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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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스 노르망디 인근 이브토에서 자랐던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과 보르도 대학을 거쳐, 현대 문학 전공으로 교사 자격을 취득하게 됩니다. 그녀는 1974년에 '빈 옷장'으로 등단해 주로 자전적 소설과 사회 문제적 주제를 포함해, 특히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소재로 삼아 글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여성의 심리 묘사'와 더불어 '노골적인 성애'를 담고 있어 문학적 경건주의에 빠진 평론가들의 비판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활동에 힘입어 아니 에르노는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정치적 활동에 있어, 2012년 프랑스 대선에서 멜랑숑을 지지한 바가 있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 반이스라엘적 입장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란의 강제 히잡 착용 문제와 관련해서도 그녀는 이란 당국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 바가 있는데요. 이에 이란에서 일어났던 민중 봉기에 대해서 자신도 연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L'Occupation'으로 지난 200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에르노의 이 책은 지금 읽고 있는 마농 가르시아의 논저, '여성은 순종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에서 인용이 되었기에 최근에 구매를 하게 되었는데요. 일전에 제가 에르노 작품에 대해 서평을 쓴 일도 있거니와, 소설 작품을 잘 접하지 않는 저에게도 에르노는 꽤 개성 있는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여성의 다층적인 심리 묘사를 바탕으로 잘 짜여진 한 편의 '모노 드라마'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남녀 간의 성애적인 측면에서 여성이 남자의 남근에 대한 성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 집착에 대한 '감정선'이 꽤 흥미롭게 다가왔는데요. 흔히 사랑하는 남성의 남근에 대한 좀 더 집요한 감정과 이 남근을 통해 애인을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평범한 여성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통해 무슨 남근주의적 사고를 피력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남성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마찬가지로 여성에게 있어서도 비슷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을 살 만한 내용인데요. 일찍이 공화주의적 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사회에 있어 여성의 이런 남근에 대한 소유 열망이 어떻게 보면 인간의 욕망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평등의 관점에서, 이러한 감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백안시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글 전반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많은 독백과 생각이 어쩌면 남성 주도의 연애관을 넘어, 여성이 받아들이는 연애와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접근에서 충분히 읽힐만한 소설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의 페니스가 자신이 질투하고 있는 여성의 성기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마치 자신이 알고 있는 그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 같은 절망을 그려낸 소설 중간의 독백은 여성도 마땅히 사랑하는 남자를 소유할 수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페니스가 스스로 애정의 척도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는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 관계가 쾌락을 추동한다는 점에서 섹스 본연의 감정을 저자는 잊지 않고 있는데요. 다만, 소설의 제목과 관련해, 꽤 중의적인 해석을 해볼 수 있는 상대적으로 어린 연애 상대와 40대 중반의 주인공 여성의 관계가 일반적인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포함해, 사회적으로도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있어서도 '이해와 갈등'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혼선 속에서 이를 잘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리고 매력적인 남성의 발기된 페니스를 그저 손으로 쥐는 행위마저도 슬픔과 만족이라는 양가적 입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꽤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설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랑하는 남성의 페니스를 마땅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고 더 나아가 페니스에 대한 다른 여자의 접근마저도 방지하고 싶은 소위 '사랑에 빠진' 여성의 전형적인 감정의 레퍼토리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에르노의 이런 집적적인 성기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 글을 읽는 남성 독자들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인간으로서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찬찬히 에르노의 이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저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랑에 대한 의미가 너무나 틀에 박히고 가부장적이지 않았나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육체적 쾌락만을 요구하는 '섹스 파트너'일지라도 서로의 관계성을 모두 베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여성의 사랑에 대한 편견을 재고하는 것이기도 한 데요. 그러면서 전형적인 남성들의 틀에 박힌 여성에 대한 육체적 관계를 포함한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 불행하게도 상대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다른 여자, 혹은 다른 남자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 자신만이 알고 있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맺게 될 때, 그러한 과정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가 될지는 최소한 스스로에게 내면의 탈각(脫却)을 통해, 최소한 자신을 인정하고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것이 경솔하고 즉흥적인 감정으로 점철된 혼자만의 괴로움 그 자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 에르노 작품에서 관계가 마무리 될 때, 등장하는 '에이즈 검사'는 뭔가 그녀의 클리셰인 것일까요. 왠지 모르게 이 대목에서 실소가 나오더군요.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하는 동작은, 잠결에 일어서 있는 그의 페니스를 쥐고 마치 나뭇가지에라도 매달린 듯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이걸 쥐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방황할 일은 없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내가 내 자리에 세워놓는 사람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나, 사랑에 빠져서 그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으며 아직 우리 사이의 그 모든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나였다.

오장육부 깊숙이 뿌리내린 또다른 법, 그러니까,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침입한 자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지에는 반했다.

잡다하기 짝이 없는 사실들을 끼워맞춰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나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삼십대 남자에게 제공되는 모든 가능성 속에서 그가 마흔일곱 살의 여자를 기꺼이 택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상대방과 다른 점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바꾸어놓으며 자아를 지어버리는 질투라는 감정을 겪으면서, 나의 육체, 나의 얼굴뿐만 아니라 나의 활동, 내 존재 전체가 평가절하되고 있었다.

그의 페니스가 생각날 때면, 첫날밤에 본 모습 그대로 떠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내 눈앞에, 거대하고 강력하며 끝이 버섯 갓 모양으로 부푼 채 불끈 솟아 있던 그의 페니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낯선 사람의 페니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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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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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12: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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