유럽인들이 이러한 정치사회적 왜곡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느냐에 대해서 저로서는 비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정치적 통합까지 마련되는 수준의 통합도 아니거니와 핵보유와 동시에 유엔의 안보리 회원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있는 것 만으로도 자국의 이해 관계가 우선인 이런 국제정치국가들이 유럽 통합에 온전히 힘을 쏟는 일은 극히 희박해 보이고 더욱이 영국은 최근에 그 궤를 벗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EU 중심국들이 주변국들에 대해 정치경제적 지원과 이해를 갖고 특히 독일의 경제적 양보와 지원이 바탕이 되어 유럽 의회와 실질적 유럽 통합 은행 등의 주권 이양이 이뤄질 수 있는 시도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오페는 여기에 이 글에서 앞선 유럽의 정치경제적 상황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자유민주주의의 견고한 확산과 이념적 수용에 대한 언급과 근래 미국이 군사 행동을 통해 비인도적 잔혹 행위인 불법적 고문 등을 시도한 것과는 다른 유럽의 민주주의를 보여줘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유럽 여러 국가에는 아직도 사회민주주의적 토양이 자리하고 있으니 최근에 날뛰고 있는 포퓰리즘과 극우 세력,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인종 차별 문제 등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다른 국가들과는 다른 몇 계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체적으로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주장들이 저자의 꽤 올바른 정치적 시각을 기반으로 미래의 유럽 통합의 가능성을 흥미롭게 진단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여러 현존하고 있는 문제들은 충분히 해결 가능하고 역동적 유럽 시민들이 기반이 되어 한번 더 자유민주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지역의 시민 의식은 아직은 다른 대륙의 어떤 곳보다는 양호한 편이니 이 부분에 한번 희망을 가져봐도 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의 승리인가 자본의 위기인가 - 자본주의의 작은 역사
울리케 헤르만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쓴 울리케 헤르만은 독일 함부르크 출생으로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경제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여러 미디어 등의 토론에 출현해 경제문제와 사회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저명한 경제학 논문을 발표하거나 동일 학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 책을 통해 꽤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공감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고 밝히고 싶군요. 독일어로 씌여진 원제는 ‘Der Sieg Des Kapitals’로 번역하면 자본의 승리가 되겠습니다.

책의 도입에서 저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사에 대해 소홀하거나 무시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경제학자들에게 경제사는 특히 영국의 산업 혁명에 대한 본질과 애덤 스미스가 신고전 경제학에서 인용하는대로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에 대해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크게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측면의 진실을 인정하기 힘든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과거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되었어도 그것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가려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라고도 생각됩니다.

일단 이 책은 전체적으로 4부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1부가 고대 로마시대에도 있었던 자본의 개념, 네덜란드의 상업 부흥 시기와 영국의 산업 혁명 시기를 서술하고 2부는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자본의 세가지 오류인 ‘자본주의는 시장 경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적대적이지 않다, 세계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를 밝힙니다. 그리고 3부는 자본과 돈의 구별과 차이점을 열거하고 마지막 4부는 금융의 위기로 볼 수 있는 오늘날 자본의 위기에 대한 배경과 경제사를 함께 분석합니다.

우선 저자가 생각하는 자본과 자본주의의 기본적 인식은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는 경향이 있어 정기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는 매우 유동적인 시스템”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자본주의의 진정한 원동력은 ‘임금’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으며, 오늘날 그리스로 촉발된 유로화의 위기에 있어서 EU의 거대 자본주의 국가 독일이 자신들의 임금을 상승시켜야 유로 가맹국들이 통화 발행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자발적 제한’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이것이 위기의 출구 전략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은 경제사회적으로 복합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높은 부자 세금, 높은 임금, 강력한 감독 등의 자산가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사회주의가 도래한 것’이라 믿는데 워렌 버핏 등이 부자들의 증세에 동의하는 것도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경기 부양과 시장의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분명 이 부분도 공감이 되는 것인데요. 무엇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가 이미 본연의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은 2007년의 금융업계의 도덕 불감증이 국가의 도움을 자발적으로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앞선 인식들은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가 세밀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자본주의와 금융시장을 별개로 여기거나 분리 이해하는 학자들이 전세계에 아직도 태반이 넘지만 이것은 사실상 의미없는 주장에 그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분명 다른 것이라고 글에서 다루고 있는데요. 저자의 말대로 시장은 판매자와 구매자가 존재하고 이들사이에 일정한 매커니즘이 있는 것으로 오늘날 너무 ‘무슨무슨 시장’ 이라고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장 자체에서 ‘소수의 독점 이해자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는 이러한 시장경제의 측면이 과거 대공황 시기 이전에도 미국 시장의 소수 기업들이 독점화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는 언뜻 부정적 영향의 연관성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보다는 의미론 내지 분류론으로 봤을 때 좀 더 시장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틀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기술의 발전은 국가 발전의 한 축이 될 수 있고 이렇게 본다면 자본주의와 국가는 적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 일부 증명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국가의 지속적 개입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작동하지 못한다’는 저자의 해석도 자본주의와 국가의 본질적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여러 사례들을 보더라도 국가와 자본주의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고 이들을 따로 분리 생각해서는 맞물린 현상들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4부는 금융과 금융시장의 위기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자쥬우의를 우회 비판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지난 1970년대의 미국 경제 위기와 2007년의 뉴욕 발 금융위기가 베트남 전과 이라크 전쟁이 큰 원인이었다고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부분인 것만은 확실해 보이는데요. 저자는 여기에 1973년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가 신자유주의자들이 사실상 이것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이것을 의식적으로 뛰어넘어 금융시장의 문분별한 확대를 옹호하는 이들이 이러한 외적 팽창 시기를 자신들의 승리로 여긴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신용 대부를 통해 기업들을 사냥하는 행위가 과연 자본주의에 이롭냐 이롭지 않냐를 말하기에 앞서 ‘기업사냥꾼들’ 자체는 자신들의 잇속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에 금융 시장을 통해 무분별한 증권화와 도덕적 해이는 금융인들 자신이 시스템을 통한 사익 추구가 너무나 만연되어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책임을 국가가 대신 치뤘다는 결과만으로도 저는 이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책의 4부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반대로 ‘인플레이션 시기에 노동 조합들이 높은 임금을 고집한 것은 비극’이라고 말하고 무분별한 저축이 초래하는 재앙들을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어느 한쪽의 입장보다는 이론적 자본주의와 시장의 여러 현상 등에 저자인 울리케 헤르만 특유의 시각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경제와 관련된 여러 문제와 과제들은 흔히 이념적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큰데요. 일찍이 노엄 촘스키가 말한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당면한 경제문제에 개인의 자유 등을 비롯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본질을 흐려 이 판을 흙탕물로 만든 책임이 있다’것이 이런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얼마 전에 리뷰했던 조지프 히스의 글에서도 ‘좌파들은 경제학적 이론을 갖고 치열하게 다퉈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와 같지 않나 싶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노동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벗겨내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기술 발전과 노동의 역할이 자본주의 발전에 큰 중요한 부분이라면 좀 더 건전한 발전을 위해 우리 시민들의 노력과 이 판 자체를 흙탕물로 만들려고 하는 일부 우파들의 오역된 주장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과거에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그동안 너무 계급적으로 인식되어 좌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도 극복해야 될 문제일지도 모르겠군요. 경제사와 자본주의 및 시장경제를 과거와 오늘날을 함께 모색하며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의 일독이 저에게는 오랜만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유가 된다면 조만간 한번 더 정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