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렉트라 지만지 고전선집 557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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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로벌 한류의 한축을 이끌고 있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 사극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극의 바탕이 되는 사료의 범위도 한계가 있어 같은 주제를 다시 극화할 때는 전작과는 다른 해석으로 역시 새로운 시각을 가진 시청자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작방식이 때로는 역사를 왜곡한다는 지적도 나오곤 합니다만, 드라마는 작가와 연출가의 창의적인 해석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 역시 시대에 따라, 작가에 따라 새로운 해석으로 독자 혹은 관객을 만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트로이의 영웅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에 관한 신화는 그리스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손으로 해석되어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 http://blog.joins.com/yang412/13137059>를 읽었습니다. 김의기님이 <어느 독서광의 유쾌한 책읽기; http://blog.joins.com/yang412/13128005>에서 소개하는 사르트르의 <파리떼>에서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하여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의 정부 아이기토스를 살해하려는 오레스테스가 아가멤논의 죽음 역시 신들의 뜻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 복수를 허락하지 않는 제우스신의 신탁을 거부하고 복수를 감행하면서 “나는 나의 자유죠. 당신이 나를 창조한 순간, 나는 이미 소유가 아니게 되는거죠. 당신은 신이고 나는 자유로운 존재죠. 우리는 각자 혼자예요.”라고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의 의지를 거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트로이에서 귀환한 아가멤논이 살해되고 그의 딸 엘렉트라가 남동생 오레스테이아를 국외로 빼돌리고, 외국에서 성장한 오레스테이아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복수를 한 다음에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저주에 따라 복수의 여신에 쫓기다가 아네타여신의 중재에 따라서 신과 인간이 화해하기에 이른다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엘렉트라를 중심으로 아가멤논의 죽음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비중이 별로 크지 않은 엘렉트라를 소포클레스는 주연으로 기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킬로스의 남성중심의 해석에서 발전하여 여성인 엘렉트라를 복수극의 중심에 세우는 독특한 시도로 당시 그리스관객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엘렉트라>의 내용을 요약한 옮긴이의 해설을 보면, 서막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을 잊지 않고 있는 엘렉트라의 탄식으로 시작하여, 제1삽화에서는 엘렉트라와 여동생 크리소테미스 사이의 대화가, 제2삽화에서는 아가멤논의 살해에 대한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의 논쟁과 오레스테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엘렉트라는 절망하게 됩니다. 제3삽화에서는 오레스테스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크리소테미스의 전언과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엘렉트라의 대화로 구성되고, 제4삽화에서는 죽음을 가장했던 오레스테스가 정체를 밝히고 복수를 다짐하고 마지막 종막에서는 복수가 완성됩니다. 이 과정에서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에 신의 의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을 살고 있는 저의 시각으로는 등장인물들이 내세우는 복수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 시대의 윤리적 판단으로는 복수가 가능하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 등장하는 엘렉트라와 크리소테미스의 대화내용을 읽다보면, 그의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안티고네와 동생 이스메네의 모습과 겹쳐보입니다. 자신의 판단하는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강경파 안티고네와 엘렉트라, 그리고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생존을 위하여 현실과 타협하는 협상파 이스메네와 크리스테미스는 소포클레스가 즐겨 사용하는 대치되는 배역방식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요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음을 맞는 <안티고네>와는 달리 <엘렉트라>에서는 복수를 완성하고 몰락한 가문을 다시 세운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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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슈퍼 리치의 종말과 중산층 부활을 위한 역사의 제언
샘 피지개티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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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우리사회는 중산층이 얇아지면서 부익부 빈익빈이 두드러지는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중산층은 실물경제의 중심을 잡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일각에서는 치솟는 사교육비와 보육비, 생업의 불안정성 그리고 노후의 삶에 대한 부양비용 때문에 우리나라의 중산층이 붕괴되었다는 진단을 내놓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1992의 대외개방,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2003년 카드대란이 3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모자란 국정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2008년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1996년 68.7%에 달하던 중산층 비중은 2006년 58.5%로 10.2%포인트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같은 기간 동안 빈곤층은 11.2%에서 17.4%로 상류층은 20.1에서 24.1%로 늘어 양극화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문화일보 2008년 10월 6일자 기사). 앞서 지적한 3대 원인 이외에 양극화에 기여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 각종 부동산경기 부양책과 지방경기활성화를 내세워 행복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을 추진하면서 99조원이나 되는 토지보상비가 풀려나간 것도 주요요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하우스푸어현상도 그 뿌리는 참여정부시절의 부동산경기 부양책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심화되고 있는 사회의 양극화현상은 계층간의 대립이 심화되어가는 부작용을 낳고 있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완화되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요? 그래서 문제의 해결방안을 역사를 되돌아보면 찾아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사건이 동일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노동전문기자 샘 피지개티의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지난 100년간 부의 분배를 두고 벌어진 미국의 역사-특히 정치와 사회분야에서의-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사회를 쥐고 흔들던 슈퍼리치들의 전횡에 제동을 걸어온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국가와 결탁하여 돈되는 사업을 독점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면서도 걸맞지 않는 세금으로 체면치레를 하던 관행에 제공이 걸린 것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었다고 합니다.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부자들에게 전시공채를 발행하기 보다는 세금부과율을 높이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도 부자들은 전쟁특수를 업고 그들의 부를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 상류층의 모습을 최근에 개봉된 영화 <위대한 개츠비; http://blog.aladin.co.kr/761535117/6425262>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1928년 대공황 이전 미국사회의 최상위 1%의 슈퍼리치는 전체 국민소득의 25%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두 차례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이들의 몫은 10분의 일로 줄었다고 합니다. 그런 미국이 최근 불어 닥친 경기침체 직전인 2007년에 전체 국민소득의 23.5%를 가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극히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낳는 자유방임경제성향을 중화하는 평등화제도”의 효과라는 경제학자 로버트 커트너의 지적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21쪽).

 

저자는 미국의 일반국민들이 20세기에 이룩한 위대한 업적으로 지목되는 히틀러와 나치를 물리치고, 러시아와 공산당을 극복했으며 인종적 편견을 버렸다는 점에 20세기 전반에 부가 지배하던 금권정치를 몰아냈다는 사실을 더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재력가들이 국가의 양대 정당을 지배하는 금권정치에 제동을 걸려는 노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방대한 자료들을 조사하여 요점을 정리하다보니 인용문이 많고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들을 적지 않게 만나야 하는데다가 등장인물이 수시로 바뀌는 바람에 읽어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만,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표, 미국사회의 양극화를 주도하는 주범으로 지목된 수퍼리치들에 대한 각종 정책들이 어떻게 도입되어 시행되었는가를 살피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금권주의가 다시 교두보를 확보하여 세를 넓혀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이 노력하여 함께 번영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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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첼로 - 이응준 연작소설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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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보던 드라마 <내 연애의 모든 것>을 쓴 이응준작가의 신작소설 <밤의 첼로>를 읽었습니다. 표제가 되는 ‘밤의 첼로’를 포함하여 모두 여섯 편의 소설을 묶은 연작소설이라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여섯 편의 소설은 그대로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하고, 한 소설에서는 중요한 에피소드가 다른 소설에서는 뉴스 한 꼭지로 간단하게 처리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집단을 구성하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여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도식이 떠오릅니다.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 모두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몇 몇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작은 집단으로 나눌 수 있지만, 이들 작은 집단을 연결하는 사람이 있어 전체 집단이 끊어짐 없이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처럼 등장인물들이 서로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어 독립적인 스토리이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연작소설이라고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분위기는 하나같이 어둡고, 등장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어두운 분위기에 관계의 갈등을 수월하게 풀어가지 못하고 갈등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적 결말을 쉽게 예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독일의 여류시인 안나 헨리케의 <밤의 첼로>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제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밤이 꼭 한 번은 찾아오고 그러면 그는 홀로 눈보라 치는 광야에서 뜨거운 무쇠 난로를 끌어안듯이 신의 이름을 부른다. (…) 가장 절망스러운 밤의 밑바닥에서 신의 얼굴을 보고자 기도하는 인간은 신이 연주하는 첼로소리를 듣게 된다. 단 한 번은, 꼭 한 번은, 듣게 된다. 신이 흘리는 눈물보다 더 아름다운 더 첼로소리를.(20쪽)” 마치 그 첼로소리를 듣게 되면 지난한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의미로 읽히는 시입니다만, 다른 길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공연히 시빗거리를 찾으려는 속셈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절망의 극한에서 듣게 된다는 첼로소리에 이어서 바다에서 올라온 인간이 잃어버린 바다에 대한 기억 대신에 남겨진 ‘물고기 그림자’가 역시 주인이 극도의 고통에 처하게 되면 견디다 못해 떠나가 버린다는 설명 또한 인간이란 절망에 아주 취약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는 같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주어진 고난을 쉽게 이겨내는 입지전적인 인물보다는 고난에 쉽게 무너지는 안타까운 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더 가지고 있어 그런 인물들을 주로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희망이란 애시 당초 존재하는 않은 특별한 무엇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작가가 던지는 한 마디에서 손에 잡힐 듯한 무엇이 느껴집니다. 바로 “사막 밑에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어요. 녀석을 낚으려면 모래를 깊이깊이 파 내려가야 해요. 사막에도 100년에 몇 번은 폭우가 있거든요. 그때 빗물을 타고 지하 수맥으로 빠져 들어가 번식하게 된 거예요. 사막 아래 물리 출렁인다고 하면 안 믿기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막 한가운데 홀연히 오아시스가 나타나는 거거든요.(72쪽)”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히 사막 아래에 지나는 수맥이 지표 가까이 지나기 때문인 점을 고려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 작가가 무력함에 좌절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강변 버드나무 군락지가 불타사라지면서 누구에게는 죽음이 예고되지만 누구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기이한 엇갈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숙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짧은 소설들이면서도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고 할까요? 국내에서도 다양한 지역이 무대가 될 뿐 아니라 몽골, 인도까지 무대와 등장인물을 확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북극늑대까지 등장시켜 신비로운 분위기로 이끌고 있는 것도 독특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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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다 잃어버린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 너무 늦기 전에 깨달아야 할 사랑의 진실 42
고든 리빙스턴 지음, 공경희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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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리빙스턴 시리즈의 네 번째 책입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써오고 있는 저자가 이 책에서 담고 있는 주제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와 행복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생물이 그렇듯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서 삶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관계를 위하여 새겨야 할 지혜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제1장에서는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가 삶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과 결혼에 관한 선택의 기로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2장에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의 유형을 다루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당신과 가까운 분이 떠오른다면 그 분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것과 만약 극단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관계를 정리해야 할 것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제3장에서는 나 자신과 상대가 갖고 있으면 좋을 미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범해보이지는 타인과의 관계를 행복으로 이끄는데 도움이 될 것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제4장은 우리가 맺은 관계를 발전시키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효율성에 집착하여 여행을 가더라도 행군하듯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경향을 콕 짚어냈군요. 그 글의 말미에 붙여둔 저자의 요약문의 일부를 옮겨 해결할 수 있는 팁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행의 진정한 기쁨은 ‘우연’과 ‘예상치 못한 일’에서 비롯됩니다. 여행지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 일정이 달라지거나 일기예보에 없었던 폭설이 내려 발이 묶이게 되면서 여행은 더욱 다채로워집니다. 만일 이러한 상황에서 심하게 투덜대거나 무리하게 일정을 고집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살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93쪽)” 장거리여행을 떠나던 날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결국은 저녁 무렵 고속도로가 빙판이 되었는데도 무리하게 운전을 하다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온 가족이 위험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일찍 숙소를 정하고 쉰 다음에 다음날 여행을 계속했어야 하는 것이었죠.

 

요즘 독서계의 한 켠에서 조그만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을 포함해서 현대의료에 대한 불신을 담은 책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점에 관한 저자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글에서 요지를 연결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람들 중에는 꽉 막힌 사람이 있습니다. (…)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것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현대의약품에 약초와 자연 치유법을 무시하려는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과학적 방법을 거부합니다. 암 같은 중병에 걸렸는데도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천문학적 비용이 들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치료에 필사적으로 매달립니다.(113쪽)” 자신의 세계에 갇혀있는 이런 사람들은 타인의 세계에 들어설 수 없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하는 메시지를 바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배운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을 익히는 것입니다. 실험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기 위해 과학적 사고체계가 생깁니다.(119쪽)” 음모론을 제기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방안이 과학적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제3장에서 소개되어 있는 행복을 키워가는 사랑의 미덕은 친절, 낙천주의, 용기, 성실성, 관용, 회복력, 아름다움, 유머, 정직, 지성 등 열 가지입니다. 저자는 삶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인간의 조건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불합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How to Love>라는 원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에 매여서 상황판단이 흐려지면 안 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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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신화 지중해 국가정보 시리즈 5
지중해지역원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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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국어사전에 따르면 신화(神話)란 “어떤 신격(神格)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설화로, 우주 및 세계의 창조, 신이나 영웅의 사적, 민족의 기원 같이 고대인의 사유나 표상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신화를 억압된 관념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고, 융은 한 걸음 나아가 신화에 집단의 무의식이 녹아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민족에는 전승되어오는 천지창조신화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단군신화가 전해온다는 주장에 대하여 고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신화로 포장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신화는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구전으로 전해오면서 새롭게 해석되거나 새로이 보태지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민족의 이동과 접촉과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집단들이 유사한 신화를 가지기도 하고, 배경이 서로 다른 신화가 융합되기도 했을 것 같습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에서 펴낸 <지중해의 신화>는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다양한 민족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온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부로 구성된 내용의 1부에는 아프리카의 이집트와 소아시아의 터키의 신화를 다루었고, 2부에서는 유럽의 그리스, 로마,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화의 요약된 줄거리를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은 신화를 구성하는 요소라거나 민족들의 접촉에 따란 신화의 변화를 주로 다루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면, 이집트 신화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신들의 이름도 생소하고, 복잡해서 산만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혹은 지역에 따라서 등장하는 신들이 다른데 이는 인접한 민족의 신화가 녹아들면서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터키의 신화는 그 뿌리가 돌궐족에 닿고 있다고 합니다. 돌궐제국을 구성한 튀르크족이 멸망하여 흩어지면서 아제리족, 카자흐족, 키르기즈족, 투르크멘족, 알타이족, 투바족, 하카스족, 아쿠트족 등 유라시아대륙 전반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에 건설된 셀축제국이 서진하여 아나돌루반도에 이주하여 성립한 오스만제국의 후예인 것입니다. 따라서 터키족의 신화는 튀르크족의 신화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튀르크족의 천지창조신화는 ‘세상은 하늘도 땅도 없는 하나의 바다였다.’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바다를 날면서 쉴 곳을 찾던 탄르 윌겐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돌 하나에 머물게 되었고, “있어라 땅이여!”라고 외쳐 바다로부터 땅을  창조하였다. 이어서 “있어라 하늘이여!”라고 외쳐 땅을 창조하였으며, 이어서 생물을 창조하는데 6일이 걸렸고 7일째 잠들었다고 합니다. 튀르크족 가운데 최초로 기록을 남긴 돌궐족의 종족기원설화에는 몰살당한 마을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년이 이리와 합하여 이리가 잉태하고 열명의 아들을 낳은 것이 돌궐족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들이 튀르크족의 기원설화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거주지들이 한민족과 한국어의 기원과 형성에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 알타이계 민족들의 무대라는 점을 고려한 것 같습니다.

 

최근 우리에게도 알려진 프랑스의 인기만화 아스테릭스는 고대 골(프랑스의 옛 명칭)에 거주한 갈리아 켈트인의 신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골신화에는 산, 나무, 강과 같이 특정한 곳에 머무는 정령이나 조상신들로 구성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서쪽이 만나는 중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신화 역시 다양한 문명이 교차한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토착 민간 신앙은 물론 그리스의 헤라클레서 신화,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의 신화, 그밖에 이슬람이나 기독교 성서의 내용이 신화와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그리스신화는 기원전 15세기로부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기원후 4세기에 이르고 있는데, 등장하는 많은 신들 가운데 누구도 전지전능하거나 초월적이거나 세상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유일신을 믿는 종교와는 다른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는 새롭게 번안, 각색되며, 계속 반복되어 생동하고 있는데, 이는 같은 문화권 내부의 상이한 집단들 간의 독자성, 대립, 충돌을 반영하는 것이며, 고대 그리스국가들의 정치적 현실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신은 인간처럼 사물을 똑 같이 느끼고, 양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협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은 인간과는 달리 불사의 행복과 권능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이야기 중심의 신화를 소개하기보다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신화를 민족들의 관계사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기 때문인지 다소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신화의 성립과 변천과정을 이해하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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