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 시간과 사람과 풍경이 수놓는 아름다운 우리 강 문화 에세이
한승원 지음, 권태균 사진 / 김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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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살던 곳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엇하지만 개울보다는 큰 강이 흘렀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댓똘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네청년들이 미역을 감기도 했지만 물을 무서워하는 저는 무릎보다 깊이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이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무척 궁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강을 만나게 되면 이 물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입니다. 미국에서도 미시시피강의 상류에 해당되는 미네소타의 트윈시티에 살았는데, 그때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길다는 미시시피강의 시원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여기 살고 있는 곳 근처를 흐르는 강에 대하여 시시콜콜한 것까지 뒤져내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한승원 작가님이신데, 고향땅 장흥 가까이 흐르는 영산강 유역을 샅샅이 다니면서 알아낸 내용을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에 담았습니다. 일종의 영산강 지리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은 태초로부터, 고즈넉한 밤, 달과 별과 은밀한 사랑을 나누며 굽이굽이 전설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들려주는, 여신의 다른 이름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강 앞에 서면 사람들도 하나하나의 풍경이 되고, 역사도 강바닥을 디디고 선 갈대숲이나 수양버들이나 개개비나 두루미나 황새나 해오라기나 청동오리 처럼 한 자락 또 한 자락의 풍경이 된다(9쪽)”라고 했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도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담양 북편 산기슭까지 시원을 찾아갔습니다. 가는 길에는 반가운 사람들을 불러내 동행하면서 자연을 같이 즐기는 여유로운 여행이었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영산강의 시원이 담양 용추봉 아래 가마골에 있는 용소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읽다보니 용소에 상류로부터 흘러드는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용소가 시원이 아니라 그 폭포물이 시작되는 곳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야 맞을 것 같습니다. 용소로부터 영산강이 흘러드는 바다까지 따라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산강으로 합쳐지는 지류들도 뒤쫓고 있어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영산강 유역에 흩어져 있는 동리에서 배출한 걸출한 인사들은 물론이고 영산강 주변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모아두었기 때문에 흥미진진한 읽을거리가 되었습니다. 남원에 살면서 구경 다녔던 소쇄원이나, 송강정 등등 익숙한 이름들이 나오면 더 반갑고 잊어버리거나 그때는 미처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는 재미도 있습니다. 저자는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지천까지 살피기 위하여 2만 5천분의 1지도에서 영산강 줄기가 마치 겨울철의 나목이 된 거대한 노거수의 모양새와 같다는 것을 발견해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전라남도의 서남 서북권인 무안, 함평, 영암, 나주, 장성, 화순, 광주, 담양을 적시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사도 인용하고, 이곳 출신 문인들의 시 혹은 문학작품들을 인용하여 그 의미를 짚어보고 있어 그야말로 영상강 의 인문학적 지리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으로 잘 알고 있는 송강 정철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취조하면서 무려 1천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호남을 역모의 땅으로 인식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학적 성품은 그의 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재 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는단 말 어제 듣고 /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 아헤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일러라(49쪽)”

 

저자는 영산강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오랫동안 꿈꾸어왔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는 자료조사와 현지답사를 통하여 확인작업을 해왔던 것인데, 그 범위에는 외래 민족의 침탈, 이 땅 관리들의 착취, 수탈, 그로 인한 토착 서민들의 저항의 역사, 노령산맥 이남의 굽이굽이에서 태어난 고귀한 인물들의 삶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장엄한 교향곡,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가 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강 앞에 서면 작가라는 사람도, 그 강위를 흘러갔거나 지금 흐르고 있는 역사도 하나하나의 풍경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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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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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님이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에서 읽어보기를 권한 책입니다. 저자 오주석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고, 간송미술관 연구 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조선시대의 그림, 특히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21세기의 미술사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생전에 그는 우리 옛그림의 맛을 제대로 느끼는 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책 역시 그와 같은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이미 읽은 <오주석의 한국미 특강; http://blog.joins.com/yang412/13488647>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와 중복되는 것이 많은 것은 제목처럼 공무원연수원에서 가졌던 특별강연에서 발표한 내용을 편집하여 책으로 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은 책으로 엮기 위하여 따로 쓴 원고이기 때문에 읽는 문장에서도 구어체와 문어체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인용문 역시 구체적이고 보다 풍부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 강좌에서는 ‘옛 그림 감상의 두 원칙’, ‘옛 그림에 담긴 선인들의 마음’, ‘옛 그림으로 살펴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자료를 인용해서 주제를 설명해나가는 방식입니다만, 이 책에서는 작품을 중심으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씨름> 그리고 <무동>은 특강을 통해서 들은 내용과 중복된다는 느낌이 들지만, 다른 작품들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배울 수 있어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특히 서양화와 우리의 산수화의 중요한 차이점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서양의 풍경화는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풍경 밖의 한 곳에서 전체를 조감하는 원근법을 적용하고 있어, 풍경을 보고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산수화는 풍경 자체를 주인공으로 하고, 주인공을 치켜보고, 내려다보고, 비껴보고, 휘둘러 봄으로써 산수의 다양한 실제 모습을 담아내려고 한 것(79~81쪽)이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단순히 옛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과 관련된 고사뿐 아니라 화가를 둘러싼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이끌어 오고 있어 책을 읽는 느낌이 전혀 단조롭지 않은 것도 특기할만합니다.

 

작가가 살아계셨더라면 꼭 알려드리고 싶은 내용도 있습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인용한 그의 편지내용입니다. “대개 서울에 있을 적부터 이 일을 포기한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남쪽으로 돌아온 후로는 더더욱 적막하게 지내면서 눈의 시력 또한 흐리고 뿌예졌습니다.(101쪽)” 작가의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눈 둘레에서 안경에 눌린 자국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윤두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긴 노안으로 안경을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흐리고 뿌옇게 변했다고 한다면 렌즈에 혼탁이 생기는 노인성 백내장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렌즈를 교체하는 수술을 받아 밝은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을 터이지만 당시의 의술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시의 <동자견려도>를 설명하면서 저자가 인용한 왕희지의 ‘문득 쓰고 싶어 쓴 글씨(偶然欲書)’라는 고사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왕희지가 삼월 삼짓날 벗들과 난정(蘭亭)에 모여 늦은 봄풍광을 즐기며 무심하게 글씨를 썼는데 자연의 신비로운 기운이 스며들어 스스로 보아도 천하의 걸작이 탄생하게 되었더랍니다. 나중에 이처럼 써보려고 정좌를 하고 여러 차례 시도를 해보았지만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우연욕서(偶然欲書)라는 고사는 “예술이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펼쳐질 때만 최상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대표적인 옛 그림작품을 설명하는 사이에, ‘옛 그림의 색채’, ‘옛 그림의 원근법’, ‘옛 그림의 여백’, ‘옛 그림 읽기’, ‘옛 그림 보는 법’, ‘옛 그림에 깃든 마음’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옛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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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창업가 바이블 - 전 세계 창업가들의 27가지 감동 스토리
다니엘 아이젠버그 & 캐런 딜론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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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벤처기업 돌풍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주변에서도 벤처기업을 일구느라 젊음을 바친 친구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벤처기업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벤처기업이 성공할 확률은 2%에 불과하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도 미국의 벤처캐피털이 벤처기업에 투자한 4건 중 3건이 실패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안철수 의원은 카이스트교수시절, “벤처창업의 성공확률을 높이려면 좋은 사람들로 팀을 만들고,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경쟁하고, 점진적인 플랜을 세워서 실행하라”라고 조언하였다고 합니다.

 

창업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하는 불운을 맛본 분들이라면 실패한 창업과정을 복기하여 재기를 꿈꾸기도 하겠습니다만, 실패를 겪지 않고 성공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창업가정신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는 다니엘 아이젠버그교수의 <하버드 창업가 바이블>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업에 필요한 것은 오직 창업가 자신의 고된 노력, 야망, 지략, 파격적인 사고방식, 영업 능력, 리더십 등인데, 정작 창업에 성공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서가를 채우고도 넘치는 창업 매뉴얼이 아니라 창업가의 통찰의 깊이, 즉 기존의 가치를 깨고, 비틀고, 도약하는 창업가정신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창업은 누구나 열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창업 자체보다 ‘가치창조’와 ‘가치획득’의 관점에서 창업가정신에 대한 개념을 분명하게 하는데 두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눈에 띄지 않고 무시당하고, 하찮게 여겨지거나 폄하된 곳에서 기회를 발견하여 비범한 가치를 창조하고 획득한, 바로 그런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24쪽). 저자는 이 책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1부는 창업가가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 만큼 수준 높은 전문성을 지닌 ‘혁신적인 젊은이’라고 간주하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2부에서는 대중의 기대를 거스르는 것이 창업가정신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내재되어 있는 이유를 살펴본다. 3부는 창업가가 직면하는 다양한 종류의 역경을 알라보고, 어떤 역경이 창업가정신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또 어떤 역경이 그와 반대로 되는지 보여줄 것이다. 4부와 결론에서는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발판으로 창업가정신의 의미가 비범한 가치를 인식하고, 창조하며, 획득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27쪽)”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눈길을 끈 아이템은 캡슐 내시경을 개발한 가비 머론의 이야기입니다. 캡슐내시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금년 9월 1일부터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게 되어 130만원이나 들던 비용이 11만원으로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내시경으로 관찰할 수 없는 소장을 관찰하는데 유용한 점이 있습니다. 길이가 7미터나 되는 소장은 대장보다 가늘고 대장의 안쪽으로 여러 차례 접혀져 있기 때문에 내시경으로 소장 전체를 보는 것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창업가정신이란 비범한 기회를 인식하고, 창조하고, 획득하는 세 가지 요소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창업가정신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창업가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조금은 이론적인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많은 사례에서 이와 같은 요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공부문의 리더들은 예외적이고 불연속적 특성이 있다는 창업가정신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절한 정책의 방향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창업 전에 다른 사람 밑에서 10년 이상 현업의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으며, ‘엄청난 금전적 리스크를 기꺼이 견딜 수 있습니까?’를 비롯한 열 가지 체크리스트를 통하여 자가진단해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저자 역시 성공한 창업가가 설립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가 투자금을 몽땅 날리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업과 투자는 또 다른 과정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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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
조정우 지음 / 청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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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맞붙던 조선 숙종 시절, 내명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권력싸움의 이면사인 만큼 희빈 장씨의 삶은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곤 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다양하다 보니 누구를 주인공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를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나갈 수 있어, 볼 때 마다 흥미를 돋우곤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작품으로는 드라마 <동이>에서는 궁인에서 19대 숙종의 후궁에 오르고 그의 아들 연잉군을 21대 영조로 등극하게 만든 숙빈 최씨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그동안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의 갈등을 주요테마로 했던 전작들과는 다른 맛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순신 불멸의 신화; http://blog.joins.com/yang412/13475791>에서 이순신 장군이 23차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략에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전개로 주목을 끌었던 조정우 작가의 <장옥정>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미모를 바탕으로 자신의 야심채우기에만 급급하던 요부의 이미지가 강했던 장옥정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요부의 이미지가 강조되던 장옥정과는 다른 인간 장옥정의 모습을 그려냈다고 할까요? 그리고 요즘 막바지에 이른 드라마 <유혹>에서 여자라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아진그룹의 사장처럼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그리고 영빈 김씨와 숙빈 최씨 등 적지 않은 여인네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줏대없는 숙종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희빈 장씨의 삶은 천인출신 궁인에서 숙의 희빈을 거쳐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숙종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경종을 출산하기에 이르렀지만, 남자를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 과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사약을 받고 스러지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요약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옥정은 역관으로 날리던 아버지 장경이 죽고 사촌형 장현에 의탁하고 있었던 것인데 장현이 역모에 휘말리고, 역시 역모에 휘말려 노비로 몰락했던 어머니 윤씨의 신분 때문에 천인으로 굴러 떨어진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역경에 굽히지 않는 사람은 새로운 경지로 나가는 법입니다. 양반의 첩실로 가느니 중인의 정실이 되고자 했던 옥정은 신분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천인이 된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하여 궁인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토록 천대받고 사느니 차라리 궁인이 되자! 내 반드시 임금의 총애를 얻어 마음의 한을 풀고 가문의 누명을 벗기고야 말리라!(47쪽)” 그야말로 목적의식이 뚜렷한 신여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옥정은 궁에 들어가자마자 중전 인경왕후의 죽음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숙종의 승은을 입기에 이르지만, 백부의 역모사건의 배후인 대비의 농간으로 궁에서 퇴출되고 맙니다. 서인과 남인의 힘겨루기가 진행되면서 옥정의 환궁이 불투명하지만 남자 숙종의 마음은 여전히 옥정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대비가 고른 민유중의 여식 인현왕후가 나이도 옥정보다 어리고 현숙하고 더 아름다워 숙종의 마음이 기울고 있음에도 옥정을 잊지 못하는 것은 작가가 따로 드러내지 못한 무언가 비술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숙종이 부탁하는 거문고연주만으로는 숙종의 마음을 훔쳐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재주를 작가는 “(옥정이) 사내의 마음을 홀리는 재주가 탁월하다.”라고 표현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생략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옥정의 재치는 탁월한 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궁에서 쫓겨나 숭선군의 집에 의탁하고 있을 때 찾아온 숙종의 편지를 읽다가 왕이 지금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대목입니다. “옥정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서찰에 떨어졌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던 옥정은 문득 서찰의 글씨가 눈물에 많이 번진 것이 쓴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46쪽)” 이런 장면은 옥정의 재치가 뛰어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표현한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의욕이 너무 앞선 것 아닌가 싶은 대목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과정입니다. 사약을 마시고 숨이 끊어져가는 옥정을 껴안고 울부짖는 장면이나 옥정의 사후 십수년이 지난 다음에 인장리에 있다는 옥정의 무덤을 찾아 옥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는 장면이야말로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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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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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번역된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통해서만 만나본 강유원님을 저서로는 처음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3쪽)”라고 쓴 첫 만남에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분이구나 싶습니다. 언제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책의 기준을 어디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설마 절대 다수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을까요?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평생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만 마주하고 있어 행복하기 때문인 것 맞나요? 그리고 책에 있는 글자가 죽어있는 것 맞나요? 그리고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 것 맞나요? 책을 펼치자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어디에 있나요?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을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는 단정은 분명한 것일까요? 책을 읽는 이들은 책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얻으면 그만일진대 굳이 타인까지 책읽기에 끌어들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책으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의 음모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

 

저자는 <책과 세계>라는 주제를 통하여 책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기에 나선 모양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가 책에 앞섰다는 전제는 분명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주장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의 삶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자를 만들고, 문자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식의 분열로 해석하기 보다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자와 문자로 구성되는 컨텍스트를 창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컨텍스트가 모여 텍스트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합니다만, 저자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5쪽)”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그 책들을 읽기 전에 그 책들이 어떻게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한참을 에둘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 장을 세계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하여 <길가메시 서사시>, <모세 5경>, <사자의 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자기록이 남아 있는 수메르문명의 점토판에서 발견된 것으로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 알려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문자로 남겨져있는 것만이 인류 최초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 5경>은 히브리민족의 서사시라고 보는 저자의 견해에 공감합니다. 이집트 파피루스에 기록된 19왕조시대의 <사자의 서>는 그들이 불멸과 영원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는 것인데, 그들의 문명이 무너지면서 그들이 남긴 책은 ‘죽은 책’이 되었다고 단정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수메르문명, 히브리문명, 이집트문명 등 고대문명이 남긴 텍스트에서 시작하여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텍스트의 의미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필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극단의 시대’라고 하는 20세기에 등장하는 현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국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책읽기가 출발점이 되어야 할 터인데, 현실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론을 세우기 위한 책읽기가 필요할 것인가에 의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冒頭)에서 책읽기를 부정적으로 정의한 이유가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반쯤 차있는 컵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한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정이 있겠습니다만, 저라면 긍정적 사고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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