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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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숙명입니다만, 인간만이 유일하게(다른 생명체 역시 사유(思惟)한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정한 것입니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온 것 같습니다. 영생을 꿈꾸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은 우선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피하는 소극적 대응을 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인간은 영생에 가름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창조해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종교의 형태로 발전했던 것인데, 특히 불교에서는 죽음과 탄생이 반복된다는 윤회의 개념을 곁들여 현생의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사유의 발전은 생명의 본질과 죽음의 원인을 분석하게 되었고, 생명을 연장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이라는 생명현상을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과거에도 유사한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듯합니다. 스스로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어진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함으로써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을 화두로 쥐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은 지, 그 성과를 담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죽음에 관심이 많아지고,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도 죽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공부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2623266>를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죽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금년에 우리나라 작가 한강씨가 받아서 화제가 된 문학상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예술사와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플로베르나 푸생에 정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도 많습니다만, 작가는 오랫동안 ‘죽음’에 대하여 천착해왔다고 합니다. 그는 첫 소설 <메트로랜드(1980)>에서부터 죽음을 언급했다고 하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는 학창시절 절친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주인공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고, 사별과 살아남은 자의 삶을 다룬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23768>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소개하는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2008년에 출간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금년에 처음 소개되었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1년)>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2013년)> 보다 먼저 나왔던 것입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반스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의 죽음에 관한 일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몇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일반적인 책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한 일화들이 반복해서 거론하고 있기 때문에 책읽는 흐름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완독한 뒤까지 남는 의문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에서는 그 무렵 죽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쏟아 부었던 그가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는 아내에 대하여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랑한 이의 죽음을 웃으면서 이야기하기에는 여전히 부담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짚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죽음에 관한 사유가 종교와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털어놓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저자의 가족은 외조부모, 부모 그리고 그의 형 등입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형과 자신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철학을 전공하는 형은 무신론자이며 저자는 불가지론자입니다. 어려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저자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가지론으로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9쪽)”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교조주의(敎條主義)의 교조적(?) 입장에 반발하여 생긴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와 같은 신학적 명제는 진위를 가릴 수 없으며, 사물의 본질은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왕에 가족 이야기가 나왔기에 정리를 하면, 옮긴이는 이 책이 반스 자신의 회고록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자는 “이것은 나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부모님을 찾아서’ 따위의 이야기도 아니다. (…)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헤아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64쪽)”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와 문학자는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요양시설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고인을 보겠느냐는 장의사의 질문에 형은 “고인의 시체를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플라톤이 말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지만, 반스는 오랜 세월 어머니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분노의 감정과 이별하는 절차가 필요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시신을 마주합니다. 어느 집안처럼 반스 형제도 여러 모로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이 커왔기 때문에 공유하는 상황이 많았을 터이나 형제는 기억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는 지적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녹여져 있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뿌리가 깊었던 모양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까지도 꽤나 다른 성격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교장을 지내셨던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을 터이나 어머니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입니다. 몰리는 입장이었던 아버지는 치매를 앓아 요양시설에서 조금씩 스러져갔지만,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길지 않은 투병 끝에 죽음에 이르렀던 모양입니다. 죽음을 맞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신이 그립다’라고 하는 불가지론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종교예술을 만날 때에 국한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즉 종교예술의 토대가 되는 목적과 신념의식이 그립다는 뜻으로 제한적으로 이해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이유는 모든 신자들이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와 성직자가 강요했기 때문이고, 사회적 통제수단이었기 때문이며, 시골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옛날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제 명에 죽지 못할 수 있었기에 신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학습을 요한다. 독서부터 죽음까지.(163쪽)”라고 스탕달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딱히 죽음을 연습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별」,「마지막 수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퐁스 도데 역시 죽음에 관한 비망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데는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실제로는 두 명의 의사가 불려 와서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당시 유행하던 인공호흡법을 시행하다가 그도 안되자 전기충격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도데에게 명성을 안겨준 랑그(langue)와 의사들이 그를 되살리기 위해 잡아당긴 랑그(langue)의 아이러니를 꼬집고 있습니다.(프랑스어 랑그는 ‘언어’를 의미하기 전에 ‘혀’를 뜻하기도 합니다.) 숨을 거둔 다음에 일어난 구명과정이야말로 도데의 친구 에밀 졸라가 설명하는 ‘아름다운 죽음(une belle mort)’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상상하는 죽음을 맞는 최악의 상황은 격리, 물, 그리고 임박한 죽음이라고 하면서 뒤집힌 유람선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에어포켓, 암흑, 서서히 차오르는 물, 같은 배를 탄 힘없는 사람들의 절규, 그리고 숨 쉴 공기를 차지하려는 경쟁(166쪽)”이라는 참혹한 정경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듯해서 상상하는 것도 끔찍합니다. 반면 저자가 줄곧 그려오는 최고의 죽음은, “정확히 마지막 책을 쓸 수 있을 만큼의 기간과 명료한 의식만 남아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달려있다(167쪽)”라고 합니다. 이 또한 집필 중이던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죽음을 맞은 문학가, 미완의 작품을 남긴 채 숨을 거둔 미술가, 조각가 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고백하는 일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젊었을 때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비행기 추락사고와 같은 치명적 상황을 맞을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자가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플뢰베르의 <부바르 페퀴셰>를 챙겼던 것은 물론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 단단하게 움켜쥔 플뢰베르의 책에서 저자가 각별하게 존경심을 표하게 될 한 문장을 가리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오래도록 자신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비오토포비아(Aviotophobia) 즉 비행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비행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대대로 비행공포증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경우 동유럽에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면서도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정적이 많아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상식을 믿는 편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 그런 끔찍한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이유가 없다고 믿는 편입니다.


저자는 의학사학자 로이 포터의 죽음에 대한 소견처럼 기발한 생각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의식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변화를 맞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요. 생각해보니 제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면… 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의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대단한 걸 허망하게 놓쳐버리게 될 테니까요.(185쪽)” 사실 공중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는 경우에 충돌하는 순간 죽음을 맞게 되는지, 아니면 충돌하기 전에 이미 혼절하여 의식이 사라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리 즐거운 기억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금년에 번역 소개되었습니다만,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 처음 발표된 시기에 대하여 제가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 있습니다. <볼레로 Boléro(1928)>,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 등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픽병으로 죽었다고 적었기 때문입니다. 픽병(Pick's disease)은 1892년 아놀드 픽(Arnold Pick)이 서서히 진행하는 언어장애를 특징으로 하는 치매환자를 처음 보고하였고, 1911년에는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가 이런 환자의 뇌에서 특징적인 픽소체(Pick body)를 발견함에 따라, 1925년 스파츠(Spartz)와 오나리(Onari)가 픽병으로 명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들어 임상양상에 따라서 전두측두엽퇴행 (frontotemporal degeneration)에 속하는 병리학적 진단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즉 라벨의 사인은 전두측두엽퇴행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읽고 나서야 줄리안 반스가 그의 대표작들에서 차용하고 있는 죽음과 기억에 대한 개념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파악되는 것 같습니다. 줄리안 반스가 화두로 붙들고 있는 ‘르 레베일 모르텔(le réveil mortel)’은 프랑스의 번역가 샤를 뒤보스가 제안한 용어로, ‘죽음의 숙명을 알리는 모닝콜’ 정도로 번역되는 ‘죽음의 엄존성과 삶의 필연성에 눈뜨는 계기’라는 개념이라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통하여 저자가 얻어낸 ‘르 레베일 모르텔’의 이해에 공감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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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미식 - 108가지 청두(成都) 맛집여행
캉칭 지음, 임화영 옮김 / 이담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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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출장길에 북경에 한 번 다녀온 것이 유일한 중국방문이었습니다. 출장이었으니 구경은 업무 사이에 잠깐에 불과하였습니다.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이렇게 방문할 기회가 없는 것은 우선 먼 나라부터 찾아보자는 원칙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중국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서기 전에 중국을 구경해야 한다는 조언도 듣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나라를 먼저 보면 먼 나라는 아예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우선순위를 정한 것입니다.

 

사실 중국을 방문한 적은 없으면서도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중국의 영향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읽은 <펜으로 그린 베이징;  http://blog.joins.com/yang412/14104933>을 비롯해서 중국에 관한 책을 읽을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이 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베이징에 이어 이번에는 사천지방에서 미식으로 이름난 청두의 맛집을 소개한 <사천 미식>을 읽게 되었습니다. 청두출신 작가가 직접 쓴 것이니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두 사람의 미각을 기준으로 했다면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사천음식이 맵다고 알고 있어서 더욱 그렀습니다. 책 내용의 소개에 앞서 잠깐 언급하면, 개구리요리는 그럴 수 있다쳐도, 토끼 머리를 통째로 내는 요리도 있다고 합니다. 몬도가네가 따로 없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언젠가 스위스에서 오신 손님을 모시고 용인 민속촌에 갔다가 번데기를 권했더니 질겁하던 생각이 납니다.

저자는 108곳의 맛집과 그 집의 대표요리를 18부문으로 구분하여 소개합니다. 역시 사천음식의 대표주자인 훠궈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음식도 훠궈, 고기구이, 면류, 등 다양할 뿐더러, 차, 술안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유명한 음식 뿐 아니라 사천지방에서 흔히 먹는 집밥도 별도로 소개합니다.

혹시 음식을 만드는 법도 같이 소개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신 분들은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청두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적 음식을 잘하는 맛집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며 다른 책과 다른 점은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장기를 살려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그림이라는 것이 앞서 읽은 <펜으로 그린 베이징>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음식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림에는 키키라는 다홍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와 무무라는 이름의 팬더, 그리고 비우비우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연은 당연히 음식이 되겠지요? 한 마디로 오감으로 음식을 느껴 구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림을 통하여 눈으로 감상하고, 저자의 설명에 따라 음식을 미각은 물론 소리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108가지의 맛집을 고른 내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청두의 맛집을 고르는 것이야말로 번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려 108가지나 되는 번뇌말입니다. 사실 108번뇌를 경계하는 불교에서는 역시 탐욕을 경계하는데, 미식을 찾는 일 역시 식탐이라 할 수 있겠고, 식탐이 탐욕의 하나라고 한다면 맛집을 찾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작가는 청두의 맛집 소개가 이 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는 있습니다. 별책부록으로 108곳의 맛집의 대표음식을 별도로 그리고 위치정보를 담은 QR코드까지 담아낸 것을 보면 아주 청두의 음식소개에 팔 걷고 나선 듯합니다. 혹시 청두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당연히 챙기셔야 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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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신기주 지음, 최신엽 그림 / 한빛비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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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하면 페미니스트의 비난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만, 오늘 날 우리는 남녀평등을 넘어서 여성 우위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를 읽다보니 제 생각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는 TV 프로그램 <비밀독서단>에 출연하는 신기주기자가 40줄에 들어서면서 느낀 푸념(이런 단어를 써도 되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을 담았다고 보았습니다. 아빠와 남자 사이에서, 본능과 제도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불안한 40대 남자들을 위한 현실적 조언’이라고 요약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남자 나이 ‘40’은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습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오는 ‘子曰, 吾十有吾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라는 공자님 말씀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내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어 서른에 입신했으며, 마흔이 되니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쉰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 예순에 귀가 순해지고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좇았으되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남자 나이 40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아 남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아니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나이 40이 되어서도 여전히 주관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제도가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남자들 스스로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들어보면 원인을 찾아 바로 잡는 것보다는 남자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니 이를 바로 잡아보자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법이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 구한 것들로 보입니다. 즉 ‘옛날로 돌아가자!’는 느낌입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하여 페미니스트들은 상당히 마초적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자가 남성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저자는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가 어른으로서, 남편으로서, 연인으로서, 아빠로서, 선배로서, 상사로서, 후배로서, 아들로서 그 무엇으로든 자신만의 스토리를 쓰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으로서의 ‘마흔 앓이’를 통해서 얻은 나름대로의 생각을 40줄에 들어설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4부로 나눈 책에서 저자는 1부에서 마흔 앓이의 원인을 진단하고, 2부네서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볼 것을 권유합니다. ‘본능에도 이유가 있다’라는 3부의 성격은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떻든 4부에서는 머지않아 만나게 될 죽음을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남성지에서 일해 오면서 경험한 영화, 예술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40대 남성을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때로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가 40대를 보내던 시절과는 환경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저자는 ‘40대 남자는 실수투성이다. 완벽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질풍노도의 20대와 30대를 거쳐 온 40대 남자는 겉모습은 현명해 보여도 결국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물론 공자께서도 40이 ‘불혹’의 나이라 하셨지만 완전한 존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았다고 했는데, 저자는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어느 한편의 주장에 쏠리지 않은 중립적인 위치를 지켰던 점을 보면 저자는 흔들리지 않는 불혹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저자가 40줄에 들어설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들에게 던지는 조언에 귀를 기울여 볼 이유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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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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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반쪼가리 자작>에 이어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나무 위의 남작>과 함께 <우리의 선조들>을 이루는 3부작의 하나입니다. <반쪼가리 자작>에 이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가상의 시대에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20세기 활동한 이탈로 칼비노는 당시 유행하던 네오리얼리즘 소설로는 복잡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느껴 과거로 돌아가 선조들을 환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는 방식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8-9세기에 걸쳐 프랑크왕국을 통합한 카롤루스 대제(혹은 샤를 마뉴 대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 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합니다. 카롤루스대제의 군대를 구성하는 용장들은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장수들인데 그들 가운데 특별한 사연이 있는 몇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얀 갑옷을 입은 아질울포는 육체가 없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만, 당시 기사들이 그렇듯 위기에 처한 처녀를 구해내고 귀족에 임명된 사연을 가지고 있고, 원칙주의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하인이 되는 구르둘루만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존재인 것과는 대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카롤루스대제를 찾아온 랭보가 있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입신양명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젊은이는 토리스먼공작입니다. 아질울포가 구해낸 처녀 스코틀랜드의 왕녀 소프로니아의 사생아임을 밝혀 자신의 신분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아질울포의 작위가 잘못되었음을 밝히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입니다. 토리스먼으로 인하여 이야기가 급류를 타면서 과거 속에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고, 아질울포가 결국은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랭보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존재하는 기사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생각 같지 않게 밋밋할 수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게 엮기도 하는데, 그 고리는 아질울포를 사랑하는 여자기사 브라다만테입니다. 그리고 랭보가 다시 브라다만테를 사랑하고, 모자지간으로 알고 있던 소프로니아와 토리스먼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임이 밝혀져 결국 근친상간의 죄를 벗고 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테오도라수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써내려가는 수녀는 나중에 브라다만테임이 밝혀집니다. 작가가 반전 장치를 너무 많이 설계한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질울포와 구르둘루만, 즉 존재와 비존재의 조화를 랭보가 이루어내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것이 작가가 보여주려는 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읽은 계기는 지난해 다녀온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 롤랑이 등장한다고 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최측근 기사였던 롤랑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에서는 안타깝게도 조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겨우 두 차례 등장합니다. 카롤루스대제에게 “제가 저 녀석을 흔들어놓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아질울포의 하인이 되는 구르둘루를 한번 툭 치는 역할이었고, 두 번째는 카롤루스 대제의 만찬자리에서 아골란테왕으로부터 전설의 명검 엑스칼리버 검을 얻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질울포에게 거짓임을 추궁당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롤랑의 노래로 유럽사람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 이 이야기에서는 조연급에도 미치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탈리아 사람의 시각에서는 롤랑의 존재를 굳이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헷갈리는 것이 카롤루스대제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상대는 사라센사람들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무어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라센사람들은 아라비아반도 지역에 사는 무슬림을 통칭하며, 무어인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던 무슬림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아랍계이거나 베르베르족의 후손들로 사라센사람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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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있을걸 - 떠나본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멋진 후회
케르스틴 기어 지음, 서유리 옮김 / 예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여행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을 보면, 고생과 그 고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소중한 것들을 비교해보면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의 여류소설가 케르스틴 기어의 <그냥 집에 있을 걸>은 마치 여행에서 겪은 엄청난 고생의 기억을 담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재미로 꽉꽉 채워졌던 여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미끼와 같은 제목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집을 떠나는 두려움에 대하여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 두려움의 백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것입니다. 어제만 해도 페루에 여행을 갔던 한국관광객이 폭포에서 사진을 찍다가 추락해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을 갔다가 집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테러에 희생된 여행객, 공항에 도착하던 비행기가 추락해서 승객들이 모두 사망하는 사고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사고들이 저자로 하여금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에게는 아비오토포비아(Aviotophobia), 즉 비행공포증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비행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비행공포증이 있어서인지 해외순방길에도 기차를 타고 가는 버릇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의 비행공포증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비행공포증이 저자보다 더 한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포를 감추려는 친구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이 백미입니다.


<그냥 집에 있을 걸>은 특별한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가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여행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건사고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렸을 적 여행이야기까지도 나오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비행공포증 이외에도 다양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어 여행경험이 다양하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저자이지만, 늘어놓은 이야기를 보면 저보다도 훨씬 다양한 여행을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그냥 집 안에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좋겠어. 겁쟁이들은 여행을 할 수 없다. 사람이 얼마나 용감하냐에 따라 그의 삶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라는 엽서를 남편에게 보낸 것을 보면, 저자는 엄살이 심하거나 아예 기우(杞憂)라고 할 쓸데없는 걱정을 이 책의 주제로 삼은 것처럼 보입니다.


여행과 관련한 재미있거나 끔찍한 이야기들은 저자가 직접 겪은 것은 물론 저자가 어머니, 남편, 시누이 등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주어들은 이야기들까지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일상에서 일어난 일까지도 적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남이 하는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들은 이야기들을 소설에서만 써먹는 것이 아니라 수필에서도 써먹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버릇까지도 적었더라구요. 저자는 여행지에서 발견한 독특한 모습의 돌을 수집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고 합니다.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돌이라고 하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자의 몸무게에 가까운 커다란 돌덩이를 차에 실어간다고 하면 이는 거의 절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말입니다. 에필로그를 보면 한술 더 떠서 여행지에서 식물까지도 채집해오는 모양입니다. 국경을 넘어 여행할 때 반입하거나 반출하는 동식물을 통하여 무서운 전염병이 옮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의식이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든 참 독특한 여행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읽기였습니다. 역시 집을 떠나지 않고는 겪어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어쩌면 ‘멋진 추억일수록 틀림없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글도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모두 꾸며낸 이야기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역설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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