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기회에 집중하는가 - 결단의 승부사, 손정의가 인생에 도전하는 법
미키 타케노부 지음, 김윤수 옮김 / 다산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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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는 위기(危機)를 “어떤 일이 그 진행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악화된 상황, 또는 파국을 맞을 만큼 위험한 고비”라고 설명합니다만, 혹자는 위기(危機)를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병존하는 것이라고 풀기도 합니다. 즉, 위험한 만큼 그 고비를 넘기면 기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야구경기에서 위험한 상황을 잘 넘기면 바로 기회가 생기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현재 일본 최고의 재벌인 손정의회장은 재일 한국인 3세로, 그의 할아버지는 도일하여 광산노동자로 일하였고, 아버지는 생선장사와 양돈업 등을 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일본 맥도날드의 CEO 후지타 덴의 조언으로 유학하여 UC 버클리에서 경제와 컴퓨터과학을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대학시절 마이크로칩을 이용한 자동번역기를 개발하였고, 유니손월드라는 사업체를 설립하기도 했지만, 일본으로 귀국하여 스프트웨어 유통업체인 소프트뱅크를 설립하였다. 1996년 야후재팬을 설립하였고, 2001년에는 브로드밴드 사업에 진출, 2004년 일본텔레콤과 프로야구단 다이에호크스 인수, 2006년 보다폰 일본법인을 인수히여 휴대전화사업에 진출, 2008년 애플의 아이폰3G 일본에서 발매하는 등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 일본 재계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기회에 집중하는가>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회장이 위험을 성공으로 바꾸는 28가지의 비결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손정의회장이 직접 쓴 책은 아니고, 26살 때 소프트뱅크에 입사하여 손회장의 수행비서로 활동하면서 직원들을 대신하여 사업 계획을 직접 손회장에게 브리핑하는 등의 업무를 맡다가 프로젝트 메니저로 활동기에 이르렀고, 종국에는 독립하여 일본의 사회발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재팬 플래그십 프로젝트 주식회사의 CEO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단의 승부사, 손정의가 인생에 도전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는 만큼 손회장이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노하우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숱한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품고 있는 의문은 하나같이 이렇게 하면 성공한다면서도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언급하는 경우를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리스크를 취하지 않는 삶은 오히려 아주 위험한 일이다.(24쪽)’라고 진단한 것이 꼭 옳은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직업마다 나름대로의 특수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혹은 직업에 따라서는 굴곡없는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 경우도 있지 싶습니다.

 

‘20대에 이름을 떨치고, 30대에 최소 1,000억엔의 운영 자금을 모으고, 40대에 승부를 걸고, 50대에 사업을 완성하고, 60대에 다음 세대에 사업을 물려준다(26쪽)’라는 손정의의 인생 50년 계획은 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이 될 수도 없으려니와 그와 같이 되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손회장의 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너는 천재다’라는 이야기를 해주며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새겨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서 인정받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자란 손회장이 매사에 두려움없이 도전하기 위한 요령은 ‘즉시 도전을 결정하고, 할 일을 구체적으로 나눠서 준비한다.(41쪽)’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손정의의 사업 플랜의 대강은 외국, 특히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검증된 브랜드를 발빠르게 일본에 수입하는 전략을 구사한 결과로 성공을 일구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기업운영 사례는 국내에서도 몇몇 재벌기업들로 해오던 방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목표를 정한 뒤, 역할을 분담하고 책임을 지는’ 회장의 리더십은 독특한 면이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점은 손정의식으로 손정의를 뛰어넘을 수는 없겠지만, 배울 점은 분명 찾을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집약해서 현실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빠르게 피드백을 수용해서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제공한다.(189쪽)”입니다. 물론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요령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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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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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를 몰랐고, 아시아는 우리를 몰랐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한겨레21>이 구심점 역할을 하여 아시아 20개여 나라의 언론인들과 민주화운동가를 하나로 묶어 ‘아시아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서구 중심의 외신에 의존하지 않고, 아시아를 온전히 아시아인의 눈으로 보자는 것이 아시아네트워크를 통한 언론실험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주제로 구성된 글들은 모두 다섯 묶음으로 나누고 있는데, 먼저 ‘해묵은 거짓말’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인도 독립투쟁의 원동력이었던 간디에게는 노동자들이나 계급평등을 염원하는 이들에게는 히틀러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수카르노에 이어 인도네시아를 이끌었던 수하르토 역시 1965년 10월 1일 공산당이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일으켰다는 쿠데타인 G30S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상당부분이 날조되어 수하르토의 집권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권투사라는 이미지를 앞세웠던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토지개혁이나 인권회복부문에서는 개선이 지지부진하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특정인, 특히 정치인의 경우 정적이 내세우는 논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반대의 주장 역시 같은 무게로 검토하고 비교해서 논리적이지 못한 쪽을 버리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단은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참고할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의 배경에 대한 분석자료에서는 얼마 전에 읽은 도올의 책에서도 같은 맥락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 새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폴포트가 집권했던 시기(1975~1979년) 이전에 벌어진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1969~1973년)과 그로 인한 사망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폴 포트가 200만명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미국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폴포트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필자는 1969~1973년 사이 미국의 폭격으로 60~80만이 죽었고, 폴포트 집권 직후에 10만명의 지식인과 시민을 처형하였으며,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집권 기간에 과로, 질병, 기아로 사망한 70~80만을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대캄보디아 구호사업을 차단하여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폴포트의 책임은 줄이고 미국의 책임을 늘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반대측 주장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80년 광주, 1984년 필리핀, 1990년 랑군, 1992년 방콕, 1998년 자카르타 등 연쇄적으로 일어났던 피로 점철된 민주화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이미지를 던지는 듯합니다. 필진들이 공통적으로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6.25동란을 일본, 인도, 태국, 필리핀 등, 당시 관련된 국가의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있는 시도는 독특한 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본의 필자는 이 전쟁으로 일본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살이었던 필자가 이웃에 있던 공장이 파산직전이었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도의 경우는 이 전쟁에서 서방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비동맹정책을 내세워 중재자 노릇을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참전을 강요당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존 할리데이와 브루스 커밍스 등이 내놓은 ‘잊어버린 전쟁’이라는 주장에 따라, ‘필리핀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고자 남한에 군대를 파견한다(86쪽)’는 주류의 입장에 반하여 미국의 용병론을 내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필리핀의 비주류논리를 이끌고 있는 월든 벨로교수는 “한국전쟁은 소련이 자유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북한군을 38선 공격대로 활용했다는 미국식 논리를 지닌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 사회 내부가 충돌한 가슴 아픈 내전이었을 뿐이다. 북한과 남한은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몇 년 동안 피로 얼룩진 전투를 해왔고, 그 분쟁은 미국과 소련 의도에 따라 국경분쟁 이상의 것으로 강요되었다.(88쪽)”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6.25동란의 경과와는 전혀 다른 시각이라고 보이는데,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인도나 태국처럼 남아있는 당시의 자료도 변변치 못한 형편이라고 하는데, 이런 과감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 말입니다.

 

그밖에도 아시아에 강하게 불고 있는 민족주의, 성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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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과학사 -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인문학 1
정인경 지음, 강응천 기획 / 다산에듀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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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다녀온 스페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같이 일하는 분들과 나누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꽃보다 할배>보다는 조금은 심각해 보이는 이유를 들어서 스페인을 구경하러 갔노라고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판구조론에 따른 지진발생현황자료에서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판이 충돌하는 지중해주변에서 화산활동이 많고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자연스럽게 지중해를 둘러싸고 전개되어온 유럽의 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로 연결하였습니다. 유럽과 이슬람의 만남은 아무래도 도항(渡航)이 쉬운 보스포루스해협과 지브롤터해협을 통하여 주로 이루어져왔을 것입니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이 주로 전쟁이라는 파괴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지만 평화가 유지될 때는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발칸반도에서는 최근까지도 인종과 종교의 차이 때문에 충돌을 빚었습니다만, 또 다른 접점 이베리아반도에서는 1492년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왕국을 축출한 뒤로 아직까지는 대규모 충돌이 일어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이슬람문명과 기독교문명이 서로에게 미친 영향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성품이 자연을 닮아 너그럽고 포용력이 컸던 까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스페인으로 가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대륙의 동쪽 끝에 사는 우리는 서쪽 끝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배운 지식에 머물고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최근까지 우리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친 사고체계 때문에 다양한 문명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중립적으로 판단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인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여행칼럼으로 풀어내면서[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 http://www.medicaltimes.com], 중세 무렵 이베리아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들을 찾아 읽으면서 생각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 저로서는 참 다행입니다.

 

마침 다산에듀에서 ‘동양과 서양의 장벽을 넘어 인문학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통합 교양서’라는 타이틀로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책 <보스포루스 과학사>를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제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아직 가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보스포루스해협은 좁은 곳이 200미터에 불과해서 한걸음에 건널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 이오에게 반한 제우스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을 헤라가 눈치를 채자 이오를 암소로 만들었는데, 헤라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이오가 이곳을 건너 도망쳤다고 해서 ‘소가 건넌 해협’이라는 의미를 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스포루스 인문학 시리즈를 기획한 강응천 문사철대표는 ‘우리는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는 넘나들 수 없는 장벽이 있다는 생각에 빠져 살아왔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유럽중심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불과하며 동과 서의 역사와 문화는 분명 오랜 옛날부터 수시로 교류하며 서로를 살찌워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만 유럽중심의 사고에 대한 반발로 아시아를 턱없이 높여 보려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동서양의 병진(竝進)과 교류를 과학, 미술, 문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살펴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철학에서 태동하여 발전해 나온 과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객관적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얻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을 세우는 학문으로 정의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은 절대불변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관찰과 실험의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지면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변화해온 과정을 뒤쫓는 학문이 과학사입니다. 즉, ‘과학사(科學史)는 자연세계에서 인류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정의되는 것입니다.

 

<보스포루스 과학사>의 저자 정인경박사는 ‘과학은 인간이 만든 언어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지구에 출현했을 때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었는데, 그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과학을 창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럽문명이 그리스 철학에서 과학을 발전시켜온 것처럼 역사적으로 각 문명권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과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근대들어 독보적인 발전을 이룩한 서양과학에 압도되어 개별 문명에서 발전시켜온 과학의 역사조차 도태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앎이 삶을 바꾼 수많은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단히 자연에 부딪히면서 이해하고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용된 과학이 세계에 대한 지식이고, 기술은 실용적 목적으로 개발한 도구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근대 이후 물밀듯 쏟아져 들어오는 기술문명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찼던 우리는 과학을 앎으로서 받아들일 기회가 없었다고 비판합니다. 과학과 우리의 삶을 연결하여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얄팍한 우리의 과학사적 인식은 서양과학의 성취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이 문제였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흐름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꿰뚫고, 인간 스스로 세계를 앎으로서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었다는 통찰을 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스포루스 과학사>는 각각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발흥’,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세의 과학과 기술’, ‘과학혁명, 유럽의 지식과 야망’, ‘인간을 닮은 현대 과학기술’이라는 제목으로 된,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발흥’에서는 고생물학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하여 인류가 어떻게 지구상에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그리고 황허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출현한 4대 문명에 중앙아메리카의 마야문명과 남아메리카의 잉카문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각 문명이 독립적으로 문자를 고안해서 사용하였다는 것을 중요한 이유로 보았습니다. 지역적으로 씨앗이 뿌려진 고대문명이 어디에서는 대약진을 하고 어디에서는 소멸하고 말았는가 하는 점에서는 기술이 학문으로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문명이 그리스문명으로 전해지면서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발전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문명 역시 나름대로의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기술발전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문명의 자연철학이 우주의 근원물질로 물, 불, 흙, 공기와 같은 물질을 제시한 것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물질이 아닌 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다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기술은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4대 발명품이라고 하는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은 모두 고대 중국에서 발명되었는데, 종이제작 기술이 1500년 뒤에 유럽에 전해진 것을 비롯하여 지진계는 1700년이나 앞서고 대부분의 중국의 발명품은 유럽보다 1000년 이상 앞서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럽문명과 아시아문명 사이의 엄청난 격차가 생기게 된 이유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세의 과학기술’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스 학자들에 의하여 도약한 다양한 학문들은 로마로 건너가게 되지만 그리스학문을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로마가 국교로 삼은 기독교의 영향이 있습니다. 즉 과학의 발전은 기독교의 교리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학자들의 연구성과들이 멸실되거나 수도원의 비밀도서관에 숨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문명이 이룩한 빛나는 성과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에 인접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이슬람문명이 그리스문명을 계승하여 보전한 것은 물론, 인도와 중국에서 발전해온 성과들을 받아들여 진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이슬람문명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근대에 들어 이룩한 과학혁명을 통하여 주도권을 쥐게 된 서양의 과학사학자들이 ‘과학기술의 주도권은 늘 유럽이 가지고 있었다’라는 유럽중심적 시각으로 세계과학사를 써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유럽이 고대 그리스학문을 계승하여 근대과학을 출현시킬 수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일부 유럽의 역사학계에서 유럽의 중세를 암흑기가 아니라 고대의 문명으로부터 근대의 발전을 준비하기 위한 휴식기였다는 해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윤용수교수는 역사의 발전과정에는 잉태기와 성장기, 발전기와 쇠퇴기를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당한 측면도 있겠으나, 인류문명의 발달은 어느 한 순간도 중단된 적이 없고, 유럽이 인류문명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인류문명의 주역은 아랍인이었으니, 이들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유럽문명이 암흑의 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지중해지역원 지음, 지중해 문명의 다중성 27쪽, 이담출판사, 2010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70031)

7세기 이후 아라비아반도에서 출현한 이슬람문명은 동쪽으로는 인도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서쪽으로는 북부아프리카를 넘어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하여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학문의 꽃을 피웠고,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편입시킨 다양한 문명들을 녹여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켜온 업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문명은 때마침 전해진 종이제작기술을 바탕으로 유용한 지식을 모아 번역하고 출판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특히 그리스문헌의 가치를 알아본 칼리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를 대부분 아랍어로 번역하여 각 지역의 도서관에 소장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후기 우마이야왕조의 수도였던 코르도바에는 도서관이 70여 곳에 이르렀고, 수십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곳도 여러 곳이었다고 합니다.

 

인류의 과학문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이슬람문명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짚은 저자는 중국과 조선에서 일어났던 과학의 발전과정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세종조에 이룩한 천문, 과학, 의학, 언어 분야에서의 발전을 괄목할만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과가 이어지지 못한 것은 세종의 통치행위의 하나로 주도한 과학기술이 궤도에 올라 사회가 안정되면서 그 동력이 사라진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랜 기간 암흑에 갇혀있는 유럽의 문명이 르네상스를 맞아 활기를 띄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전해진 종이, 화약, 나침반 등의 기술은 로마가 무너진 다음 할거하던 지방영주들 간의 전쟁을 통하여 빠르게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과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리스에서 시작한 자연의 탐구는 자연을 명상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결국 과학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음에도 동아시아에서는 반향이 크지 않았던 것은 유럽의 학문이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선별적으로 전달되면서 유럽 학문을 낮추어 보는 경향이 생겼던 것도 원인이 되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우주론과 자연인식체계에서는 무엇이 우주의 중심인가는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던 것도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제국주의에 봉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기술이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행복에 기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답을 구하려면 과학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과학사 공부를 통하여, 과학과 기술에 대한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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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일상과 축제 지중해 국가정보 시리즈 2
지중해지역원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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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오사카에서 열린 학회에 갔을 때 마침 지역축제가 열리고 있어서 구경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부러 축제에 참가하기 위한 경우가 아니면 외국을 여행하면서 축제를 볼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10월 12일 ‘스페인의 날’ 축제가 있었는데, 여행일정이 맞지 않아 마드리드와 살라망카에서 열리는 이 축제를 구경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여행사에서 일정을 맞추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도 조금 담아보았습니다.

 

‘스페인의 날’ 축제 건도 있었고, 세비야를 여행하는 동안 조형진가이드가 세비야지역의 축제 이야기를 소개한 적도 있어 스페인의 축제에 관한 것을 알라보기 위하여 고른 <지중해의 일상과 축제>입니다.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축제를 망라하다보니, 유럽쪽으로는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터키 그리고 이스라엘의 축제와 이슬람 공통의 축제를 따로 소개하였습니다. 각 지역의 축제는 해당 지역에서 머물면서 박사과정을 밟으신 분들께서 나누어 정리하신 것이라서 축제를 직접 체험하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중해 지역의 축제들 가운데는 해외특파원 보고, 혹은 요즈음 유행인 세계여행 안내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이미 본 적이 있는 것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900m 정도의 거리를 투우소에게 쫓겨 달리는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 발렌시아 인근 부뇰에서 백만개에 달하는 토마토를 서로 던지는 토마토축제 등이 있습니다. 세비야에서 가이드가 소개한 것처럼 부활절이 끝난 일주일 후부터 일주일 동안 열리는 세비야축제는 스페인의 4대축제 중 하나인데, 사순절 기간 동안의 기독교적 제한에서 풀려나 일상으로 돌아오며, 새봄을 맞는 것을 축하하는 의미가 곁들여져 있다고 합니다. 축제 기간 중에 플라멩코를 입은 여성들은 세비야나를 추면서 축제를 즐긴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축제 가운데 종교축제일은 주현절에 관한 내용 가운데 아기예수가 탄생하였을 때 찾아

왔다는 세 명의 동방박사 가운데 발타쟈르(Baltazar)라는 이름이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스페인에서 우리와 내내 함께 했던 포르투갈 출신 버스기사가 바로 발타사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5일째 말라가지역에 있는 론다를 구경하고 스페인 가이드이 귀곡산장이라고 부르는 라 시에라호텔에서 묵은 다음날 버스에 타면서 발타사르에세 아침인사를 하려고 스마트폰에 저장해놓은 포르투갈 인사말을 찾으려다가 폰을 숙소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발타사르 아저씨는 저에게는 동방박사였던 것입니다.

 

프랑스 축제를 정리한 장니나박사는 프랑스의 축제를 색깔로 표현하였는데, 다음 구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지중해라는 바다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축제 양상은 남프랑스의 자연을 닮은 흙, 돌, 파스텔톤 건축물과 함께 푸른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이러한 축제의 모습 속에 내재해 있는 빛은 우리에게 과거 선조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배우며 현대를 살아가는 분주함에 여유로운 느림의 미학을 선물해주는 고마운 휴식이라고 생각된다.(68쪽)” 온통 떠들썩하고 분주한 우리네 지역축제와는 비교되는 점이 있는 것 같아 더욱 인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아 무슬림의 축제에 관한 내용 가운데 수니파와 시아파가 나뉘게 되는 배경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 무함마드 사후에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에 이어 칼리프에 오르게 된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가 되며 따라서 알 리가 적법한 무함마드의 계승자라고 보고, 그를 1대 이맘으로 섬기게 되는 이슬람들이 시아파로 분류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수니파는 이슬람 부족들의 대표들 가운데 선출되는 칼리프가 무함마드의 정치적, 종교적 위치를 승계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이 책을 기획한 분들은 “각 지역 및 민족의 일상과 축제는 삶이 주는 기쁨과 고단함을 함께 노정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와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보고 지중해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일상과 축제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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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문명의 다중성 - 교류와 갈등의 어울림 지중해지역원 인문총서
윤용수 외 지음 / 이담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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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과 공유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물론 12박13일의 여정을 단 1시간으로 압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강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가급적이면 많은 자료를 읽어보려 노력해왔습니다. 부산외대의 지중해지역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 성과를 일반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리하여 발표하고 있는 책들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윤용수교수님을 비롯한 7분의 교수님들께서 나누어 쓰신 <지중해 문명의 다중성>에서는 지중해를 둘러싸고 있는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 삼개 대륙에서 피고 진 문명이 서로 부딪치고 스며들면서 만들어낸 결과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앎이 많이 부족한 고대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갈등에서부터 가톨릭과 이슬람의 충돌, 그리고 레바논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갈등까지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시작한 이슬람이 어떤 경로로 스페인까지 흘러들었을까, 그리고 시대별로 등장하는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하여도 궁금했습니다. 윤용수교수님은 이슬람문명의 시작단계에서부터 갈등과 분화과정을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정리하였습니다. 무함마드 사후에 칼리프시대를 거쳐 우마이야왕조, 압바시야왕조로 이행하면서 우마이야왕조에서 살아남은 왕족이 멀리 스페인까지 달아나 후우마이야왕조를 세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단시간에 동으로는 인도에서 서로는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대한 영토를 차지한 이슬람왕국은 전체 영토를 다스릴 수 있는 행정체제를 갖추지 못하였고, 지역별로 중앙왕국과 연계된 지역왕국을 용인하는 체제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다보니 지역의 왕국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흥하고 망하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슬람이 차지한 광대한 영토 안에서는 다양한 문명이 명멸하면서 남겨둔 지적 유산이 풍부하게 존재하였는데, 유목을 기반으로 하는 아랍민족의 특성상 이들 문명을 탄압하기보다는 품어 안아 새로운 문명으로 발전시키는 쪽으로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859년에 모로코의 페즈에 세계 최초의 대학 카이라완대학을 설립하였고, 970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 알 아즈하르 대학을 세웠던 것으로 알 수 있고, 곳곳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책자들을 수집하여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서 학문에 대한 이슬람의 갈증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변한 문명 혹은 문화랄 것이 없었던 중세 유럽에서는 관심을 두지 안았던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을 새로운 해석한 결과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이슬람 문명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대에 지중해에서 충돌했던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결이 로마가 아닌 카르타고의 승리로 끝났더라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하는 점을 모색하고 있는 최자영교수님의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패권 다툼에서 로마가 아니라 카르타고가 승리했더라면, 로마 대신 카르타고의 패권이 지중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카르타고가 가지고 있었던 소규모 도시국가, 시민이 갖는 자유의 원리가 여전히 획일적인 군국주의, 의무, 법, 질서를 대신하여 지중해 세계에 존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76쪽)” 존재하지 않은 가상의 역사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할까요?

 

임주인교수님의 ‘스페인 문학에 나타난 이단성’도 관심이 가는 글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이슬람, 유대교 그리고 가톨릭이 부딪히거나 공존하면서 살아온 역사가 있습니다. 이슬람이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게 된 것은 앞서 윤용수교수님께서 정리를 해주셨지만,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한 경로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대교와 이슬람은 그 뿌리가 아브라함에 닿고 있어 공통의 조상을 두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서로 개종을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이슬람과 가톨릭 그리고 유대교가 함께 어우려져 살아가던 시기의 문화를 무데하리스모 문화라고 부르는데, 이 문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차이 속에서 공존과 화해의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민족간, 심지어는 같은 민족끼리도 지역적 차이로 인하여 갈등이 첨예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해결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는 무엇이 이곳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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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4-12-19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4 서재의 달인이 되신 걸 축하드려요. ^^

처음처럼 2014-12-19 23: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꼼쥐님....
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네요...
요즘 한해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