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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행하는 왕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34
마르크 블로크 지음, 박용진 옮김 / 한길사 / 2015년 5월
평점 :
중세 후기부터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은 연주창 환자들에게 손을 대서 치료를 하는, ‘손대기 치료’를 시행하였다. 중세 시대의 수많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은, 이 치료는 무려 18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금방 효과가 없다고 들통날 것 같은, 이러한 치료법이 어떻게 수 백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가?
이는 프랑스와 영국 왕정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놀랍게도 이러한 손대기 치료는 다른 기독교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오직 프랑스와 영국에서만 유행하였다. 이들 서유럽 국가에서는 왕에게 단순히 정치적 지배자를 넘어 사제로서의 성격도 부여할려고 하였다. 이는 당시 교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교회 입장에서 교회권은 왕권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었고 ‘신의 기적’은 교회의 영역이지, 왕의 능력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이후 교회의 힘이 약화되고 절대왕정의 시대가 오면서, 이러한 손대기 치료는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이러한 치료가 효과가 없음을 아는 이들이 많았지만, 대중들의 믿음과 기대를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영국의 경우 호국경 크롬웰이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국왕의 영역이었던 손대기 치료를 중단시켰으나,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가 되면서 다시 ‘손대기 치료’가 성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손대기 치료도 점점 대중들의 지식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그리고 절대왕정이 몰락함에 따라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영국은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면서 ‘손대기 치료’가 사라졌고, 프랑스는 대혁명으로 부르봉 왕실이 몰락하면서 ‘손대기 치료’가 사라졌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프랑스 왕실이 복고되자, 샤를 10세는 이 구시대적인 유물을 다시 꺼내들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지식인들은 물론, 대중들의 호응도 좋지 않았고 결국 1825년을 끝으로 ‘손대기 치료’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만다.
‘손대기 치료’는 언뜻 보면 주목할 게 없어 보이는 민간요법이지만, 마르크 블로크는 이 민간요법에서 중세 후기, 그리고 절대왕정 시대 서유럽의 사회상과, 왕권과 교권의 대립까지 도출해내었다. 범인은 어떤 현상을 볼 때 현상 그 자체 밖에 못 보지만, 마르크 블로크는 현상 그 자체를 넘어 현상 뒤에 숨겨진 진실까지 보았고, 이것이 그를 ‘역사학의 대가’로, 또 그의 저서를 고전으로 남게 만든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