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fi 문학과지성 시인선 511
강성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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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도시에서 사람들은 영원히 젊어 보였다
죽음이라는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다
죽어야만 가장 먼 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달에 다녀온 사람도 알지 못했다
때로 깊은 밤
극장의 어둠 속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창밖으로 미끄러져가는 빙하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지구만큼 오래된
한없이 깊은 잠

그런 밤이면 연필을 깎고
나는 백지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 잠들어
꿈이 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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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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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한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나는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서 내가 그동안 그것을 ‘그다지’ 좋아한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다. 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당신들이 모르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끄덕이는 사람, 나는 불안한 수다쟁이, 나는 나의 이야기,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 나는 나의 각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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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시대의 의사 -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
카를 야스퍼스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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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연과학이 의학에 도입되면서,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따로 치료법이 없던 질병들에도 의사들은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지만, 역설적으로 환자들은 어느 때보다 의사들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자연과학적 의학은 그동안 의학을 구성했던 부분들에서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들, 특히 철학을 몰아내면서 더욱 이러한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현상을 경계하면서 의사에게 있어서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 소양인지 강조한다. 그가 무려 2번이나 인용한 히포크라테스의 명제에서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 (ίατρός φιλόσξφος ίσόνες)”

인간에게는 질병을 앓는다는 것이 매우 편해졌다. 폐렴은 페니실린 주사를 놓게 되면서 사라졌지만, 그러나 환자는 신경증적 장애에 빠졌다. 왜냐하면 폐렴을 앓는 의미에 대해 답이 구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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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리커버 에디션)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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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어버린 다음 날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슬픔을 표현하는 솔직하고 간결한 문장들, 하지만 슬픔을 표현하는데 화려한 문학적 비유들은 모두 거짓되고 쓸데없는 겉치레 일 뿐...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문장들이 오히려 마망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그녀를 잃어버린 후의 상실감을 여과없이 전해준다. 슬픔은 시간도 지워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그 슬픔을 숙명처럼 짊어지며 살아갈 뿐이다.

애도: 그건 (어떤 빛 같은 것이) 꺼져 있는 상태. 그 어떤 ‘충만’이 막혀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애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 상태다: 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웅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마담 팡제라가 내게 하는 말):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어버린 조르주 드 로리스에게 보내는 프루스트의 편지

"제가 지금 당신에게 해드릴 수 있는 말은 한 가지 뿐입니다.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이제 당신은 행복한 순간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어머니가 아직 당신 곁에 있었을 때, 당신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게 될 오늘과 같은 시간만을 생각했겠죠. 그리고 지금 당신은 그녀가 여전히 곁에 있었던 지난날만을 생각하고 있겠죠. 그런데 과거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일은 참으로 잔인하지만, 그 일에 서서히 습관이 되면, 당신은 차츰 감지하게 될 겁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아주 부드럽게 새로운 삶으로 깨어나 당신에게로 되돌아와서, 그 분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당신의 곁에, 그 어떤 빈 곳도 남기지 않고 다시 존재하게 될 거라는 말이죠.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아직 불가능합니다. 침착하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그러면서 당신을 어느 정도 바로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수수께끼 같은 힘이 찾아올 때까지. 제가 여기서 ‘어느 정도’라고 말하는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잃어버린) 좌절감은 전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여전히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당신도 이제 알게 될 겁니다. 결코 위안 같은 건 찾을 수 없으리라는걸.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걸, 이 사실을 깨닫는 일이 다름 아닌 위안이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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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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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동경하고 원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나의 영혼 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머물러 있었다.

"좋은 책이란 우리에게 모든 세계를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야"
"책은 실제로 책 속에 존재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에 쓰여 있는 말을 통해 내가 그 존재감과 지속성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의 일부분이야"
"세상의 정적 또는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 무엇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적과 소음도 그것 자체는 아니야"
"좋은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종의 무(無), 일종의 죽음을 설명하는 글이지... 그렇지만 단어들 너머에 존재하는 나라를 글과 책 밖에서 찾는 것은 헛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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