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미술관 1
랄프 이자우 지음, 안상임 옮김 / 비룡소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판타지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있다 보니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올 여름에는 독일 환상문학을 이끄는 랄프 이자우의 작품을 몇 편 읽었습니다. [북소리]에서도 지난달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http://blog.joins.com/yang412/13459421>으로 한번 만나 본 적 있는 작가입니다. 그때 소개를 드렸습니다만, 미하엘 엔데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랄프 이자우는 1992년 자신의 딸을 위하여 썼다는 <용 게르트루트 Der Drache Gertrud>로 데뷔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판타곤’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환상, 상상을 의미하는 판타지(Phantasie)와 다각형을 뜻하는 수학적 어미, -타곤(-tagon)을 조합한 단어입니다. 판타곤은 환상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문학 형태와 장르가 복합적으로 녹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거짓의 미술관>은 유명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예술작품의 도난사건과 살인을 다루는 스릴러소설로 그리스신화를 인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판타지적 요소는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다만 예술작품이 이야기의 주제를 풀어가는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독특하면서도 아주 매력적인 조합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의 대치상황을 곁들인 점도 이야기의 전개를 촘촘하면서도 매끄럽게 하는 맛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에서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이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읽을거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거짓의 미술관> 역시 인간복제라는 의학적 기술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장르소설의 리뷰가 어려운 점은 이야기 줄거리를 어느 정도까지 소개할 것인가 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출판사에서 요약하여 소개하는 수준까지는 무난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출판사의 책소개에 나오는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야기는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각상 <잠든 헤르마프로디테>가 침입자에 의하여 폭발, 파괴되면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르네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The Reckless Sleeper)」가 도난당하고, 그다음엔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사 박물관의 루카스 크라나흐의 「에덴 낙원」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예술품이 사라진 현장에는 어김없이 르네 마그리트의「경솔한 수면자」에 그려진 물건들이 하나씩 놓여 있습니다. 거울, 붉은색 담요, 황금 사과 ……. 미술관들이 도난당한 작품들은 보험을 계약한 곳이 모두 ‘아트케어’ 라는 보험회사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스터리한 예술품 파괴, 도난사건의 실마리를 풀어줄 주인공 알렉스 다니엘스는 꽤나 요란스럽게 등장합니다. 스물다섯 살된 과학기자 알렉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유서깊은 칼리지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지적 설계 진흥상(Intelligent Design Encouragement Award)’, 약어로는 이데아 상을 받게 됩니다. 이 상은 ‘비평적 과학자 협회’의 열한 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수상자를 결정하게 되는데, 수상자는 지적 설계 사상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한 출간물의 저자들 중에서 선정합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체가 고등한 것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한다는 다윈의 사상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진화론 추종자들과는 반대로, ‘지적 설계론’ 옹호자들은 모든 생명의 복잡성 뒤에 존재하는 창조적 지성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다.(거짓의 미술관 1권, 38쪽)”라고 합니다. 창조과학에서 지적설계론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가 종교적 배경에서 지적설계론에 공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수상직후에 루브르 미술관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됩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아트케어의 보험수사관 다윈 매트 쇼우입니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다윈은 인간복제에 관한 기사에 주목합니다. 기사내용은 이렇습니다. 2000년 12월 영국하원은 인공수정법을 개혁하여 ‘치료용 복제’를 합법화했다고 합니다. 황우석교수 사건으로 우리들에게도 친숙해진 바 있는 체세포를 이용하여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입니다. 즉, 시험관에서 인간의 난자에서 세포핵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의 일반 체세포의 핵을 이식한 다음 전기자극을 가하면 마치 수정난처럼 세포분열을 시작하여 세포덩어리를 만들게 되고, 여기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은 배아줄기세포를 목적에 맞는 특수세포로 발전하도록 하여 환자에게 이식하는 것이 줄기세포요법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배아청이 2004년 8월 뉴캐슬대학교 생명센터 연구팀에게 인간 배아의 복제를 허가했고, 다윈은 현대 단계에는 치료용복제가 일상적으로 시행되고 있으며 유전자 특허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과 영국이 인간유전학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인간복제기술을 통하여 세포덩어리 단계를 넘어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허락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적설계론 옹호자인 알렉스와 진화론 신봉자는 아닌 다윈의 관계는 일종의 저자의 현학적 장치에 불과한 듯하지만, 사실 알렉스가 내세운 지적설계론이라는 장치는 이 사건의 바탕이 되고 있는 인간복제에 대한 저자의 경고가 구체적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뜨거운 감자, 인간복제는 사건의 기둥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알렉스가 주장하는 현생인류를 이을 신인류가 다윈의 진화론이 아닌 과학자에 의하여 설계된 유전자조작으로 탄생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신인류가 탄생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과학자들의 오만함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복제를 단순히 치료용으로 발전시킨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아일랜드; http://blog.joins.com/yang412/5207437>나 불완전한 기술로 인간의 유전자와 동물의 유전자를 섞어 만들어낸 키메라가 등장하는 영화 <닥터 모로의 DNA; http://blog.joins.com/yang412/4679762>는 생각하기도 끔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짓의 미술관>에는 인간복제라는 기술로 탄생한 인간들의 모습을 새긴 조각작품을 모아둔 곳이기도 한데, 결국은 이들의 탄생을 주도한 인물과 함께 사라지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제노사이드; http://blog.joins.com/yang412/12853780>에서 신인류의 등장을 막으려는 미국정부의 음모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열대 우림에 신종 생물 출현. 이 생물이 번식하게 될 경우, 미국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전 인류 멸망이라는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제노사이드, 11쪽)”는 내용을 담은 정보보고를 토대로 현생인류의 멸망을 우려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공존하였던 코로마뇽인의 삶을 추적한 <크로마뇽; http://blog.joins.com/yang412/13003445>을 읽으면 이해의 폭을 넓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의 미술관>에서 인간복제를 통하여 탄생하게 되는 신인류의 모델은 그리스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헤르마프로디테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헤르마프로디테는 남성과 여성의 외부적 특징은 물론 유전적 특징고 완벽하게 공유하고 있는 간성을 의미합니다. 헤르마프로디테가 현생인류를 이을 신인류가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미들섹스>에 등장하는 조라가 “우리가 다음번에 오게 될 바로 그 사람들이기 때문이야(거짓의 미술관 1권, 159쪽)”라는 말에서 얻은 것 같습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 있는 세상이 갈등을 빚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생각한 어떤 과학자가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세상에서는 갈등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유전자조작과 인간복제를 통하여 똑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을 대량으로 만들어낸 결과가 <거짓의 미술관>의 이야기로 탄생한 것입니다. 그 과학자가 바로 예술작품 도난사건의 핵심이 되는 ‘경솔한 수면자’가 되는 것이고, 그 경솔한 수면자에게 책임을 묻기로 결심한 ‘두뇌’가 사건을 통하여 드러나는 복제인간들을 제거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경솔한 수면자와 대면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판타곤이라고 부르는 저자의 작품의 특징을 <거짓의 미술관>에서 찾아보면 헤르마프로디테에 관한 뿌리를 찾아가는 신화학, 알렉스와 다윈의 첫 만남을 장식하는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의 이론적 대립을 설명하는 진화생물학, 인간복제를 통하여 헤르마프로디테를 창조해낸 생물학, 이들을 창조해낸 ‘경솔한 수면자’를 시작으로 일곱 개의 예술작품의 의미를 연결하는 미학, 또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나타나는 픽토그램을 꿈의 상징으로 확대하는 프로이트 심리학 등이 있습니다.

<거짓의 미술관>에 등장하는 예술작품들을 따로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작품은 파리 루브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잠자고 있는 헤마프로디테 (Sleeping Hermaphrodite)」입니다. 기원전 160년 에트루리아 조각품인데, 이탈리아 바로크시대 조각가인 베르니니(Bernini, 1598~1680)가 대리석으로 만든 매트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라지는 작품은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입니다. 랄프 이자우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의 상징물, 즉 수면자가 덮고 있는 거울, 붉은 이불, 황금사과, 비둘기, 양초, 리본, 모자가 범행의 대상이 될 작품을 예고하는 메시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일곱 상징물인가에 대하여 알렉스는 창세기를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여섯 날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날 쉬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가 이야기의 중심에 오는 이유입니다. 세 번째 사라지는 작품은 빈 예술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루카스 크라나흐의 「에덴 낙원」입니다.

 

네 번째 작품은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입니다.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Eris)가 던져놓고 간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The Apple of Discord) 에 적혀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To the Fairest)'라는 문구대로 황금사과의 주인을 찾는 장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파리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해준다는 아프로디테의 제안에 넘어가서 황금사과를 아테네에게 건네게 되고, 결국은 트로이전쟁의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작품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그가 소장하고 있는 이탈리아 화가 피에로 디 코지모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입니다. 이 작품은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불을 통해 생명을 주기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두뇌’는 신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행위가 기술 남용과 인류의 타락한 문화의 상징으로 이해하려 했을 것(거짓의 미술관 1권 420쪽)으로 알렉스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작품은 네덜란드 오테를로에 있는 호헤 벨루베 국립공원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는 헨드릭 반 클레버의 「바벨탑 건설」입니다. 신의 명령을 따르며 땅에 흩어져 살지 않고, 사람들을 한 장소에 묶어 두려는 목적으로 건설하던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탑을 짓던 이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하는 벌을 내리는 것으로 결국은 세상이 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의 상징인 인간복제를 부정하는 메시지인 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작품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다비드」입니다. 마지막 미션으로 「다비드」를 선택한 이유를 알렉스는 이렇게 추정합니다. 오늘날 발전한 과학과 기술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완벽함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만, 우리가 만든 것들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만큼이나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 약점을 인정해야 우리는 이 행성 위에서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뇌’의 마지막 미션은 「다비드」를 폭파하는 것으로 예상한 알렉스와 다윈 그리고 아트케어와 이탈리아 정부는 과연 「다비드」를 지켜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윈이 발견한 「경솔한 수면자」에서 아직까지 의미를 두지 않았던 어두운 하늘, 똑바로 서있는 비석, 그리고 나무상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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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화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새로운 방법
유예진 지음, 유재길 감수 / 현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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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진교수님의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을 읽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작했던 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문학작품들을 따로 읽어 인용구절을 포함해서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여기 덧붙여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미술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프루스트의 화가들>을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작에 비하여 뒤늦게 읽기에 나선 것은 아무래도 미술에 대한 저의 앎이 부족한 탓에 이유가 있습니다.

 

유예진교수님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목적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화가들 중 비중의 중요도에 따라 선정된 15명과 그들의 특정한 그림들을 대하는 마르셀의 시선을 분석함으로써 프루스트의 소설을 새로운 방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4쪽)”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전체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소설 속의 마르셀의 성장과정에 따라 구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단순하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 미술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의 작품세계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같이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모두 100여 명의 실제 예술가와 200여 점의 실제 작품이 언급된다는 것도 출판사의 소개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프루스트가 창조한 화가 엘스티르를 포함한 15명의 작품세계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화가와 그들의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음악, 문학, 건축, 연극 등의 나머지 예술분야에 비해 월등하게 크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화가 엘스티르를 주인공 마르셀을 예술의 세계로 안내하는 스승으로 선택한 것은 프루스트가 ‘보는 것’과 ‘시선’의 중요성을 일찍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나는 작가는 <나사의 회전>과 <여인의 초상>의 작가 헨리 제임스가 생각납니다. 오르한 파묵에 따르면 프루스트가 ‘나의 소설은 그림이다’라고 했다면 헨리 제임스는 ‘내 이야기를 본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프루스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20여권에 달하는 의학서적을 출간한 아버지가 프루스트에게 지적 자극을 주었다면 문학적 지식이 풍부한 어머니는 프루스트의 문학적 취향을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의 소년시절을 담은 「스완네 쪽으로」를 보면 어린 마르셀이 책읽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본 할머니가 밖에 나가 산책을 하도록 했던 것처럼 프루스트의 어머니 역시 오랜 시간 독서를 하는 아들을 억지로 방에서 내보내거나 서재의 램프 불을 끄곤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프루스트는 평생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전에 자전소설 <장 상퇴유>와 비평서 <생트 뵈브에 반박하여>를 쓰기 시작하였지만,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유예진교수님은 <프루스트의 화가들>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15명의 화가의 작품세계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에 대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해당 작품들을 컬러로 싣고 있어 설명한 내용을 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해당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을 밝혀놓고 있어 뒷날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기억해두었다가 꼭 감상해보려 합니다. 조금 아쉬운 것은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이나 <프루스트의 화가들>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아직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많고, 소개되었더라도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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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우현주 옮김, 김상근 해제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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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인문학특강] 공개강좌에서 만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김상근교수님은 <마키아벨리; http://blog.joins.com/yang412/13190938>를 통하여 <군주론>에 담은 마키아벨리의 진심이 왜곡되어 힘과 권력을 가진 강자에게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음흉한 참모라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김상근교수님의 주장을 먼저 듣고서 <군주론; http://blog.joins.com/yang412/13452949>을 읽은 탓인지, 군주에게 얄팍한 권모술수가 아닌 정통적인 ‘제왕학’을 설명하는 교과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 생각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김상근교수님께서 해제를 붙이신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입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가 말년에 학문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던 ‘루첼라이 정원’ 모임의 제자이자 후원자였던 피렌체의 젊은 귀족 자노비 부온델몬테와 시인 루이지 알라만니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들어가는 글에 보면, “나는 포르투나가 자신의 존재를, 즉 위대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 존재는 지혜가 아닌 바로 포르투나 자신임을 세상에 드러내길 원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믿습니다.(10쪽)”라고 적었습니다. 카스트루초의 삶을 보면 비르투스를 통하여 입신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결국에 마지막 승자는 포르투나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비르투스의 덕목으로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즉 포르투스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르투나에 의하여 좌지우지되는 우리의 운명을 지키는 최선의 방책은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여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질 것을 강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김상근교수님의 해제를 읽어보면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됩니다. 마키아벨리가 카스트루초의 생전의 행적에 관한 역사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그의 생애를 영웅담의 형식을 꾸몄는데, 사실은 카스트루초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유언을 각색하는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마키아벨리적’이라는 형용사, 즉 ‘사악하고 권모술수를 부리는 모사꾼’으로 폄하되고 말았는데, 이는 다분히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보면 <군주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마키아벨리에 대하여 평가되어 내려온 이미지가 크게 잘못된 것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카스트루초를 준주로 세우는데 조력하였지만 공적을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루카의 포조(Poggio)라는 가문의 일원이 카스트루초의 대리인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사전 준비작업을 철저하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일부 세력들이 반대세력에 서는 등 복잡한 상황으로 치달아 결국은 협상에 의하여 조율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카스트루초는 그의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보여줄 것처럼 폭동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사면할 것처럼 포고하고는 이 말을 믿고 그의 앞에 나온 이들은 모두 붙잡혀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조작되었거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세상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인간 일반’에 관한 자신의 성철을 담아내기 위하여 철저한 수학적 계산과 치밀한 작품 계획을 통하여 구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김상근교수님의 해제를 이렇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남을 절대로 신회하지 않고, 공포심을 조장하면서 비르투스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평화의 방법’으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두고서 이렇레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147쪽) 어떻습니까? 일종의 해탈의 단계에 들어서야 인류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다는 주장을 곁들이고 있습니다만,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은 해탈에 이르는 길오 보여서 오히려 책읽는 이들에게 부정적 이미지로 남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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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기버; 기억전달자>를 시사회에서 감상했습니다. 뉴베리상을 수상한 로이스 로리가 발표한 동명의 원작 <더 기버; 기억전달자; http://blog.joins.com/yang412/12811323>를 필립 노이스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겼습니다. 노이스 감독은 원작이 1993년에 된 점을 고려한 듯 디테일에서는 업그레이드된 기술을 일부 적용하였지만, 대사는 물론 스토리까지도 원작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영화는 제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표현되는 점은 있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 모두에서 조너스(브렌튼 스웨이스扮)가 주인공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원저자는 왜 ‘기억전달자’를 제목으로 하였을까 지금도 궁금합니다. 이 작품의 뼈대는 이들이 사는 커뮤니티에 관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기억보유자가 다음 세대의 기억보유자에게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만들어져 저장되는 과정은 과학적으로 많이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한 것을 요즈음 말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최초의 방법은 개인별 기억이었을 것입니다. 그 기억을 언어를 통하여 타인과 공유하게 되었고, 문자가 개발된 다음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록으로 기억이 다음 세대에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기록은 동굴의 바위와 같이 자연물에 적다가 점토판에 기록하게 되었고, 양피지나 종이에 적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문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바로 구술로 전수되던 개인의 기억이 문자의 형태로 전달할 수 있게 되고, 그 기록이 남아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이 첫 번째 계기가 되었고, 수작업을 통하여 문서로 남기던 단계에서 활자를 이용한 자동인쇄술이 개발된 것이 두 번째 계기가 되었으며, 기록이 전자문서화되어 보관과 검색이 용이해지고, 인터넷을 통하여 대용량의 정보를 인류가 공유하게 된 것이 세 번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기억을 완벽하게 타인에게 넘겨주는 방법은 아직까지도 없지만 상상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고려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다크 시티; http://blog.joins.com/yang412/4495836>에서는 두뇌에서 기억물질을 주사기로 끄집어내어 조작을 가한 다음에 다시 주사하는 방식으로 기억을 바꾸기도 하는 기술을 선보였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직 가능하지 않습니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에서는 기억전달자가 차세대 기억보유자에게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기억을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기술입니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는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사는 커뮤니티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고, 기후까지도 통제되는 회색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개인의 감정까지도 통제되고 가족까지도 인위적으로 구성되는데 아이는 남녀의 사랑의 결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산모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이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면 그 아이를 적절한 가정에 배정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 커뮤니티에는 ‘임무해제’라는 독특한 절차가 있습니다.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아기, 맡은 직위를 포기하는 젊은이, 그리고 맡은 업무를 모두 마친 노인들에게 적용되는 절차입니다. 그리고 그 절차를 수행하는 사람은 정해진 것처럼 혈관주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생명을 끝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것은 개인의 욕심으로 인하여 끔찍한 전쟁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쟁이 없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해제’라는 미명아래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무심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변화가 없는 세상은 발전이 없고, 결국은 퇴화되기 마련이 아닐까요? 회색빛으로 뒤덮인 이들의 세상이 유토피아일까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생략한 표현들은 원작을 통해서 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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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탈출법 - 현직 한의사가 귀띔해주는 명상 속
안상원.박경태.김병준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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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를 통하여 친숙한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사망소식을 듣고서 생각이 많이 복잡해졌습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시는 정신과선생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참 어려운 질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현대의학에서 적용하고 있는 약물요법, 면담요법 등 이외에도 다양한 시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울증 탈출법>은 명상으로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을 담고 있습니다. 우울증의 정의와 현대의학과 전통의학에서 사용하는 치료방법도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을 전공하신 분과 다양한 명상기법을 운용하시는 분들이 같이 책을 꾸몄습니다. 다만 정신의학을 전공하신 분이 참여하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다른 질환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정신과 질환의 진단이 복잡하고 전문적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일상의 근심과 고난마저 정신병으로 둔갑하는 시대, 범람하는 정신 장애에서 현대인을 구원하라!’라는 카피가 달린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http://blog.joins.com/yang412/13392396>에서는 정신질환 진단기준이 완화되어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가 폭증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만큼 정신질환이 다양해지고 진단을 정하는 기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현대의학에서 규정하는 정신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효과를 판단하는데 있어 전문성이 요구된다고 볼 때,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있어 명상의 치료효과를 판단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빠져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들 역시 명상을 통한 우울증 치료에 전제가 필요하다고 적었습니다. “반드시 본인 스스로 우울증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명상 지도자나 의사의 지시와 조언에 따르고 스스로 노력해야만 한다. 이러한 노력에 현대의학과 심리학, 한의학적 치료기법들이 병행된다면 우울증은 결코 난치병이나 평생 불치병이 아닌 탈출 가능한 마음의 병으로 정의될 것이다.(80쪽)”

 

정신의학을 전공하신 의사들 가운데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 실패하여 불행한 상황을 맞는 경우 입장이 난처해지거나 때로는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의사가 아닌 경우에는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현행 의료법상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비의료인에 의한 유사의료행위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국민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에 약물치료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물복용을 소홀히 하다가 불행한 일이 생긴 사례를 최근에 겪었습니다.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명상의 효과에 대하여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성과는 현대에 들어 더욱 발전해왔고, 1960년대 하버드 의대에서는 명상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명상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집중력과 면역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데, 특히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증가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착안하여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드는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명상을 이용해보려는 시도가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집중명상, 마음챙김명상, 걷기명상, 호흡명상 등을 소개하며, 명상을 활용한 행동치유, 심리치유, 집단치유, 통신치유, 영성치유 등의 방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에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과 전통의학에서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 역시 요약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울증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학적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은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있어 가장 적절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현대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따르면서 보완적 요법으로 명상을 활용하도록 해야 치료효과를 판정하고 앞으로의 치료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 오류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감기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우울증이 현대인의 정신건강에 심각한 위기 상황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지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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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4-08-13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증은 병이라기보다는 .. 심오하고 진실된 인간의 증표이기도 하죠. 대부분의 위대한 위인은 우울증세가 있지요. 처칠, 아인규타인, 예수 공자.. 링컨 등등 ..우울증도 없다면 .. 오히려 어떤 재능도 심오함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심심한 사람이라는 증거일뿐입니다.

처음처럼 2014-08-14 15:43   좋아요 0 | URL
공감이 되는 점이네요. 지극히 평범하고 심심한 저는 우울할 틈이 없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