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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숭배 - 우리는 왜 경제성장의 노예가 되었는가
클라이브 해밀턴 지음, 김홍식 옮김 / 바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이 글의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은 영국 서섹스 대학의 경제발전연구소 (Instirute of Development Studies) 에서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시드니 대학교,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대학교를 거쳐 호주 진보 단체인 ‘오스트레일리아 인스티튜트’를 설립한 대표적인 진보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이며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녹색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실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현실 참여와 꾸준히 갖고 있던 연구물로 탄생한 이 책은 지난 2003년 출간되었으며, 원제는 ‘Growth Fetish’로 국내에는 좀 뒤늦은 2011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첨언을 드린다면, 역자가 지면을 할애해 특별히 설명하고 있듯이 원제의 fetish를 우리 말의 ‘망상’으로 지정했는데요. 이 부분은 후에 일면적인 경제성장주의와 소비지상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할당된 용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적절한 표현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구분된 소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8장은 탈성장 사회의 이행 방법과 그 과정을 담은 사실상 결론으로 볼 수 있겠고요. 처음 1장과 2장, 3장이 전체적인 주제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며, 4장과 5장, 6장과 7장은 개략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는 논증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처음 3장까지 부분을 제외한다면 각 장의 독립된 구분의 논증은 따로 읽어서 이해해도 될 만큼 특유의 개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논의들이긴 합니다만 꽤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 군더더기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번역 또한 꽤 양호했습니다.
대략적인 큰틀에서 보자면, 경제 성장의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 그리고 그 이행과정에서 세계화와 소비 지상주의 및 왜곡된 현대 사회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 등을 매끄럽게 연결하여 글의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자가 단언하는 오늘날 성장 일변도의 경제 발전주의와 관련해서는 이러한 성장 일변도의 가치관 자체가 거의 ‘성장의 망상’이라고 규탄하고 있는데요.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한번 이행과정에 들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면 더이상 수정 가능성과 돌이킬 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확신을 강요해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자의 행로에서 서구권의 좌파 정치와 진보 세력의 철지난 이데올로그에 사로잡혀 견제와 비판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먼저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아직도 사회 전반의 빈곤의 문제에 집착해 신자유주의적 우파와의 정치 대결에서 힘을 잃고 내적 동력을 상실했으며, 이 점은 결국 신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견제, 비판하지 못해 사실상 많은 시민의 고통을 낳게했다는 측면의 포괄적인 ‘좌파의 실패’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그동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다룬 여느 책들에서는 볼 수 없는 꽤 상세한 내용인데요. 흔히 많은 논저에서 ‘그 동안 진보 좌파의 지리멸렬’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의 충분한 연유와 결과를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이 실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뒷배경을 갖고 있든, 면밀한 해석상의 창의력을 갖고 있든 간에 어떤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가 우연히든 아니든 나타났다면 우선 그것을 이해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수단 내지는 방법, 이론 등이 필요합니다. 신자유주의가 그러한 이행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경제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면 반대의 혹은 충분히 의심을 갖고 살펴볼만한 상대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했음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 좌파가 궤멸해서 어떠한 사회적 병리를 낳았는지는 익히 목도했습니다. 이들이 우파와의 표심 다툼과 정권 획득과 관련해서 특유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발밑에 던져버리고 욕망의 본성으로 이합집산해 버린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자유의 적은 집단주의와 국가권력”이라는 전제와 함께, “신자유주의 이전까지 시장에서의 권력만이 아니라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의 권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시장에서의 권력 밖에 갖지 못하나 그것마저도 일개 개인의 권력이 기업과 경제 권력의 힘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이처럼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구불변해야 하는 민주적 권리”라는 절대 명제 입니다. 그동안 뉴라이트나, 시카고 학파, 밀턴 프리드먼과 아인 랜드와 같은 이들 혹은 아류들이 민주주의의 과잉 시대 혹은 민주주의의 왜곡에 주도 면밀한 쳬계로서 목소리를 높여 왔는데, 이들이 그만큼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만큼 더불어 우리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주의도 그보다 더 중요하고 양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같이 민주주의는 어떤식으로든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내몰려서는 안되는데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전방위적인 세계화는 시장이 필요하고 갖고 싶은 만큼의 권력을 종래 근대이념인 자유와 인간 해방의 민주주의 체제로부터 우선 지위를 할당받아 많은 시민들의 대다수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식위에 있던 성장 제일주의 내지는 성장 유일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 책은 담고 있습니다.
본디 이 만큼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인 이식이 이뤄진 상황에 다시 탈성장주의를 부르짖는 것은 유토피아적 발상이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이 있어 왔습니다. 저자는 이것과 관련해 2장과 3장에서 화폐 거래와 상품 거래 등으로 이루어진 소비 지상주의나 부와 행복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가지 자료와 통계를 대입하며 그것이 허구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리고 ‘성장 유일주의-신자유주의-소비지상주의’를 함께 비판하고, “금전이 행복의 척도라는 관념이 강요될 수록, 사회 병리를 더욱 심화시킨다”고 앞선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이 “명백한 진실에 근거한 비판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진실을 부인해야 득을 보는 사람들이 그 비판을 무력화하려고 들 것”이라는 분석 또한 이 정도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탈성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상주의적이고 유토피아주의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의 명백한 진면목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소비 지상주의와 자본주의 논리는 화폐의 합리성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덧붙이며, 대대적인 마케팅과 만난 소비 지상주의가 다수의 삶에 어떤식으로 작용했는지는 그 결과가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통찰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과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서 소비 자본주의 시대로 급격하게 변질됨으로 애초에 자본주의의 시스템의 전체적인 수단의 틀에 그치지 않고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개인들이 소비를 통해 각각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또한 자기 망상에 의해 지탱되는 과소비 사회다”라고 평가하고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환경 파괴와 소비에 의존하여 사는 시스템 자체를 잉태했다는 것은 또한 병리의 한 형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어쩌지 못하는 것은 “세계화의 본질이 성장과 소비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쉴 새 없이 확산된다는 데 있다”고 5장과 6장을 통해 저자는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앞선 책에서 가이 스탠딩은 시장은 이제 ‘민주주의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자세는 작게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받는 것이며, 또한 크게는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테제로 인해 후퇴했던 사회적 요건과 사회적 보장 등을 다시 민주주의적 논리로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일찍이 레이건이 목소리 높였던 낙수효과는 허황으로 끝났고 시장의 자유가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것도 다수의 고통으로 자리매김 했으며, 우리의 보편적인 근대가 왜곡되었던 것을 이제 ‘탈성장’ 아니더라도 뭔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그런 의미로 이 책의 마지막 8장은 이러한 의의를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소비 지상주의가 그 자체로 세련된 표상과 문화적 소비 등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은 이면의 허상을 가리기 위한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작업이라 불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