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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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서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쉽게 정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양한 모습을 숨기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진면목을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숲에 들어가면 나무는 볼 수 있으되 숲은 볼 수 없는 그런 것 말입니다. 하지만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다른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그 도시의 특징이 혹은 인상이 쉽게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고전을 읽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94688>로 친숙해진 이탈로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도시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도시는 기억, 욕망, 기호 등 수많은 것들의 총체이다. 도시는 경제학 서적에서 설명하듯 교환의 장소이다. 하지만 이때 교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다. 언어, 욕망, 추억들도 교환될 수 있다. 내 책의 이야기들은 계속 형태를 취했다가 사라지는, 불행한 도시 속에 숨어 있는 행복한 도시들의 이미지 위에서 펼쳐진다.(211쪽)”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동방견문록>을 써 유럽 사람들에게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베네치아 출신 마르코 폴로(1254~1324)가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방문했던 도시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읽다보면, ‘창문 높이에서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비행선과, 무더위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뚱뚱한 여자들로 만원인 지하철이 등장하거나, 공항이 등장하는 도시, 최신형 냉장고에서 아직 뚜껑을 따지 않은 캔들을 꺼내며 최신 모델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근 소식을 듣는 도시가 등장하고 있어 읽는 이를 헷갈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칼비노가 그리고 있는 도시들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라 환상적인 가상의 도시들인 것입니다. 이 도시들은 기억, 욕망, 기호, 교환, 눈, 이름, 죽은 자, 하늘 같은 명사 혹은 섬세한, 지속되는, 숨겨진 등과 같은 형용사로 수식되고, 기하학적 대칭구조를 이루면서 비연속적인 시공간 속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도시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개별적으로 서술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무와 돌들뿐인 길을 따라 며칠을 걸어 도시에 도착한 여행자는 기호를 통하여 사물을 인식하게 되고, 남겨진 기억의 흔적을 통하여 도시의 과거를 가늠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행자의 과거는 그가 지나온 여정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그가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자는 어떤 도시의 광장에서 자신의 것일 수도 있었을 삶을, 혹은 그런 한순간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39쪽).

 

칼비노는 폴로의 입을 빌어 도시들이 특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차이가 사라져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각 도시는 다른 모든 도시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도시들은 형식, 질서, 차이들을 서로 교환합니다. 무형의 먼지가 대륙을 침입합니다. 폐하의 지도책은 그 차이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름의 문자들처럼 특성들이 배합되어 있습니다.(174쪽)” 또한 도시의 이중성, 삼중성을 거론하기도 하는데, 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도시들은 죽은 자들이 사는 다른 도시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다른 도시를 곁에 두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산자들의 도시가 확장될수록 그들이 죽어 묻힌 무덤이 차지하는 공간도 덩달아 늘어나게 된다는 것이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산자들의 공간은 언젠가는 소멸될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칼비노는 죽은자들의 라우도미아(묘지)와 산자들의 라우도미아는 마치 뒤집히지 않은 모레시계의 볼록한 유리병과 같아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방문한 55번째 도시를 마무리하는 글에서 폴로의 입을 빌어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고,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단정하고,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며, 둘째는,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인데,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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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면 할 일이 보인다
밥 나이트 & 밥 해멀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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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프로야구가 정규리그가 끝나고 챔피언시리즈가 진행되고 있어 야구를 좋아하는 국내팬들의 뜨거운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류현진선수가 소속된 다저스가 지구 우승을 차지하고 리그챔피언결정전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디널스와 시작한 챔피언시리즈경기에서 다저스는 커쇼와 그레인키, 원투펀치를 투입하고도 타선의 불발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3차전에서는 우리의 류현진투수가 카디널스의 에이스 웨인라이트를 꺽었지만, 4차전에서는 놀라스코가 초반에 무너지는 바람에 1승3패로 코너에 몰리고 만 것입니다. 5차전에서는 다시 다저스 에이스 그레인키가 등판해서 승리를 거두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있어 류현진 선수가 챔피언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투펀치를 투입한 다저스는 적지라고는 하지만 에이스를 내지 않은 카디널스에게 두 경기 모두 내주고 말았을까요? 어쩌면 정규전에서 막강 파워를 보였던 두 에이스를 지나치게 믿었던 것 아닐까요? 흔히 우리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에 심리적으로 위축하게 만들어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낙관주의는 위기상황에 적절한 대응조치를 사전에 마련하지 않는 실수를 초래하여 무너질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근거없는 낙관에서 벗어나 문제를 바로 보는 용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 할 일이 보인다>는 바로 이런 점을 강조한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미국 대학농구의 전설의 승부사 밥 나이트감독입니다. 밥 나이트는 통상 통산 902승을 기록하며 역대 최다승 감독 부문 2위에 오른 그는 ‘승리란 실수를 가장 적게 하는 팀이 차지하는 법’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어, 매 경기마다 실수를 줄이기 위하여 팀의 결점을 파악하고 패배요인을 찾아 미리 제거하는 ‘부정적인 생각의 힘(The Power of Negative Thinking’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노먼 빈센트 필 목사의 <적극적 사고방식; 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론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현장에서 느끼고 만들어낸 철학이라고 합니다. 그의 생각은 책에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탈리 샤롯교수가 <설계된 망각;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에서 인류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낙관편향을 가지도록 진화해왔다는 주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낙관편향을 가지고 있지만 ‘부정적인 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야 말로 장기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자질이다.(8쪽)’라고 했습니다. 장기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 농구감독으로서의 그의 삶에서 얻은 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이런 철학은 늘 상황을 어둡게 보고 실패를 예상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부정적 요소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는 것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전향적 사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열한개의 장으로 구분된 저자의 생각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으로는 ‘현실을 보게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 ‘승리를 견인하는 것은 철저한 준비다’, ‘현실을 직시할 때 길이 보인다’ 등이 있습니다. 자신이 치른 힘든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 농구 혹은 스포츠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농구경기의 실제 상황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농구를 배우는 선수나 농구팀을 지도하고 있는 감독들이 읽으면 선수생활 혹은 감독생활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꼭 농구선수가 아니더라도, 조직의 리더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는데, 예를 들면 리더를 위한 십계명 같은 것입니다. 1.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마라, 2. 있느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말고, 매사에 의문을 품으라, 3. 안심하지 말고, 언제나 걱정하라, 4. 내면의 문제나 나쁜 습관을 내버려두지 마라, 5. 증거 없이 행동하지 말고, 철저하게 점검하기 전에는 어느 것도 믿지 마라, 등입니다.

 

평소 운전하면서 자동차 계기판에 표시되는 휘발유계기가 바닥으로 떨어져야 주유소에 가는 제가 꼭 기억할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자동차 계기판의 주유 경고등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야. 집데 도착할 때까지는 기름이 충분할거야(78쪽)”라는 지나친 긍정적 사고보다는 “주유소를 찾기 위해 3킬로미터가 넘는 눈길을 걸어갈 때 이 말을 상기하라”는 저자의 따끔한 충고가 더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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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여행하다 - 공간을 통해 삶을 읽는 사람 여행 책
전연재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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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미국을 두서없이 여행하면서 남겼던 메모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사진과 같이 읽다보면 지금은 곁에 계시지 않은 선친 그리고 아내의 외조모님과 함께 했던 그때 생각이 납니다. 당시와 상황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때의 여행지를 회상하는 글을 써보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여행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행에 관한 책을 읽게 되면 글쓴이의 관점에서 여행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효과를 통하여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여행하다>는 건축가의 눈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들여다보는 독특한 여행기입니다. 어쩌면 우리네가 생각하는 집은 금전으로 환산되는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집들은 그 외관을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는데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유명인사들이 살던 집들을 공개하여 그들이 살던 분위기를 볼 수 있기도 한데, 역시 사람 사는 온기가 없는 단순한 구경거리에 불과하여 진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집을. 여행하다>에서 저자의 놀라운 경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였던 친절을 통해서 현지인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발견하게 된 것 같습니다. “현지 사람들의 집에 머무는 여행을 택하는 것은 (중략)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들이 먹고 자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취향과 삶에 대한 이해를 한 뼘씩 넓혔다.(265쪽)” 나아가 새로운 즐거움을 하나씩 더하게 되면서 가급적 여행지에서 묵을 수 있는 집을 늘려나가게 된 것 같습니다. “현지인의 집에 머무는 여행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는 함께 요리하여 나누어 먹는 것이다. 새로운 요리법을 배우거나 특별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행위에 들어 있는 의미 때문이다.(270쪽)”

 

이탈리아 카타니, 시라큐사, 파나레아, 피스토이아, 포르투칼 리스본,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벨기에 브뤼셀, 네델란드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함부르크 등, 유럽 8개국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모두 열 세 곳의 집에 머물면서 느낀 점을 적고 있는데,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그녀와 그녀를 맞은 집주인들의 열린 마음입니다.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를 받은 경우도 있고, 친구의 친구집을 방문한 경우도 있으며, 방문하였을 때 친구가 여행을 떠나게 되어 친구의 남편과 같이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집주인 남성과 둘이서만 지낸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작업을 거는 듯한 멘트를 듣기도 했다고 하는데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집은 머무는 곳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진 것이 적으면 그만큼 삶은 자유로워진다. 언제 어디로건 마음 내킬 때 자리를 털고 길을 나설 수 있다. 영혼에는 매임이 없다.(219쪽)” 즉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점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미치 엘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http://blog.joins.com/yang412/4706383>에 나오는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에요.”구절에서도 같은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건축을 전공하는 분답게 밖에서 보는 집을 담은 사진은 물론 집안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 사진들을 다수 곁들이고 있어 마치 저자와 함께 그 집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 세 곳의 이야기를 함축하는 책 속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저자를 유혹하던 남편을 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에서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가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처럼 본심을 간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滿月),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지금 받아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친지의 집에 머물면서 조금은 불편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경험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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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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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 읽은 책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에서 프루스트가 평생 동안 플로베르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쓴 프루스트의 편지에서도 플로베르의 <감성교육>의 주인공에 자신을 비유하는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엄마의 어린 프레데릭은(사실은 엄마의 하나뿐인 마르셀이에요. 엄마가 저와 프레데릭을 혼동하지만 말이지요.) 기침을 심하게 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답니다.(120쪽)” 더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감정교육>과 닮은 점이 많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감정교육>은 프루스트의 소설보다 반세기 전인 1840년부터 1867년까지 30여년 동안 프레데릭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파리의 사교계를 무대로 활동한다는 점, 주인공이 여러 여인들을 거쳐서 사랑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 등입니다. 다만 각각의 주인공이 도달하는 결론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은 젊어서 가졌던 야망은 결국 실현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는 점을 깨닫고 단순히 추억거리로 간직하는 다소 비관적이면서도 염세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반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역시 사교계에, 그리고 사랑에 실망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산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개인의 기억을 모아 예술로 승화시키는 창조적 활동을 보인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라고 하였습니다.

 

플뢰베르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내과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1821년 태어났는데, 법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으로 길을 글쓰기로 바꾸었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1857년에 출간한 소설 <마담 보바리; http://blog.joins.com/yang412/13224230>는 풍기문란죄로 기소되었고, 이국적 소설 <살람보>는 고고학적인 사항의 외형적 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1869년에 나온 <감정교육>은 “내가 읽어본 유일한 역사 소설(에밀 졸라)”, “이 책에 전적으로 굴복한다(프란츠 카프카)”, “슬프고 희미하고 신비로우며, 인생 그 자체와 같다.(테오도르 방빌)” 등과 같은 문학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왜 이 책은 괴테, 바이런, 샤토브리앙과 같은 작가에 의해 주도된 화려한 낭만주의적 전통을 따르지 않는가”라는 비판도 많았다고 합니다. 1864년 시작한 글쓰기 과정에서 “나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현대적인 삶에 관한 소설에 매달렸다. 난 내 세대 사람들의 도덕적 역사를 쓰고 싶다. 정확하게는 ‘감정적인’ 역사라 함이 옳을 듯…….”이라고 플로베르가 토로한 것처럼 <감정교육>에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랑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적는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정치적 견해의 충돌과 1848년의 혁명과 같은 극적인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에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플로베르 사후에서야 인정받아 <감정교육>은 플로베르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소설로서 평가를 받고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주인공 프레데릭의 사랑이 지나치게 변화무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을 꼭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법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파리로 올라와서는 학업보다는 사교계를 기웃거리는 점도 이해하기 어렵고, 게다가 상대는 고향으로 가는 배안에서 우연히 만난 아르누 부인으로 오랜 기간 가슴앓이를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갑작스럽게 진전된다거나, 갑작스럽게 개입하는 사교계 여성 로자네트와의 동거, 그리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재계와 사교계를 주름잡는 당브뢰즈 부인과의 결혼설, 그런가 하면 고향마을의 이웃 소녀 루이즈 등등, 얽힌 여성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곡예를 하는 프레데릭의 애정행각을 뒤쫓아 가기도 숨 가쁘기만 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결국은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다가 종국에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품에 남은 여인은 없더라는 식의 허무한 결말에 속았다는 느낌이 진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정치적 격변기에 등장인물들의 정치적 색깔이 감정 혹은 도덕적 행적과 잘 녹아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당시의 도덕적 역사를 기록한다는 처음 생각에 집중하였더라면 읽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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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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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민족학자(民族學者) 레비스트로스의 대표적 저서 <슬픈 열대>를 읽었습니다. 적지 않은 인문서적들이 읽기를 추천하고 있어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정작 읽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슬픈 열대>의 첫 구절입니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105쪽)” 저자가 지금은 인류학이라고 부르는 민족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던 브라질을 떠나온 것이 15년 전인데, 그동안에도 수없이 해오던 책쓰기를 미루어 온 것은 자신이 해온 민족학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는 시시콜콜할 모험이야기를 써야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민족학자의 시각에서 서구문명의 유입으로 왜곡되어 가는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느낀 참담함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계문명이라는 덫에 걸려든 불쌍한 노획물인 아마존 삼림 속의 야만인들이여, 부드러우면서도 무력한 희생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라지게 한 운명을 이해하는 것까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대들의 모습을 대신하는 총천연색 사진첩을 자랑스럽게 흔들어내는 요술, 당신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요술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145쪽)” 그러면서도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여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레비-스트로스를 갈등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상호 교섭할 수 있는 힘이 생겨 그들의 접촉을 통해 서로를 부식시키는 일이 드물수록, 각기 다른 문화에 파견된 사자는 그 문화의 다양성의 풍부함과 의의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149쪽)”

 

문화인류학 분야의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요즈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정글의 법칙> 류의 연예오락프로그램들이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의 곁으로 끌어오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한낱 웃음거리로 지나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인류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분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자가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1998년에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편찬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는 좋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임돈희교수님은 기획의도를 담은 머리말에 “인류학에서 발달된 중요한 개념인 ‘문화상대주의’란 세계 여러 문화를 우리 자신의 가치관이나 우열의 척도를 가지고 보지 않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세계화시대에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현대인들에게 특히 강조되어야 할 개념이다.” 라고 적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된 현실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우리사회를 후퇴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열대>에는 이 책을 번역하신 박옥줄교수님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과 <슬픈 열대>에 대한 해설을 앞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65쪽)”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레비-스트로스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회조직이나 행위를 연구함에 있어서 구조적 분석방법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입니다. 박교수님은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조화(調和)에 대한 탐구이며, 어떤 대상들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관계의 체계를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의 구조주의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의 화학적 요소처럼 과학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자연이나 사회현상에는 임의적인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게 된다.(65쪽)”고 정리하였습니다.

 

<슬픈 열대>는 모두 9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레비-스트로스가 밀항선을 타고 마르세유에서 뉴욕까지 가는 선상여행을 회고하였습니다. 제2부에서는 과거로 거슬러 철학에 관심을 두었던 레비-스토로스가 민족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과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의 사회학교수로 취임하는 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어서 3부에서는 브리질로 가는 항해과정에서 열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고 4부에서는 브리질에서의 생활과 현지조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 5부에서 8부까지는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카라족 그리고 투피 카와이브족에 대한 민족지(民族誌)로서,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과 각각 원주민 사회의 문화를 소개하고 분석하였습니다. 마지막 9부는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과정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여행기가 추가되었고, 그때까지의 개인적 체험과 현지조사의 내용을 종합정리하면서 자신이 인류학적 연구에서 부딪혔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문명이 원주민과 처음 접촉한 이래 그 사회를 파괴하는 침략성을 보여 온 데 대하여 분노하고, 서구문명의 침입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 원주민 문명, 즉 ‘사라져버린 실체’를 탐구하고 있는 민족학자라는 직업의 역설에 비통함을 토로하곤 했다는데, <슬픈 열대>에는 저주받은 원주민 사회에서 느낀 레비-스트로스의 비애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철학에 관심을 두었던 레비-스트로스는 민족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학문의 시녀, 즉 과학적 탐색의 시녀나 보조자가 아니라,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심미적 관조였다. 철학이 수세기에 걸쳐서 점점 경쾌하고 대담한 구성을 다듬어가고, 균형과 능력의 문제를 풀어가며 논리적 세련화를 창안해가는 것을 보아왔는데(162쪽), (…) 민족학의 연구대상인 문화의 구조와 나 자신의 사고구조의 유사성 때문에 내가 민족학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164쪽) (…) 민족학은 나에게 지적만족을 가져다준다.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라는 양극을 결합시켜, 인류와 나 사이에 공통되는 근거를 동시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173쪽)”

 

5장을 시작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현황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하였을 당시만 해도 남부 브라질 전체에는 제(Gé)라는 집합적 명칭으로 구분되는, 언어와 문화의 모양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던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해안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투피(Tupi)어를 사용하는 침략자들에 의해 몇 세기 전에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변지역의 투피족은 유럽의 식민지개척자들에 의해 소탕되었지만, 접근이 어려운 숲속으로 물러나 있던 원주민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는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들을 외부세계에 전혀 노출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주지역에서 유럽문명이 필요로 하는 자원들이 발견되면서 이를 개발하기 위하여 철도, 전신선 등을 부설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노출되고, 브라질 정부에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별도의 지역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구문명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문화인류학적 조사결과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들과 소통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레비-스트로스 당시의 현지조사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조사대상 주민들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해석한 것으로 보여 심층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원주민사회에서 관찰한 내용들을 구조적 분석을 통하여 해석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카두베오족이 사용하는 도자기나 목각상과 같은 생활미술품이라거나, 그들이 서열을 나타내기 위하여 몸에 채색하고 있는 가문(家紋)에 해당하는 문신이나 형판을 그림으로 담아낸 것 등이라거나, 보로로족의 서열을 나타내는 성기덮개나 마을의 사회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등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민족지에서 읽은, 저로서는 놀라운 사실은 20세기 초반 지구적 재앙이었던 스페인독감의 악몽이 아마존 밀림 속에 고립되어 살고 있던 원주민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지나 콜라타가 <독감; http://blog.joins.com/yang412/3963341>에서 ‘스페인 독감은 1918년과 19년에 걸쳐 맹위를 떨쳐 고립되어 있어 외부와 단절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발병하지 않은 지역이라고는 없었다.’고 적은 것처럼 아마존의 밀림까지도 침투했던 것입니다. 한때 1,000명으로 알려진 남비콰라족의 사바네 무리는 1938년에 19명의 남자만이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페인독감은 호흡기를 통하는 감염성질환입니다. 환자가 기침할 때 튀어나오는 비말에 담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마신 사람이 감염되고, 잠복기를 거쳐 증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우주적 조화를 구축하려는 감각 속에서는 균형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서구의 과학적 논리와는 달리, 원주민의 원시적 사고는 동식물의 세계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독특한 지식 습득의 방식일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결국은 원시적 사고는 세계를 하나의 동시적(同時的), 공시적(共時的) 전체로 파악하기 위한 무시간성(無時間性)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해온 작업들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또는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 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개화이다.(742쪽) (…)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743쪽) (…) 개인이 집단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각 사회가 여러 사회들 가운데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도 우주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여기 있고 또 세계가 존재하는 한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그 가느다란 아치는 우리 앞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다.(744쪽)”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시작부분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슬픈 열대>를 읽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지만, 그 기억이 글자 그대로 나타나는 한은 그렇지 못하다. 회상을 해보는 것은 좋아하더라도, 그 고된 일들과 괴로움을 다시 겪어보고자 하는 이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인생 그 자체이기는 하나, 다른 성질을 지닌 것이다. (179쪽)”라고 적은 글을 읽으면서 제가 기획하고 있는 여행회고담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1990년대 초반 미국을 여행하면서 적어두었던 여행기를 손에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년도 넘은 옛날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과거를 여행하는 자가 되어 내게는 거의 전부가 이해도 안 될 뿐더러 비웃음과 혐오감밖에 못 일으킬 어마어마한 광경에 접하든가, 아니면 현대의 여행자가 되어 사라져버린 현실의 흔적을 뒤쫓아 다니든가 해야 하는(149쪽)”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었다는 고백처럼, 의미 없는 과거의 여행을 복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때의 여행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읽을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답은 이미 쥐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문화인류학 분야로 분류되는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의 여행기와 현지조사를 통하여 발견한 것들을 적고 있어 방대한 분량에 비하여 잘 읽히는 책입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우경화 경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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