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숙명입니다만, 인간만이 유일하게(다른 생명체 역시 사유(思惟)한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정한 것입니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해온 것 같습니다. 영생을 꿈꾸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간은 우선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피하는 소극적 대응을 구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인간은 영생에 가름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창조해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종교의 형태로 발전했던 것인데, 특히 불교에서는 죽음과 탄생이 반복된다는 윤회의 개념을 곁들여 현생의 고통을 견디어낼 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사유의 발전은 생명의 본질과 죽음의 원인을 분석하게 되었고, 생명을 연장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음이라는 생명현상을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과거에도 유사한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는 듯합니다. 스스로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어진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함으로써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을 화두로 쥐고 정진하는 분들이 많은 지, 그 성과를 담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죽음에 관심이 많아지고,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도 죽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공부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2623266>를 통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죽음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금년에 우리나라 작가 한강씨가 받아서 화제가 된 문학상입니다. 줄리언 반스는 예술사와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특히 플로베르나 푸생에 정통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도 많습니다만, 작가는 오랫동안 ‘죽음’에 대하여 천착해왔다고 합니다. 그는 첫 소설 <메트로랜드(1980)>에서부터 죽음을 언급했다고 하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는 학창시절 절친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주인공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고, 사별과 살아남은 자의 삶을 다룬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23768>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소개하는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2008년에 출간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금년에 처음 소개되었지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2011년)>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2013년)> 보다 먼저 나왔던 것입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반스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의 죽음에 관한 일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몇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일반적인 책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관한 일화들이 반복해서 거론하고 있기 때문에 책읽는 흐름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완독한 뒤까지 남는 의문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에서는 그 무렵 죽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감정을 쏟아 부었던 그가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에서는 아내에 대하여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랑한 이의 죽음을 웃으면서 이야기하기에는 여전히 부담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앞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짚어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죽음에 관한 사유가 종교와 무관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털어놓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언급된 저자의 가족은 외조부모, 부모 그리고 그의 형 등입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형과 자신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철학을 전공하는 형은 무신론자이며 저자는 불가지론자입니다. 어려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저자였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가지론으로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그립다.(9쪽)” 절대적이며 완벽한 진실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는 교조주의(敎條主義)의 교조적(?) 입장에 반발하여 생긴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와 같은 신학적 명제는 진위를 가릴 수 없으며, 사물의 본질은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왕에 가족 이야기가 나왔기에 정리를 하면, 옮긴이는 이 책이 반스 자신의 회고록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자는 “이것은 나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렇다고 ‘잃어버린 부모님을 찾아서’ 따위의 이야기도 아니다. (…)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헤아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다.(64쪽)”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와 문학자는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요양시설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고인을 보겠느냐는 장의사의 질문에 형은 “고인의 시체를 반드시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플라톤이 말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지만, 반스는 오랜 세월 어머니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분노의 감정과 이별하는 절차가 필요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시신을 마주합니다. 어느 집안처럼 반스 형제도 여러 모로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이 커왔기 때문에 공유하는 상황이 많았을 터이나 형제는 기억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는 지적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녹여져 있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뿌리가 깊었던 모양으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까지도 꽤나 다른 성격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교장을 지내셨던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을 터이나 어머니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입니다. 몰리는 입장이었던 아버지는 치매를 앓아 요양시설에서 조금씩 스러져갔지만,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길지 않은 투병 끝에 죽음에 이르렀던 모양입니다. 죽음을 맞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신이 그립다’라고 하는 불가지론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종교예술을 만날 때에 국한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즉 종교예술의 토대가 되는 목적과 신념의식이 그립다는 뜻으로 제한적으로 이해해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이유는 모든 신자들이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통치자와 성직자가 강요했기 때문이고, 사회적 통제수단이었기 때문이며, 시골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옛날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제 명에 죽지 못할 수 있었기에 신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학습을 요한다. 독서부터 죽음까지.(163쪽)”라고 스탕달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딱히 죽음을 연습하지 않는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별」,「마지막 수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퐁스 도데 역시 죽음에 관한 비망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데는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실제로는 두 명의 의사가 불려 와서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당시 유행하던 인공호흡법을 시행하다가 그도 안되자 전기충격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도데에게 명성을 안겨준 랑그(langue)와 의사들이 그를 되살리기 위해 잡아당긴 랑그(langue)의 아이러니를 꼬집고 있습니다.(프랑스어 랑그는 ‘언어’를 의미하기 전에 ‘혀’를 뜻하기도 합니다.) 숨을 거둔 다음에 일어난 구명과정이야말로 도데의 친구 에밀 졸라가 설명하는 ‘아름다운 죽음(une belle mort)’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상상하는 죽음을 맞는 최악의 상황은 격리, 물, 그리고 임박한 죽음이라고 하면서 뒤집힌 유람선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에어포켓, 암흑, 서서히 차오르는 물, 같은 배를 탄 힘없는 사람들의 절규, 그리고 숨 쉴 공기를 차지하려는 경쟁(166쪽)”이라는 참혹한 정경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듯해서 상상하는 것도 끔찍합니다. 반면 저자가 줄곧 그려오는 최고의 죽음은, “정확히 마지막 책을 쓸 수 있을 만큼의 기간과 명료한 의식만 남아있다는 의사의 진단에 달려있다(167쪽)”라고 합니다. 이 또한 집필 중이던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죽음을 맞은 문학가, 미완의 작품을 남긴 채 숨을 거둔 미술가, 조각가 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고백하는 일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젊었을 때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비행기 추락사고와 같은 치명적 상황을 맞을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자가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 플뢰베르의 <부바르 페퀴셰>를 챙겼던 것은 물론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 단단하게 움켜쥔 플뢰베르의 책에서 저자가 각별하게 존경심을 표하게 될 한 문장을 가리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오래도록 자신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비오토포비아(Aviotophobia) 즉 비행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비행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대대로 비행공포증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경우 동유럽에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면서도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정적이 많아 자신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상식을 믿는 편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 그런 끔찍한 일이 나에게 일어날 이유가 없다고 믿는 편입니다.


저자는 의학사학자 로이 포터의 죽음에 대한 소견처럼 기발한 생각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의식이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변화를 맞을 게 틀림없을 테니까요. 생각해보니 제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면… 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의식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으면 대단한 걸 허망하게 놓쳐버리게 될 테니까요.(185쪽)” 사실 공중에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는 경우에 충돌하는 순간 죽음을 맞게 되는지, 아니면 충돌하기 전에 이미 혼절하여 의식이 사라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그리 즐거운 기억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금년에 번역 소개되었습니다만,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 처음 발표된 시기에 대하여 제가 의문을 가졌던 부분이 있습니다. <볼레로 Boléro(1928)>,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1899)> 등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픽병으로 죽었다고 적었기 때문입니다. 픽병(Pick's disease)은 1892년 아놀드 픽(Arnold Pick)이 서서히 진행하는 언어장애를 특징으로 하는 치매환자를 처음 보고하였고, 1911년에는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가 이런 환자의 뇌에서 특징적인 픽소체(Pick body)를 발견함에 따라, 1925년 스파츠(Spartz)와 오나리(Onari)가 픽병으로 명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들어 임상양상에 따라서 전두측두엽퇴행 (frontotemporal degeneration)에 속하는 병리학적 진단명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즉 라벨의 사인은 전두측두엽퇴행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읽고 나서야 줄리안 반스가 그의 대표작들에서 차용하고 있는 죽음과 기억에 대한 개념들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파악되는 것 같습니다. 줄리안 반스가 화두로 붙들고 있는 ‘르 레베일 모르텔(le réveil mortel)’은 프랑스의 번역가 샤를 뒤보스가 제안한 용어로, ‘죽음의 숙명을 알리는 모닝콜’ 정도로 번역되는 ‘죽음의 엄존성과 삶의 필연성에 눈뜨는 계기’라는 개념이라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통하여 저자가 얻어낸 ‘르 레베일 모르텔’의 이해에 공감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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