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를 사랑한다면, 한번쯤은 체스키크룸로프
김해선 지음 / 이담북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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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출판사를 무대로 한 드라마 <사랑은 별책부록>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벌써 6권이나 세상에 내보냈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시인과 시집출판에 관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시집을 내기도 어렵고, 그렇게 낸 시집이 팔리지 않아 생계에 어려움을 겪다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은 어떤 시인의 이야기였습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은 특정 분야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치매에 관하여 20년 전에 냈던 책이 두 번이나 개정판을 내놓을 수 있었던 저는 특별하게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은 시인으로 갓 등단한 시인이 에곤 실레를 주제로 하여 쓴 일종의 산문입니다. 1890년 오스트리아의 동북부 툴른(Tulln)에서 태어난 실레는 1918년 28살을 일기로 죽었습니다. 당시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독감에 희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중에 시부문의 신인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산티아고를 걷고 나서 마드리드에 있는 어느 미술관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만나게 된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드리드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끝에 있는 것은 아니지 싶기도 합니다. 결국 다른 나라에서 한 달 이상 살아보기와 같은 막연한 희망이 에곤 실레와의 만남으로 현실이 되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에곤 실레가 죽기 전에 잠시 머물렀다는 체코의 시골 마을 체스키크룸로프에서 말입니다.

저도 동유럽을 여행하면서 가보았습니다만 체스키크룸로프는 인구 1만3천 명 정도가 사는 서울시 용산구 규모의 작은 마을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서남쪽 오스트리아의 국경 가까이에 있습니다. 마을을 감돌아 흐르는 블타바 강은 상류라서인지 폭이 불과 몇m에 불과하며 지형자체가 평탄한 탓에 완만한 흐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체스키 크롬루프 성에서 굽어보는 마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는 느낌은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마을의 작은 광장에서 자유시간을 가졌을 때 에곤 실레 미술관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찾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동유럽 인문학 기행-21, 체코의 하회마을 체스키크룸로프; https://blog.naver.com/neuro412/2213971446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말대로 40일까지 머물면서 이 마을을 그리고 에곤 실레를 느껴봐야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가는 에곤 실레를 처음 만나게 된 사연에서부터 에곤 실레의 족적을 뒤쫓아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등을 주유하면서 그의 출생과 예술,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 그를 도와준 클림트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냅니다. 물론 적절한 지점에서 에곤 실레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것은 정형화된 서술도 한 몫을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예를 들면 에곤 실레의 작품에서 느끼는 바에 대한 것입니다. “에곤 실레가 자신의 몸이나 사람들의 인체 작품을 볼 때는 몸을 구성해가는 뼈와 세포, 표정까지 세부적으로 그려가는 에곤의 손길이 느껴지기도 했다.(58쪽)”는 대목에서는 표정처럼 인체의 외적 요소를 뼈라고 하는 내적 요소, 심지어는 세포와 같은 미세한 요소까지 한 통에 버무려 낸 탓에 왠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시체의 냄새를 맡으며 몸 구석구석까지 만지고 조사하는 어느 형사나 탐정가의 손길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잠시 멈췄다 빠르게 움직이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는 대목에서도 자연사가 아닌 경우 사체를 다루는 것은 형사가 아니라 부검의사라는 것입니다. 부검 장면을 직접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싶기도 합니다.

에곤의 연인이었던 노이즐은 한 때 클림트의 연인이었던 관계를 안다면 세 사람 사이의 관계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남습니다. 책에서 적지 않게 인용하고 있는 에곤 실레의 작품에 대해서는 조금 깊이 살펴보았더라면 하는 것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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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과 병원의 미래
이종철 엮음 / 청년의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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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에 관한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의 클라우스 슈바브의장이 2016년 포럼에서 제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직은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새로운 사조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끌 동력은 ‘물리적, 생물학적, 디지털적 세계를 빅 데이터에 입각해서 통합시키고 경제 및 산업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신기술’로 설명될 수 있다고 위키백과는 정의합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1760년부터 1820년 사이에 시작된 기술혁신과 제조공정의 개선으로 사회와 경제 등의 영역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1844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산업혁명은 몇 차례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는데,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1870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동력원이 석탄에서 전기로 전환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전기를 이용하게 된 기존산업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철강, 석유, 전기 등의 새로운 산업분야가 등장하여 산업의 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제3차 산업혁명은 1970년대 시작된 것으로 보는데, 디지털혁명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존의 아날로그 및 기계 장치들이 디지털기술을 적용하게 되고,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및 정보통신기술이 등장하여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제레미 리프킨 같은 이는 아직도 제3차 산업혁명이 진행중이라는 견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만,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측에서는 빅데이터와 정보통신기술에 기반하여 로봇 공학, 인공 지능, 나노 기술, 양자 컴퓨팅, 생명공학, 사물인터넷, 3D 인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기술 혁신이 일어나고 있으니, 제4차 산업혁명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4차 산업혁명과 병원의 미래>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의료계의 초기 수용자(darly adoptor)들의 혜안을 담고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의 병원장을 지내셨고, 제가 근무하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진료심사평가위원장을 지내신 이종철교수님께서 편집책임을 맡아 모두 76명의 필자들이 각자의 의료영역에서 예상되는 제4차 산업혁명의 전망을 담았습니다. 어찌 보면 의료계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변화에 둔감한 편에 속합니다. 하지만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변화는 지금까지의 것과는 차원이 달라서 변화에 늦었다가는 도태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책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손놓고 있다가는 뒤처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니 무언가라도 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무려 63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의견들을 모았습니다. 서문에 요약된 내용을 인용해보면, 5부로 구성된 책의 1부에는 4차 산업혁명이 병원에 미칠 영향과 디지털 헬스의 핵심내용을 개괄하며, 제2부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는 주요 기술들을 의료에 미칠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3부에서는 세분화되어 있는 의료분야에서 전망되는 제4차 산업의 미래를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이 정리하였습니다. 4부와 5부에서는 연구, 교육, 간호, 경영, 건축, 제도 등 병원 및 의료체계를 뒷받침하는 영역에 미칠 제4차 산업의 영향까지도 고려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의료는 사람이 중심이 되고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여 실시간으로 확인되는 건강의 변화가 컴퓨터에 자동으로 전송되며 치료에 관한 정보까지도 개인에게 제공될 수 있어서 의사가 환자를 직접 만나야 하는 현재와는 사뭇 다른 의료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의료계에서는 원격진료체계의 도입을 반대하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도도한 변화의 물결을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당랑거철의 무모함 보다는 변화를 선도하는 위치를 선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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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말리노브스키 - 인류학에서 미래를 위한 공생주의의 길을 모색하다
전경수 지음 / 눌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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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인류학을 넘어서; https://blog.naver.com/neuro412/221461194415>를 읽은 여운이 남았기 때문인지 쉽게 손이 갔던 것 같습니다. 20세기 초 들어서야 학문으로서 자리잡게 된 인류학은 새로운 학문영역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막상 인류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철학이 인간의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인류학은 인간의 생물학적 속성과 함께 문화적 특성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말리노브스키는 1884년 지금의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태어나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하던 20세기 초 인류학 고유의 방법론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인류학자 말리노브스키>는 서울대학교에서 문화이론과 생태인류학을 전공한 전경수교수가 인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말리노브스키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학문에 입문해서 종사하고, 그것을 직업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 학문을 일구어온 선조들의 족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시작하는 그의 서언은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전경수교수는 말리노브스키가 인류학에 기여한 바를 20여년에 걸쳐 뒤쫓으면서 세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고, 그 내용을 이 책에 쉽게 풀어 담아냈습니다. 1994년에 발표한 “말리노브스키의 섹스론”, 2001년에 발표한 “말리노브스키의 문화이론: 맥락론에서 기능론으로”, 그리고 2013년에 발표한 “방법론적 혁명으로서의 토속지와 유배지의 천우신조” 등입니다.

<인류학을 넘어서>에서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인류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하여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유럽 사람들이 비유럽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에 관한 인식의 변천과정을 다루었습니다. 비유럽사람들의 사회가 유럽사회로 발전하는 중간과정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덜 발전된 사회, 즉 야만인이라는 우월적 사고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발전해온 인류학이라는 학문의 기저에 깔려있는 여러 가지 오해와 왜곡된 시각들에 대하여 전교수 역시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이를테면, 일러두기에 밝힌 번역용어의 재정립에 관한 것입니다. 현지조사 혹은 현지작업으로 번역해온 Field Research를 야연(野硏)으로 현지조사로 번영해온 Fieldwork는 야로(野勞)로, 참여관찰으로 번역해온 Participant Observation은 관문참여(觀問參與)로, 조사지 혹은 조사노트로 번역해온 Fieldnote는 야장(野章)이라는 용어를 제시합니다. 영어로 된 인류학 분야의 단어가 나름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데 반하여 이들 단어가 한자어로 표기되는 과정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사’라는 단어에는 일정한 인식의 기울기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인류학적 연구결과를 담는 Ethnography를 관에 대응하는 개념의 민속지로 번역해오던 것을 토속지라는 용어를 제시합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말리노브스키가 뉴기니 동쪽에 있는 작은 섬 트로브리안드에서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크라쿠프에서 태어난 그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호주에서 전쟁포로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트로브리안드섬에 유치되어 유배생활을 하게 된 것이 오히려 학문적 발전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다만 섬주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그의 학문적 방법론이 인류학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트로브리안드섬의 토속사회는 개명한 현대사회에서도 주목할 점이 분명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인류학 분야의 책을 읽어온 소감은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딱딱할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쉽게 읽히고 이해가 되는 편이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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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호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2
외젠 다비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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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몇 차례나 집었다 놓기를 반복했던 책이었습니다. 제목을 보면 꼭 책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데, 내용을 요약한 글을 보면 책과 무관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최근에 읽은 김연수작가의 여행칼럼 <언젠가, 아마도; https://blog.naver.com/neuro412/221429983488>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읽다보니 책과 연관이 있는 호텔이 아니라, 호텔이 파리 북쪽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거나 북쪽을 이르는 것이 맞았습니다. 수준으로 보아 호텔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해서, ‘북쪽 여관’ 혹은 ‘북쪽 여인숙’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로비나 복도에 책을 모아놓은 호텔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투숙객들 가운데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배려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호텔(L‘Hôtel du Nord>은 작가의 부모가 사들여 경영했던 파리의 제마프 강변의 값싼 호텔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부모의 호텔에 머무는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꾸밈없이 그려낸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등장인물들은 대장장이, 인쇄공, 마차꾼, 공장 여직공들, 폐병환자, 수문지기, 오입쟁이 등등입니다. 아마도 집을 살 수 없을 형편인 사람들이 집대신 살림을 하는 장소로 활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관방을 빌려서 장기간 머무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입니다만, 20세기 초반의 파리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챙겨주면서 정을 나누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사랑을 빌미로 같이 살다가 막상 여성이 임신을 하자 떠나는 무책임한 남자가 등장하기도 하고, 그런 아픔을 겪고도 같은 꼴로 사는 대책 없는 여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북호텔의 여주인은 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방을 빌어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감싸고 챙겨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북호텔에 살다가 양노원으로 옮긴 노인이 찾아오자, 그가 쓰던 방을 보여주고 또 차비도 챙겨주는 따듯함을 보여줍니다. 작가의 어머니 역할이라서 애틋함을 나타내고 싶었을까요?

그 무렵의 파리에서 부각되기 시작한 공산당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5월1일 메이데이의 시위를 주동하기 위하여 투숙한 베니토의 정체를 알아챈 여주인은 ‘선동주의자’라고 잘라 말하는 것을 보면, 프랑스 공산당의 시작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인식 정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당시 결핵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앓다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려낸 것을 보면, 결핵에 대한 국가적인 대책은 뚜렷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쉽지 않은 결정일 수도 있습니다만, 르쿠브뢰르씨가 북호텔을 인수하는 과정입니다. 자기 자본 없이 처남의 돈을 빌어 호텔을 인수하여 운영을 시작하는 것인데, 호텔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호텔을 인수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그것도 중개업자의 안내를 받아 한 차례 둘러보는 것만으로 인수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투숙객의 현황 등 관련 자료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주먹구구식으로 호텔을 인수하여 망해먹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고, 호텔을 건네준 전 주인도 마음이 엄청 착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르쿠브뢰르씨 부부가 인수 전에 둘러본 호텔의 분위기로 보면 청소상태를 비롯하여 여러면에서 호텔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런 요소들이 인수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승전결이나 반전 같은 것이 없어, 이야기가 너무 평이하게 전개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다소 모호하다는 느낌이 남는 책읽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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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미술관 -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열네 번의 예술수업
조경진 지음 / 사월의책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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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씀드려 저는 정서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은 탓인지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를 이해하는 능력이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라도 하면 나아지려나 싶어서 나름대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공부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느낌의 미술관>도 부족한 점을 채워보려 골라든 책입니다만, 책읽기를 마치고는 잘못했다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작품을 대하고 당신의 느낌이랄 수 있는 세 생기고 당신만의 정연한 느낌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게 답입니다.(17쪽)’라고 적었습니다. 즉, 미술작품을 보고나서 나름대로의 느낌이 생긴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비전문 독자와 현대 미술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목적에서 쓰였다.(9쪽)’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징검다리를 놓는 수준이 아니라 핵폭탄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다리를 건설하려는 수준으로 미술작품을 느끼고, 그 느낌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키우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예술학을 공부하고 철학을 미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자가 공부한 예술론을 철학적 관점으로 승화시켜 미술작품을 차원 높게 이해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열네 번의 예술수업’이라는 부제를 보면 이 책의 성격을 파악했어야 했습니다.

그 열네 번의 강의 가운데 초반은 아무래도 긴장을 풀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지, ‘느낌’을 강조합니다. 쉽죠. 느낌이란 보는 사람마다의 다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느낌이라는 것의 조작적 정의가 점점 수위를 높여가면서 기호, 실재, 재현 등, 철학적 사유로 연결해 나갑니다. 그래서 책읽기가 중반에 접어들면 느낌이 점점 오리무중이 되면서 호흡이 가팔라지는 느낌입니다. 책읽기도 강약이 교차되면 수월하기 마련인데, 화두가 다시 느낌으로 돌아가는 듯하다가 이내 자의식, 표상 등 긴장의 강도가 다시 세기는 느낌입니다.

열네 번의 강의를 이어가면서 그녀와 그남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가 현대미술에 대하여 초짜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느 사이에 그남과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 거의 전문가에 다름이 아닌 듯 합니다. 즉 그녀와 그남은 저자 자신이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녀와 그남으로 나누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을 취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몇 가지 책을 읽으면서 얻어 들인 앎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미학은 개개의 존재가 가지고 있거나 경험하는 느낌에 관한 학문(60쪽)’이라는 작가의 정의가 있습니다. 미학에 대한 다른 이의 견해도 인용합니다. 미국의 미학자 아서 단토의 경우 ‘내가 미학(Aesthetics)이라고 할 때, 그건 다음을 의미한다. 미학은 사물이 스스로 나타나는 방식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사물이 다른 방식이 아니라 왜 그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그 이유에 관한 것이다.(61쪽)’라고 했다는데, 생각을 더 해봐야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주장 역시 동의가 쉽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과학이나 수학, 철학 등 전문적인 방식의 기술이 아닌 이상 미술작품에 대한 기술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림에 대한 세심한 관찰과 분별이 필요할 뿐이죠.(310쪽)” 과학이나 수학은 일정한 공식을 이해하면 쉽게 풀어 설명이 가능합니다만, 미술은 역시 나름의 느낌을 누군가에게 설명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앞서 말한 ‘기억은 가장 위대한 마법 중의 하나’라는 대사 기억하지죠.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기억 작용 자체는 설명할 수 없을 겁니다.(331-332쪽)” 기억의 과학은 그 근본 원리에 접근해가고 있습니다. 즉 마법이 아니라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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