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 세상을 바꾼 400년의 시간 흥망의 세계사 1
후쿠이 노리히코 지음, 송태욱 옮김 / 다른세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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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여성 학자로 여겨지는 후쿠이 노리히코는 일본 도쿄 출신으로 프랑스 근현대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일본 명문인 도쿄의 가쿠슈인 대학의 학장이라는 설명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만 한가지 저자와 관련하여 명확하지 않은 점은 박사 학위를 중도에 그만 두었다고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장을 역임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한국과 일본의 대학 체계가 달라서 그런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저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나오지 않았는데요. 윗 부분은 이 정도 언급으로 정리하고 싶군요. 이 책은 지난 2008년 일본 고단샤 출판사 창사 100주년 기획 시리즈 물로 출간되어, 당시 일본 서점가에서 큰 인기를 누린 바 있습니다. 국내에는 지난 2013년 번역 출판되었고,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쓴 필립 T. 호프먼의 ‘정복의 조건’이라는 글과 후쿠이 노리히코의 이 책은 꽤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이 글의 저자는 유럽이 세계의 패권을 성공적으로 획득하게 된 연유에는 바로 ‘공업화와 국민국가’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2차 공업 주도의 공업화로 둔 것은 아마도 지난 일본이 미국 페리제독에게 겪은 ‘흑선’의 존재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봤습니다. 여기에는 “기계 공업이 실질적으로 발전하기 전인 18세기 중반까지는 경제적인 면에서 유럽이 아시아에 뒤쳐졌다고 보는 게 맞다”는 분석과 이 공업화는 연계하여 설명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의 성공적인 산업혁명이 유럽의 모든 산업 생산 역량의 획기적인 증대로 나타나고 그런 결과물로써 농업과 수공업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중공업의 생산 확대는 수많은 식민지들에서의 다양한 자원 수집에 기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점은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으며, 이렇게 공업화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 최초의 장면을 저자는 15세기 초 포르투갈이 인도한 유럽의 대항해시대로 꼽고 있습니다. 전면적인 전 유럽의 상업부흥을 일으킨 이 대항해시대는 상업 활동 하나만으로도 부를 축적하는 국가들을 탄생시켰고, 다시 이러한 부를 상업활동과 여타 군사력에 재투자 함으로써 유럽이 단순히 합리주의적 상업활동에 기반한 흐름만으로 유럽의 근대화를 설명하기는 분명 어렵습니다. 다만, 상업 부흥과 계몽주의의 발생은 매우 연관이 있어보였고, 영국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국왕의 왕권을 제한하기에 이른 과정도 바로 이러한 상업의 이윤 가치가 날로 증대됨에 따라 돈의 힘이 어떠한 것을 이뤄낼 수 있는지 ‘상업주의 인간’의 탄생을 목도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상업의 부흥은 유럽 각국의 부르주아 계급을 잉태했고, 이들이 1770년대 미국 독립혁명과 이후의 프랑스 혁명까지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저자 역시 “프랑스 혁명이 복합적인 사건이었다는 인식 자체는 오늘날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다.”는 분석 또한 저의 판단과 일치합니다. 즉, 이 프랑스 혁명이 몇번의 굴곡을 거쳐 결국에는 유럽에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나중에는 나폴레옹 자체가 왜곡된 정치욕으로 말미암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존계비속에 의한 전 프랑스 통치라는 황당한 체계를 만들어 낸 치명적 선택이 대 프랑스 동맹을 만들어 내고 끝내 자신까지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지만, 초기 프랑스 혁명정부가 주변의 이웃 국가들과 대결할 즈음에 혁명의 이념의 불꽃을 조금이라도 길게 끌고 갔으면 전유럽에서의 국민국가 출현이 조금 더 앞당겨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영국,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의 식민제국과 관련하여 저자는 ‘박애적 제국주의’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역사학자 더든도 이와 관련하여 ‘계몽적 통치’에 주목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박애나 계목 통치나 하는 말들은 그저 제국주의적 식민 통치에 대해 덧칠을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며, 아직도 이와 관련된 역사의 정리 또한 채 마무리도 되지 못했습니다. 식민지 경영을 몸소 실천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해당 지역의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미명하여 인력과 자원들을 비롯한 강제 징발 및 소비기지로 만든 것이 과연 계몽이나 박애주의가 들어갈 만한 것들인지 심사숙고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합니다.

끝으로 후쿠이 노리히코의 이 책은 상당한 분량에도 크게 고려할 만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 당시, 전체주의의 책임을 계몽주의에서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사조에 대한 비판과 히틀러에 대한 짤막한 그녀의 평가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만, ‘국민주의로서의 내셔널리즘’이라는 분석은 꽤 마음에 들기도 했습니다. 이론적 분석이 꽤 귀담아 들을만 하다는 말씀입니다. 더불어 쿠바의 노예 해방 운동인 성 도밍그의 해방운동과 관련해 지도자인 해방 노예 ‘루베르튀르’라는 이름을 글에 적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 역시 꽤 많은 연구를 기울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책 외적으로 한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일독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에 남을 듯 한데요. 무슨 무슨 어려운 용어가 전무함에도 이상하게 읽기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제 마지막 소회로 남겨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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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 현대 대중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정치문화 비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장선영 옮김 / 누멘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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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철학자이자 특히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1931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알폰소 13세를 퇴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사상가로서 많은 논저를 쓰기도 했는데요. 지금 소개해 드릴 이 ‘대중의 반역’이라는 글은 1930년에 출간되었던 것으로 그의 독특한 사상이 잘 녹아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절판된 것을 포함해 여러 출판사 판의 번역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역사비평사 판이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누멘의 번역본을 구해 읽게 되었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저자 자신의 주요 논점은 거의 1부에, 그리고 유럽의 도덕주의적 몰락과 더불어 세계 지배의 역할을 내려놓게 된 현재의 유럽의 대해 여러가지 논의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책 제목대로 말하고자 하는 ‘대중의 반역’은 바로 “야만의 시대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이것은 “직접적인 행동”을 확실하게 꼬집어 야만이라고 일컬으며, 이것과 더불어 대중이 ‘국가를 자신의 것 또는 자신과 일체화 시켜, 국가주의에 들어서는 것’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방금 저자를 소개하면서 그가 자유주의를 대체로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본질과는 논외로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논점이 너무나 염세적이고 회의적이며, 글의 논조로 보아 딱히 자유주의를 옹호하거나 인간의 자유에 대해 긍정적이라 볼 만한 부분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는 1부 7장에서 자신의 이 글을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점은 2부에서 논의될 유럽의 ‘도덕적 타락’과 더불어 “이지적, 도덕적 불복종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하지 않고는 이 책이 뜻하는 정리에 최종적인 명백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그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점은 “군중에 대한 개념 자체를 어디까지나 양적이고 시각적으로 구분하고, 사회를 다수파와 우수한 소수파로 구분하는 것 등” 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독창적 정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우수한 소수파’에 대해 일견 능력있는 엘리트 집단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것으로 명확하지는 않고 ‘특권’을 갖고 있는 계층 내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을 보이는 이들’이라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대중과 관련된 해석에 있어서도 ‘평균인’ 내지는 ‘평균화의 시대’로 정의 내리며, ‘다양한 삶을 즐기는 대중’, ‘사회의 보편적인 조류’라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유럽 (아마도 1차대전 이전의 시기)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예전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보다 나은 삶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이 대중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삶을 누리는데 어떠한 조력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배은망덕한 일이다.”라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그가 분석하는 사회는 ‘과학자-전문직-부르주아’의 순서대로 그 능력과 책임이 구분되어 왔으며, 여기에는 일반 대중(저자가 항상 강조하는 대로 양적이며, 시각적인 구분으로서)이 그러한 기여를 해왔는지에 대해 의구심 보다는 그 자체가 회의적인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확연히 찬란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냉정하게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단을 시도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는 대중이 ‘스스로 택하는 규율의 삶’을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이 점은 소수의 ‘선택된 인간의 삶’만이 존재할 것으로 저자는 예측합니다. 대중에 의한 권력이 최대의 사기라고 언급하며, 이것에 대한 대칭을 대중 스스로가 규율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일종의 속죄를 바라는 이유가 뒤이어 나오는 대중이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주의를 출현시키고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자가 미래의 파시즘을 경고하고,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같은 새로운 정치 시도는 본질적인 후퇴의 그 좋은 본보기다.”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서 19세기의 자유주의를 극복해 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도 파시즘은 그런 자유주의를 결코 극복해 낼 수 없다고 단언하고 파시즘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그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파시즘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히 공감이 갈 만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저자는 국가라는 시스템 내지는 조직체가 매우 불안하다고 강조하고, 여기에 몸을 맡기는 대중들이야 말로 위험하고 끔직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중인들이 경박한 조류에 온몸을 내맡긴다”면서도 다수의 대중이 지성을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계몽의 시대를 겪은 유럽인이 판단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대중은 자신의 운명을 잘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거역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역이다’ 라고 하는 점도 사회적 규율과 사회를 인도하는 지배체제에 복종하라는 뜻이기도 하여 오늘날에 이런 그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앞선 볼셰비즘과 관련해서도 ‘혁명’의 기운에 경고하고 대중이 정치적 인식을 갖는 것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잠정적 명령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의 기술발전과 과학 진보의 시대에 놓여 있는 대중들의 역할을 의도하지 않은 대로 움직이면 반역과 같고, 규율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냥 대중이라고 못박는 것은 불행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실 이 책은 많은 우파들에게 영감을 안겨 주었고, 특히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자들과 엘리트 지배 체제를 강조하는 소수의 기득권들에게도 이론의 뒷배경을 더한 글이기도 합니다. 물론 타인과 타인들이 모인 사회의 공동생활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사회의 규범을 중요하게 여기는 등의 사회 일반의 선을 중요하게 여긴 점 등은 물론 저자의 혜안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부의 12장에서도 “평균인은 그 세계 안에서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물질적 혜택만을 느꼈지, 고민 따위는 도무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등과 13장에서 최대의 위험은 국가라고 일갈하는 부분 또한 여러모로 현대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인 “국가를 마치 소유물로 여기려 드는” 대중인의 행태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 명확하게 서술되지 않았고, 장자크 루소의 인민 주권을 거부하는 듯한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러한 주권을 가졌다.”는 신랄한 문장도 어떤 여지를 갖는 것 또한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끝으로 저자의 이 책과 관련해 자신이 진정 말하고 싶었던 점은 “민중의 힘과 사회의 힘의 평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대중의 힘이 사회를 넘어서고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반역과 쇠퇴 및 몰락이라고 여겼다면 자신을 넘어서고 자신의 삶을 도약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부 소수의 우수한 자들만의 계획된 사회가 과연 모두의 선이 될 수 있을지는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확대된 민주주의를 초민주주의라 지칭하면서 민주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다수에 의한 중우정치라 할때,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은 단지 권력에 복종하는 편이 낫다라는 논법을 설파하는 자들이 아직도 많은 시점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책이 더욱 오독되는 일이 없기를 단지 바라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자유주의조차 극복해야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저자의 논법 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어려운 편이 속하는 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약간 사족으로, 본문 14페이지와 32페이지에 오타를 발견했는데요. 두 군데의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도 출판을 한 출판사에 더할나위 없는 실망을 느낍니다. 이것은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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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에 대하여 -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
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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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서 자이니치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거쳐 현재 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서경식 선생과 일본 후쿠시마 출신으로 도쿄대 프랑스과를 졸업하고 현재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교수이자, 일본 내에 자크 데리다에 관한 권위자로 명성을 얻은 대표적 리버럴 지식인 다카하시 데쓰야의 대담집 ‘책임에 대하여’를 일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특히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를 꽤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이 책에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소수의 희생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의 행태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서경식 선생과 관련해서는 2017년 번역 출간된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를 읽고 일본에서 선생이 겪은 경험들을 통해 실로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소회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현대 일본의 본성을 묻는 20년의 대화’라는 부제는 우리에게는 실로 의미심장하며, 두 사람이 엮은 대화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일본 국민의 가감없는 실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8년 8월 처음 일본어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8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서경식 선생이 이 책의 서문에 쓴 한 문장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국민 다수가 자숙하며 예속의 정도를 점점 심화시킬 때, 전체주의의 완성된 행태를 목도할 것이다.” 이것은 단연코 현재의 일본인들을 지칭한 문장입니다. 특히 “자신들의 역사를 판단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무시했던 일본인들로서는 그 끝의 결과가 어떤식이 될지는 매우 자명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역사를 판단하고 응답하게 될 때 아베 신조와 같은 인물은 설 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선, 이 글은 전체 4장의 주제와 한 분량의 자료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2장인 ‘일본의 본성’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졌습니다. 1장에서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전쟁 책임, 전후 책임, 식민 지배 책임 중 어느 것이든 1945년에 끝난 일본 제국 체제에 대한 책임을 불문에 붙여 왔다는 점, ‘중심부 일본 국민’이 그에 대한 판단을 회피해 왔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일본 국민이 스스로 시민이 되기 보다는 범접할 수 없고, 건드릴 수 없는 전통적인 일왕의 신민이 되기를 자처하면서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판단하고 응답하는 어떠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이를 통해 일본 사회의 곳곳에 왜곡과 불철저함을 만들어냈다는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의 결론에 매우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200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에서 있었던 과거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유럽 종주국들의 도의적 책임을 도출한 ‘더반 회의’와 유사한 ‘여성국제전범법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NHK가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한 내용을 포함해 일본 내에서 역사문제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밝혀내는 등의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자학 사관이라는 얼토당토 되지 않는 입장과 일본 지식인들이 정치에 전면에 나서 비판을 가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풍토가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2장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박유하 씨의 최근 논란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는 읽지 못했으나, 그의 법정 공방과 관련해 류시민, 김규항, 홍세화, 고종석 씨 등이 박유하 형사 기소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상적 자유를 옹호한 움직임으로 비록 박유하씨가 꽤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을 해왔지만 개인 자유의 원칙적인 측면에서 법원에 의한 판단을 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박유하 씨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특히 박유하 씨의 ‘화해를 위해서’와 관련하여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는 “주요 논점으로 조선인 업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일본군 내지 일본군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이 명확하다.”며 자신은 이것에 설득당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전에 어떤 일본 지식인은 우선 자국민들을 용서하고 구제해야 비로소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을 돌아볼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다분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박유하 씨가 지난 1995년에 발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조성으로 일본이 사과한 것과 같다는 식의 주장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국민 기금이 있으므로 일본의 사죄의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인데요. 사실 박유하 씨의 ‘제국의 위안부’와 ‘화해를 위해서’는 그 주장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일본내의 우익과 한국의 사과 요구에 비판적인 이들의 논리로 교묘히 매개되어 왔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에서 서경식 선생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매우 곤란한 화해가 가능하냐는 이야기를 아마도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혼동하면서, 화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개개의 피해자들에게 국가 간의 화해를 막는 존재라는 위치를 부여했다”고 해석합니다. 더불어 일본내의 리버럴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인 우에노 지즈코와 같은 사람이 이러한 한국의 태도와 정대협과 같은 단체를 내셔널주의적이다고 오도하는 것은 매우 큰 문제임은 자명합니다. 역사 문제와 관련해 개인이 한 국가를 상대로 진실과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일이며, 이것을 한국인의 민족주의적 태도라고 우회 비판하는 것은 그만큼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물며 일부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치적이다 라고 언급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박유하는 일본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방향의 논리를 세우고 있다”는 주장을 가볍게 들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재 나무위키에도 올라와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박유하 씨의 ‘화해를 위해서’의 국내판에는 없고 일본판에만 있는 내용중에 “일본 지식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물어 온 정도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한국은 아직도 가져본 적이 없다”는 한줄이 대체 무슨 의도인지는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저도 역사의 고통을 저울질을 하는 것을 무엇보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행위자의 범죄를 여러 수단으로 가리는 것은 피해자를 두 번 욕보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오늘날 일본이 2001년 더반 회의를 거울 삼아 도의적 책임 이외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수단을 강구해 오지 않았나 유추해 보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박노자 교수가 언급한대로 일본이 저지른 위안부 범죄는 ‘제네바 협약’, ‘헤이그 협약’, ‘국제 여성 인신매매 방지 조약’ 등에 대한 위반이므로 그것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근거는 매우 명확하다는 것을 여기에 남겨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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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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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 불문과 출신으로 프랑스 현대사상 및 푸코와 라캉을 연구하고 말년에는 고베여학원대학에서 은퇴해 현재 명예교수로 있는 우치다 다쓰루와 와세다 정치학과 출신으로 정치학, 사회사상을 연구하면서 현재는 교토세이카대학의 교수로 있는 시라이 사토시의 두 번째 대담집 ‘사쿠라 진다’를 일독했습니다. 우선 시라이 사토시 교수는 얼마전 번역된 ‘영속패전론’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칭하고 있는데요. 이것과는 논외로 대담에 참여한 두 사람 다 일본 내 대표적인 리버럴 지식인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첫번째 대담집은 2018년에 번역 출간된 ‘속국 민주주의론’입니다. 국내에는 두 번째로 번역 출간된 이 ‘사쿠라 진다’는 일본의 전후 70년이라는 주제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올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한 가지 출판사의 착오인지 아니면 알라딘의 임의 표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표지에는 저자 이름이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로 표기되어 있으나, 알라딘 홈페이지에는 우치다 타츠루, 시라이 사토시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양자간에 합의를 보던 어떻든 간에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일단 이 책은 총 4장의 큰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글을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일본의 국내 정치와 대미관계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 문제 및 역사수정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일본 내 리버럴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 의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상 일본이 미국의 속국 지위에 놓여 있는 것을 일본 정부가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건지 아니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외교와 군사 문제를 미국에 위임하는 것이 피치못한 문제로 보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과 함께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는 패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 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부터 미국의 안보 이익을 위한 일본의 군사 기지 지원과 같은 ‘배려예산’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얼굴을 들고 다니는 많은 일본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무의식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전후 국체호지를 위한 미국 정부와 일본 파시스트의 영합이라는 측면과 미일안보조약을 통한 평화헌법의 존재로 인해 일본인들 스스로 ‘군사적 발기 불능 상황’이라고 자조하면서도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하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그 정치인들의 행태를 꼬집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반세기 이상을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안주해 온 일본이 얼토당토 않게도 ‘전후의 탈각’을 목표로 ‘자학 사관 퇴출’과 ‘역사수정주의’를 주요 정치적 사업으로 확대시켜왔는데요. 지난 2013년 아베가 고노 담화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했을 때, 오마마의 백악관이 이에 대해 아주 불쾌한 평가와 함께 압력을 행한 것이 아베의 궁색한 변명과 함께 이를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역사 수정의 시도는 주요 주변국인 한국과 중국의 어떠한 의견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단지 백악관의 시선이 도쿄에 닿을때, 반응하는 것에만 일본 정부에게는 중요했던 것이죠. 이에 관해 시라이 사토시는 “분명 과거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가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최근 부흥 올림픽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도쿄 올림픽에 대한 주변국들의 보이콧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점도 단순히 동일본 대지진 사태에 따른 환경 문제에 대한 측면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과 한국에서 증가한 ‘역사 압력’ 상황을 우려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도쿄 올림픽 보다는 ‘후쿠시마 올림픽’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 책과는 논외로 일본이 벌이고 있는 경제적 술수를 보노라면 이 후쿠시마 올림픽에 대한 좀 더 합리적인 대응이 필요하지 않나 판단해 봅니다.

과거 일본의 전중 세대는 “절대 말하지 않고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는 그 소름끼치는 예의 침묵과 이를 바탕으로 과거 여러 장소에서 벌어졌던 일본군에 의한 지옥의 광경들을 왜 오늘날 다시 끄집어 내야 하는가라는 침묵의 정당성을 일본인들 스스로가 자의적인 판단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는 오늘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대한 꽤 설득적인 매커니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무덤까지 안고 가는 전중세대의 침묵과 증인과 증거가 없다는 핑계로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이러한 과거 역사 문제들이 일본을 자학 사관에 빠지게 만든다는 이상한 해석이죠. 더군다나 평화헌법을 수정해 동맹국인 미국의 군사 협력을 좀 더 수월하게 하겠다는 본질을 흐리는 주장을 함께 곁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3장에 더해져 있는 논의들은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을 혐오하는 책이나 혐오 발언에서 알 수 있는, 하시모토 도오루와 아베 신조의 인격에서 배어나는 반지성주의, 또 그런 것을 환영하는 폭력적인 풍조” 등이 이를 말해준다는 우치다 다쓰루의 비판은 꼭 일본인들이 귀담아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미밀 동맹에만 기대어 방향타를 잡고 이를 위해 역사수정주의가 뒷받침하는 일본의 대외 정치의 요점은 “일본이 아시아에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와 일맥상통합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냉전 시기 이후에도 왜 미일 동맹은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맹이 존속과 의존적인 측면으로 일본이 스스로 미국의 속국임을 증명한 것밖에 되지 않았느냐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혐오하는 가당치도 않은 국제 관계와 자신들이 자유 민주주의적 가치를 믿고 있는 서방 진영이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퇴행적이고 전혀 되돌아보지 않는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는데 있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일본인들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님은 분명해보입니다. 끝으로 저자인 우치다 다쓰루는 2015년의 한국은 “확실히 민주화가 뒤쳐져 있고 정치 시스템도 문제가 많습니다”라는 표현으로 당시의 우리를 돌아보고 있는데요. 사실 금방 발끈하다가도 옮긴이가 달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주석으로 저자가 그렇게 받아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후에 촛불 혁명으로 불의한 정권을 끝장냈으니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는 그 위상이 달라졌다고 볼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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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듀이 지음, 김진희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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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꽤 낯익은 교육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존 듀이는 미국 버몬트 대학을 졸업하고 존스홉킨스 대학에 수학한 뒤 헤겔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미국의 독특한 철학인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적 확대를 일군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개인적으로 존 듀이는 민주주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단순한 교육 분야의 이론가 보다는 공공철학자로서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는 시민들이 정치적 관심보다 즐길 오락 거리들이 많아지면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는 정치철학의 측면에서 공공성의 관심을 기울여 온 측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그의 1935년에 출간된 논저인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은 세계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하고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사실상 지지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제는 ‘Liberalism and Social Action’ 으로 국내에는 과거 1980년대에 판권 없이 일역판을 번역해 출간된 책들이 있습니다만 2011년 책세상에서 번역 출간되어, 2018년에 대사 개정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에 나온 개정판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총 3장의 구분으로 되어 있고, 글의 마지막에는 꽤 면밀한 해제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존 듀이가 밝히는 자유주의의 핵심은 프래그머티즘에 입각했다고 봐야하는 ‘실용적 자유주의’ 내지는 ‘진보적 자유주의’입니다. 우선 2장에서 존 듀이는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자유주의 혁명가들과 이론가들 및 자유주의자들이 분명 인간의 자유를 위한 세상을 처음 열었던 것을 기념비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노력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선언적인 의미도 담고 있는데요. 다만, 당시 세계 대공황 이전 혹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자유주의는 크게 변질되어 1장의 초입에서 “자유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에는 늘 자본주의의 지배자 편에 서는 자들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결국 듀이가 밝히는 쓸모있고 유용하며, 민주 정치에 도움되는 자유주의는 제도 구성의 철저한 변화와 그 변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행위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급진적 인식을 주창했습니다.

결국 자유주의 사상이 가장 결핍된 문제는 지적 및 지성에 대해서 기존의 자유주의가 인간 바깥의 고립된 역할을 지지했고, 빅토리아 시기의 긍정의 시대 이후 과학과 기술의 놀라운 발전으로 지성의 문제를 편협하게 해석한 것은 그는 시대상과 맞지 않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습속을 깨고, 인간들로 하여금 실제 사건에 근접하는 정신과 지적 그리고 도덕적 양식의 생성에 도움을 주게끔 하는 것이 자유주의가 개선하고 변화해야 되는 점으로 또한 인식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유주의가 “지적-도덕적 방향성을 지닌 사회조직으로 조직화 하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거의 무능했다”고 비판하며, 1장에서 자유의 문제를 그 시대 상황에서 재정의해야한다는 근본 원칙을 망각했다고 보는 시각과도 이 점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개인에게는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동정심의 실천이 덕을 갖춘 행위의 기준이다”라고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도 그러한 맥락에 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지성을 고립된 요소로 파악하는 것은 현실 정치에서 시민들의 정치철학적 질문들을 막아서는 문제로 비화될 수 있으며, 모두가 공유하고 발전시킨다는 대의 명제로서 지성의 역할을 반대하고 특별한 계층, 특수한 인물들만이 소유 내지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전반적인 인간 사회의 진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3장에서는 현 시점과 약간 다른 인식적 배경이 있었는데요. 당시 미국 정치 무대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독립되고 분리되어 있는 상황이 오늘날의 보수정치와 신자유주의의 밀접한 관계와는 상이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일찍이 제러미 벤담이 강조한 공익의 측면에서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 의미있는 기여를 했다면 새롭게 발견된 자연권과 더 나아가 기본적인 자유의 확대가 인간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불확실성을 불식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예견해보기도 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전반적인 시대긍정론과 같은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과거의 역사에 개념치 않고 단지 실용주의적 입장에 치중했다는 듀이의 평가에 긍정하면서도 이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입장과 지적 이론의 견고함을 강조하기 위해 수도 없이 과거의 역사를 인용하는 것은 역사의 원칙없는 차용이 어떠한 인식 파괴를 불러일으켰는지 명백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1800년대 후반부터 그 이후의 자유주의가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꽤 변혁적이었던 다윈과 멜서스의 진화론의 다수를 받아들여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이들이 자유주의가 양산한 불평등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론으로 한정해 버린 것과 같은 자유 자체가 교조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는 폐해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의 경제 자유와 그에 따른 정치의 불간섭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교조화가 되어가는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상적 주장에는 반드시 그것을 상식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하며, 존 듀이가 강조했듯이 그 시대에 맞는 사상, 그 시대에 부합하는 사상으로 철저히 분석하고 개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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