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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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에서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5년 뒤에 부모를 따라 이브토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캉 인근과 루앙 지역의 지도 교사를 역임하고, 1959년에 루앙의 여성 사범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합니다. 이후 그녀는 짧게 영국을 오고 가며 지내다 루앙 문과 대학의 교양 과정을 등록합니다. 대략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중등 교원으로 활동하다 남편인 필리프 에르노가 행정직으로 임명되어, 파리 근교 신도시인 세르지퐁투아즈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그녀는통신대학 고등교육 교수로 임명되어 은퇴까지 직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수상 이후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도 그녀의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고 재번역과 재판 발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르노의 이 책은 원제, "Le jeune homme'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꽤 교육을 받은 중년 여성과 이십 대 초반 남성의 사랑은 지금까지 상당한 사회적 금기였습니다. 반대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고 있는 육십 대 이상의 남성과 갓 이십 대 여성의 관계는 사람들의 표면적인 지탄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후자를 보는 많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일면적인 이해에서, 돈으로 젊은 여자를 만나는 중년 이상의 남성을 심하게 말하자면 역겹다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데요. 마찬가지로 전자의 경우도 역시 일반 남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는 젊은 남자에 대한 대체적인 연민과 불편함이 섞인 감정일 텐데요. 비슷한 나이의 사람끼리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지 않은 평범한 연애를 하는 것이 일견 맞다는 식의 통념은 지금도 사회 구성원들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연애에는 나이와 국경이 없다고들 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젊음을 사는 것'과 같은 주변의 불쾌함은 그걸 보는 사람들의 단순한 질투라는 감정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감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느끼는 데 있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어느 정도는 진지함을 갖고 있을 겁니다. 상대방을 만날 때 이 사람을 진지하게 여겨야만 그것대로 스스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태도일 것인데요.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진지함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어떤 이익을 위해 그 혹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장황한 사설과 맞닿아 있는 에르노의 이 소설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는 작가 본인이 과거에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것마저도 작품에 등장시키는 것과 유사해 보이는 솔직함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대학생과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의 궁핍한 경제적 조건마저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연인인 남자가 언제든 젊은 여자에게 갈 수 있다는 결론을 애써 인정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육체적 쾌락에 의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정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자신들의 미래까지 기약한 관계가 아니라 결말을 예견하고 있는 이런 처지에서 자신이 되돌아 보는 '관계의 속성'이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애인의 솔직한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조건에 깊은 회한을 보이는 여 주인공의 독백은 임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든 여성'의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뜨거운 연애를 하면서 흔히 '나의 아이를 낳아줘'라는 말을 자주 읊게 됩니다. 서로 불타는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런 농밀한 대화는 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갖고 싶은 젊은 남성의 기대가 그저 이 여자를 버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진솔한 고백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질책하는 시선을 보내는 타인들을 겪게 되니, 비로소 주인공은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젊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그만큼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그만큼 영속성은 멀어지게 된다"는 진실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이것은 결말의 예측과 맞닿아 있고, 두 사람이 함께하던 나날의 진실과 끝내 결말을 맞이한 그 후의 일상이 보기보다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이미 숱한 연애를 경험한 우리들에게도 보란 듯이 전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쾌락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함은 관계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끝으로 아니 에르노의 이 작품도 자신의 실제 경험과 문학적 장치가 혼합되어 있는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노년의 여자가 젊은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거의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단순히 이러한 만남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권력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일정 부분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있는 일반적인 모습의 연애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아직 노년에 들어서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이들이 보이는 여러 회한과 일생을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장소, 바로 그 병원이 내가 학생 시절, 불법 임신중절 후에 출혈을 일으킨 1월의 어느 밤에 이송된 곳이다.

그의 집에서 나는 학생 시절, 신혼 초 남편과 살며 겪었던 불편함과 초라한 가구들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쾌락을 주었고, 다시 살아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질투에 휩싸일 때마다 비난했던 이 같은 이중성은 그의 상상과는 달리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내가 품었을지 모를 욕망에 자리 잡지 않았다.

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한 이 긴 기억은, 결국에는 내가 죽은 후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사건들과 정치적인 인물들이 새겨진 그의 기억이 될 것과 짝을 이룰 것이며, 뒤집힌 이미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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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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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스 노르망디 인근 이브토에서 자랐던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과 보르도 대학을 거쳐, 현대 문학 전공으로 교사 자격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녀는 1974년에 '빈 옷장'으로 등단해 주로 자전적 소설과 사회 문제적 주제를 포함해, 특히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여성의 심리 묘사'와 더불어 '노골적인 성애'를 담고 있어 문학적 경건주의에 빠진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활동에 힘입어 아니 에르노는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정치적 활동에 있어,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멜랑숑을 지지한 바가 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반이스라엘적 입장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란의 강제 히잡 착용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녀는 이란 당국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 바가 있는데요. 이에 이란에서 일어났던 민중 봉기에 대해서 자신도 연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L'Occupation'으로 지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르노의 이 책은 지금 읽고 있는 마농 가르시아의 논저,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에서 인용이 되었기에 최근에 구매를 하게 되었는데요. 일전에 제가 에르노 작품에 대해 서평을 쓴 일도 있거니와, 소설 작품을 잘 접하지 않는 저에게도 에르노는 꽤 개성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여성의 다층적인 심리 묘사를 바탕으로 잘 짜여진 한 편의 '모노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남녀 간의 성애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남자의 남근에 대한 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 집착에 대한 '감정선'이 꽤 흥미롭게 다가왔는데요. 흔히 사랑하는 남성의 남근에 대한 좀 더 집요한 감정과 이 남근을 통해 애인을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평범한 여성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통해 무슨 남근주의적 사고를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남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있어서도 비슷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내용인데요. 일찍이 공화주의적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사회에 있어 여성의 이런 남근에 대한 소유 열망이 어떻게 보면 인간의 욕망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평등의 관점에서, 이러한 감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백안시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글 전반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많은 독백과 생각이 어쩌면 남성 주도의 연애관을 넘어, 여성이 받아들이는 연애와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접근에서 충분히 읽힐만한 소설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페니스가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여성의 성기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그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 같은 절망을 그려낸 소설 중간의 독백은 여성도 마땅히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할 수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페니스가 스스로 애정의 척도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 관계가 쾌락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섹스 본연의 감정을 저자는 잊지 않고 있는데요. 다만, 소설의 제목과 관련해, 꽤 중의적인 해석을 해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어린 연애 상대와 40대 중반의 주인공 여성의 관계가 일반적인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포함해,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있어서도 '이해와 갈등'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혼선 속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매력적인 남성의 발기된 페니스를 그저 손으로 쥐는 행위마저도 슬픔과 만족이라는 양가적 입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설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성의 페니스를 마땅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고 더 나아가 페니스에 대한 다른 여자의 접근마저도 방지하고 싶은 소위 '사랑에 빠진' 여성의 전형적인 감정의 레퍼토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에르노의 이런 집적적인 성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남성 독자들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인간으로서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찬찬히 에르노의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저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랑에 대한 의미가 너무나 틀에 박히고 가부장적이지 않았나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육체적 쾌락만을 요구하는 '섹스 파트너'일지라도 서로의 관계성을 모두 베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여성의 사랑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는 것이기도 한 데요. 그러면서 전형적인 남성들의 틀에 박힌 여성에 대한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 자신만이 알고 있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맺게 될 때, 그러한 과정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는 최소한 스스로에게 내면의 탈각(脫却)을 통해, 최소한 자신을 인정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경솔하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점철된 혼자만의 괴로움 그 자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 에르노 작품에서 관계가 마무리 될 때, 등장하는 '에이즈 검사'는 뭔가 그녀의 클리셰인 것일까요. 왠지 모르게 이 대목에서 실소가 나오더군요.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동작은, 잠결에 일어서 있는 그의 페니스를 쥐고 마치 나뭇가지에라도 매달린 듯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이걸 쥐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방황할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내가 내 자리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오장육부 깊숙이 뿌리내린 또다른 법, 그러니까,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침입한 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에는 반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삼십대 남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가능성 속에서 그가 마흔일곱 살의 여자를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상대방과 다른 점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바꾸어놓으며 자아를 지어버리는 질투라는 감정을 겪으면서, 나의 육체, 나의 얼굴뿐만 아니라 나의 활동, 내 존재 전체가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밤에 본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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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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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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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이란 무엇인가? - 갖가지 불평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열쇠
린지 저먼 지음, 최병현 옮김 / 책갈피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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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지 저먼은 영국의 좌파 정치 운동가입니다. 그녀는 영국 반전 조직인 전쟁저지연합 Stop the War Coalition 의 창립 멤버였고,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월간지인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저먼은 영국 유수의 사회과학 전문 대학인 런던 정경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스스로 여성 운동에 대한 의지를 갖고 1975년 4월 영국 최초의 전국 낙태 캠페인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정치 이력 대부분은 영국 노동당과 밀접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로 SWC에 참여한 것만 봐도 그녀의 정치 성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2007년 4월에는 런던 시장 선거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스로 노동당을 개혁하기 위해 움직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A Question of Class"로 지난 199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서평을 쓰기에 앞서 우선 개념적인 접근에서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저자가 분석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사회 전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여러분은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사회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노동 조합에 의한 사회적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가 이를 구조적으로 강화하여 왔다는 점을 인식하시는 것이 좋읗 듯 합니다. 즉, 사회 전반에 노동 조합에 대한 터무니 없는 부정적 영향은 바로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강고화 된 것인데요. 이것의 전반적인 체제적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자본가들의 요구와 그에 대한 정부의 응답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작은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강력한 동의는 체제 안에서 소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정부'가 우선적으로 포함된, 작은 정부임을 우라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마르크스가 해석한 자본주의에 대한 함의는 일부 오류를 제외한다면 기본적으로 현세에 까지 일관된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부 분들은 '노동자들의 착취'라는 개념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는데요.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분석과 사회적 기원에 대한 저자의 전반적인 진술은 대체로 정확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글에서 영국 사회의 여러 사례들이 근거로 제시되고 있고, 흔히 자본주의가 계급주의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여러 일설에 대해 1장의 논의들은 충분한 반론으로 읽히는데요. 더욱이 저자가 강조하는 "계급은 객관적 관계다"라는 주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보다도 자신이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두고 고심해야 된다는 부분에서 실로 이론과 사례 양쪽 모두, 적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여전히 많은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체제가 결국은 인간의 계급적 해방을 추동했고, 현재의 건전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맹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급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에서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듯 한데요. 하지만 노동자 계급이라는 어감의 마르크스주의적 반감을 조금 차치하고 이 글을 본다면, 현재의 노동자 계급이 처한 실체 자체가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황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특성이 있다"는 2장의 서두는, 그만큼 자본주의를 잘 설명하는 문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의 인식하에 과거와는 달리 비숙련 노동자들의 채용이 오늘날 자본가들에게 선호되는 것은 현장에서 비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해 그만큼 생산 단가를 줄이려는 일련의 노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950년대 이후 변화된 영국 사회에서의 노동자 계층의 전반적인 상황이 저자의 분석대로 "결코 균일하지 않다"는 주장은 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세계 2차 대전 이후. 전통적인 제조업과 서비스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선에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동시에 규모가 커진 서비스업은 자본가들의 새로운 요구였던, "읽고 쓸 줄 얼고 잘 교육받고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노동력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노동 형태가 변화되고, 노동 계급 자체를 포드주의 시대보다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던 사회적 체제는 제조업과 서비스직의 분화라는 중요한 포인트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2장 중후반에 논증되는 노동 계급의 본질적인 사회적 삶의 변화는 정부가 이들의 삶에서 양육을 책임지지 않는 것으로 시작해, 전반적인 사회적 부조를 신자유주의가 성공적으로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이트 컬러 노동자들이 일반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자신들은 엄연히 다르다는 입장으로 급격한 분화가 이뤄졌습니다. 또한 사회가 보다 평등한 삶을 위해, 서로 간의 처한 입장과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여러 모순들에 있어 근본적인 방해가 되는 노동 계급의 분열이 초래된 것인데요. 다소 불편한 이해일 수 있겠지만, 이들 화이트 컬러들이 자본주의에 사실상 매수 되었고, 비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주의 자체의 선호로 말미암아 대다수의 제조업 노동자들이 저자의 분석대로, '언더클래스'로 취급되기에 이릅니다. 사실상 이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사회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철회된 시점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런 분열된 의식 가운데,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하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편견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더욱이 극우에 있는 자들은 "물질적 빈곤 자체는 개인이 자초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는데요. 2장 말미에서 언더클래스 이론은 결국, "취업자와 실업자, 훌륭한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검소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켰다고 판단됩니다.

이어지는 3장은 소위 '선택 받은 자들'이라는 자본가들을 설명합니다. 다수의 자본가들은 다른 시민들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 더 자유로운 선택'으로 표현되는 사실상 사회 지배 계급입니다. 이들에 대한 저자의 분석 들은 대부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식들입니다. 이번 장의 가장 중요한 분석은, "정부 자체, 경찰 군대 같은 국가 기구, 사법부, 공무원 조직은 모두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다"는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가 구축되어 왔고, 이들의 이익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전무하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만약 자본주의가 계급의 자유로운 이동성을 보장하는 건전한 체제 그 자체라면 자본가들의 특권 만을 위한 사회의 재편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일부의 경제적 활황에서 일부의 '떡고물'을 노동자 계급과 공유하겠다는 일종의 경제적 배려 같은 것도 어쩌면 계급적 인식의 한 증거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산 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조치에서 비롯된 사회의 계급적 분열은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적 모순 이전에 우리의 정치를 포함한, 고질적인 문제로 귀결되었습니다. 시민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을 포함한 중위 계층과 그 이하 계층의 분열, 그리고 이것을 거의 조장하는 듯한 자본가들을 위한 이익 증대의 토대는 우리가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인 린지 저먼의 새로울 것 없는 체제 전반의 비판은 역시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만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지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저먼의 이 글을 찬찬히 읽다 보니, 지금은 없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아주 쉽게 '시민의 각성'을 밥 먹듯 언급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본질적인 체제 구속은 쉽게 개선될 수 없는 지극한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와 오래된 북플 이웃님이 이 책에 대한 짧은 평가를 남기셨는데,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


노동자는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때문에 ‘노동과정‘뿐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개인의 실제 계급 위치는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생존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지 여부에 달린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하는 특성이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구조조정은 자본주의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자본주의는 읽고 쓸 줄 알고 잘 교육받고 건강하고 상대적으로 장수하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노동생산성을 높여 잉여가치를 최대한 쥐어짜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가 양육의 짐을 부담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시간제 일자리가 적합했던 것이다. 이런 일자리는 여성이 기초적 양육을 책임지면서 병행할 수 있어 국가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객관적 지위가 무엇이든 간에 소득과 라이프스타일을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멍청하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 생각했다.

정부 자체, 경찰 군대 같은 국가 기구, 사법부, 공무원 조직은 모두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다.

경제 성장기와 호황기에 자본가는 상당히 만족해하고 약간의 떡고물을 자신이 착취하는 노동자들에게 주기도 한다.

특권층을 위한 이런 제도와 단체 등은 자본가 계급의 구성원을 교육하고, 계급의식과 응집력을 높이고, 지배계급 출신이 아니지만 부나 지위를 통해 지배계급이 된 이들을 포섭하는 구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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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대하여 -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한 강의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애덤 스미스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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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합리적 이기심','보이지 않는 손','고전적 자유 시장'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애덤 스미스는 후세에 의해 경제학의 선구자로 거의 존숭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는 여러 서평들을 통해 그가 경제학의 아버지이기 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이고, 오늘날에는 여러 지식인들의 의도로 부분적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 애덤 스미스라고 강조했던 바가 있습니다. 또한 시장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애덤 스미스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으로 그를 몇 번이나 팔면서 애꿎은 논리에 등장시키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본디 스미스는 유년 시절부터 이성과 시민의 자유 및 언론의 자유라는 철학적 가치에 몰입했고, 이러한 공부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데이비드 흄과의 만남은 계몽주의적 측면에서 역사, 정치, 철학, 경제 등을 포함한 자신의 지적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이런 스미스의 학문적 관심과 지향을 고려해 봤을 때, 오직 하나의 저작 만을 놓고 그를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그에 대한 반쪽 짜리 이해라고 판단되는데요. 과거 애덤 스미스가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에 강의를 나가면서, 그가 행한 도덕 철학 강의가 총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가운데, 여기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이 추후에 출판되기에 이릅니다. 지금 서평을 쓰게 될 이 '정의에 대하여'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스미스의 강의록에서 당시 학생이 기록한 노트를 바탕으로 출판된 것인데요. 더욱이 번역된 이 책은 그중에서도 편역이 된 상황으로 어떻게 보면 '발췌본'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The Lecture on Justice"로 지난 201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3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인류에게 소유권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비로소 정부의 행태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단초를 기반으로, 그동안 역사적으로 사회를 구성해 온 정부 형태들을 살펴보고, 더불어 사법의 기원과 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의 사법제도가 어떠한 사회적 맥락으로 기인했는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전에 읽었던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어떤 글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스미스가 살았던 근대를 구분하여 그 시대마다 있었던 국가의 형태를 분석해 보는 작업은 분명 의미가 있긴 합니다. 스미스는 이에 대해 무엇보다 소유권의 개념과 개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국가를 해석하고 있는데요. 사적 소유권의 인식은 스미스에게 기본적인 합리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 전반에 중요한 가치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소유권 자체가 어떻게 보면 인간 자유의 기초적인 기반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경제 발전을 통해 사회가 발전, 변화되고 이러한 과정 속에 인간의 권리가 더 충족될 수 있다고 사실상 확신하는 이론적 체계는 스미스 사상의 주요한 근간이기도 합니다.

정부의 권력이라는 구분으로 정부 형태를 살펴본다면, 일반 군주제와 공화주의는 개념적으로 매우 다른 체제입니다. 특히 고대 로마 제국을 근간으로 했던 공화주의를 고려한다면 그 시기에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어느 정도는 노예 제도에 기반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최근의 공화주의 기반의 정치가 사익 보다는 공익에 근거한 권력 체제임을 인정한다면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공화주의에서는 필수적인 요소인데요. 그럼에도 14세기 전후로 이탈리아 내의 도시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정이 정치 참여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가 부정적이었다는 스미스의 진술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민주정과 공화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중세의 그늘을 떠올려 본다면, 역사적으로 인간 자체가 권위주의적 권력에 쉽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E. H. 카의 진술을 거부하기 힘듭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헌팅턴 류의 선민주의와도 얼마간 맞닿아 있기도 한 데요. 그렇지만 여기에서 스미스는 인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마땅한 정부의 행태를 분석하고 그것을 제도 자체보다 일종의 '계약' 관계로 추론해 보는 점은 어쩌면 대안의 제시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일독을 하고 보니, 스미스의 '계약'은 일반적인 사회학적인 계약과는 조금 맥락이 다르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음 2부의 가정법을 위시한 여러 사회법에 대한 부분에서 스미스는 특히 결혼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에 뿌리 내린 오래된 관습법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그 시대 다른 남성 사상가들과는 달리 여성의 권리나 여성이 처한 현실 내지는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점은 이 부분의 진술로 파악해 볼 수 있는데요. 1부 마지막 부분에서 스미스가 정부는 "효용과 권위의 원칙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인식 하에, 교회의 지배 하에 있던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여성의 권리라는 일종의 파격적인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위배되어 왔는지 (약간의 저의 해석을 곁들이면)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일부다처제에 대한 스미스의 비판은 글 전반에서 일관된 편이기도 합니다. 이혼에 있어서 만큼 과거 남성들이 무분별하게 누려왔다는 점에서,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초래하는 '사생아' 문제도 이런 인식하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래된 관습법적인 결혼 제도 자체가 여성이 남편의 아이가 아닌 다른 정부(精夫)의 아이를 임신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고도로 마련된 제도임을 감안해 본다면 과거 사회가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나 전통적인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남성들이 처(妻) 외에 무분별하게 정부를 두고 자신의 성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점과 육체적 폭력이 너무나 가중되고 두려운 현실에서조차 완벽한 이혼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시대적 배경은 대체로 여성에게 있어 매우 불합리한 부분이었습니다. 더욱이 여성에게 성불감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교회의 지배하에서도 이혼이 가능했다는 점은 물론 반대로 남성에게도 해당되는 사례이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도 하에서 어떻게 발휘되고 있는지 사뭇 짐작케 합니다.

이렇게 가정에 대한 인식 저변이 어떻게 사법 제도에서 변화되어 왔고, 이를 통해 기본적인 가족 제도에 대한 체계를 마련했는지 뒤이어 나오는 부모와 자식, 후견인과 피후견인 간의 제도적 인식을 통해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존의 가정을 통해, 재산을 어떻게 분배하고, 상속 문제라든지, 후견인과 피후견인간의 개념들은 결국은 소유권 개념으로 사실상 연결됩니다. 만약 스미스가 살았던 시대에 본격적으로 소유권 권리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요청된 것이라면 그가 이런 변화된 사회상에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되는데요. 앞서 언급한 대로 기존의 소유에 대한 관념이 정부와 그것을 이루는 권력 관계에 의해 제한적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국왕이 봉토제를 통해 자신의 귀족들에게 일종의 소유권을 허가한 것과 다름 아닌 것인데요. 이것이 스미스의 시대에 계몽주의와 사회적 진보로 말미암아 소유권이 개인의 중요한 권리로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결국 소유권과 이를 바탕으로 확장된 계약의 가치가 법으로 어떻게 보장해야 하며, 이것을 불법적으로 거스르는 행태들인 '사기나 위조'와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예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법에 대한 요구와 일종의 사회 규약의 요청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역시나 편역이라 그저 개론서의 측면에서 '이런 게 있다'는 식으로 글 전체를 요약해 볼 수 있을 텐데요. 역자의 말마따나 나머지 번역에 대한 추후 계획이 있었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부장적 체제 하에 여성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에 있었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남성의 성적 권리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엄청난 재산을 지출할 수 있지만, 그 지출로 인해 그 사람에게 종속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지출로 인해 기술과 제품은 증대될 것이지만, 그런 지출에 종속되어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유언이나 합의, 계약 같은 것이 일어나고 복잡한 거래가 행해지기 시작함에 따라, 갈등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차이의 원인은 바로 노예제도에 있다. 자유민들이 자신의 일을 모두 노예들에게 맡기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공적 토론에 참석할 권리를 누렸다.

그러나 풍요와 사치가 늘어나게 되었을 때, 부유한 사람은 대단히 급박한 상황이 아니고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 들었을 것이다.

판사들은 도덕성이 높은 사람이고, 또 상당한 독립을 누리고 있으며, 그 자리를 종신으로 지키면서 법에만 얽매일 뿐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잘못한 때를 결정하는 판사는 전혀 없다. 주권자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곧 또 다른 주권자를 전제하는 것이다.

일부다처제가 이뤄지는 곳이라면, 아내는 완전히 노예의 신분이기 때문에 남편의 재산에 아무런 이해관계를 갖지 못하며 남편의 사후에 식량을 받을 자격만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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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선동의 수사학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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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패트리샤 로버츠-밀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을 전공하여 이후, 모교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마치게 됩니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케네스 버크 등을 연구하고, 수사학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 공동체에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어떻게 민주주의에 응용할 수 있을지 평생에 걸쳐 노력을 해왔는데요. 더불어 수사학의 기본 목표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교양 교육 전반에도 관여할 수 있기에 그녀와 같은 연구자들의 활동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위협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 책을 통해, 수사학의 가치가 극우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의 병리를 치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emagoguery and Democracy"로 지난 21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로버츠-밀러의 이 글은 오늘날 나날이 세를 확대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선동을 이용하여 어떻게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또한 선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민주적 숙의의 원칙을 무력화 시키고, 시민 대다수를 그릇된 근거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들로 세뇌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소 놀랍게 느꼈던 부분은 선동에 휩쓸리는 시민들 대다수가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다는 점 이외에도 똑똑한 사람들조차 마찬가지로 선동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결국 선동이 나와 적을 가르는 일종의 슈미트식의 폭력적 분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우리 정치는 대다수 시민들이 이 선동을 어떻게 하면 확실히 구별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츠-밀러가 이러한 글을 내놓은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잖아도 이 책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니, 현지의 의미 있는 여러 서평들이 적잖게 검색되고 있었습니다.

과거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내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냥'은 저자가 말하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폭력적 구별 뿐만 아니라, 정치 집단이 자신들을 향한 내부의 불만을 전혀 상관 없는 집단에게 돌려 사실상 비참한 결말을 초래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일본인들 전부를 어리석은 군중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선동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 파급이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선동 자체는 대체로 민주주의적 숙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동가의 무분별한 선동과는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가 언급한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욱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만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포용의 원칙에서 다른 사람의 발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선동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와 적이라는 구분으로 정치 전반을 양극화 하고, 더 나아가 세계는 우리 편과 상대 편으로 마땅히 환원될 수 있으며, 현재의 내집단 상황이 대체로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벌이는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이들은 사실과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그릇된 주장을 일삼으며, 여기에는 각종 논리적 오류는 물론이고 객관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것의 해악은 자체로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는 주장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겁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저자의 논증에 있어 한 가지 부족한 진술은 이들 선동이 궁극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실상의 격멸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선동의 끝에 파시즘이 있다"는 종래의 경고를 어정쩡하게 넘어간 점이라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 뿐만 아니라, 선동에 빠져 그릇된 사고와 행동을 벌이고 있는 집단의 행태를 과연 어떤 식으로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 논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이 좀 더 제시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까지 과거 파시즘에 대한 찬양과 인종적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를 사실상 처벌하는 법령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카를 슈미트를 언급했지만 선동의 근원에 대한 역사적 맥락이 대부분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고, 이에 슈미트적 피아 논리는 이처럼 극단적인 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극우 포퓰리즘의 속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선동 자체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법들 혹은 주장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회의를 끌어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터무니 없게 매번 민주주의 타령을 해대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저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자신은 밤낮으로 오로지 민주주의 생각만 한다는 소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상 우리 정치에서도 '민주적 숙의'를 통한 서로 간의 정치적 토론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은 언제나 옳고, 설사 그릇된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편을 들게 되는 행태가 만연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대로 오늘날 선동이 왜곡한 정치는 그만큼 건정성을 답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매번 강조하는 민주적 숙의는 어떻게 보면 서로에 대한 정치적 양보라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따라서 주장 전반이 부족하면 때에 따라 그것을 보완하여 알리고, 쟁점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은 행위자들에게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선동이 주가 된 정치 자체는 건설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것이 끝내 인신 공격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유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동가들을 정치 무대에서 축출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선동을 구별하고, 그 가운데에서 민주주의에 유독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찾아내는데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논리적으로 무장하여 이들 선동 정치의 포로가 되지 않는 점일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시민들 모두가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유혹하는 '내집단'이라는 의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인 외집단을 배격하면서 느끼는 왜곡된 카타르시스는 그만큼 중독적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터넷 상에서의 너무나 무분별한 혐오 발언과 그것을 추종하는 집단들의 무분별한 언행들이 선동에 대한 근절을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만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타 다른 인용보다 히틀러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행된 언론들의 혐오주의적 발언에 대한 인용이 결국 파시즘을 일으킨 토양이 되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한데요. 현재 미국 언론 지형이 극단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부분도 꽤 중요한 통찰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경계할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전반적인 선동 정치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우리 언론에게 있어 거의 전무하다는 점도 현재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견주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주류 정치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선동 정치와 이것을 거의 비판하지 않는 언론의 조합이 과연 민주주의에 어떠한 악영향으로 나타날지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이 글, 4장에서 인용된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을 수 있다는 주장 등이 비논리적으로 꾸며진, 합리적 인간의 근거로 쓰인다는 부분은 여전히 강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향후 드러난 바와 같이 대량살상무기 관련 주장, 9.11과 이라크 사이의 연관성, 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관해서는 당시에 침공을 반대하고 의심했던 사람들이 옳았다.

선동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선동은 복잡한 정책 이슈가 우리(좋음) 대 그들(나쁨)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도 틀릴 수 있고 지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주장의 증거와 출처, 전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세계적인 음모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유대인을 학살하던 과거를 돌아보며 끔찍해 한다.

우리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좋아했다거나, 히틀러가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보면 점차 성숙해지고 사실 정말 그런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거나, 자유 민주주의는 끝났으니 파시즘이 최선의 선택이고,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모든 특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질문을 우리 대 상대편의 구도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 오류가 우리 같은 사람들(내집단 구성원)은 본질적으로 믿을 만하고, 그들 같은 사람들(외집단 구성원)은 그렇지 않다는, 자주 틀리곤 하는 직감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세계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완벽하게 진심일 수 있고, 진정성 있게 부정확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비슷한 논쟁을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했던 적이 있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나너였던 게르디 트루스트는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친절하고, 강아지를 아끼고,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예술품 앞에 서서 감동에 가득 차 생각에 잠기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살인자일 수 있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생산적인 민주적 숙의가 되려면 전제를 포함한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공적 담론의 요점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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