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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 세계문화유산 종묘에 숨겨진 역사의 재발견
이상주 지음, 이규대 사진 / 다음생각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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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가 사당인 종묘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나로서는 종묘를 일반인들을 배제한 채 몇몇 동행들과만 보겠다고 해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낸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구겐하임 빌바오를 설계한...), 우리의 목조 건물들 중 가장 긴 101미터(정전)의 위용 등에 초점을 두었는데 이상주는 조선의 화재대책은 종묘의 화재대책이라는 말로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를 시작해 신선함을 준다. 한양 도성에 불이 나면 가장 먼저 진화해야 하는 곳이 종묘인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종묘는 아직 문헌적으로 보강되고 이론적으로 설득력을 키워야 하는 곳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의 의문들이다. 초헌관인 임금은 신(神)이 된 조상들에게 값싼 예제(단술)를 올리는데 신하인 영의정은 비싼 청주를 바치는가, 생전에 진수성찬, 산해진미를 드셨을 신(神)이 된 임금께 왜 생고기를 올리는가..
제사(祭祀)란 교제한다는 의미의 祭와, 같다(似)는 의미의 祀가 합쳐진 말로 사람과 귀신의 교제를 의미한다.(20 페이지) 종묘는 최고지존인 왕조차 최고가 아닌 구역, 신을 위한 공간이다. 왕은 선왕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함은 물론 스스로도 걸을 수 없는 길이 있다. 신이 걷는 길인 중앙의 신향로(神香路)가 그것이다.
신향로의 오른쪽 길은 어로(御路), 왼쪽 길은 세자로(世子路)이다. 경복궁에도 세 길이 있는데 중앙의 길은 어로, 좌우는 문무관의 길이다.(24 페이지) 종묘는 정치적 역학관계가 반영된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27 명의 임금 중 2명(연산군, 광해군)이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 35명의 임금이 모셔졌는데 그것은 추존왕이 있기 때문이다.
공덕에 따라 정전에 계속 모셔지는 임금도 있고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진 임금도 있다. 단종, 현덕왕후, 단경왕후 등은 사후 수백년이 지나서 부묘되었다. 종묘에 모셔진 신주(神主)는 4대가 되면 영녕전으로 옮기는데 특히 공덕이 많은 임금은 영원히 옮기지 않는다. 태조, 태종, 세종 등의 임금이다. 그렇게 공덕이 특히 많은 임금들이 계속 머무는 곳을 세실(世室)이라 한다.
그런데 4대가 되기 전에 영원히 모시는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선언된 임금이 있다. 효종과 영조이다. 영조는 정쟁과 판단착오로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다. 영조는 손자(정조)를, 일찍 죽은 큰아들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아 종통을 잇게 했다. 영조를 불천지위로 결정한 임금은 정조이다. 정조는 영조를 불천지위로 선언하는 교문(敎文)을 반포했다.
임금과 세자는 권력 관계로 엮인 사이이다. 임금과 세자는 항상 같이 움직여야 했다. 세자는 항상 임금의 가시권에 있어야 했다. 사적으로는 부자관계이지만 임금과, 임금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인 사이이기에 은근한 긴장이 있었다. 임금은 세자를 가까이 두어야 안심했다. 임금이 친향례(임금이 직접 참여하여 제사지내는 것)를 하지 못할 경우 세자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는 것은 권력의 속성상 본능적으로 피했다.(86 페이지)
어머니에 대한 정을 보이는 것을 넘어 왕권강화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생모의 추숭(追崇)에 크게 신경을 썼던 광해군을 통해 우리는 예의 그 권력관계에 대해 음미하게 된다.(107 페이지) 임금과 왕후의 종묘 부묘 때 세 가지 용어가 쓰인다. 부알(祔謁), 묘알(廟謁), 승부(陞祔)가 그것이다.(121 페이지) 정상적일 때는 부알을 쓰지만 때로는 묘알과 승부를 쓴다.
승하(昇遐) 후 27개월이 지나 종묘에 부묘되는 임금이 선대왕과 선왕후에게 신고하는 말로 하는 멘트가 “부알이요“이다. 임금을 알현한 뒤 자신의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의미이다. 태종에 의해 왕비 지위가 박탈되고 종묘에 부묘되지 못하게 된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경우 사후 300년이 거의 다 되어 왕비의 지위를 회복하고 남편인 태조의 곁으로 오게 되었는데 이때 종묘의 숱한 임금과 왕후는 태조를 제외하면 모두 아랫 사람이기에 스스로 올라가 자리에 앉겠다는 의미의 승부라는 용어가 쓰인다.
묘알의 예는 단종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단종은 정전에서 4년 간 머물다 영녕전으로 가는 일반 관례와 달리 영녕전으로 직행했다. 비운의 단종은 영녕전으로 가기 전에 정전의 선대왕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했다. 이때 묘알이란 말이 쓰인 것이다.(122 페이지)
조선 관료들의 사후 최고 영광은 종묘에 배향되는 것이다.(129 페이지) 임금에게 특히 큰 충성을 했거나 나라에 공로가 큰 경우이다. 종묘의 배향 공신은 애초 아흔 다섯 명이었다. 정치적 변고로 추가되거나 삭제되었고 영녕전으로 조천될 때 매안(埋安; 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되기도 해 현재는 여든 세 명이다.(129 페이지)
조선이 망한 이후인 요즘에는 부묘 의식은 없고 종묘제례가 있다.(137 페이지) 종묘에 떼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선조때의 일로 선조의 도덕적 실종이 조직적인 종묘 도적질을 부른 것이다. 도적들은 삼성추국(三省推鞫)되었다. 삼성추국은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의 관원이 합석하여 심문하는 것이다.(184 페이지)
친일파 이완용이 종묘에 배향된 적이 있다. 순종 승하로 배향된 것이다. 이완용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종묘에서 제거되었다. 최소 5년은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던 것이다.(189 페이지) 종묘제례는 경건해야 한다. 혼령이 식음하는 음식은 온갖 정성을 다해 마련한다.
희생물도 고통을 받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희생물을 편안하게 보내는 비밀은 음악에 있다. 음악을 들려주고 한 순간에 죽이는 것이다.(220 페이지) 종묘대제에서는 신이 된 임금들에게 세 차례 술을 올린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각각 술을 올리면서 왕실과 나라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한다.
이익, 정약용 등은 가끔 제자들로부터 임금이 가장 귀한 명주가 아닌 거친 술을 올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제사는 우리의 민간 전통에서나 유교에서나 정성을 가장 우선시했고 정성은 가장 오래된 것을 으뜸으로 쳤다.(223 페이지) 종묘제례는 향기제례라고도 불린다. 신이 향기를 음미하는 제례라는 의미이다. 물론 제사는 향기제례이면서 식신제례이다.
종묘제례에는 익힌 고기가 아닌 생고기를 쓴다. 희생(羲牲)이란 말을 보면 그 배경을 알 수 있다. 牲에 들어 있는 날 생(生)이란 말은 제물이 살아 있음을 뜻한다. 종묘에는 세 개의 연못(지당池塘)이 있다. 정전 앞에서 시작하여 정문으로 가는 위치에 따라 상지, 중지, 하지라 한다.
세종 25년에 지금 농사철인데 비가 때맞춰 내리지 않으니 종묘에 못을 파는 일과 간의대에 해시계를 설치하는 일 외에는 여러 사업을 모두 중지하라는 기록이 있다.(251 페이지) 종묘의 상징목은 향나무이다. 사직은 소나무, 종묘는 향나무이다. 창덕궁의 우봉지나 경복궁 경회루의 망지에는 소나무가 있다.
향나무는 귀신을 부른다는 속설이 있다. 저자는 향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255 페이지) 종묘에는 지당의 섬에 향나무를 심어 신궁의 상징성과 함께 향의 재료를 즉시 구할 수 있게 했다. 종묘에는 25명의 임금, 9명의 추존왕, 의민황태자 등이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에서 어숙실로 가는 길에 주목(朱木)이 심어져 있다. 껍질과 속살이 유난히 붉어 주목이라 불린다. 주목은 나무 중에서 수명이 가장 길 뿐 아니라 목재로서의 수명도 길어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고 한다. 조선이 영원토록 지속되고 종묘에 모셔진 영혼이 영원하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270 페이지)
전사청 앞에는 작은 오얏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오얏은 조선황실의 상징이다. 오얏나무는 4월에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271 페이지) 임금들의 영혼이 숨쉬는 국가 사당을 사람이 많이 모이는 중심가에 세운 것은 좌묘우사 원칙에 따른 것이다. 임금이 궁궐을 중심으로 남쪽을 향했을 때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 또는 창엽문이라 한다. 종묘 건물에는 현판이 없다. 종묘는 오는 이가 한정되었기에 현판이 없는 것이다. 종묘는 본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곳이니 제관 등 제례에 관련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굳이 이름표를 붙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273 페이지)
사랑한다, 아름답다 등 두뇌로만 감지되는 추상적인 정신은 혼(魂), 꼬집으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고파 하는 등 육체적인 정신은 백(魄)이라 한다. 혼은 자유로워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죽으면 땅에 같이 묻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종묘는 무덤이 있는 곳이 아니다. 무덤 묘(墓)가 아닌 사당 묘(廟)를 쓰는 이유이다.
종묘는 세계 4개국에만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이다. 그 중 우리나라 것만 세계유산이 되었다. 종묘의 기능 수행, 독특한 제도, 건축물의 우수성 때문이다. 앞선 왕조의 신주를 모시는 점, 불천위제도, 사당 건축물로서 세계에서 가장 긴 건축물이라는 점 등이 작용했다. 종묘 정전의 기둥은 20개로 안정감을 주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엔타시스 공법을 썼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탔을 때 왕궁보다 먼저 복원되었다. 종묘 정전의 문은 일부러 어긋나게 만들었다. 목재인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신실에 통풍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혼령이 자유롭게 다닌다는 상징성도 있다. 일본의 종묘인 이세신궁은 식년천궁이라 해서20년마다 건물을 새로 짓고 옛 건물은 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