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산 ㅣ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스릴러물은 자칫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에 독후감을 정리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를 끌어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악마의 산>은 남아프리카 출신 작가 디온 메이어의 베니형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미 읽은 <13시간>과 함께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읽는 순서가 거꾸로 되었습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세븐 데이즈> 등과 함께 형사 베니 시리즈 4권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시리즈물이기는 해도 각권이 개별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읽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주인공 베니형사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보니 베니형사의 신상문제가 처음 등장하게 됩니다. 케이프타운의 강력계 형사 베니 그리셜경위는 중독수준의 주정뱅인데다가 급기야 술김에 아내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도 아내에게 일말의 사랑이 남아있었던지 ‘6개월 안에 술을 끊지 않으면 이혼’이라는 말미를 얻었습니다. 술주정뱅이이지만 사건 하나는 깔끔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강력사건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그가 마흔 넘도록 경위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료된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차별의 결과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강간, 마약, 납치, 인신매매 등 온갖 범죄의 전시장이 되고 만 남아공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릴러물이니 형사 이외에도 범인이 또 다른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 토벨라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가 만들어낸 비틀어진 인물상입니다. 반(反)아파르트헤이트의 투쟁 요원으로 활동하던 토벨라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에는 범죄의 세계에 잠시 몸을 들였다가 은퇴한 상태입니다. 첫사랑이 남긴 아들을 입양할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던 중에 고작 주유소를 털던 잡범이 쏜 총에 아들이 눈앞에서 죽는 참변을 당합니다. 문제는 그 범인이 풀려나 행적이 묘연해졌다는 것입니다. 토벨라는 범인을 추적하는 한편, 아동 대상 범죄자들을 줄루족의 전통 무기 아세가이로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두 명이면 집중하기는 쉬우나 자칫 이야기가 단촐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보조할 주인공급 등장인물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투톱이니 포톱이니 하는 것 같습니다. <악마의 산>에서는 두 명의 주인공급 인물이 등장합니다. 고급 콜걸 크리스틴과 그녀에게 집착하는 콜롬비아에서 온 마약상 카를로스가 있습니다. <13시간>에서도 그렇습니다만, <악마의 산>에서도 이야기는 베니 그리셜, 토벨라, 크리스틴 등 세 사람의 삶이 따로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정점으로 치닫는 순간 하나로 만나 엮이게 됩니다. 즉 카를로스가 크리스틴의 딸을 납치하고, 이 사건을 아동대상 범죄자를 처단하는 범인을 체포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하는 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베니 그리셜이 술에 빠진 사연은 강력계 형사라는 직업이 주는 중압감 때문입니다. 사건 현장에 들어가면 쓰러져있는 희생자가 죽어가면서 질렀을 비명소리를 듣게 되는데, 비명소리가 머릿속에 붙박인 것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부검의로 일할 때는 부검이 끝난 뒤에는 코끝에 배여 있는 피남새를 지운다는 핑계로 술을 마시곤 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술을 마시기 위하여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짜임새 있게 전개됩니다. 물론 반전에 반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덤으로 알게 되는 것도 수확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동 강간 사건의 40퍼센트는 아동과 성관계를 맺으면 에이즈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미신이 퍼져있다는 것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 마약상들이 몰려드는 곳이라는 것도,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찰이 범죄조직과 결탁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덤은 <악마의 산>은 케이프타운의 뒷배경이 되는 테이블마운틴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서쪽으로 올라선 봉우리이며, 다음 작품 <13시간>에 등장하는 시그널 힐과 함께 케이프타운의 좌청룡 우백호가 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고정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는 저 자신이 남성우월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입니다. 20세기 미국의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기수이자, 성별, 인종, 계층을 넘어선 시민운동가로 꼽힌다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생소한 이유입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역동적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그녀의 자서전 <글로리아 스타이넘 길 위의 인생>을 읽게 된 것은 전혀 우연입니다.


프롤로그에 실려 있는 배드랜드 사진과 브루스 채트윈이 <방랑의 해부학>에서 인용한 여행에 관한 구절 때문입니다. “진화는 우리를 여행자로 만들었다. 동굴이나 성에 정착해 살아온 기간이 얼마가 됐든, 진황듸 시간이라는 대양에서 그것을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긴 삶의 여정을 여행으로, 그리고 자신을 여행자라고 말합니다. 오랜 세월 자신의 삶이 여전히 희망과 에너지 가득한 비결은 ‘여행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행이라 함은 그녀의 일상이 여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이 그녀의 삶의 일부가 된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익숙해있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이 책을 쓴 첫 번째 이유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지만 가장 덜 드러난 자신의 삶의 일부를 함께 나누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감추고 싶었을 성장기의 모습을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생활을 한 것은 부친의 성격 탓으로 보이는데, 그녀가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두 번째 목적을 여행에 둔 것 아닐까 짐작합니다. 즉 이 책을 읽는 이들도 가끔은 여행을 하도록 부추기고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심심한 여행이아니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를 권하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은 지금까지 남자들의 영역으로 믿어왔던 길을 열어 여성과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세 가지 이유는 쉽게 이해가 가는 바 있으나 마지막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성적 역할론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세상의 모든 일을 남녀구분 없이 공유하자는 생각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생각은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삶이 된 시민운동을 이끌어가는 힘은 여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특히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야말로 성공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시민운동에서 중요한 요소가 대중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대중에 대한 울렁증이 심한 저자였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 역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처음 발표하던 날 얼마나 떨었던지 거의 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떠는 목소리로 발표를 겨우 마무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떠는 발표를 몇 차례 이어간 끝에 지금은 전혀 떨지도 않을뿐더러 제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과 눈을 맞추는 여유를 부리기도 합니다.


시민운동을 하던 분이 결국은 정치판에 서 있는 모습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는 일입니다. 저자의 삶의 후반부는 시민운동보다는 정치활동에 무게를 두는 것 같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을 시작하면서 정치를 꿈꾸는 분들이 계신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시민운동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징검다리로 삼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은 시민운동의 선배들이 초심을 잃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생각으로 인도하는 질문여행 - 내 삶에 대한 물음표. 인도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전명윤 지음, 대한항공 기획 / 홍익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참 총기있다는 생각을 두 번 하게 됩니다. 처음에 골랐을 때는 막연했지만 인도여행에 관한 이야기 같은데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책을 읽은 뒤에는 작가의 기획의도를 제대로 담은 제목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판사 리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인도를 찾아가는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1) 현실이 막막하고 힘들 때 깨달음을 얻고 싶다. 2) 낯설고 신비로운 풍경과 문화를 접하고 싶다. 3) 아직 보이지 않는 나의 길을 찾는다. 이 모든 걸 충족시키고 싶다면? 지금 『생각으로 인도하는 질문여행』을 만나라.” 그러니까 인도여행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친다고 해도 되나요?


실제로 인도여행기를 읽다보면 막막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찾았던 인도에서 해답을 얻었다는 내용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대륙의 끝에 위치해서 온갖 문화가 모여들어 잡탕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만, 인도 역시 유라시아 대륙에서 남쪽으로 튀어나온 탓인지, 우리나라보다 더한 듯합니다. 마지막 이유는 고차원적인 느낌입니다. 하지만 인도는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곳 아니겠습니까? 깨달음을 얻으려면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야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데 착안을 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열어 목차를 먼저 만나면, 인도 각지의 15곳을 요약한 작은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델리, 타지마할, 뭄바이, 바라나시처럼 잘 알고 있거나 들어본 장소도 있습니다만, 나머지는 처음 들어보는 곳입니다. 그리고 책 말미에 붙여둔 지도를 보면 15곳이 인도땅 전역에 흩어져 있어서 이 장소들을 꿰어서 다녀 보려해도 쉽지 않은 노릇일 듯합니다. 그만큼 인도여행에 쌓은 작가의 내공이 짐작되는 일면입니다. 작가 역시 실연후 처음 인도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궈낸 성과이니 시작은 막막했지만, 끝은 창대해지고 있는 셈인가요?


작가는 인도에서 가봄직한 장소 열다섯 곳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다음에 몇 쪽에 걸쳐서 그곳에서 가져봄직한 질문과 답을 몇 쪽에 걸쳐 쏟아냅니다. 그냥이 아니라 그럴듯한 사진을 곁들이고 있는데, 사진이 참 좋습니다. 순간 포착도 좋고, 질문의 요지를 잘 담아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도여행이 시작되는 장소 델리에서의 마지막 한 마디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행의 길 위에선 눈앞의 기회에 자신을 던져봐요. 두려움 때문에 소중한 것을 놓칠 순 없으니(23쪽)” 사실 여행지에 대한 설명보다 오히려 부록처럼 붙여둔 질문과 답이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가하면 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통로에 있는 자이살메르에서 도시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는 대목도 좋습니다. “도시란 늘 변한다. 사람의 인생과 비슷해, 생성됐다가 커지는가 하면 결국은 쇠망한다. 영원무궁할 것 같았던 번영의 자이살메르는 무역로가 바닷길로 바뀌면서 한 차례 타격을 받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단되며 아예 무역 거점으로서의 생명 자체가 끊어졌다.(168쪽)” 12세기에는 작은 왕국의 수도로서 영화를 누렸던 자이살메르가 스러졌다가 최근에 다시 관광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인도는 상하의 나라라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대목도 있습니다. 인도의 계절은 봄,여름,장마,가을,겨울,선선한 계절의 여섯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11월 중순에서 1월 중순까지가 겨울인데, 12월 한 달이 혹한기로 북인도 평원은 섭씨 4도까지 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기온과 비교해보면 혹한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조만간에는 가볼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글쓰기의 유혹 - 에코의 즐거운 상상 3
움베르토 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쓰는 사람은 글쓰기에 관한 책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렵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글쓰기의 대가가 쓴 책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목에 낚인 느낌이 조금 남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거울과 그 밖의 다른 현상에 관해: 기호, 재현, 환상, 상상> 가운데서 이탈리아어 권 밖의 독자를 위해 따로 묶은 독일어판 선집을 옮긴 것이라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는 미학 논문,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있는 글, 텍스트비평 논문 그리고 철학 논문과 기호학 논문이 들어 있다.(9쪽)’라고 설명합니다. 강연이나 학술대회, 혹은 청탁에 의한 기고문 등을 모아 엮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글쓰기의 유혹’이라는 글의 제목에서 우리말로 옮긴 이 책의 제목을 따왔다고 했습니다. 학술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만만치 않은 책읽기였습니다. “부제인 ‘기호, 재현, 환상, 상상’은 이 책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적 상상력 문제(341쪽)”를 다루고 있다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모두 14꼭지의 글을 세 묶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서론부분에 해당하는 ‘예술과 매스미디어 우주의 시리즈 문제: 미학에서 시학으로’에서는 주로 현대의 매스미디어 문화에 관하여 논합니다. “현대의 매스미디어 문화가 제기한 몇 가지 예술적-미학적 문제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매스미디어 문화를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틀을 정식화(345쪽)”하고 있다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기왕 유혹을 당했으니, 제1부 “세계를 얼마나 다양하게 서술할 수 있을까”에 들어있는 ‘글쓰기의 유혹’이라는 제목의 글을 생각해봅니다. 이 글은 파리의 갈레리 나쇼날 뒤 그랑 팔레에서 열린 글쓰기의 탄생을 주제로 한 전람회에 대한 단상을 적었습니다. 수메르,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의 상형문자가 기록된 점토판을 비롯하여 이집트의 상형문자 등을 전시한 전람회였던 모양입니다. 필자는 과연 글쓰기를 배운 사람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해본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파이드리아>에서 글자의 발명에 관한 파라오와 토트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파라오는 토트 신이 글자를 고안했다고 질책을 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다시 자신의 생각과 기억을 계발할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글쓰기를 배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말도 플라톤에 의하여 채록되어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역시 글로 남겨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필자가 기호학자임을 고려할 때, 당연히 인간의 생각을 남길 수 있는 기호, 즉 문자에 대하여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느껴지면서도 공감하는 대목입니다. 글쓰기의 유혹에 대한 저자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글쓰기는 정보를 기록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즉시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넘겨받기 시작했다. 제의를 찬미하고 법을 확정하고 특권을 강조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글이 씌어졌다.(117쪽)” 즉 사람들이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적을 수 있게 되는 것보다 특정한 목적의 글쓰기가 선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제3부 “세계에 대하 요모조모 생각해보기”에서는 보르헤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와 돈 이시드로 파로디가 함께 쓴 탐정이야기가 그때까지의 글쓰기와는 다른 창조적 글쓰기였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의 우주는 다양한 사람과 정신이 도서관의 법칙에 따라 사고하고 있는 세계(273쪽)라고 정의한 에코는 그 법칙은 신실증주의 과학의 법칙이 아니라 비논리가 정신과 세계의 법칙을 모두 지배하는 역설적 법칙이라 했습니다. 보르헤스의 우주는 연출, 즉 픽션의 법칙에 다라 움직이는 것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헌정하는 작품으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대한 에코의 설명도 남음이 있는 글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인생 최고의 책>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10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북클럽 회원들 가운데 아내를 여윈 존이 선택한 책입니다. 아내와의 인연을 엮어준 책이었기 때문에 존은 인생의 최고의 책으로 <제5도살장>을 꼽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았고, 나는 그 때문에 그녀가 좋다. 얼마나 인간적인가’라는 대목을 뽑아 10월의 글로 삼았습니다. 한편 작가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무명의 SF작가 커트 보네거트를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어준 소설입니다. 아마도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사회를 휩쓸고 있던 반전 분위기 덕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티프는 스무살이 되던 1943년 징집되어 유럽전선에 투입된 작가가 1944년 12월 22일 벌지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수용소가 바로 ‘제5 도살장’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종전이 되었으면 이 특별한 책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 800대가 대대적인 폭격을 가해 무려 13만명이 죽고 아름다운 도시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보네거트를 비롯하여 <제5 도살장>의 등장인물들은 지하의 고기 저장고에 있었던 덕분에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드레스덴의 참사를 목격한 보니거트가 평화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내 인생 최고의 책>에서는 <제5 도살장>에서 주목해야 할 장치가 바로 빌리 필그림의 ‘시간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빌리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가 트라팔마도어 행성입니다. 지구로부터 500만km 떨어진 트라팔마도어행성의 사람들은 4차원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시간은 시간일 뿐 변하기 않습니다.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순간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곤 합니다. 트라팔마도어행성은 드레스덴의 충격으로 PTSD를 앓게 된 빌 리가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려고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일뿐입니다. 작가는 빌 리가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제5 도살장>에는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작가로서는 드레스덴의 충격적인 학살을 정리하기 위하여 많은 글을 쓰고 버렸던 것인데, 드레스덴의 수용소생활을 같이한 전우 버나드 V. 오헤어의 부인 메리가 ‘당신들은 그때 젖비린내 나는 애들에 불과했어요’라는 비난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철부지였을 10대에 겪은 참상을 어른의 시각에서 재구성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각에서 작품을 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제목이 정해진 것입니다. 물론 제목이 되지는 못했습니다만....


‘십자군’이란 단어에 숨어 있는 의미는 그들이 단지 무지하고 미개한 사람들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동기 역시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신앙이었으며, 그들이 지나는 길은 피와 눈물의 길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200만 유럽인들이 수백만의 재화를 투입한 십자군전쟁에 나서서 얻은 것이라고는 고작 팔레스티나를 100년여를 소유한 것 뿐이라고 합니다.


사실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활자로 옮기면 책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이 읽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저자 역시 이런 점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입니다. “23년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드레스덴 파괴에 대해 쉽게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목격했던 것을 그대로 보고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 그것이 명작이 되거나, 그렇게까지 못 되더라도 큰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제가 워낙 거창했으니까(1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그리 많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취재 끝에 썼다가 버린 원고만도 엄청났던 모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