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자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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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릴본에서 노동자 계급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5년 뒤에 부모를 따라 이브토로 돌아갑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캉 인근과 루앙 지역의 지도 교사를 역임하고, 1959년에 루앙의 여성 사범대학의 입학시험에 합격합니다. 이후 그녀는 짧게 영국을 오고 가며 지내다 루앙 문과 대학의 교양 과정을 등록합니다. 대략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중등 교원으로 활동하다 남편인 필리프 에르노가 행정직으로 임명되어, 파리 근교 신도시인 세르지퐁투아즈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그녀는통신대학 고등교육 교수로 임명되어 은퇴까지 직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202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요. 수상 이후 세계 각지에서 자신의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도 그녀의 많은 작품이 번역되었고 재번역과 재판 발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르노의 이 책은 원제, "Le jeune homme'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꽤 교육을 받은 중년 여성과 이십 대 초반 남성의 사랑은 지금까지 상당한 사회적 금기였습니다. 반대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고 있는 육십 대 이상의 남성과 갓 이십 대 여성의 관계는 사람들의 표면적인 지탄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후자를 보는 많은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일면적인 이해에서, 돈으로 젊은 여자를 만나는 중년 이상의 남성을 심하게 말하자면 역겹다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데요. 마찬가지로 전자의 경우도 역시 일반 남성들의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는 젊은 남자에 대한 대체적인 연민과 불편함이 섞인 감정일 텐데요. 비슷한 나이의 사람끼리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지 않은 평범한 연애를 하는 것이 일견 맞다는 식의 통념은 지금도 사회 구성원들의 주된 관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연애에는 나이와 국경이 없다고들 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젊음을 사는 것'과 같은 주변의 불쾌함은 그걸 보는 사람들의 단순한 질투라는 감정으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난감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느끼는 데 있어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어느 정도는 진지함을 갖고 있을 겁니다. 상대방을 만날 때 이 사람을 진지하게 여겨야만 그것대로 스스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태도일 것인데요.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진지함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어떤 이익을 위해 그 혹은 그녀를 만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장황한 사설과 맞닿아 있는 에르노의 이 소설 역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스스로의 경험을 투영되어 있습니다. 이는 작가 본인이 과거에 불법 낙태 시술을 받은 것마저도 작품에 등장시키는 것과 유사해 보이는 솔직함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대학생과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의 궁핍한 경제적 조건마저도 어느 정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연인인 남자가 언제든 젊은 여자에게 갈 수 있다는 결론을 애써 인정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육체적 쾌락에 의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정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자신들의 미래까지 기약한 관계가 아니라 결말을 예견하고 있는 이런 처지에서 자신이 되돌아 보는 '관계의 속성'이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애인의 솔직한 바람을 들어줄 수 없는 자신의 육체적 조건에 깊은 회한을 보이는 여 주인공의 독백은 임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는 '나이든 여성'의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뜨거운 연애를 하면서 흔히 '나의 아이를 낳아줘'라는 말을 자주 읊게 됩니다. 서로 불타는 알몸으로 껴안고 있는 상황에서도 저런 농밀한 대화는 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갖고 싶은 젊은 남성의 기대가 그저 이 여자를 버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 진솔한 고백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질책하는 시선을 보내는 타인들을 겪게 되니, 비로소 주인공은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젊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그만큼 이 남자와의 관계에서 그만큼 영속성은 멀어지게 된다"는 진실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이것은 결말의 예측과 맞닿아 있고, 두 사람이 함께하던 나날의 진실과 끝내 결말을 맞이한 그 후의 일상이 보기보다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이미 숱한 연애를 경험한 우리들에게도 보란 듯이 전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육체적 쾌락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함은 관계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끝으로 아니 에르노의 이 작품도 자신의 실제 경험과 문학적 장치가 혼합되어 있는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소설을 통해, 노년의 여자가 젊은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거의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단순히 이러한 만남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권력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일정 부분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있는 일반적인 모습의 연애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아직 노년에 들어서지 않은 저 같은 사람이 이들이 보이는 여러 회한과 일생을 살아온 스스로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장소, 바로 그 병원이 내가 학생 시절, 불법 임신중절 후에 출혈을 일으킨 1월의 어느 밤에 이송된 곳이다.

그의 집에서 나는 학생 시절, 신혼 초 남편과 살며 겪었던 불편함과 초라한 가구들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쾌락을 주었고, 다시 살아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질투에 휩싸일 때마다 비난했던 이 같은 이중성은 그의 상상과는 달리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내가 품었을지 모를 욕망에 자리 잡지 않았다.

쉰 살 먹은 남자가 분명 자기 딸이 아닌 여자와 아무런 지탄을 받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마당에.

그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에 대한 이 긴 기억은, 결국에는 내가 죽은 후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사건들과 정치적인 인물들이 새겨진 그의 기억이 될 것과 짝을 이룰 것이며, 뒤집힌 이미지가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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