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묘한 말... 반성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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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간 하나의 연주회를 위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성공적이든 아쉽게든 일정을 마치고 갈채를 뒤로 하고 옷을 갈아입는 대기실에서의 오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 마치 우주에 홀로 있기라도 한 듯 외롭고 허탈하게 느껴진다는 연주자들의 사연을 접했다.

나는 우주 공간을 생각하면 그 상상 불허의 추위를 먼저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 연주자 역시 우주 공간에서의 경험이 없을 것이기에 느낌은 상상이고 유추일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은 실제하는 것이다. 지구의 모처에서 피어나는. 사실 우주 공간에서든 지구의 모처에서든 외로움의 퀄리티는 같고 허탈감의 무게는 비슷하지 않을지?

아무려나 우주와 무관한 나는 우주 공간에서 홀로 있는 느낌을 실제 경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연주자들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자신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궁금하다.

시간이 지나며 일정이 반복됨으로써 그들은 그 감정들로부터 조금씩이나마 자유로워지는지? 아니면 소멸할 줄 모르는 아픔처럼 허무감과 외로움도 늘 새로운 짐으로 느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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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이란 말이 있지만 드라마틱한 8대0 전원일치의 탄핵 인용은 놀랍다.

탄핵 축하 파티가 곳곳에서 무수히 많이 열리리라. 탄핵은 국민의 수치이자 영광이란 말이 가장 크게 눈에 띈다.

탄핵은 수많은 이슈를 가로챈 블랙홀 같은 역할을 했지만 해피 엔딩이어서 아주 다행스럽다.

물론 탄핵에 이르기까지의 혼란과 갈등은 환멸을 느끼게 하기에 족했다.

정치란 너무도 근본적인 이슈이기에 잡음과 혼란 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현명한 비판과 감시의 눈이 필요하다.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인지 모르지만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은 대체로 환상에 빠져 소중한 표를 아깝게 버린 사람들이다.

아니 버렸다기보다 악의 세력에 힘을 실어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5월 대선을 보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날씨가 투표율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궁금하다.

진짜 봄(봄 다운 봄)을 맞고 있지만 가는 길이 꽃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기쁘기 한량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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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소개로 알게 된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베르네유쉬르아브르에서 태어난 작가이다.

음악가 집안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감수성을, 언어학자 집안 출신의 어머니로부터 언어적 감각을 익힌 작가라는 점이 흥미를 부른다.
그러나 키냐르는 비극적이게도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 라틴어 등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자폐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18개월의 일이었다.

외삼촌의 기지로 사탕을 빨면서 자폐증에서 벗어났던 키냐르는 17세 무렵 재차 자폐증을 앓는데 이를 계기로 작가로서의 소명을 깨달았다고 하니 전화위복의 한 사례라 할 만하다.
물론 전화위복이란 평가가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부를 수도 있다.

의미로운 작품세계를 드러내 보여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가가 있겠지만 정작 그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 수 있기 때문이다.

키냐르는 ‘메두사에 관한 소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생존을 위해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썼던 이유는 글만이 침묵을 지키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프랑스 작가는 카뮈, 사르트르, 레몽 장, 르 클레지오, 파스칼 레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마르그리트 뒤라스,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정도이다.

모두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교수의 소개를 받아 읽었던 작가들이다.

첫 탐색을 위해 도서관에서 빌린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해줄 작품이다.

˝시, 되찾은 단어, 그것은 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며, 어떤 이미지 뒤에나 숨어 있게 마련인 전달 불가능한

이미지를 다시 나타나게 하며, 꼭 들어맞는 단어를 떠올려 빈칸을 채우고.. 은유의 내부에서 실행 중인 단락을 재현하는 언어이다...˝

깊은 관심을 부르는 구절이다.

한 동안 키냐르를 읽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분량이 적어 위압적이지 않아 좋다. 소개해준 분께 감사 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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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Der Frühling ist gekommen.)˝고 쓴 한 페친의 글을 보고 잠시 봄 생각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글보다 글을 쓴 사람이 차려 입은 가벼운 옷, 싸이클을 탄 모습의 사진이 봄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어떻든 나는 봄을 느끼기도 했지만 착각도 했다.

유쾌하다고도 아쉽다고도 할 수 있는 기억이 내 무의식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슈만의 봄(교향곡 1번 4악장, 원제; Frühling op 38)을 들으며 떠올리던 봄이란 뜻의 독일어 Frühling을 순간 같은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 쁘렝땅(Printemps)으로 착각한 결과이다.

이 착각은 결국 을지로에 있던 쁘렝땅백화점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데로 나아갔다.(쁘렝땅백화점은 지난 1997년 문을 닫았다.)

지난 1989년 내가 맡던 시골 교회 주일학교의 5학년 아이들 다섯 명을 데리고 을지로 나들이를 했었다. 벌써 28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홀로 민중신학에 빠져들며 내가 속했던 극히 보수적이었던 시골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꼈었다.

그럼에도 행복했던 것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였다. 산책을 하며 음악을 듣기에 좋은 시간이 되었다.

슈만의 ‘봄‘보다는 전악장이 봄과 참 잘 어울리는 같은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을 들으며 산책하는 것으로 봄을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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