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이라는 기독교 온라인 월간 잡지가 있다. 불교 온라인 계간 잡지인 불교평론에 가끔 들어가 보듯 ‘복음과 상황’에도 가끔 들어가 본다.

(언제 문제 없었던 때가 있었겠냐만..) 요즘 두 종교가 모두 문제인데 그래도 관심을 두는 것은 전기한 잡지들 때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론이 늘 내 관심이다. 오만(傲慢)이겠지만 나는 믿음이 없는 부류이다. 좋아하는 신학자 가운데 도로테 죌레가 있(었)다.

정미현이란 여성 신학자가 이 분의 책(‘저항과 신비’)을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와 별개로 죌레의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는 감명 깊게 읽었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죌레의 논지는 저항(적 행동)과 신비(적 지향)는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복음과 상황’ 최근호에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란 제목의 정미현 교수의 글이 실려 반가운 마음(죌레, 정미현 두 분이 두루 관련되었을 것이기에 2중으로)에 클릭했는데 정기 구독자만이 볼 수 있어 아쉬움을 삼켰다.

시간이 되면 페미니즘과 기독교적 관점을 결합한 분들의 책을 읽을 생각이다. 한가한 심산인지 모르겠지만 초기 불교, 초기 기독교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오늘 그 점을 오랜만에 거듭 확인한 것이다. 저항과 신비가 하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 참된 영성이란 신비와 저항을 한 품에 아우르는 것임을 주장한 죌레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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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소성괘 여덟개가 만나(8 곱하기 8) 64괘가 된다는 통설과 달리 4상(태양, 태음, 소양, 소음)이 세 번 만나(4 곱하기 4 곱하기 4) 64괘가 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진위 여부를 떠나 흥미롭다. 나는 64괘가 8 곱하기 8이란 사실로부터 8일무(佾舞)를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8일무란 가로 여덟, 세로 여덟 사람 즉 64 명이 추는 춤이다. 종묘 제례에서 추는 춤이다.

주역의 대의는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기 위해 굳이 주역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

평생 주역을 배웠지만 통달하지 못했다는 공자, 역시 평생 주역을 공부했지만 난해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다산 선생 등을 보면 주역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수천년 전의 책을 너무 신비화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산 선생은 평생 주역을 배웠지만 점을 치는 용도로는 한 번도 주역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유배 중에 자신의 앞날을 점친 것으로 볼 만한 행동을 했다.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하다는 원리를 알기 위해 주역을 공부한다는 사람도 자신의 구체적 운명을 미리 알려는 욕구에 따라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주역에 입문한 사람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나는 주역을 이야기거리를 얻는 데 활용한다.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시집)을 풍천소축, 산뢰이 등의 괘로 분석한 것이 한 예이다.

물론 주역을 공부하는 데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하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주역을 공부한다고 말하는 것은 석연치 않다. 차라리 점을 치기 위해 배운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하다.

점은 고대인들이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삶에 대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서툰 과학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주역이 살아남은 것은 점서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주역은 철학서의 성격이 더 강한데 진시황(과 그 일당들)이 점서로 오해해 놔두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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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이론적 관심이 아닌 실제적 관심으로 태극권에 대해 검색하다가 공자, 맹자를 모르고서 무술 논할 수 없다는 글(세종의 소리 20151021)을 만났다. ()와 문()은 같이 수련해야 효과가 좋다는 글이다.

 

필자(김장수)에 의하면 태극권에서는 심(:마음)과 신(:육체)의 균형이 맞지 않는데서 간신배가 나온다고 본다는 것이다. 간신이라...그렇다. 간신(奸臣)은 나라에 해를 끼치는 여섯 종류의 나쁜 신하 즉 육사신(六邪臣) 가운데 하나이다.

 

구신(具臣), 유신(諛臣), 간신(奸臣), 참신(讒臣), 적신(賊臣), 망국신(亡國臣)이 육사신이다. 구신(具臣)은 아무 구실도 하지 못하고 머리수만 채우는 신하, 참신(讒臣)은 참소를 일삼는 신하, 유신(諛臣)은 아첨하는 신하, 간신(奸臣)은 간사한 신하, 적신(賊臣)은 반역하는 신하, 망국신(亡國臣)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신하이다.

 

어떻든 이 흥미로운 조합을 지렛대 삼아 신들의 정원 조선 왕릉의 저자 이정근 님의 간신의 민낯’(20174월 출간)까지 들춰보게 되었다. 그런데 간신이 문제가 아니었다.

 

저자가 조말생, 한명회, 유자광, 임사홍, 윤원형, 이이첨, 김자점, 홍국영 등과 함께 거론된 안동 김씨편에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정조(正租)가 뿌린 씨앗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해석은 낯설지 않다.

 

낯설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최근에 나온 또 다른 역사 책으로 인해서이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가 쓴 정조와 정조 이후란 책(20175월 출간)에서도 이런 논리가 제시된 것이다.

 

오수창이란 필자의 오늘날의 역사학, 정조 연간 탕평정치,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의 삼각 대화란 글이 그 글인데 그는 19세기 세도정치의 등장에는 정조가 집권 중반기부터 척신의 육성을 암시하면서 명문세도가의 딸(김조순의 딸이자 순조비 순원황후)을 간택하는 등 세도를 위임했던 점이 영향을 주었다는 말을 했다.

 

덧붙여 정조가 공론의 그늘에서 신료 심환지와 비밀편지를 나누면서 배후에서 정치적 조율을 함으로써 공론 정치를 무력하게 했으며, 지나치게 의리를 강조함으로써 순조 이후의 정파들이 정적들을 숙청하고 천주교를 박해하는 데 빌미를 제공했다는 어두운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도 했다.(어조가 사뭇 조심스럽다.)

 

같은 책의 다른 필자인 이경구는 세도정치는 정조의 제반 개혁을 무산시킨 대표적 사례로 인식된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최대 설계자는 정조였다.”는 지적을 했다.(한국일보 62일 기사 참고)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국정을 치밀하게 이끌었던 정조의 정치는 자신과 같거나 자신보다 더 큰 역량을 지닌 군주에 의해서만 지속할 수 있었기에 정조 정치의 역사적 성격은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군주마저도 통치체제와 사회구조에서 후대로 계승될 새로운 틀을 수립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는 오수창 교수의 글을 다시 읽는다.

 

효명세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존경하는 할아버지 정조의 뜻을 받들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한 인물로 평가받는, 요절한 비운의 세자이다. 만일 정조가 세도정치를 초래했다는 말이 근거 있는 말이라면 정조와 효명세자는 묘한 인연의 줄로 이어진 사이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아픈 부분은 정조가 관념적인 학문인 주자학에 의거해 강국(强國)의 꿈을 가졌었다는 내용이다. 개혁군주 정조가 주자학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글을 접하게 되어 혼란스럽다. 물론 정조는 뛰어난 학(성리학)자 군주이다. 정조의 학자 군주적 성격과 관계 있겠지만 정조는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답하기만 하라)의 대가이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주장들은 이주한 님이 문제제기한 서울대 국문과 및 국사학과의 식민사학적 특성(’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참고)과 관계 있는 것일까? 서울대 식민사학 진영이 가장 물고 늘어지는 부분이 정조와 사도세자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내가 직접 읽어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리라.

 

나만이 최고라는 유아론(唯我論)을 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기에 내가 직접 읽고 헤아려야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정조의 과()에 무게를 두는 큰 테두리 안에서 세밀하게 직접 읽는 공부를 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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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메일 아이디는 anuloma이다. 옛 엠파스 블로그 시절 한 피아니스트는 이 단어가 울지 않겠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인 줄 알았다는 말을 했었다. anuloma는 고유 문자는 없고 발음만 있는 빨리어의 한 단어이다. 적응, 순응 등을 의미한다. 빨리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용하신 언어라고 한다.

 

지난 2002년 강남의 초기불교 수행 센터에 다닐 때 영향을 받아 지은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 스님이 해설한 아비담마 길라잡이에는 anuloma가 수순(隨順)으로 소개되어 있다.(2002년 발행 아비담마 길라잡이’ 779 페이지) 당시 열 차례 일정으로 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 강의를 들었었다. 스님은 수학을 전공한 수행자여서인지 합리적이고 군더더기 없다는 느낌을 갖게 하셨다.

 

잘못이라 생각되는 것은 초기 불교의 수행인 위빠사나를 통해 얻는 10 가지 지혜의 마지막 항목인 수순의 지혜를 겁도 없이 내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명상의 지혜, 생멸(生滅)을 아는 지혜... 숙고하는 지혜, ()에 대한 평온의 지혜 다음에 오는 수순의 지혜...

 

현재 아비담마 길라잡이는 최신 판으로 업그레이드 된 상태이다. 지면도 892페이지에서 1024페이지로 132 페이지나 늘었다. 초기불전연구원이 홍제동에서 울산으로(2004) 이주한 이래 한 번도 찾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초기불전연구원은 현재 울산에서 김해로(2010) 이주한 상태이다. 스님(각묵 스님)의 모습을 한 번 뵙고 싶은데 초기 불교 경전과 주석서 번역 및 저술 등을 해오시다가 지난 2010년 뇌종양 수술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카페에도 잘 가지 않다가 수술 소식을 7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알게 되다니... 부지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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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 평론가이고 교수이고...봄 여윔이란 뜻의 춘수(春瘦)라는 시어를 만들어낸 분.(瘦; 여윌 수), 오룩이란 인물을 알게 해준 분.(오룩은 내가 감명 깊게 읽은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 나오는 훌륭한 고수鼓手이자 이야기꾼이다.) 시심전심(詩心傳心)이란 말을 알게 해준 분. ‘파이(π)의 시학’에서 비체(鼻涕) 즉 아브젝시옹이란 개념으로 미당의 시들을 분석한 시론을 펼친 분.

그가 이번에 ‘패러디’란 시론집을 냈다. ‘파이의 시학’에 이미(?) 패러디론이 있으니 출간 해인 2010년부터 패러디에 대해 준비한 것이라 하겠다. 물론 1997년에 ‘패러디 시학’이 나왔음을 지적해야겠다.)

저자는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김종삼의 ‘정원’ 등 너무나 좋아했던 우리 시들이 ‘외국 시의 베끼기’ 였다는 걸 알고 난 후 배신감”으로 패러디를 공부했다고 말한다.(나는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가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를 표절한 시이니 패러디한 시니 하는 말들이 있었을 때 그런가 보다 했다.

요즘 작품 활동이 거의 없는 양귀자 작가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란 소설을 썼는데 이 제목이 폴 엘뤼아르의 시 ‘커브’에서 가져온 것(전문全文)이다. 찾아 보니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세월이 참 빨리 갔음을 느낀다.) 각설(却說)하고 ‘패러디’는 공부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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