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 - 개인, 가족, 사회, 역사에 대한 보수의 철학
러셀 커크 지음, 이재학 옮김 / 지식노마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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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 주 플리머스 출신의 정치 이론가,사회 비평가, 문학 평론가이자 스스로 전통적 보수주의자로 여겼던 러셀 에이모스 커크는 미시간 주립대와 듀크대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에 복무했고 당시 자유지상주의자 이사벨 페터슨과의 서신 교환으로 초기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에게 크나큰 명성을 가져다 준 '보수의 정신 Conservative Mind'으로 미국 내에서 보수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쌓은 인물로 이해되는데요. 그의 여러 일화들을 살펴보다 문득 C. 라이트 밀즈가 머리에서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둘 다 동시에 약간 유쾌한 괴짜 같은 취향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밀즈와 커크는 사상적 경향이 완전 다른 인물들입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oncise Guide to Conservatism"으로 아마도 지난 1957년에 출간된 것을 최근인 2019년에 새롭게 펴낸 것으로 추측됩니다. 국내에도 마찬가지로 2019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러셀 커크는 그의 생애 내내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버크식 보수주의를 추종했던 인물입니다. 제가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의 최근 보수주의적 역사에 대해 달통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주의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와 강력하게 결합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커크의 이 글은 크게 3가지 키워드를 배경으로 진술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양심과 재산권, 자유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보충 설명을 드린다면 커크가 설명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의 맥락은 미국의 공화주의적 보수주의며, 존 애덤스와 제임스 메디슨 등의 사상이 기초한 전통적 보수주의라는 점을 먼저 염두해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다른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린다면 커크의 이 글을 전체적으로 일독해 보면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의 보수주의와는 그 궤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어느 정도 우리의 보수주의적 토대가 미흡하고 주장하는 바가 주먹구구식이며, 본질적으로 반공주의와 시장 자유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난 현대사를 통해 이들 대부분이 소위 강력한 우파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커크가 줄곧 주장하는 공동체의 선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의 가능성은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커크의 논지에 대해 전반적으로 깊은 인상을 받기는 어려웠는데요. 무엇보다 대중과 공중에 대한 정확한 개념 도출이 되지 않고 '민주적 전제주의'라는 일종의 거의 일원화 된 다수 지배 정치에 대한 설명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커크가 살았던 첨예한 냉전 시기를 고려한다면 오늘날 건전하게 뿌리 내린 사회 민주주의에 대해 그가 경멸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커크가 보이는 '평등'에 대한 사실상의 혐오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다른 걸 다 떠나 자유와 평등이 중요한 가치라는 것은 분명한데요. 지지 파파차리시의 언급대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개념은 이처럼 중요한 맥락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오늘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민주주의가 과잉된 상황'이라고 시대적 이해를 보이고 있는 상황이니, 저로서는 (현재의 변형된) 보수주의 자체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커크의 이 글에서는 '도덕적 경쟁', '질서 있는 자유'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 보수주의와 지금의 보수주의가 얼마나 상이한 개념인지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커크가 설명하는 보수주의에 있어 '인간의 양심'은 중요한 화두로 여겨졌습니다.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모여 만든 사회가 양심적일 수 없다"는 취지의 문장도 이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양심의 문제는 더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서도 양심이 '자선'을 도덕적으로 권유하고 이는 기독교적 겸허한 양심에서 비롯되었고 가난을 구호 하기 위해 돈 있는 계층이 자발적으로 지갑을 열 수 있는 양심이 보수주의의 기본적 맥락이라고 인용됩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주의는 혁신과 혁명이라는 이름과는 반대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선인先人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사회 체계나 전통 문화 혹은 가정에 대한 기존의 가치들을 수호하고자 합니다. 이는 일종의 하이에크와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회를 좀 더 개선시키기 위한 소위 개혁가들의 사회적 시도들이 우리 모두를 고통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경고와도 같은 것이겠죠. 물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전통 자체가 지키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로서 더 중요한 맥락에서 "개인들의 자발적인 양심이 사회를 아무런 부작용 없이 개선해 나갈 수 있다."는 인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글에서 재산권과 자유는 거의 한 몸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인정하고 있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유와 연계되어 있지만 커크는 그렇다고 모든 보수주의자들이 방만한 이기심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그는 "간단히 말해 사유 재산제는 자유를 누리려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라고 진술합니다. 다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은 자본주의의 아주 자연스런 요소로서, 그 이기심 자체는 사악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죠. 이를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사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이기심 추구는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제한 없고 무분별한 자유의 추구와 신자유주의자들의 거의 제한을 두지 않는 이기심 추구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는데요. 그래서 커크는 이기심에 대해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주의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는 관리되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맹렬히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본의 축적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에 있어 동의하는 것이다."라고 언급되는 부분도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즉, 힘 있는 자들의 마땅한 자유가 아니라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만 하는 기본적인 권리로서 자유를 바라볼 수 있겠는데요. 따라서 커크의 말대로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양심, 법원, 정부가 모든 사람과 계급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눈을 부릅떠야 한다고 믿는다."는 진술은 이를 정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대를 감안해 보면 커크의 공산주의와 집산주의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잘 엿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류에게 남긴 상처를 감안해 본다면 이는 지나친 감정이 아닐 수 있는데요. 부의 재분배에 있어서도 전자가 모든 인간들에게 실패한 결과물을 남긴 것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혁신과 진보에 대해 커크가 보이는 부정적인 인식과 그가 이를 바탕으로 주장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은 쉽게 이해되지는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는 자들이 좀 더 많은 권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쳐도 사회적으로 능력 있는 자들의 권리가 커크가 말하는 대로 '공짜'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는 줄곧 양심과 의무를 들어,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편안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측면에서 앞선 관념을 경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작금의 보수주의와 커크의 보수주의는 매우 상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는데요.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을 추종한 커크라면 그리고 미국식 공화주의에 '충성스런' 신념을 갖고 있는 커크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더불어 저자의 글을 통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해석대로라면 과거 전체주의의 화신인 히틀러가 '급진주의적 선동가'라고 취급할 수 있을 텐데요. 이러한 히틀러의 전체주의를 왜 겸허한 양심의 보수주의자들이 전혀 저항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자크 파월이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던 부분이나 한나 아렌트가 일생을 소비해 천착했던 전체주의에 대한 해부까지는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여기의 커크가 2차 대전에서 어떠한 양심에서 참전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보수주의적 관념을 떠나서 전쟁을 몸소 체험한 것은 어쩌면 가볍지 않은 일일 겁니다. 그가 수없이 언급했던 것처럼 만약 히틀러가 급진주의자라면 왜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전혀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작고한 토니 주트의 언급대로 당시의 평범한 독일인들이 히틀러가 만든 거대한 흐름에 전혀 저항을 할 수 없던 것이었을까요. 오히려 일상에서 안온한 행복감을 느꼈을 정도로 말이죠.

현재의 보수주의와 커크가 논증을 통해 설명하는 보수주의는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날 겁니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도덕주의적 정치는 철지난 것으로 치부 되었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존경한다는 밀턴 프리드먼 역시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었죠. 이와는 상반되게 커크는 자유와 정의, 도덕, 질서, 공동체 등을 보수주의의 핵심이라고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선명한 진보, 건전한 보수는 필연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수는 과거 개발 독재와 철저한 반공에 기대어 반대의 의견을 철저히 묵살했던 것과 같이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역사와 제대로 화해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제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경도된 사람입니다만 여러 서평에서 언급했듯 에드먼드 버크식의 보수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는데요. 일전에 버크는 프랑스 혁명의 잔인한 결과들에 대해 양심에 비추어 토로하여 모든 혁명이 역사와 사회에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의 보수주의가 과연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적 전통을 얼마나 체화시키고 있는지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걔 중에 커크가 말하는 이기심과 지금의 이기심은 매우 차원이 다른 것이 되었기에, 어쩌면 시대와 환경이 다른 미국의 보수주의와 우리의 보수주의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커크의 글을 일독하고 난 후에, 다른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보수주의가 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를 명확하게 다룬 글이 새롭게 나와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자유와 민주라는 탈을 쓰고 입으로만 이를 강조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커크의 이 책은 홉하우스의 자유주의의 본질과 더불어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정부를 필요악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커크가 말하는 보수주의는 정부를 필요선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보수주의는 많은 재산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만의 관심사가 아니고, 특권과 지위만을 방어하려는 사상도 아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치 않은 ‘인민people‘이나 ‘군중The Masses‘혹은 ‘핍박받는자The Underprivileged‘는 기독교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전적 정의 양심은 ‘사람의 행동이나 동기의 측면에서 내적으로 인식하는 옳고 그름, 다시 말해 사람의 행동과 동기의 도덕적 측면을 파악해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하도록 명령하는 능력이다.‘

반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표류하고 양심에 무지하며 감각적 욕구의 충족에만 매달리는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가하든, 또 그 공식적 헌정 체제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이든 모두 나쁜 사회다

시기심을 견제하는 오직 하나의 진정한 방법은 비상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에겐 그들만의 고유한 권리가 있음을 많은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일반적 원칙을 인정하는 사회다. 더 나은 사람들에겐 스스로를 계발할 권리가, 보통 사람들에겐 잔잔하게 살아갈 권리가 부여된다는 원칙이 인정되는 사회 말이다

공동체가 약화되면 대개는 무질서한 자유 anarchic freedom가 아닌, 숨 막히는 집산주의가 들어선다

따라서 급진적 선동가는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엔 지역 공동체의 활력을 뿌리 뽑으려 애쓴다. 그 짓을 히틀러가 독일에서 시도했고, 또 러시아의 다른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처절하리만치 철저하게 완수했다

따라서 깨어 있는 보수주의자는 공동체, 마을, 국가, 사업 조직, 시민 사회 모임, 노조, 교회 집단, 동업자 집단, 학교와 대학, 그리고 자선 기금이 요구하는 의무를 다한다

보수주의자는 개인의 양심, 법원, 정부가 모든 사람과 계급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눈을 부릅떠야 한다고 믿는다

사유 재산 제도는 불평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는 평등하지만 다른 모든 관점에서는 불평등하다

국가는 때때로 탐욕스런 빈자를 억누를 필요가 있듯이 오만한 부자를 저지하는 조치도 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이 아닌 개인적 양심과 공중의 여론에ㅔ 호소함으로써, 보수주의자는 재산 소유자들에게 그들의 타고난 권리와 함께 타고난 의무를 환기시키려 노력한다

보수주의자는 진보 그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 반드시 작동하는 신비로운 진보, 그 자체의 힘이 있다는 주장은 강하게 의심한다

‘민주적‘ 국가가 누구의 자유도 빼앗지 않는다는 얘기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자유 경제 없이는 어떤 형태의 자유든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공화국은 그 어떤 특별한 경제 체제보다 중요하지만, 자유로운 경제가 없으면 실질적으로 공화국은 지속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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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데이터를 가져다 뭐하게 - 디지털 시대의 자기결정권
브리기테 비어만 외 지음, 김현정 옮김 / 책세상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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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일의 젊은 정치인이자 인터넷 시대의 시민권 보장을 주장하는 논설가인 말테 슈피츠는 1984년생으로 오스트베번에 소재한 사립 기숙학교 콜레기움 요한네움 슐로스 로부르크에서 수학했습니다. 이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하겐에 소재한 하겐 대학에서 정치 및 행정학을 공부합니다. 2006년에는 독일 정당인 가운데 최연소로 녹색당 연방집행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어 2012년까지 위원직을 맡게 됩니다. 현재 그는 자유 권리 협회 공동 설립자 겸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고, 동시에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독일 내의 여러 TV 방송에 출연해, 시민을 위한 데이터 권리 보호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브리기테 비어만은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저명한 주간지 노이에 베를리너 일루스트리어테에서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잡지사 브리기테에서 통신원 및 범죄전문기자로 일했습니다. 여기 이 책은 거대 기업과 정부에 의해 시민들의 사생활 보호와 그에 따른 기본적인 권리가 위태로운 상황을 진술한 일종의 르포르타주로 원제 "Was Macht Ihr Mit Meinen Daten?"으로 지난 201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5월에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번역본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글의 전반부는 현재 EU를 포함해, 독일 내에서 정부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시민들의 광범위한 데이터 수집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에드워드 스노든이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이 NSA가 주도한 전세계 광범위한 감청 프로그램 프리즘 Prism으로 대표 되는 오늘날 위태로운 시민권을 잘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슈피츠는 어느 날 독일 통신업체인 도이체텔레콤이 보유한 자신의 개인정보 수집에 관심을 갖고 이를 독일 법원에 고소한 이력을 갖고 있는 행동가인데요. 대략 2008년 이후의 독일 정부는 EU의 잠정적이 조치대로 다수 시민들의 무분별한 정보를 '통신정보저장법'으로 수집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의 근거는 모두가 알다시피 국가 안보였죠. 여기에 슈피츠는 거의 처음 제동을 걸고 시민의 권리 보호를 주장하며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갔고 마침내 국가에 대한 연방 판사의 시정명령을 받아내게 됩니다. 즉, 2010년 3월 2일에 이른 판결, "통신정보저장법에 관한 유럽연합 지침 2006/24/EG을 국내법으로 전환한다는 독일 법은 기본법에 위배된다는 취지"였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인지하고 있듯이 독일은 시민 자유에 대한 개념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비해 더 확고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런 국가가 자국의 국민들이 축적한 데이터를 미국 정보 당국에 제공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물론 미국은 독일에게 있어 절대적인 나토 동맹국이고, 2001년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할 때 크게 협력한 국가가 독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책을 통해서도 대략 좋지 않은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 통신과 제반 산업이 고도화 될 수록 권력을 쥔 정부의 관리들이 데이터의 기본적인 수량화에 따른 데이터 수집을 아주 손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슈피츠의 개인 경험을 통해 밝혀진 독일에서 벌어지는 시민들의 정보 수집은 같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우리에게도 유사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를테면 법원의 영장을 발부 받아 어떤 개인의 금융 계좌와 핸드폰 통화 내역을 수사 기관이 통상적으로 조회해 봤을 때, 그 당사자 본인에게 이러한 조회 이력을 통보하는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독일은 당국이 시민의 개인 정보를 특정 목적을 위해 열람을 하면서도 당사자에게 알리지도 않는 듯 보였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멀게는 조지 오웰부터 가깝게는 미셀 푸코의 논법으로 어느 정도 예상된 시나리오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의 정당한 위임을 받은 정부가 자신들을 선출한 시민의 사생활 정보를 비롯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쓰일 수밖에 없는 여러 개인 정보들을 수집하고 개량화 하는 것에 어떠한 명분이 있을지 요즘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미 영화의 짤막한 장면으로도 묘사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해외정보감시법인 FISA의 영장 요청을 감독하기 위해 FISC를 설립했지만 2001년 이후, 그것이 명백하게 법이 규정하는 의미 하에서 발부되었다고 하지만 무고한 피해자를 낳은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이처럼 안보라는 특수한 관점으로 대다수 시민들의 개인정보를 손아귀에 넣고 싶어하는 정부를 제대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어떻게 보면 전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 10장에서 "만일 개별 국가와 기관 및 조직이 개인정보에 대한 권력을 일부 국가과 기관, 조직이 소유하게 될 경우 한 나라의 주권이 위협 받을 수 있다"는 경고는 매우 의미심장한데요. 안보에 대한 함의를 통해 자유 진영의 수호라는 명목으로 독일이 미국에 했던 일들과 구글과 페이스북과 같은 다국적 기업이 주권국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 정도로 거대해지고 있는 상황은 미래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는 두려울 정도입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은 한 나라의 안보에 대한 욕망과 그에 따른 강조가 결코 전부 채워질 수 없음을 예측한 바 있습니다. 아무리 정상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크든 작든 권력이 여러 감시 데이터를 통해 이것을 수치화하여 손에 쥐고 있다면 그것의 파급력이 항상 좋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를테면 미국 FBI가 최소 600만명 이상이나 되는 안면 인식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범죄 예방과 테러 방지를 위함이라는 설명으로 우려하는 다른 이견과 비판을 침묵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인지는 불명확합니다. '개인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기본권을 중시한다는 독일이라는 나라도 현재 이런 상황이니 다른 국가들은 어쩌면 말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이 글 7장의 개인의 의료 기록의 사실상 거래 상황이 보험사들에 의해 자행 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소름 끼치는 상황인데요. 여기에 인용된 테크니커 보험사가 고객의 데이터를 평가하지도, 다른 시스템과 대조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는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사실로 글에서 증명되기에 이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기관과 보험회사에서 주도 되는 개인 정보 유출이 독일에서도 이미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입니다.

끝으로 개인들 간의 누적된 데이터 교환을 비롯한 축적된 정보들에 대한 통제권이 아직까지는 시민이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의 결말에서 슈피츠가 제안하는 12가지의 제언들은 눈 여겨 볼만하다고 여겨지는데요. 그중에 3번째 조언인 "모든 국민은 공공기관, 데이터를 가공하는 모든 기업과 전자식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는 비밀이 보장되도록 암호화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정보기관이 무엇보다 의회의 막강한 감시를 받는 것을 전제로 투명하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점은 또한 명백한 당위성인데요. 그럼에도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을 어느 한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은 실로 우려스러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까운 미래에도 우리의 사생활 보호 권리와 기본적인 시민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해 당하지 않고,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걱정하지 않게 살아갈 권리도 마땅히 보장 받아야 할 텐데요. 이것의 전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건전해져야 하며 시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정치와 정부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씀드리면 작금의 민주주의가 일종의 엘리트 지배 체제의 편의적인 기능성을 포함하고 있다면, 선출 권력에 의해 소수의 엘리트 들을 견제할 수 있게 시민들이 이들에게 정치적 명분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가 결코 안온할 수 없을 겁니다.

경찰이 당사자에게 그와 같은 데이터 조회 사실을 알릴 의무가 법으로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데이터는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지, 남자친구가 누구인지, 가족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숨겨진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은밀한 연애사도 폭로하고, 심지어 당사자조차도 명확하게 느끼지 못하는 관계까지도 입증해준다

경찰과 검찰, 독일 정보기관이 인터넷을 감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통신 및 인터넷 사업자는 사법기관들이 범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가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정 단어에 따라 메일이 필터링되고 특정 패턴에 따라 통ㅎ신이 분류되면서 이미 감시가 시작된다

중국, 터키, 이란, 미국, 영국 등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자국민이 온라인으로 무엇을 하는지 되도록 정확히 알고 싶어 한다

국경을 넘는 이러한 협력은 법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난다. 예컨대 해외 정보기관들은 독일 정보를 독일 기관에 넘겨주면서 국내 경찰이나 사법기관에 제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단다. 그렇게 되면 반국가 단체를 수사하는 헌법수호청이 독일에서 발생한 범죄, 특히 중범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 정보를 경찰에 주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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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17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우....관심이 있어야, 12가지 제언 중 어떤 것을 취하는 게 특히 좋을까를 알텐데 저부터도 평소 무심하게 지나가는 이슈였어요. 영화 소재라고만 생각하지, 제 문제로 생각하지 못하는 안이함...

베터라이프 2022-09-17 19:27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얄라님.^^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안보 구축이 엘리트들에 의해 시민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가 많은 분들이 우려하고 계시죠. 그럼에도 얄라님의 말씀대로 이런 소재는 영화의 단골 장치입니다. 보수주의자인 러셀 커크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무슨 망상으로 취급했는데 뭔가 안타까운 일이죠. 가까운 미래의 수많은 정보 당국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지 사뭇 걱정입니다. 엘리트적 사고관을 갖고 있는 관료들은 민주체체에서의 감시와 통제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점이 소위 전문가들의 정치가 양면성을 띠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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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앙그룹의 현 회장인 홍석현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평화만들기 재단의 산하 한반도 문제 싱크탱크의 '한반도 포럼'에서 도출된 여러 논문들을 엮은 일종의 논문집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 논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최근의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였던 미국과 북한을 포함한 '종전 협정' 및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지난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상세히 분석해 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한반도평화만들기 재단의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여러 칼럼들이 소개 되어 있었는데요. 이 곳에 참여한 인물들을 보니 거의 보수적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더라도 논문들이 말하는 바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전 강원대 초빙교수인 박영호씨의 글과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인 이태환씨와 이화여자대학 국제정치학과의 박인휘 교수의 글에 관심이 갔습니다. 특히, 한반도 포럼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박영호 씨의 글은 정말 설득력이 높았는데요. 제가 비록 한반도 문제와 국제정치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꽤 균형 잡힌 글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2021년 3월 초도 출판되었고 이것에 관여한 출판사는 늘품플러스 입니다.

북한 핵문제는 우리에게 있어 심각한 안보 위협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단순히 남북 간의 정치적 이념 대결을 떠나 김정은이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권 안위' 만큼이나 우리에게도 북한의 핵개발은 동등하게 중요한 안보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곳의 필자들이 인정하는 바대로 지난 미국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의 10년은 사실상 북한의 핵무기를 방조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북한이 자신들의 핵문제를 공식적인 테이블에서 협상할 수 있는 대상을 오로지 미국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이는 국제적 성격을 띤다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실효적인 역할을 제한 받는다는 점은 거의 명백하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북한의 핵개발과 그에 따른 우리의 안보 위협이 전적으로 미국에 달려있다는 점도 거의 부정할 수 없는 문제인데요. 이와 관련해 보수에 있는 인사들은 그만큼 한미 동맹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 한미일 간의 삼자 협력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거의 매번 그러하죠. 작금의 바이든 미 행정부가 과거 트럼프 정권과는 달리 동맹 외교에 힘쓰면서 '미국 우선주의'와는 궤를 달리할 것으로 여겨지기는 하는데요. 이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의 북한 핵문제 해결에 '탑다운' 방식이 사실상 실패했고, 그런 연유로 인해 북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시도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오바마 행정부 시절과 마찬가지로 바이든 역시 북한 핵문제에 대한 '전략적 인내 제2기'를 감행하는 것이 아닌지 국내외 전문가들이 촉각을 세우고 이를 지켜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글의 필자 중 한 사람인 김현욱 국립 외교원 교수의 언급대로 북한은 "2019년부터 국제정치체제를 한미일 대 북중러 양 진영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양극체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평가에 사뭇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 미중 간의 갈등은 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중국에 의한 대만 해협의 위기에서 이러한 진영 간의 대결이 다시금 열리는 것으로 읽힙니다. 더불어 중국도 2019년 이후에 북한의 핵개발이 동북아시아의 핵개발 도미노로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사실상 단정 짓고 북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선회로 이어졌는데요. 그래서 중국도 공산당 내부에서 북한에 대한 기존의 전통파 의견을 쫓아 북핵문제를 북한 문제로부터 분리하여 처리한다는 전략을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도 이에 국내 안보와 한미 동맹의 구호적 측면이 아니라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도발을 감행한다면, "한국은 한미 동맹에 근거하여 미국의 확장억제력 제공이 즉각 현실화 될 수 있게 요구나 협의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이는 프랑스 드골 전 대통령의 유명한 언급대로, (흡사 북한의 ICBM에 의한) 미국 본토 위협에서 과연 "샌프란시스코를 희생하면서 서울이나 동경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 자신들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철폐'를 사실상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 바대로, 박영호 위원장의 서문과도 같은 논증은 기존의 문재인 정부의 북한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의 본질에 대한 꽤 설득력 있는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 한국전쟁의 종전을 형식적으로 선언하는 이른바 '종전선언' 방안은 상징적 의미만 가질 뿐"이라는 진술은 실로 공감하는 바가 있었는데요. 사실 지난 박근혜 정권의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론'과 관련해, 북한 정권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북한의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 시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김정은이 조부인 김일성의 유훈이나 김씨 일가가 세운 정권의 철회할 수 없는 신성한 의무로 주장하는 것은, 상당한 정치 경제적 격차를 보이고 있는 지금의 남북 관계라 할 지라도 양자 간의 진정한 협력과 화해 기조에 위배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그냥 덮어버리고 그저 '한반도 평화 구축'이라는 모호한 의미에 치중한다면 당면한 우리의 실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요. 특히, 박영호 위원장의 중요한 제언으로 현재 북미 간의 전략적 불신 상황에서 북한이 그렇게 강조하는 자신들의 체제 안위를 위해 중국이 대외적으로 북한에 대한 핵우산을 제공한다고 공표한다면 북한이 그렇게 두렵게 생각하는 미국의 선제 공격에 대한 억제력을 답보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런 이행에 대해 심각한 거부감을 갖는 분들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만약 이것이 정말 실현된다면 북한의 핵무기 포기에 대한 정당한 근거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다만 현재의 김정은 정권이 정상적인 핵보유 국가로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핵억지라는 측면에서 핵무기 보유의 유용성을 최근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확인했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가 단순히 안보 측면의 의미를 넘어 세계 패권국인 미국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여기는 것이겠죠. 물론 이는 우리를 포함해 미국과 국제사회가 절대 수용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북한은 자신들의 실질적인 핵무기 협상과 관련해 오로지 미국과 대화하려는 의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것의 숨겨진 의미는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북한 핵문제에 대해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이는 우리가 미국의 안보 자산과 외교 정책에만 몰빵해야만 한다는 의미는 분명 아닐 겁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의 제언대로 한미 관계를 우선시 하되, 미중게임과 한반도 게임의 분리와 대 미중외교를 위한 전문가 그룹의 양성 필요성은 꽤 귀담아 들을만한 내용이기도 한 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안보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미중 간의 어느 정도 균형적인 외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 바이든 행정부에 의해 미국의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이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중국과의 교역을 전부 일소할 명분은 되지 않는다고 파악됩니다. 더욱이 중국이 북한 핵문제와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자신들의 정치외교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북한을 지렛대로 삼을 수밖에 없는 근거가 여전히 상당하고, 종래의 자신들의 우려인 북한의 핵보유가 한국과 일본, 대만의 핵보유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게 됨으로써 반대로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에게는 '미국의 핵우산 보장'이 더욱 시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곳의 몇몇 필자들의 주장 만큼 단순한 한미 동맹의 구호 반복이 아니라 실질적인 핵우산 보장과 더 나아가 나토에 준하는 미국의 전술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저의 보수적인 접근에서 단순히 우리 안보의 필요성으로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반도 비핵화'라는 통념적인 가치에는 앞선 제안이 상당히 위배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북한의 핵문제가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사드 만으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방지할 수 있을지 상당한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재래식 전력을 그저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정은이 자신의 안위에 반하는 심각한 체제 위협이 가시화 되었을 때, 과연 민족적 동질성과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를 끝까지 고수하여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과 부산에 핵 미사일을 투하하지 않을 가능성이 거의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서 김정은은 남한과의 공멸을 시도할 것입니다.

여기의 이 글은 최근의 북한 핵문제를 다룬 글들 가운데에서도 거의 최근의 인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몇몇 보수적인 필자들로 인해 기존의 원칙적인 한미 동맹 강조만 읊어 대는 논조가 기존의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부 독자들에게는 절실히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지만 단순하게 어느 정도 진영 논리라는 것을 배제한다면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기존의 국제정치적 배경을 꽤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다만 우리의 전시 작전권 귀속 문제를 단순히 북한 핵문제와 결부시켜 해석한 점은 일종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주권 국가의 자주권이라는 문제가 우리에게 있어서 꽤나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동안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한미 동맹이 기여한 바는 아주 명백하고 현재의 미국 의회와 백악관이 동맹 관계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우리와의 동맹을 선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 것은 분명한데요.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한미 동맹이 우리의 번영에 기여한 바는 명확하다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주한미군의 존재 역시 미중 간의 갈등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고 있습니다만 마찬가지로 미국의 군사력 유지가 북한의 재래식 도발의 억제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끝으로 이곳의 필자들도 어느 정도 상징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현재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앞으로 북한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아주 중요한 시점이라고 보여지는데요. 이에 우리 전문가 그룹이나 외교 정책에 관여하는 관료들이 이러한 국제정치적 상황을 좀 더 면밀히 주시하고 정치적 이념을 떠나 명망있는 국내 학자들과 여러 지식인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저 개인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유일주의적 잔재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전부 철회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겨지는데요. 물론 어느 정도는 바이든 정부도 과거의 정책대로 북한 핵문제를 국제적 문제로 인식하고 다자간 협력을 중시하려고 할 것입니다. 전쟁 발발시 2천만이나 되는 수도권 인구의 궤멸을 감안한다면 미국 역시 북한 핵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적 옵션에 나서는 것은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미국이나 우리에게도 내부에 현실을 도외시 한 치킨 호크들이 상당히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을 보더라도 만약 제한적인 전쟁이 한반도에서 벌어진다면, 이는 남북한 양쪽의 공멸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보에게도 북한 문제를 잘 관리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엔쉐퉁의 2023년에 대한 국제정치적 담론을 무턱대고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이 시기는 한반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여지가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각 분야의 소위 정치 엘리트들의 비상한 예방 대책이 더욱 요구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본문 209 페이지의 한 문장에 문맥상 오기라고 볼 수 있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글에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만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정권에 따른 정책 일관성이 거의 부재한 것은 상당한 문제라고 보였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건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당면한 북핵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진보와 보수 간에 공통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사안을 서로 오랫동안 협의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미국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오바마 행정부 당시 시도된 이란과의 핵협상 모델을 북한이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평화 이상으로 중시되는 요소가 안보다. 모든 국가는 영토 보전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 정상회담 후 "이제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은 사라졌다"고 했으며, 2001년에는 "북(한)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협정에 대한 남북 간 입장의 근본적인 괴리도 문제였으나 애초 북한은 남한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선언문에 담긴 ‘한반도 비핵화‘ 용어는 한국과 미국이 기대하는 북한 비핵화가 아니었다

북한의 강력한 핵무장 의지, 그리고 기만적인 협상 전술과 핵합의 위반이 비핵화와 평화정착에 대한 최대 위협요인이자 장애요인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하면서, 북핵정책 기조가 계속 변동했다

따라서 새로운 평화체제 구축 전략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종속변수로 두고, 이를 추동하는 독립변수로 북미관계 정상화, 남북관계 정상화, 북일관계 정상화, 경제에너지 지원, 동북아안보협력 등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핵보유국으로부터 오는 핵위협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핵무기로 보복을 위협하는 것이 억제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데, 한국은 핵무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제핵비확산체제 규범의 모범 준수국으로 핵개발을 시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핵우산, 재래식 타격 능력 및 MD를 포함하는 모든 범주의 군사능력을 운용하는 확장억제력을 한국에게 제공"한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북핵위협에 대응함에 있어서 한국이 동맹의 파트너인 미국에 너무 의존한 결과, 급속한 안보환경의 변화와 중국의 부상과 그에 따라 치열해지는 미중 패권경쟁,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급격한 증가에 대해서 한국은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의 불안정한 대외전략에 매우 큰 실망감과 불신을 보이기 시작했다

종합해 보면 중국의 해양강국 건설과 적극적인 대외전략으로 아태지역에서 미중 군사갈등이 고조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왔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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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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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반극단주의 연구자이자 정치학자인 줄리아 에브너는 런던정경대에서 국제사와 관련된 석사 학위를, 중국 북경대에서도 국제 관계와 관련해, 마찬가지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영국 런던의 소재한 반극단주의 조직인 전략대화연구소 Institute for Strategic Dialogue 에서 상주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와 함께 여러 국가들에서 폐쇄적인 급진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고, 소위 서구 유럽의 전통주의적 맥락이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와 차별에 있지 않음을 신뢰하면서, 이러한 극단주의적 흐름을 어떻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지에 지속적인 연구를 해오고 있는데요.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 역시, 에브너의 지난 2년 간의 활동을 여실히 보여주는 연구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Going Dark"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최근 카스 무데의 논저와 함께, 에브너의 이 글 역시 일종의 '르포르타주'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이 훌륭한 논저 역시, 저자가 지난 2년 동안 '대안우파'와 여러 백인인종주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극단주의 단체들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포함한 동시 잠입 취재를 통해, 현재 유럽과 미국에 불고 있는 극우주의와 초자유지상주의 운동을 거의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정치학에서의 포퓰리즘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시도된 것은 최근 몇 년 간의 일입니다. 아직도 포퓰리즘의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기능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은 실정이기도 한 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극우 포퓰리즘과 우파 극단주의가 어떠한 차이를 갖고 있는지 다소 불명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극우 포퓰리즘이나 극단주의 흐름 전반이 서로 경계가 불명확하고 주장하는 바가 서로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민주주의 정치 내에서 이들 극단주의 세력의 준동이 단순히 표현의 자유나 다원주의적 측면에서 무조건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의 발언대로 이들 모두가 '반민주주의 세력'임은 부정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지난 대전大戰 에서의 서구 자유 진영의 승리는 '자유주의에 의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일소'한 의미를 넘어 인간의 자유와 역사의 진보에 반하는 거대한 반동을 비로소 정상화 시킨 사건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들에 대한 홀로코스트가 리버럴리즘에 의한 날조라고 주장하는 저 극단주의자들을 어떤 식으로 사회가 용인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그것의 실현 가능 여부를 떠나 실로 인간의 처절한 비상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익의 차원에서 진행된 지난 날의 전세계적 신자유주의화가 어떤 식으로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 오늘날 극단주의 세력의 대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건전한 토론 없이 사회 비용의 절감이라는 순전히 자기 기만적인 이익 관념의 지배가 우리의 사회 전반을 장악한 결과로써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 불안을 틈타 극단주의자들의 토양이 구축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즉, 지난 미국 대선에서 몇 대에 걸쳐, 산업이 쇠퇴하고 시민 사회 조직이 붕괴한 '러스트 벨트'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불길은 도널드 트럼프를 워싱턴 D.C.로 보내는 것 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변형된 극우주의자들이 소위 '민주주의를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국가와 사회에 받아 들여져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역시 이 글에서 소개되는 더닝 크루커 효과 Dunning Kruger Effect 처럼, 어떤 주제에 별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알량한 지식과 판단에 지나친 자신감이 기반이 된 것이 과거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와 동일한, '인종분리주의'입니다. 미국 대안 우파의 대부 리처드 스펜서도 그렇거니와, 소위 사교적으로 세련되었다고 보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도 바로 흑백 간의 '인종 분리'입니다. 이것은 유럽의 '정체성 정치'와 마찬가지로 인종끼리 완벽히 분리되어 각자가 다른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진화론적인 입장이든, 사회 구성론적인 입장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철썩 같이 내면화시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유구한 서구 유럽의 전통주의와 기독교 복음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이슬람 혐오와 나치 독일이 주장한 인종적 우월주의를 주장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연대에 나선 것이 실로 놀랍지가 않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러한 흐름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에 있어 어떠한 이득이 될 수 있을지 저로서는 도저히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민주주의를 그저 고귀한 관념 정도로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한낱 극단주의 무리들에게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민주주의가 이용되는 상황은 참으로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영국수호연맹의 설립자이자 이슬람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인물인 스티븐 약슬리레넌 (다른 이름은 토미 로빈슨)은 요즘 우리 극우주의자들이 짭짤하게 수익을 얻고 있는 유튜브 모델처럼 영국에서는 파괴적인 발언력과 인지도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저자인 에브너에 의하면, 그는 일종의 '극우 셀레브리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서 연예인과 같은 위상을 갖고 있고, 그의 발언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많은 팬덤을 지닌 인물입니다. 로빈슨이 후에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기 식으로 이용하여 자신들의 반대 입장에 있는 반극단주의 인물들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강제적인 낙인 효과를 덧씌우고자 하는 점은 명백히 현대 극우의 하이브리드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저자인 줄리아 에브너 역시 이 극우 슈퍼 스타에게 단단히 찍혀 직장을 잃고 고초를 당한 경험을 이 글 5장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미 많은 시민들이 저들의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충분히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트럼프의 협력자이자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스티브 배넌은 수차례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무장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라고 부추겨 오기도 했는데요. 비상식적이고 인간의 충동적인 본능에 호소하여 순전히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선동하는 자들이 사회와 인간의 권리에 대해 어떤 가치관 따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는데요. 주변의 정치적 의견이나 논쟁 따위를 자신의 정치관으로 과대 포장하여 그것을 통해 오직 경제적 이익 만을 추구하는 자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실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자신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해 투쟁할 이유가 있고 그것이 사회가 억압할 수 없다는 관점은 극단주의자들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자유주의가 이것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겠느냐는 지금도 주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기도 합니다만 저들이 진정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은 일견 터무니 없는 일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저들과 그 궤를 같이하는 초자유지상주의자들이 사회를 어떻게 개조하고 싶은지는 이 글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인종이라는 생물학적인 급을 나누고 그리고 철지난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별을 통해 인간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마땅히 구분되면서 차별이 정당하다는 요지의 주장들이 그저 보수 따위도 아닌 '반동'이거니와 그야말로 역사를 퇴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심각하게 아이러니 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대어 자신들의 그와 같은 발언에 대한 자유권을 무엇보다 쟁취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토록 민주주의를 혐오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마땅히 민주주의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이죠.

이 글 전반에 다소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극단주의 세력 전반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가까운 시일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 점은 믿음의 여부를 떠나 소름끼치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600만이나 넘는 무고한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낸 나치주의 전반과 그것에 기인한 아돌프 히틀러의 "살 가치가 없는 생명 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1939년의 연설 문구는 그것이 사소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극단주의의 연원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일에서 이뤄지고 있는 '나치 콘서트'와 같은 문화 동일체적인 수법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저자의 몸을 아끼지 않는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지식과 사회적으로 축적된 정보들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도가 개방된 사회에서 어찌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그저 개탄스런 기분인데요. 또한 사실의 증명 여부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수많은 음모론들이 넷상에서 범람하고 확대 재생산 되어 무슨 절대 진리인 양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소명이 무슨 '신성한 사도'와 같이 동일시하는 저들을 보자니 과연 역사가 진보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깊은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에브너의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인지하게 되는 것이지만 극단주의와 그것을 추종하는 무리들에 의해 아마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절단날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점은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크나큰 불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본문 204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MI6를 M16으로 번역한 것은 실로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기본 상식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는데요.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 H. 카가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이 심각할 정도로 비정상적인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에 팽배해 있었다고 진술했는데요. 여기에 드러나는 소위 '대안우파'식의 파시즘에 대한 낭만주의는 실로 너무나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오로지 하나의 수단으로 균질화시켜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것에 당위를 갖는 그러한 반동주의가 어떻게 낭만적인 외형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파시즘에 대해 갖는 유럽 각지의 이번 세대의 낭만은 앞으로의 미래가 어떠할지 불안감을 더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시민들이 과연 정치적 변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목격한 혐오 콘텐츠의 규모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거대했고 극단주의 운동에 참여한 젊은 사람들의 수는 낙담스러울 정도로 많았다.

빨간 약을 먹는다는 말이 급진화를 뜻한단다면 대부분의 인터넷 공간은 빨간 약 공장이 되었다. 백인 민족주의자들이 내놓은 최악의 빨간 약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확신이다.

강령에 따르면 세대정체성의 목표는 동족 사회, 즉 서로 다른 인종과 문화가 섞이지 않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분열을 초래하는 콘텐츠를 퍼뜨려 중립을 취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전략적 양극화‘다.

4년 전 캘리포니아에서 발생한 유사 사건에서는 엘리엇 로저 Elliot Rodger가 총기를 난사해 여섯 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로저는 선언문에서 스스로를 ‘고결한 신사‘로 칭하며 자신에게서 섹스를 박탈한 모든 여성을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

로빈슨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과거에 영국국민당 당원이었으며 그의 지지자 중에는 히틀러식 경례를 하고 인종차별 구호를 외치는 네오파시스트가 있다.

하버드대학교의 독일계 미국인 교수인 야사 뭉크는 저서 <사람 대 민주주의>에서 서구 민주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정치인과 정치 제도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생활수준의 침체와 다민족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 소셜미디어의 대두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자체엥 대한 믿음까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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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0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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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3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3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3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해리 고든 프랭크퍼트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철학자로 모교인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뒤에 에일대와 오하이오 주립대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현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도덕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행동철학과 자유의지 및 평등론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요 철학자들 사이에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관련한 고유 해석으로도 유명한데요. 거기에다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도덕적 책임이라는 과제를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철학은 개인들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동체 사회내에서의 서로간의 배려와 존중을 매우 중요시여기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윤리철학이 학자들 사이에 다소 논쟁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철학 전반이 식자들에 의해 해석상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On Inequality˝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4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보통 평등이라는 가치는 민주주의적인 원리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사회학 등에서 18세기 이후로 학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치열한 이데올로기 시대였던 최근의 냉전 시기를 비롯,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이 평등은 현재에도 광범위한 오해로 인해 일정 부분 터부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글에서 저자인 프랭크퍼트 역시 평등과 관련해, 자신이 철학자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요. 그런 연유로 저명한 도덕철학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고 있는지 일반 독자로서 개인적인 호기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소위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서 불평등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진 부자를 원칙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프랭크퍼트는 단순히 경제적 평등에 대한 저간의 요구를 먼저 불식하면서,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우선되어야 하는 ‘사회적 자원의 충분성‘이라는 관점에서 새뮤얼 모인과 거의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저자는 시민들에게 스스로를 위해, ˝자신의 가장 참된 욕구, 이익, 목적들을 효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이 보편적으로 각 개인들이 보유하는 어느 정도의 ‘화폐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분명하고, 그런 차원에서 ‘충분한 소유‘에 대한 원리가 좀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이 글에서 명시되기에 이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심각한 빈곤의 상황에 처한 시민들에게 현 상황을 타파할 지원이 필요한 것은 이 글의 논리로 보건대 큰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언급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체제의 건전한 존속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통제력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자원의 충분성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도덕적 수준의 요구를 강조한다는 것이 현시대에서는 거의 의미없는 일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일종의 수단으로 삼아 사회 각 전반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으로 몰아 사회를 극명하게 분리시키는 점은 도덕적 기준이든 뭐든 간에 우리 정치 전반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완벽한 소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가장 잘 통제하고 있는 소수의 부유층들이 더이상의 ‘소유‘를 중지하고 자신의 건전한 삶을 위한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소위 ‘20 대 80의 사회‘도 그렇거니와 오늘날의 유산 계층이 자신들의 부를 되물림하려는 강한 경향으로 봤을 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부를 소유한 계층 역시 불완전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사회적 불안정을 위해 더 많은 안전 자산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쉽게 꺾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크퍼트가 이 글에서 차용한 ‘한계효용의 법칙‘은 자신의 말마따나 그 한계를 부정할 수 없을텐데요. 원칙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바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삶에 필요한 그 자원의 기준˝은 무엇보다 그 자신에게 달려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정이 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일전의 데이비드 코츠의 비판대로 신자유주의적 돛을 단 자본주의가 스스로 AI처럼 적절한 통제력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츠는 지금의 자본주의 자체가 좀 더 많은 자원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자본이 쏠리게 될 것으로 본 것인데요. 자본주의 나름으로는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뻔뻔한 얼굴로 절대 선이라 규정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그것의 논리로는 ‘선‘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적절한 통제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텐데요.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 근본주의‘를 내세워 국가와 사회 전체 그리고 세계 전반을 거의 제멋대로 주물렀던 점은 쉽게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전반적인 이러한 논리 가운데서 단순히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광범위한 자본주의적 논리가 많은 시민들에게 ‘내재화‘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겠죠. 이 자본주의적 논리가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큰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이 자신들 스스로의 ‘삶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매번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빈곤한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도움과 국가의 배려를 요청할 수 있는 점도 마찬가지로 비난할 수 없는 부분인데요. 개인의 마땅한 이익추구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개인주의가 기존의 사회 원리를 침해하는 지경에 이르는서는 안되는 이유가 이러한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등과 관련해 한가지 확실한 점은 빈곤 상태에 있거나 가진 바 사회적 자원이 빈약한 사람이 평등을 제약하는 발언을 하는 것보다 상당한 자원과 동시에 엄청난 화폐를 가진 사람이 평등 자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평등이라는 문제를 사회에서 더욱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몰려는 의도를 가진 그러한 기득권 층의 숨은 의도가 더 위협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모든 기득권층들의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어떠한 불만이 없는 자들이 평등 자체를 자신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으로 오도할 수도 있겠는데요. 더욱이 아직도 전반적인 상황에서 평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보지 않고 이미 의미가 없는 사회주의의 산물로 취급해, 이데올로기적 공격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극우주의를 다른 건전한 의견들처럼 같이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이자는 일각의 목소리와 하등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이 곳의 저자처럼 도덕적 우위를 통해 펼쳐나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의 경제적 평등에 대한 요구를 그저 도덕적 원리주의 차원에서 취급하고 저자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들을 단순히 이론과 현실의 괴리처럼 취급한다면 사회가 어떠한 지경에 이를지는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프랭크퍼트는 일반 시민들과 거의 모든 자원을 손에 쥔 부유층과 기득권 층의 힘의 차이를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어보이는데요. 더불어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냉정한 비판을 기반으로 경제적 평등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서로간의 존중과 이해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만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상황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 조차 없으며, 현재의 상황 자체를 현실을 왜곡하는 부류들의 철지난 주장쯤으로 여기는 세태가 분명 존재한다는 점도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무분별한 합리주의가 거의 절대 선으로 취급하는 판단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웠는데요. 합리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 그리고 시장 근본주의가 어떠한 메커니즘 상에 있는지를 사회학적으로 한번이라도 고려해 봤다면 저자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인지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질베르 리스트의 위와 같은 연계의 인식은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빈곤과 과도한 풍요를 모두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 결과는 분명 불평등의 축소일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도 아니다.

또한 평등의 추구는 보편적인 경제적 충분성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길일 수도 있다

경제적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논거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평등과 자유의 충돌이다. 이 주장의 밑바탕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고, 이런 가정은 화폐의 평등 분배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확대하는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타인들의 가용 화페량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삶에 필요한 것과는 직접적 관계가 전혀 없다

자신이 소비해온 것에 싫증이 났다 해도, 아직 소비해보지 않은 것 중 앞으로 좋아할 만한 것은 항상 남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전체 인구 중 일부가 가진 것이 충분한 양보다 적으면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물론 현재 그가 만족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향상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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