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선동의 수사학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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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패트리샤 로버츠-밀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을 전공하여 이후, 모교에서 석사와 박사까지 마치게 됩니다. 그녀는 한나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 케네스 버크 등을 연구하고, 수사학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 공동체에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를 어떻게 민주주의에 응용할 수 있을지 평생에 걸쳐 노력을 해왔는데요. 더불어 수사학의 기본 목표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들의 교양 교육 전반에도 관여할 수 있기에 그녀와 같은 연구자들의 활동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정치가 극단주의적 위협에 노출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 책을 통해, 수사학의 가치가 극우 포퓰리즘과 선동 정치의 병리를 치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Demagoguery and Democracy"로 지난 21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로버츠-밀러의 이 글은 오늘날 나날이 세를 확대하고 있는 극단주의와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선동을 이용하여 어떻게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또한 선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민주적 숙의의 원칙을 무력화 시키고, 시민 대다수를 그릇된 근거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들로 세뇌시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이 진행되는 가운데, 다소 놀랍게 느꼈던 부분은 선동에 휩쓸리는 시민들 대다수가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다는 점 이외에도 똑똑한 사람들조차 마찬가지로 선동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석이었습니다. 결국 선동이 나와 적을 가르는 일종의 슈미트식의 폭력적 분리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우리 정치는 대다수 시민들이 이 선동을 어떻게 하면 확실히 구별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버츠-밀러가 이러한 글을 내놓은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잖아도 이 책에 대해 구글링을 해보니, 현지의 의미 있는 여러 서평들이 적잖게 검색되고 있었습니다.

과거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내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냥'은 저자가 말하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폭력적 구별 뿐만 아니라, 정치 집단이 자신들을 향한 내부의 불만을 전혀 상관 없는 집단에게 돌려 사실상 비참한 결말을 초래한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일본인들 전부를 어리석은 군중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같은 선동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 파급이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선동 자체는 대체로 민주주의적 숙의와 확연히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동가의 무분별한 선동과는 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정치 지도자들은 스스로가 언급한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더욱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만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포용의 원칙에서 다른 사람의 발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선동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와 적이라는 구분으로 정치 전반을 양극화 하고, 더 나아가 세계는 우리 편과 상대 편으로 마땅히 환원될 수 있으며, 현재의 내집단 상황이 대체로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벌이는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이들은 사실과 증거에 근거하지 않은 그릇된 주장을 일삼으며, 여기에는 각종 논리적 오류는 물론이고 객관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것의 해악은 자체로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테면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는 주장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할 겁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저자의 논증에 있어 한 가지 부족한 진술은 이들 선동이 궁극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실상의 격멸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선동의 끝에 파시즘이 있다"는 종래의 경고를 어정쩡하게 넘어간 점이라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 뿐만 아니라, 선동에 빠져 그릇된 사고와 행동을 벌이고 있는 집단의 행태를 과연 어떤 식으로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 논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이 좀 더 제시되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은 물론 이탈리아까지 과거 파시즘에 대한 찬양과 인종적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를 사실상 처벌하는 법령을 갖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카를 슈미트를 언급했지만 선동의 근원에 대한 역사적 맥락이 대부분 파시즘과 연결되어 있고, 이에 슈미트적 피아 논리는 이처럼 극단적인 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극우 포퓰리즘의 속성일지도 모르겠지만 선동 자체를 민주주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기법들 혹은 주장들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한 회의를 끌어냅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현실에서 포퓰리즘이 터무니 없게 매번 민주주의 타령을 해대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저 아프리카의 독재자가 자신은 밤낮으로 오로지 민주주의 생각만 한다는 소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이는데요. 사실상 우리 정치에서도 '민주적 숙의'를 통한 서로 간의 정치적 토론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은 언제나 옳고, 설사 그릇된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고, 오히려 편을 들게 되는 행태가 만연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결론대로 오늘날 선동이 왜곡한 정치는 그만큼 건정성을 답보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매번 강조하는 민주적 숙의는 어떻게 보면 서로에 대한 정치적 양보라고 여겨집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따라서 주장 전반이 부족하면 때에 따라 그것을 보완하여 알리고, 쟁점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은 행위자들에게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선동이 주가 된 정치 자체는 건설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것이 끝내 인신 공격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유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동가들을 정치 무대에서 축출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선동을 구별하고, 그 가운데에서 민주주의에 유독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찾아내는데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논리적으로 무장하여 이들 선동 정치의 포로가 되지 않는 점일 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시민들 모두가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유혹하는 '내집단'이라는 의미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인 외집단을 배격하면서 느끼는 왜곡된 카타르시스는 그만큼 중독적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인터넷 상에서의 너무나 무분별한 혐오 발언과 그것을 추종하는 집단들의 무분별한 언행들이 선동에 대한 근절을 더욱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만은 않은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타 다른 인용보다 히틀러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행된 언론들의 혐오주의적 발언에 대한 인용이 결국 파시즘을 일으킨 토양이 되었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한데요. 현재 미국 언론 지형이 극단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이 가까운 미래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부분도 꽤 중요한 통찰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경계할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전반적인 선동 정치에 대한 비판 뿐만 아니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우리 언론에게 있어 거의 전무하다는 점도 현재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견주어 볼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집니다. 주류 정치를 수렁에 빠뜨리고 있는 선동 정치와 이것을 거의 비판하지 않는 언론의 조합이 과연 민주주의에 어떠한 악영향으로 나타날지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이 글, 4장에서 인용된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나을 수 있다는 주장 등이 비논리적으로 꾸며진, 합리적 인간의 근거로 쓰인다는 부분은 여전히 강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향후 드러난 바와 같이 대량살상무기 관련 주장, 9.11과 이라크 사이의 연관성, 계획의 실행 가능성에 관해서는 당시에 침공을 반대하고 의심했던 사람들이 옳았다.

선동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선동은 복잡한 정책 이슈가 우리(좋음) 대 그들(나쁨)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도 틀릴 수 있고 지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주장의 증거와 출처, 전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가지고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성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독약을 풀고, 세계적인 음모에 가담했을 것이라는 이유로 유대인을 학살하던 과거를 돌아보며 끔찍해 한다.

우리는 똑똑하고 좋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좋아했다거나, 히틀러가 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보면 점차 성숙해지고 사실 정말 그런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다거나, 자유 민주주의는 끝났으니 파시즘이 최선의 선택이고,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모든 특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질문을 우리 대 상대편의 구도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 오류가 우리 같은 사람들(내집단 구성원)은 본질적으로 믿을 만하고, 그들 같은 사람들(외집단 구성원)은 그렇지 않다는, 자주 틀리곤 하는 직감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우리편 정치인이 진실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면 실수지만, 상대편 정치인이 그런다면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매개도 없이 세계를 정확히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완벽하게 진심일 수 있고, 진정성 있게 부정확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비슷한 논쟁을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는 사례들은 해맑게 무시하면서 시장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려는 결정은 잘 작동할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사람과도 했던 적이 있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나너였던 게르디 트루스트는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친절하고, 강아지를 아끼고,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예술품 앞에 서서 감동에 가득 차 생각에 잠기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살인자일 수 있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생산적인 민주적 숙의가 되려면 전제를 포함한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공적 담론의 요점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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