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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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성실한 변호사 대리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루마니아 접경 지역으로 간다. 그는 영국인이니 꽤나 긴 여행을 한 셈이었고 그가 들어간 곳은 영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동유럽의 이국이었다. 자연은 웅장했으며 사람들은 깊은 신앙심과 미신이 혼재된 채 살고 있었다. 그가 드라큘라 백작의 성으로 간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를 동정하며 뭔가 두려움에 떨듯이 미신을 쫓는 손동작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약속장소까지 가면서 영국의 젊은이는 사람들의 두려움에 감염되기 시작했고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를 약속장소에서 기다린 마부와 함께 백작의 성으로 가는 동안 불안함은 점점 커지고 이리떼의 수상한 출현과 이윽고 보게된 드라큘라 백작의 성은 그가 상식적인 영국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 온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나중에 조나산 하커로 밝혀지는 이 젊은 변호사 대리가 드라큘라 백작의 성까지 가게 되고 거기서 백작의 정체를 의심하면서 나중에 탈출을 시도하게 되기까지의 묘사는 왜 원작을 뛰어넘은 패러디가 나오기 힘든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드라큘라 백작의 성이 위치한 자연에 대한 묘사와 조나산 하커의 작은 의혹과 점점 커져가는 불안을 나타내는 과정, 드라큘라 백작을 표현하는 인물묘사는 어떤 속편이나 영화도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일기와 수기, 편지, 신문기사들로 편집된 글은 속도감과 현장감을 높여주고 있어 요즘 소설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세밀한 세부 묘사가 주는 박력과 함께 고전과 현대의 환상적인 조합마저도 보여주고 있다. 속편이나 패러디일수록 더욱 자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브램 스토커의 원작이 공포나 야한 면에서는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을 찾자면 어디에나 있지만 실력으로써 독자를 자극하는 책이란 쉽게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정작 섭섭한 것은 그들의 선량함과 진취성에 정이 감에도 불구하고 드라큘라와 맞서 싸우는 조나산 하커와 미나 하커, 반 헬싱, 수어드, 아서, 퀸시 등이 하나같이 선량하고 용감한 인물들이라는 것과(그들은 흡혈귀와 싸운다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해서 번민도 없다) 그들과 백작의 대결이 완전하게 갈린 선과 악, 기독교와 악마의 대결이라는 단순한 구도라는 점에 있는데 빅토리아조의 브램 스토커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드라큘라의 인기는 시들줄 모르고 점점 복잡해지는 인간 군상은 원작의 단순한 구도를 탈피하는데 성공한 것 같으니 브램 스토커의 드랴큘라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나게 되는 것도 희망사항만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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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사람들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윤우섭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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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와 독자의 눈은 다르다. 평론가는 객관적으로 그 작품의 가치와 수준을 정리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높아지지만 흥분과 열정이 없이 무미건조하다. 그들은 책을 재미없게 읽은 것일까? 아니면 자제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일렀을까? 아니면 몇번이고 다시 읽으며 연구하는 동안 처음의 감동은 사그라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도스토예프스키 전집에는 각 책의 말미에 국내 연구자와 국외 연구자의 작품론을 짤막하게 읽고 있는데 이 <상처받은 사람들>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나 또한 그 작품론을 읽고 마지막으로 정리를 하며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었지만 노련한 평론가가 아니라 약간 모자란 독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은 사실에 감사했다. 이 신경질적이고 정열적이며 순수하고 다혈질적인 등장인물들이 몇 가지 사건으로 얽히며 개성을 드러내는 순간들을 이성과 머리로만 읽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가치와 구성상의 약점을 평가할 수 있는 이성보다 그들의 아슬아슬하고 뜨거운 심리상태에 같이 몰입하는 것이 더 큰 독서의 세례였다고 확신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귀환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다. 그리고 영원히 그의 개성으로 남을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를 보여준 예고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감성과 휴머니즘, <스뻬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의 풍자와 골계미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도 완전히 몰랐을 그의 세계를 펼쳐놓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전작들과는 다른 두근거림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병에 걸린 채 방을 얻으러 뻬쩨르부르그 거리를 헤매는 젊은 지식인이자 이 소설의 화자 바냐, 너무 일찍 어둡고 불결한 세상을 알아버려 병적인 오만밖에는 가진 재산이 없었던 간질병에 걸린 거지소녀 넬리, 어리석은 아이같은 애인에게 버림받을 걸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아름답고 자부심 강한 처녀 나따샤, 순박하나 흥분을 잘하며 극도로 고집이 센 나따샤의 아버지 니꼴라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사람에겐 일종의 편안함, 오래 아껴온 옷,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집, 어린 시절의 친구와 같은 느낌마저 준다. 전혀 부드럽지 않은 그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이 외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들었던 인물들인 어리석고 불가사의할 정도로 순진한 청년이자 나따샤의 애인인 알료샤, 호색한이고 탐욕스럽기가 괴물 수준이지만 늘씬한 외모와 귀족적인 태도로 능란하게 본성을 감추며 처신하는 알료샤의 아버지 공작도 꽤 두꺼운 분량의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는지 그 생생한 개성만으로도 그들을 용서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행복한 결말인지 불행한 결말인지 모를 이 소설은 너무나 강렬한 이야기다.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쓸 수 없을 것 같은, 끊어질 듯한 신경과 뜨거운 열 속에서 쓰여진 것 같은 이 소설은 그러나 조금의 불쾌함도 없이 읽는 이를 그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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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읽는 구약성서
편집부 / 한국신학연구소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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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구약은 잔혹하며 난해하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족보의 행렬과 낯선 지명과 인명, 사건들은 왠만한 끈기가 아니고서야 구약을 완독한다는 결심을 좌절하게 했고 다 읽고서도 이해하고 얻은 것 없이 농사를 망친 농부의 기분을 맛보게 했다. 그래서인지 구약은 휴머니즘과 인간 평등의 가치, 그리고 사랑의 정신이 발현된 예수와 그 제자들이 나오는 신약을 예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과 문헌학의 발달은 성경을 그 당시의 역사와 문화 가운데서 판단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 경전 해석의 발달은 값진 성과를 얻게 됐는데, 은연중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시각, 즉 로마제국의 공인 이후 고대 제국이라는 권력과, 중세의 성직자와 귀족이라는 기득권층, 근대 유럽의 무력팽창 기간 중 유럽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권력과 함께 하는 듯 보였던 성경을 권력의 족쇄에서 벗어나 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사실 구약은 잔혹하고 난해한 역사가 아니라 기층민들의 평등과 자유를 향한 구원의 역사였다. 성경을 저술한 이들이자 주요 등장인물인 히브리 민족은 하나의 씨족이나 혈연공동체이기보다는 주요 국가들에서 벗어나 중동을 떠돌았던 유랑기층민들이었다고 한다. 고대에는 힘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었고 권력자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은 상식이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독특한 가치를 앞세운 공동체를 창안하면서 이 흐름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바로 '신 앞에서의 평등'이 그것이었다. 왕은 신의 대리자 혹은 분신이며 일반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백성은 왕과 그 일족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고대의 상식은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예외를 두게 된다. 그 결과 왕이라 할지라도 농부의 땅을 사거나 빼앗을 수 없었고, 희년마다 빚이 탕감되고 노예가 해방됐으며 안식일마다 모든 사람과 가축이 휴식을 취했다. '신 앞에서의 평등'은 기득권자의 무한정한 권력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의 이런 평등을 향한 혁명은 지속성을 누리기가 힘들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의 증대해진 국가 권력은 신분 차별의 고착화와 권력자들을 위한 각종 노역을 강요했다. 이외에도 남왕국과 북왕국으로의 분열,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과 출애굽 이후의 오랜 방랑, 바빌론 유수 등은 히브리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다. 외부의 대사건들 외에도 '신 앞에서의 평등'은 내부의 안일과, 제물을 바치면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여기는 '우상숭배'로의 유혹으로 존립마저 위험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유일신의 존재여부라든지 고대 히브리인들이 진짜 야훼를 접하며 그 말씀을 들었는가 하는 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가장 중요하며 또 구약의 보편성을 이루는 것은 온갖 내부와 외부에 원인이 있던 위기 속에서도 소수 집단이었던 히브리인들이 '야훼'라는 구심점으로 끊임없이 자기정화를 시도하며 정체성과 자주성을 지켜나갔다는 사실이다. 순결과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야훼'라는 신의 존재는 분명 힘들고 귀찮았을텐데, 히브리인들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 가치를 되새기고 그것을 중심으로 뭉쳤다.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좌충우돌의 역사다. 그리고 대개는 약자로서의 역사였다. 하지만 그들이 약자였기 때문에 무력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그리고 무력의 지배를 오랜 기간 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주변 민족들과는 달리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창안함으로써 인간의 권력과 나태에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이 책은 유럽과 미국같은 기독교의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 불과한 한국의 학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그들은 히브리인이나 서양인의 눈 외에도 동양인의 눈으로 성경을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과 여성의 눈으로 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그 출발은 정복하고 다스렸던 게 아니라 지배당하고 떠돌았던 히브리들의 역사와 그들의 바램이 담긴 구약의 본모습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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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꿈 외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재만.박종소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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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의 색깔이 결정되는 때는 언제일까. 도스토예프스키는 '늦되는 아이' 혹은 '대기만성'형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혹은 사형위기와 시베리아 유형 생활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 어쨌든 앞세대 작가들을 끊임없이 패러디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저씨의 꿈> 이전같은 열에 들뜬 몽상가의 옷을 벗어버리고 능청스런 희비극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여전히 서두르는 듯한 문체, 지금의 글이 자기 세계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불만을 드러내는 듯한 문체만이 전작들과의 공통점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아저씨의 꿈>은 연극적인 가정극을 보는 느낌이다. 한 부인에 대한 묘사로 이 소설은 시작되는데, 그 부인은 그 소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사교계의 권력으로 통하는 대단한 부인으로 묘사된다. 기품있고 세속적인 능력 또한 겸비한. 하지만 그런 고전적인 분위기가 계속될 거라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음은 곧 드러난다. 그 부인은 딸과 다 죽어가는 늙은 공작과의 결혼을 성사시켜 딸을 출세시키고 자신도 뻬쩨르부르크에서 한 자리 할 꿈에 부풀어 있는 부산한 여인이고, 공작은 거의 백치나 다름없는데다 꿈과 현실도 구분하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기품있고 자존심 강하며 아름다운 인물은 부인의 딸 지나지만 그녀조차 다른 우스꽝스러운 인물들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정도다. 지나와 공작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부인의 작전을 끝까지 비열한 방법으로 방해하는 지나의 약혼자 모즈글랴꼬프와 부인을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부인의 남편까지 등장하면 소설을 희극과 비극을 넘나들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부산스런 준비를 갖추고 발사된 이 소설은 결국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희극적인 부분은 분명히 리얼하고 재미있어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고 인물들 또한 생생하지만, 주인공인 오만한 아가씨 지나와 다른 인물들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마추어 연극처럼 되어버렸다.

자신의 내면을 들어다볼 수 있는 사람은 깊이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내면을 들어다볼 수 있는 작가는 재능있는 작가다. 그래야만 확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다른 예술가들과 차별되는 작품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누구나 그만의 세계를 인정하는 '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 도스토예프스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그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몇 십년의 모색기와 시베리아 유형을 제물로 바쳤어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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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생애 -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
베르톨트 브레히트 외 지음, 차경아 옮김 / 두레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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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시대에는 과학이 멸시당했고, 현대에는 과학이 존숭받는다. 하지만 길릴레이 시대의 과학은 핍박받으면서도 낙천적이었고 과학자들은 열정적이고 순박했다. 하지만 과학이 어느 때보다 이 세상 피라미드의 정상에 있는 지금, 과학은 우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과학자들은 회의와 고집에 둘러싸여 있다.

<갈릴레이의 생애>의 저자 브레히트도 그런 딜레마가 있었던 것 같다. 탁구공처럼 통통 튀는 대사와 꾸밈없는 인물들로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 풍경을 묘사했음에도 마지막에 과학에 대해 우려 섞인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원폭 투하를 지켜보았던 현대 작가의 무너진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현대작가의 고민은 가장 밝았던 과학시대에 대한 묘사 속에서도 그림자를 드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리를 진리 자체로 보고 즐길 수 있었던 갈릴레이와 그 동료, 제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유쾌했던가.다른 사람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달과 별을 눈앞으로 끌어와 관찰했던 최초의 인간 갈릴레이, 페스트가 도는 와중에도 집에 머물러 연구하고 가정부의 아들에게 과학 원리를 설명하던 학자 갈릴레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아니라 가정부의 아들, 라틴어를 모르던 반 문맹자와 연구했던 갈릴레이.

그는 종교재판소에까지 끌려가고 말년에는 유폐된 채 세상을 마쳐야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의 과학자보다 행복한 인생을 살았던 것일 수도 있다. 누구나 유년기를 그리워하지만 유년기가 되돌아오지는 않듯이, 과학이 천진난만했던 시대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과학 자체가 근심거리가 되지 않았던 시대의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 <갈릴레오의 생애>가 더욱 감동적으로 읽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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