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상황’이라는 기독교 온라인 월간 잡지가 있다. 불교 온라인 계간 잡지인 불교평론에 가끔 들어가 보듯 ‘복음과 상황’에도 가끔 들어가 본다.
(언제 문제 없었던 때가 있었겠냐만..) 요즘 두 종교가 모두 문제인데 그래도 관심을 두는 것은 전기한 잡지들 때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론이 늘 내 관심이다. 오만(傲慢)이겠지만 나는 믿음이 없는 부류이다. 좋아하는 신학자 가운데 도로테 죌레가 있(었)다.
정미현이란 여성 신학자가 이 분의 책(‘저항과 신비’)을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와 별개로 죌레의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는 감명 깊게 읽었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죌레의 논지는 저항(적 행동)과 신비(적 지향)는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복음과 상황’ 최근호에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란 제목의 정미현 교수의 글이 실려 반가운 마음(죌레, 정미현 두 분이 두루 관련되었을 것이기에 2중으로)에 클릭했는데 정기 구독자만이 볼 수 있어 아쉬움을 삼켰다.
시간이 되면 페미니즘과 기독교적 관점을 결합한 분들의 책을 읽을 생각이다. 한가한 심산인지 모르겠지만 초기 불교, 초기 기독교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오늘 그 점을 오랜만에 거듭 확인한 것이다. 저항과 신비가 하나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겠다. 참된 영성이란 신비와 저항을 한 품에 아우르는 것임을 주장한 죌레를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