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역 - 현대 대중사회의 본질을 파헤친 정치문화 비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장선영 옮김 / 누멘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철학자이자 특히 자유주의를 신봉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1931년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인 알폰소 13세를 퇴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사상가로서 많은 논저를 쓰기도 했는데요. 지금 소개해 드릴 이 ‘대중의 반역’이라는 글은 1930년에 출간되었던 것으로 그의 독특한 사상이 잘 녹아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국내에는 절판된 것을 포함해 여러 출판사 판의 번역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역사비평사 판이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누멘의 번역본을 구해 읽게 되었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가장 최근에 출간된 이유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저자 자신의 주요 논점은 거의 1부에, 그리고 유럽의 도덕주의적 몰락과 더불어 세계 지배의 역할을 내려놓게 된 현재의 유럽의 대해 여러가지 논의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책 제목대로 말하고자 하는 ‘대중의 반역’은 바로 “야만의 시대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이것은 “직접적인 행동”을 확실하게 꼬집어 야만이라고 일컬으며, 이것과 더불어 대중이 ‘국가를 자신의 것 또는 자신과 일체화 시켜, 국가주의에 들어서는 것’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방금 저자를 소개하면서 그가 자유주의를 대체로 신봉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본질과는 논외로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의 논점이 너무나 염세적이고 회의적이며, 글의 논조로 보아 딱히 자유주의를 옹호하거나 인간의 자유에 대해 긍정적이라 볼 만한 부분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는 1부 7장에서 자신의 이 글을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점은 2부에서 논의될 유럽의 ‘도덕적 타락’과 더불어 “이지적, 도덕적 불복종을 철두철미하게 분석하지 않고는 이 책이 뜻하는 정리에 최종적인 명백성을 부여할 수 없다”고 그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점은 “군중에 대한 개념 자체를 어디까지나 양적이고 시각적으로 구분하고, 사회를 다수파와 우수한 소수파로 구분하는 것 등” 의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독창적 정의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우수한 소수파’에 대해 일견 능력있는 엘리트 집단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것으로 명확하지는 않고 ‘특권’을 갖고 있는 계층 내지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을 보이는 이들’이라는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대중과 관련된 해석에 있어서도 ‘평균인’ 내지는 ‘평균화의 시대’로 정의 내리며, ‘다양한 삶을 즐기는 대중’, ‘사회의 보편적인 조류’라 또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과 관련하여 저자는 현재 유럽 (아마도 1차대전 이전의 시기)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예전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보다 나은 삶의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이 대중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삶을 누리는데 어떠한 조력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이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배은망덕한 일이다.”라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그가 분석하는 사회는 ‘과학자-전문직-부르주아’의 순서대로 그 능력과 책임이 구분되어 왔으며, 여기에는 일반 대중(저자가 항상 강조하는 대로 양적이며, 시각적인 구분으로서)이 그러한 기여를 해왔는지에 대해 의구심 보다는 그 자체가 회의적인 일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확연히 찬란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냉정하게 현재 우리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진단을 시도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는 대중이 ‘스스로 택하는 규율의 삶’을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이 점은 소수의 ‘선택된 인간의 삶’만이 존재할 것으로 저자는 예측합니다. 대중에 의한 권력이 최대의 사기라고 언급하며, 이것에 대한 대칭을 대중 스스로가 규율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일종의 속죄를 바라는 이유가 뒤이어 나오는 대중이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주의를 출현시키고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자가 미래의 파시즘을 경고하고,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같은 새로운 정치 시도는 본질적인 후퇴의 그 좋은 본보기다.”라고 말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렇지만 반대로서 19세기의 자유주의를 극복해 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도 파시즘은 그런 자유주의를 결코 극복해 낼 수 없다고 단언하고 파시즘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그가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파시즘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충분히 공감이 갈 만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저자는 국가라는 시스템 내지는 조직체가 매우 불안하다고 강조하고, 여기에 몸을 맡기는 대중들이야 말로 위험하고 끔직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대중인들이 경박한 조류에 온몸을 내맡긴다”면서도 다수의 대중이 지성을 갖출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계몽의 시대를 겪은 유럽인이 판단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대중은 자신의 운명을 잘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거역하는 것은 그야말로 ‘반역이다’ 라고 하는 점도 사회적 규율과 사회를 인도하는 지배체제에 복종하라는 뜻이기도 하여 오늘날에 이런 그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앞선 볼셰비즘과 관련해서도 ‘혁명’의 기운에 경고하고 대중이 정치적 인식을 갖는 것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하지 말라’는 잠정적 명령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의 기술발전과 과학 진보의 시대에 놓여 있는 대중들의 역할을 의도하지 않은 대로 움직이면 반역과 같고, 규율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냥 대중이라고 못박는 것은 불행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실 이 책은 많은 우파들에게 영감을 안겨 주었고, 특히 스펜서를 비롯한 사회진화론자들과 엘리트 지배 체제를 강조하는 소수의 기득권들에게도 이론의 뒷배경을 더한 글이기도 합니다. 물론 타인과 타인들이 모인 사회의 공동생활을 강조한 것이라든지, 사회의 규범을 중요하게 여기는 등의 사회 일반의 선을 중요하게 여긴 점 등은 물론 저자의 혜안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부의 12장에서도 “평균인은 그 세계 안에서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물질적 혜택만을 느꼈지, 고민 따위는 도무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는 등과 13장에서 최대의 위험은 국가라고 일갈하는 부분 또한 여러모로 현대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인 “국가를 마치 소유물로 여기려 드는” 대중인의 행태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 명확하게 서술되지 않았고, 장자크 루소의 인민 주권을 거부하는 듯한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러한 주권을 가졌다.”는 신랄한 문장도 어떤 여지를 갖는 것 또한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끝으로 저자의 이 책과 관련해 자신이 진정 말하고 싶었던 점은 “민중의 힘과 사회의 힘의 평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대중의 힘이 사회를 넘어서고 국가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반역과 쇠퇴 및 몰락이라고 여겼다면 자신을 넘어서고 자신의 삶을 도약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부 소수의 우수한 자들만의 계획된 사회가 과연 모두의 선이 될 수 있을지는 어려운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확대된 민주주의를 초민주주의라 지칭하면서 민주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다수에 의한 중우정치라 할때, 오늘날에도 일반 대중은 단지 권력에 복종하는 편이 낫다라는 논법을 설파하는 자들이 아직도 많은 시점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책이 더욱 오독되는 일이 없기를 단지 바라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자유주의조차 극복해야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저자의 논법 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어려운 편이 속하는 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약간 사족으로, 본문 14페이지와 32페이지에 오타를 발견했는데요. 두 군데의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도 출판을 한 출판사에 더할나위 없는 실망을 느낍니다. 이것은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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