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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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새로 나온 책을 중심으로 하여 책읽기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책읽기를 하는 중에 다른 책, 특히 고전을 인용하여 풀어가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면 그 책을 읽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메모를 어디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지난 해 읽은 책들 가운데 <안나 카레니나>를 인용한 경우가 두어 번 있었기 때문에 필독 도서의 목록에 위쪽에 올려 두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3월 중에 새로 만들어진 <안나 카레니나>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우리나라에 초연된 뮤지컬 <레 미제라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2541>을 보러 갔을 때는 원작 읽기를 마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격, 내면상태 등에 대한 정보가 없어 전개되는 이야기를 겨우 뒤쫓을 뿐 뮤지컬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금년에 극장에서 만난 영화 <레 미제라블;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9357>은 원작을 이미 읽은 다음이어서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호’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그리고 사상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3년 집필에 착수하여 1978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위선, 질투, 신념, 욕망, 사랑 등 인간의 감정과 결혼, 계급, 종교 등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구조에 대한 톨스토이의 모든 고민이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연진희 번역본은 모두 8부로 구성된 이야기를 세권으로 나누었습니다. 1권에서는 1부와 2부를 담고 있습니다.

 

편집자는 목차에 이어서 열 한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관계를 요약하고 있어 안상헌님이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에서 귀띔해주는 것처럼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스티바(스테판 오블론스키)가 아이들의 가정교사와 정분이 난 사실을 아내 돌리(다리아 알렉산드로브나)가 알게 되면서 갈등을 빚는데서 시작됩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페테르부르그에 사는 스티바의 동생 안나(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고 여자 주인공인 안나 카레니나)가 모스코바로 찾아오고, 비슷한 시기에 스티바의 절친인 레빈[콘스탄친(코스챠) 드미트리치 레빈]이 포크로프스코예에서 돌리의 여동생 키티(카체리나 알렉산드로브나)에게 청혼하기 위하여 모스코바로 찾아 오는데, 키티는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로, 모스코바 사교계에 처음 등장해서 만난 무관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와 서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스티바와 돌리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유흥을 좋아하는 스티바는 친화성이 좋은 탓에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레빈과 브론스키라고 하는 주요 등장인물이 스티바를 축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레빈과 브론스키 사이에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크게 상처를 입고 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는 키티와 그 부모는 돌리와 가족관계에 있어 주요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1권에서는 레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당장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믿고 있는 키티가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여 레빈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데, 키티 역시 언니 돌리와 형부 스티바의 갈등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모스코바에 도착한 안나와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작가들은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순간 사랑의 불꽃이 튀는 운명적 사랑을 한다고 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저는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편입니다. 어떻든 정부 고위직에 있는 20살이나 연상인 남편과 아들이 있는 안나가 싱글인 군인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키티와 교제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운명이긴 한 것 같습니다.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안나의 뒤를 따라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브론스키는 안나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결국은 안나는 임신하기에 이르고...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의 러시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게다가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통에 책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3인칭으로 진행되는 서술입니다. 그런데 3인칭으로 서술하는 시각의 위치가 변화무쌍하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다가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미시적 시각으로 견지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특징은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기법입니다. 등장인물의 내면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하여 독자들이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어 등장인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 안나가 일찍 모스크바를 떠나 페테르부르그로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빠져든 생각ㅇ르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도회를 떠올리고, 브론스키를 떠올리고, 사랑에 빠진 그의 순종적인 얼굴을 떠올리고, 그와의 모든 관계를 떠올렸다. 수치스러워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 불현듯 원인 모를 기쁨에 사로 잡혀 자칫 웃을 뻔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경이 줄감개에 조인 현처럼 점점 더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223쪽)”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인물에 저자가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비벼 넣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레빈에게서 톨스토이의 냄새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소로우가 <월든>에서 작가들에게 당부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서술하라는 당부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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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 - 불멸의 고전 <월든>에서 배우는 충만한 인생의 조건
김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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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을 읽고 난 다음 리뷰를 준비하면서 머릿속에 복잡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에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사는 꿈을 회샹하면 쓸 이야기가 샘솟듯 할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조금 긴 리뷰를 써냈지만 내용은 마음에 썩 들지 않아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평소 이런 저런 글을 써오고 있는 탓인지 제가 살아온 인생을 정리해보아야 겠다는 꿈을 언젠가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월든>을 읽고서 그 생각이 조금 분명해졌는데, 김선미 작가님의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을 읽으면서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 같습니다. 김 작가가 소로우의 다음 글에 시선을 붙들린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다른 모든 저자들에게도 남의 생활에 대하여 주워들은 이야기만을 하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소로우, 월든 ‘생활의 경제학’ 10쪽)”

 

1817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출생한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스무살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콩코드에서 교사로 일하다 스물하나에 진보적인 학교를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스물여덟이 되던 1845년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월든 호수가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동안 생활하면서 기록한 생각들을 서른 일곱 살에 출간하여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소로우의 탐하지 않는 삶>은 저자가 소로우와 같은 나이에 서울을 떠나 경기도 광주의 끄트머리 야트막한 산기슭에 작은 집을 짓고 남편과 젖먹이를 포함해 어린 딸 둘과 함께하는 10년의 전원생활을 보내면서 얻은 생각들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거르고 걸러서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월든>을 읽는 동안 계속 밑줄을 긋게 된 여러 구절들 가운데 뽑은 서른 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낸 것이니 소로우가 말한 대로 ‘남에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소박하고 성실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셈입니다.

 

‘탐하지 않는 삶’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욕심이 전혀 없었을까?’ 되묻고 있는 저자는 정말 탐을 내야 할 것은 월든 호수와 숲보다 소로우의 생활이었을 터인데 자신은 숲과 월든이라는 허상만 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저자가 자신의 월든으로 생활터전을 옮겼던 시기, 우리나라가 IMF파동으로 휩쓸리기 직전에 저는 오히려 경기도에서 서울 강남, 그것도 대치동으로 이사를 했으니 전혀 반대의 선택을 한 셈입니다. 언젠가 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그 결과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신들의 월든 호수가로 생활의 터전을 옮겼다고 했습니다만 월든숲에서 하루를 온전하게 보낼 수 있었던 소로우와는 달리 부부가 모두 하루에 네 시간을 들여 서울로 출퇴근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무늬만 월든이었을 뿐 오히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첫 꼭지에 등장하는 이웃집 여자(이렇게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가의 호칭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가 오히려 월든방식의 삶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고 보입니다.

 

직업병이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산업화된 현대축산업이 남긴 재앙을 설명없이 광우병공포와 연결시킨 것도 의아스러울 뿐 아니라, “소로우는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 겨울, 숲으로 들어가 나무그루터기의 나이테를 세다가 독감에 걸렸고 끝내 폐결핵으로 악화되었다.(26쪽)”는 작가의 설명은 의학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독감은 바이러스가 원인이 되고 폐결핵은 결핵균이 원인이니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해넘이가 먼저 보이는 쪽 마을(95쪽)’이라는 설명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쪽 마을은 해가 먼저 뜬다면 서쪽 마을은 해넘이를 늦게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도 작가들 가족이 찾아오는 사람보다 산새나 고라니, 산토끼 같은 방문객들이 더 많은 골짜기에서 칠흑같은 어둠과 함께 지낸 월든 세계는 티없이 자라는 어린 두 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월든을 만들어낸 작가님의 용감함에 박수를 보내고 여전히 제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저의 월든을 언젠가는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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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 - 스캇 펙 박사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메시지
M. 스캇 펙 지음, 조종상 옮김 / 율리시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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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달리 해서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스캇 펙의 <이젠, 북을 수 있게 해줘>는 <Denial of the soul>을 원제로 하여 1997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1년에 민윤기님의 번역으로 <영혼의 부정; http://blog.joinsmsn.com/yang412/6647855>이란 제목으로 김영사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불과 6년 전에 읽은 책인데 번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저의 책읽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도 제목이 달라진 책을 샀다가 다른 책으로 바꾼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란 생각도 합니다.

 

이 책은 안락사와 자살 같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지 않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안락사의 문제는 벌써 15년도 전의 생각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안락사의 개념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혀 새로운 책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리뷰 역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 같습니다.

 

먼저 저자는 자살은 물론 자비로운 살인이라고 미화되는 의사조력자살, 나아가 적극적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1950년 14살의 나이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이 웬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장 ‘플러그를 뽑다’에서는 젊은날 그는 아직은 뇌사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다른 의사의 견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생명유지장치를 꺼서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저자가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이 해결 불가능한 고통을 느끼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안락사라는 말은 아니다. 내 말은 어디까지나 이미 유용한 방법들을 활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의 개선을 지칭할 뿐이다.(89쪽)”라고 적고 있어 안락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38년에 설립된 미국 안락사협회에서 안락사를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끝낼 목적으로 통증 없는 수단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끊는 행위’라고 정의한 것이 ‘지극히 부적절한 정의’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안락사는 현재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죽음에 처한 경우, 고유한 생존적, 정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도움 없이 자살하는 행위다.(173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내가 내 삶의 창조자니까. 나는 자 자신을 파괴할 권리도 있다.”고 하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매우 교만한 생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2부는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가’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하고 기르시는 고유하며 발전적인 영원한 인간 정신이다.(196쪽)”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영성에 대한 깊은 믿음은 저자가 쓴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7702>에서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심지어 죽음이 배움과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논하는 가운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죽음의)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는 결국 영혼의 성장과 학습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이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인간의 존재의 의미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이다.(225쪽)”라는 저자의 주장은 ‘안락사는 신으로 향하는 길을 단절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속이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우리 자신을 속인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안락사를 재생산하는 것, 적어도 불필요하게 적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락사 대신에 집에서 호스피스의 간호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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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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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해리스 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를 통하여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주장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 의지란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행동을 상상하고, 그 행동들을 선택한 자기 나름의 논리를 심사숙고하며, 이러한 심사숙고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고, 모순된 욕망들에 직면하여 행동을 통제하는 역량의 집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53쪽). 이와 같은 자유 의지의 관념은 “1.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 2.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13쪽)”라는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데, 저자는 이 두 가지 가정 역시 틀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저자가 인용하는 과학적 데이터는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의 뇌에 있는 신경세포는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신호를 내보내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 신경세포가 내보내는 신호를 파악하면 인간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의식적 주인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유 의지는 저자가 이 책에서 연결하여 논하고 있는 것처럼 도덕, 법률, 정치, 종교, 공공정책은 물론 사적인 관계, 죄책감 등 우리의 모든 일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 책임의 한계를 규정하는 사법적 판단을 함에 있어 자유 의지의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면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저자는 인간의 폭력성을 나타내는 다섯 건의 살인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모두 젊은 여성인데, 네 살배기 사내아이가 장전된 아버지의 총을 가지고 놀다고 오발하는 바람에 젊은 여성이 사망한 경우, 학대를 받고 있는 열두 살짜리 사내애가 자신을 괴롭히는 젊은 여성을 총으로 쏘아 죽인 경우, 유년기에 학대를 받았던 젊은이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 젊은 여성을 쏘아 죽인 경우,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한 젊은이가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을 쏘아죽인 경우,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한 젊은이가 별다른 이유없이 젊은 여성을 쏘아 죽였는데, 그 청년의 뇌의 전두엽에 종양이 발견된 경우 등입니다. 개별 사례를 동일한 무게로 판단하여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해자의 자유의지의 여부에 따라서 책임의 정도를 달리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자유 의지의 존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라고 한다면 이들 모두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저자는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 중 하나는, 우리가 대개 처벌로 억제할 수 있을 만한 행동에 한해서만 사람들이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도저히 통제하지 못할 행동에 대해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73쪽)”고 적고 있는 점을 참고할 만 합니다.

 

결론부분에서 저자는 “우리가 자유 의지를 경험한다는 것은 대단한 미스터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81쪽)”라고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행위에 대해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이른바 사회적 정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거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니힐리즘과 절망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믿을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자유 의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캇 펙 박사 역시 자신의 환자가 자살한 사건을 두고 “그것은 하워드의 뇌에서 비자발적인 화학물질의 변화가 일어난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식적인 선택이었다.(스캇 펙 지음, 이제 죽을 수 있게 해줘, 122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저 역시 우리가 인식하기 전에 신경세포가 활동을 하더라는 뇌신경생리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저자가 ‘자유 의지는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 것에 대하여 다소 성급한 판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뇌과학이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 아직도 무한하다고 보기 때문에 뇌신경세포의 네트워크를 돌아서 우리가 인식하기까지의 시간은 특정 영역의 신경세포가 활성화되는 시간보다 늦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100쪽 정도의 짧은 책입니다만, 어떻든 인간의 자유 의지의 존재에 대한 좋은 가설을 바탕으로 한 철학적 접근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자의 이론을 뒷받침하거나,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나와서 좋은 토론의 장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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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를 움직이는 7가지 설득력 - 대한민국 대표 멘토 7인 심층 보고서
이성민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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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고 할 수는 없는 묘한 상황입니다만,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을 마치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2012년은 우리나라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시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치러진 해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권의 향배에 더 관심이 많았겠지만,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도 국제 정세, 남북 관계 등등 다양한 이슈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책은 보통 꾸준하게 읽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사회적 이슈에 따라서 책읽는 이들의 관심이 부침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년전에 광우병을 주제로 한 책을 냈지만, 관심들이 2008년 같지 않은 탓이었는지 반응이 시원치 않은 것 같습니다. 새로 준비한 원고 역시 도서시장에서 반응을 얻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한 탓인지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아무래도 책상서랍 속에 처박히게 될 것 같습니다.

 

이성민교수님의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7 가지 설득력>은 독자에 따라서 평가가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2년 대한민국의 역동성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하는 저자의 집필의도는 이렇습니다. “2012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정치 분야에서는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경제 분야에서는 삼성전자의 이건희회장을, 사회 분야에서는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의원을, 문화 분야에서는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회장을, 사상 분야에서는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외교 분야에서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그리고 국제 분야에서는 재미교포인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선정하였습니다.

 

저자가 선정한 일곱 분이 꼭 해당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동의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입니다만, 읽다보면 저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감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굳이 이 책의 시의성을 따지는 독자가 있다면 아마도 지난해 치러진 대선과정에서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각각 사퇴하거나 패하면서 정치적으로 한발 물러선 상황으로 세인들의 관심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일곱 분 모두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각각의 느낌을 적기에는 리뷰가 지나치게 길어질 듯하여 몇 분만 요약해보려 합니다. 먼저 박근혜대통령님에 대한 내용입니다.(취임식을 마치셨으니 공식 직함으로 적는 것이 옳겠지요) 저자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후보로서 자리매김을 하면서 우리나라 정치역사에서 족적을 남긴 여성정치인들과 세계의 여성정치인들의 행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2004년 총선과 2012년 총선에서 박근혜대통령님이 당에 기여한 역할을 재조명하고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선거캠페인의 슬로건을 내세운 만큼 “꿈꿨으면 이뤄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경제분야의 이건희 삼성회장에 대한 설명에서 1995년 4월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던 이회장의 베이징 발언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돌직구로 깨우치려했다는 것입니다.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가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성이 벤치마킹하던 일본의 마쓰시다회장의 경영관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습니다. 글로벌 전자업계에서 삼성이 선두로 나갈 수 있었던 원인은 삼성전자의 상무를 지냈던 요시카와 료조의 <삼성의 결정은 왜 세계에서 제일 빠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17508>에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특히 흥미를 가지고 읽었던 사람은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회장이었습니다. 가수에서 연예기획사를 세워 지금의 글로벌 한류를 일궈낸 그의 행적은 분명 독특한 점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역사에서 각각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는 김정구씨와 조용필씨의 업적을 정리하고, 우리나라의 대중음악과 연결되어 있는 일본의 대중음악계의 동향도 정리하고 일본의 대중음악이 세계로 확산되어나가지 못하고 국내용이 되고 말았던 한계도 짚고 있습니다.

 

나머지 네 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줄이려 합니다. 저자는 특히 대한민국과 일본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 나갈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일본의 차이는 시민혁명을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이다. (…) (그 차이는) 10년, 20년이 지나면 더 극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새와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한 새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293, 294쪽)”라고 적고 있어 자못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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