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사고의 프런티어 3
스기타 아쓰시 지음, 이호윤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저자인 스기타 아쓰시는 도쿄대의 법학부를 나와 현재 호세이 대학 법학부 교수로 있는 학자입니다. 참고로 호세이 대학은 도쿄 6대학 중의 한 곳으로 일본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대학이기도 합니다. 또한 약간의 논외로 저자는 일관되게 자민당의 아베 정권을 비판해 온 것으로 유명한데요. 일본인들 특유의 정치적 발언을 아끼는 성향을 고려한다면 꽤 드문 케이스라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바로 2016년에 번역 출간한 그의 다른 논저 ‘정치는 뉴스는 아니라 삶이다’ 역시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글이라 조만간 구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소개해 드릴 이 책도 역시 지난번에 서평을 썼던 다카하시 데쓰야의 ‘역사/수정주의’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 중 하나이고,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이 주관하여 푸른역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일찍이 계몽주의 시대에 장 자크 루소로 대표되는 인민주권의 개념에서 일반의지와 함께 이 권력이 꽤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는데요. 절대권력을 추구했던 이전의 왕정 시기에 권력의 주체는 소위 신에 의한 대리자를 자청했던 왕정의 지배자들에게 권력은 국한되어 왔습니다. 계급적 신분 사회를 따로 논하지 않더라도 로마 교황이 실제 정치해서 패퇴한 이후로 봉건시대를 거쳐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로열 the royal’이 아닌자들이 감히 이 권력을 논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차 열리게 된 논의의 의미로 정치학자 스티븐 루크스이 정의한 권력으로 이 책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소위 ‘A가 B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는 대표적 정의가 수많은 권력과 권력론을 논하는 책들의 거의 첫머리에 실리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권력과 주체의 관계로 시작되어 자유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에서 후자에 이르는 권력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누구에게 부여될 수 있는가’라는 정치철학적 물음에 맞닿게 됩니다. 이 점은 위대한 정치학자인 로버트 달의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와 함께 일맥상통해 보이기도 합니다. 달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원화 될 수 있는 권력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말이죠. 그래서 이 글의 1장은 이런 논의적 연계로 시작되고 있고, “인간은 늘 명확한 의도를 가지지는 않는다”는 증거는 바로 권력의 명확한 의도와 정확한 주체화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뒤이어 2장에서 논하겠지만 권력 자체를 종식시키려고 하는 이들은 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제거해야 하지만 이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할지는 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 권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흔히 자유주의자들처럼 “권력은 아래로부터 온다”는 푸코의 명제에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보여왔던 것처럼 이 권력의 논의 과정 자체가 크게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위험성도 갖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인민 주권하에 인민은 이미 이성을 겸비하고 있는 존재로 가정되고 있지는 않다”는 저자의 평가는 포괄적인 논의의 측면에서 꽤 의미심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공화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의 이행이 성숙된 국가들에게서는 권력 자체는 바로 아래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공안국가의 모티브가 된 홉스의 파놉티콘을 격렬하게 비판한 미셸 푸코는 권력이 위에서 시작되면 어떠한 부작용을 갖고 있는지 탐구한 학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언어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권위를 차치한다 하더라도요. 사실상 푸코가 비판한 교도소와 학교 및 각종 규율 시스템을 장착한 ‘규율권력’을 면밀하게 분석한 것은 점차 ‘경제적 문제’가 시민들의 정치와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정치권력이 사회 전반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하는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전통적인 권력의 의미가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근대를 넘어 오늘날에 이르는 시간 동안 칼 슈미트가 다원주의를 공격하고. 적 아니면 친구라는 대칭적 사멸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의 일원화를 반대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주권론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점에서는 매우 웅변적이지만, 다른 한편 비판이 그들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한계를 저자는 같이 논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러한 일원화된 권력에 대해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2장에서 다루는 중요한 문제인 권력과 폭력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인 부분이 있는데요. 일전에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란 글에서 ‘국가 폭력이 너무 만연되어 그것이 폭력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확산된 시대적 분위기’에서 합당한 권력과 폭력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정당한 폭력이 기반되어야 한다든지, 어떻게 하면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할 수 있는지 서로 다른 질문들이 철학적 물음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이에크 조차도 시장에서 강요된 권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고 타인과 타인과의 문제에서도 언어 폭력을 비롯한 다변화된 폭력의 가능성, 앞서 언급한 슈미트의 적과 나와의 개념 등 꼭 대칭적 관계 뿐만 아니라 한나 아렌트가 언급했던 비대칭적 관계에도 이러한 폭력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팔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를 이를 명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앞선 권력의 합법적 폭력의 정당성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권력과 폭력의 문제는 일면화 될 수 없는 복잡성을 갖고 있다고 이 글을 통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끝으로 오늘날 보편적인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있게 한 권력과 자유와의 관계, 자유의 심도 있는 논의들은 앞선 논의 형태가 대칭적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권력과 자유는 서로 따로 규명을 해야 할 정도로 정치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 자유’를 확대시켜 궁극적으로 인간의 해방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근대의 역사 자체가 해방과 자유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며, 권력이 우리 사회에게는 법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갖고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해방 자체를 한번에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약간 무모하다’고 여기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지금까지 논의하고 있는 권력의 개념이 ‘아래에서 오는가, 위에서 오는가’의 단편적인 물음보다 권력 자체가 법이 보증하는 대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고 비로소 우리의 해방을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해 먼저 추궁해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권력이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여파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존 롤스를 언급하기에 앞서 보편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해 권력 스스로의 책무를 벗어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중요할텐데요. 오늘날 선출되지 않은 경제 권력들의 과도한 대두와 돈과 관련된 정치 권력들의 전자에 대한 편입은 전체적으로 권력론 자체를 다시 써야 하는 시기에 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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