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이력서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양영란 옮김, 오영욱 그림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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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서 지구의 대기업에 취직을 하기 위해 면접시험을 치르게 된다. 이력서 한 통과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지상으로 내려온 하느님은 프랑스 어느 대기업의 인사부장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지만, 인사부장은 하느님의 ‘대단한’ 이력서를 읽으면서도 어쩐지 심드렁한 반응인데……. 인사부장은 하느님의 이력서에 적힌 수많은 업적을 읽으며, 존경심 이전에 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증폭되는 듯 보였다.

  하늘과 땅, 바다와 바람, 모든 동물과 인간까지 창조하신 하느님은 의외로 아주 단순한 이유로 이들을 창조했다. 사제들도 없던 그 옛날, 혼자서 모든 것을 탄생시키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지금은 후회가 더욱 많아 보인다. 인간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서 꽃과 별, 아름다운 바다를 만들었지만, 인간들은 이제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 감사하기는커녕, 물질문명의 이득만을 취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하늘의 별 밭이 멋지게 펼쳐져 있지만, 어둠 속에 빛이 주는 황홀경도 무시한 채, 인간들은 밤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TV만을 시청하며 밤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은 튼튼한 두 다리를 주셨음에도 걷는 것을 극도로 증오하는 인간들은 자동차를 만들어 두 다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지구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만드신 풍부한 천연 자원과 아름다운 자연들을, 망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인간들은 무자비로 훼손시키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풍자를 예리하게 하고 있다. 굉장히 짧은 분량의 우화 같은 소설, 「하느님의 이력서」는 유머러스하고 기발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냉정한 현실 비판의 감각까지 지니고 있다. 점점 삭막하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세상사에 염증을 느끼는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역시 위에서 지켜보기 애처롭고 화가 나는 일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단순한 스토리에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을 발견한 ‘장 루이 푸르니에’의 「하느님의 이력서」를 읽으며, ‘만일 신이 정말로 존재하신다면, 왜…?’, 라는 가정에 힘을 실어 넣을 수 있었다. 

  ‘짐 캐리’주연의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보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느님의 업무가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보여 지고 있다. 세상 업무에 지친 창조주는 자신의 업무를 인간에게 일주일간 맡기게 되는데, 그 동안 세상은 엉망으로 변하고 만다. 코미디 영화에서까지 신의 존재가 코믹하게 그려지는 것을 보면, 지극히 신성시하며 찬양하던 순수한 존재로서의 절대자에 대한 존경심은 대중화와 함께 많이 수그러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하느님을 소재로 접하게 되는 매체들 속에서 우리는 무서운 존재로서의 신이 아닌,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존재의 신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의 이력서는 아마도 손에 쥐기도 힘들만큼 많은 업적들이 적혀 있어서, 일일이 검토하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기발한 상상력에 의해 탄생한 소설,「하느님의 이력서」를 읽으며 다시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우리는 너무 과소평가하며 불필요한 것처럼 업신여기지 않았나, 하고 반성해 본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제발 사고 좀 치지 말아야 할 텐데, 자꾸만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고, 무거운 문제들만 발생시키는지 모르겠다. ‘하느님의 이력서’에 적힌 내용들을 훑어보면서, 모두들 반성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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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 에세이 작가총서 96
정민호 지음 / 에세이퍼블리싱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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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호’님을 보면 언제나 ‘멋지다’, 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인터넷을 모르고 조용히 책을 읽던 시절, 마치 나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고 있는지 그 때는 정령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한달에 열권에서 수십 권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 저장하는 지식의 분량 또한 방대하다. 책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정민호’님 만큼 책을 사랑하며, 늘 가까이 하는 분도 드물 듯 하다. 나와는 겨우 두 살 차이.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며, 늘 친절이 몸에 베인 듯한 태도는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을 통해 알게 된 분이라 그런지, 언제나 이 분을 보면 기분이 좋다. ‘책 읽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가장 먼저 깨우쳐 마음을 열어 주셨기에, 멀리 있어도 그 분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년 추석 쯤, 스페인으로 여행을 가신다고 했다. 산티아고 성당 가는 고된 길을 다녀오겠노라고 선포하신 후, 한 달 가량 감감무소식. 그러던 중 날아온 엽서 한 통.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가슴이 시큰거려 혼났다.

  작은 엽서를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생생한 여행기를 담은 「산티아고 가는 길」은 스무날이 넘는 시간 동안 산티아고를 가기 위한 고행을 담은 귀중한 책이다. 왜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고, 작은 풀 한포기를 보면서도 감동을 하게 되는 걸까? 주거지를 벗어나 낯선 곳을 향하는 발걸음의 시작은 어려울지언정, 목표지를 세워두고 첫 걸음을 뗐을 때의 감동이 천천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설렘과 깊은 감동의 여운을 느끼기 위한 산티아고 가는 길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한 없이 나약한 인간이구나, 라고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걸어서 800km를 간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두 발로 걸어서 대장정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여행객들로 산티아고 가는 길은 마치 거대한 인간 박물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일본, 그리고 고국의 스페인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산티아고’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걷기 여행을 한다면,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이 동료이자, 친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며칠 동안 사귄 친구들 ‘마이키, 스요시, 매튜’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코끝이 찡해 혼났다는 저자의 목소리에 나까지도 가슴이 울컥했다.

  오랜 걷기로 인한 다리의 고통. 그보다 더 힘든 물집 잡힌 발바닥에 가해지는 고통. 흡사 가시밭길을 걷는 듯한 이런 고통들을 느끼면서도 진정 행복했노라고 크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커다란 감동이자 축복일 것이다. 악천후의 날씨,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에 힘들어하며,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에 대한 한계를 보디랭귀지로 해결하며, 그렇게 마침내 목표한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의 짜릿한 희열! ……아,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진정 부러웠다. 

  언제나 인간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듯 하다. 낯선 이국땅에서 어렵사리 고군분투한 그 시간들 속에서 정민호님은 잃어버렸던 자아를 분명 찾았으리라.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거친 호흡소리에서 거친 생명력을 다시금 느끼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으리라.

  고된 여행길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과 산티아고 가는 길의 다양한 풍경들을 책을 통해서나마 느낄 수 있어서 나 역시 행복했다. 그리고 또 하나. 평소에 틈틈이 외국어를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땀으로 범벅된 순례자들의 걸음이 새삼 부럽게 느껴졌다. 그간 나는 얼마나 걷는 것을 지겨워했는지….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무작정 걸어보고 싶다. 언젠가 가게 될 그 곳 산티아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어딘가의 있을 나의 다른 세계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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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7-02-01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군님!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 멋진 정군님~
 
6월 26일 하멜른
케이스 매퀸.애덤 매퀸 지음, 이지오 옮김, 오석균 감수 / 가치창조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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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로 내려오던 민담을 ‘그림 형제’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동화로 편찬했다. 동화의 줄거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 떼가 들끓는 마을에서 피리를 불어 쥐들을 강물에 빠뜨려 모두 소탕했는데, 마을 주민들이 약속한 사례금을 주지 않는다. 화가 난 악공은 그 마을의 아이들을 피리로 홀려 모두 데리고 떠나버린다는 다소 엽기적인 잔혹 동화였다. 「6월 26일, 하멜른」은 이러한 동화의 뼈대에 피와 살이 덧붙여져 탄탄한 골격을 형성한 새로운 소설을 탄생되었다.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탄생한 소설이니만큼, 동화책에서 느끼지 못했던 현실적인 탄탄함을 발견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 그리고 어떤 인문들에 의해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밝혀졌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사소한 사건에 대한 내용을, 주도면밀하게 다시 공부 한 기분이 들었다.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작가의 꼼꼼함에 놀라게 된다. 1284년 6월 22일부터, 26일까지 단 5일 동안 발생하는 이야기를 400페이지 가량의 텍스트로 기록해두었으니, 사건들의 연결이 매우 섬세하고 꼼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작 동화의 분량이라고 해봤자 분명 지극히 짧은 분량일 텐데, 약간의 단서들로 이토록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긴 이야기가 탄생하다니…. 놀랍기도 하고, 새삼 두 작가의 재치 있는 상상력에 경외감이 들었다. 「6월 26일, 하멜른」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한다면 단연, 전설속의 민담과 그림 형제의 원작 동화를 바탕으로 재미있는 소설 한 작품이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른들의 무분별한 물질만능주의와 지나친 욕심으로 상처 받는 것은 언제나 못 가진 자들과 연약한 어린 아이들이라는 큰 교훈 역시 놓치지 않고 있다.

  ‘케이스 매퀸’과 ‘애덤 매퀸’, 부자(父子)가(사진을 통해서 본 두 부자는 붕어빵에다가 매우 미남들이다.) 공동집필한 소설답게, 이 책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끈끈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소설의 내용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화합이라는 주요테마가 작용되어 있다. 주인공인 피리 부는 악사 ‘요하네스’와 길드의 배반자 ‘안셀름’, 그리고 영주의 아들 ‘슈트롬’ 역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배신,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진한 갈망 등이 잘 나타나 있는 듯 하다. 케이스와 애덤, 두 부자간의 정이 고스란히 소설 속에 투영되어 있었다.

  아들의 눈에, 때로는 아버지가 무능하게 보이기도 하고, 과욕으로 인해 한심하게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의 눈에 아들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간혹 큰 사랑을 주지 못하기도 하고, 아들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는 화를 내기도 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전형적인 부자간의 갈등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서 가장 진하게 느꼈던 부자애에 대한 부분들이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심에 언제나 아이들만 큰 상처를 받고 마는 것이다.

  몇 개의 단서만으로 용의주도하게 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두 작가의 탁월한 능력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할 것 같다. 고전 동화와 판타지 소설, 혹은 추리 소설의 영역까지 넘볼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책이다. 떠돌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무엇 때문에 쥐 떼가 들끓는 하멜른으로 와서, 수 만 마리의 쥐들을 소탕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 보시기를!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 탄탄한 열쇠 꾸러미가 이 책에 숨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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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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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 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 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 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다. -94쪽

역사와 삶 속에서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가복음 4장 25절」- 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메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공공연히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134쪽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 말라.-179쪽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들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다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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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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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오로지 죽음의 결말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인간이다. 강제 수용소에 잡혀온 2만 명가량의 사람들과 광기에 사로잡힌 독일군. 죽음의 결말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우슈비츠에서는 오직 피억압자와 억압자, 이렇게 단 두 부류로만 나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인간이 평등하다는 신화가 얼마나 공허한지, 감히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치인지, 이유 없는 감옥에선 오로지 지옥의 기로에 선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만이 메아리쳐 들려올 뿐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다. 아니, 부당함의 역사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독일인의 치부를 건드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옥과도 같았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토대로 다시 한 번 반세기 전, 피의 전쟁터 그 살육의 현장을 바라본다. 반드시 존재했던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새삼 건조하게 느껴졌다. 광기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나치즘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그의 초연함에서 분노보다 더욱 무서운 증오의 순화를 경험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간이 재생할 수 있는 모든 기본 권리마저 박탈당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 3 수용소에서의 1년. 수용소의 사람들은 의식주는 고사하고 짐승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자살 할 의지마저 꺾이는 삶의 최 하단 층의 피 끓는 고통의 시간들을 겪는다. 이 곳에서는 이유가 없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모든 부당함뿐인 불공평한 법칙에 대한 이유 따윈 없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서도 안 되고, 알아서도 안 된다. 그저 구정물 통 속으로 집어넣어 군화를 지근지근 밟아대는 타인으로부터의 모욕과 가학을 견디거나, 스스로 죽어가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다. 이것이 인간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중한 물음의 결과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누를 수 있는 자유의 보장에 따른 귀결점이다. 처음부터 자유가 없었던 사람은 스스로 자유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권력에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로 보내진 수많은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파시즘을 결단코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의 말대로 이해라는 단어 자체에 용서와 관용, 혹은 수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느냐, 답은 절대 ‘노동’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비이성적 광기와 가학만이 가득한 194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치열한 삶이 가장 오래된 물음인 ‘인간’ 자체의 도덕에 대한 상을 적절하게 제시해 주는 듯 하다.

  지금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기록은 온갖 통계자료와 수치로 그 끔찍함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당시를, 그 날을 몸소 겪었던 이들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몇 몇 영화나 소설, 혹은 문헌이나 자서전에서 폭로 혹은 증언 되고 있는 사실로서의 기록들은 여전히 유효하게, 잔인한 부분들을 더욱 더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고통스런 운명의 가혹함을 직접 저술한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된다. 개인의 증오와 분노의 차원을 넘어, 인간이 인간에게 가지는 인간 자체에 대한 악의 폭로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된다. 앞으로 우리에게 전쟁은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지구촌 모든 이들의 사고의 방식이 단일하게 발생하고 있는 전쟁터인데…. 언제 닥칠지 모를 악의 순환과 부조리한 인간 권력 상징의 두려움을 이처럼 강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 듯 하다. 국가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이다. 아직도 나는 이 국가상들에 대한 진정한 이념을 깨닫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인간을 가장 큰 두려움으로 몰고 가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도, 부당함을 당하는 것도 오직 인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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