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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에르
김붕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77년 2월
평점 :
품절
우리가 보들레르를 이해하고, 찾게되는 때는 언제일까. 6.25의 참담한 현실속에서 보들레르를 발견했다던 저자처럼, 세상을 지옥이라고 느끼는 인생의 그 어느때가 보들레르와 조우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의 싯구처럼 희망이 토굴감방에서 헛된 날개짓을 하는 박쥐로 전락할 때 우리는 평생을 '지옥에서의 한 철'처럼 살아야 했던 보들레르와 악수하게 되는 것이다.
제목은 굉장히 유명하고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데, 정작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들이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 그것은 흔히 퇴폐, 타락, 독설의 삼박자를 갖췄다고 평가되는 작가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것이면 됐다는 듯이, 동시대인들은 물론 100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들까지도 몇몇 인상들로 그와 그의 시를 평가하고는 제쳐논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누군가 화가 고흐에게 당신은 왜 미쳤냐고 물었더니 '너무 말짱한 세상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고흐나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후계자인 랭보나 베를렌느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정직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상식적인 시민의 눈으로 보면 하나같이 타락했지만 너무나 정직하게 타락했다. 말짱한 척한는 세상을 거부했기에 그들의 작품은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보들레르의 시는 셋방에서, 술집에서, 싸구려 호텔에서 빚장이에게 쫓기고 온갖 병에 시달리고 정부와 끊임없이 다투는 가운데 탄생했다. 그가 위고의 이상주의를 거부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무명과 악평에 시달리면서도 말하려 했던 것은 인간의 순진함이 무너지는 현대를 바라보는 정직함이었다. 드디어 젊은 시인들이 보들레르를 알아보고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을때 '저는 누구든지 남을 지도할 만한 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스스로 지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는 깊은 멸시를 품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그가 아닌가.
연옥을 살아가는 우리는 소름끼치도록 순수한 보들레르를 다만 '지옥의 시인'으로 스캔들 속에 박제해놓고 구경만 할 수 있을까? 인생의 참담함을 느낄때만 그의 싯구를 들쳐보면 그만인 것일까? 오히려 그와 함께 공존하면서 그의 말을 귀기울이는게 우리의 '정직함'일 것이다. 우리가 보들레르와 같이 살아가지는 않더라도, 그는 끊임없이 노래되어 매일을 안정적으로만 살려고 하는 무딘 우리를 끊임없이 투시하는 창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