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름살 수술 대신 터키로 여행간다
수잔 스왈츠 지음, 이혜경 옮김 / 나무생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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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였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경우입니다. 터키여행에 대한 조언을 담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고른 책이었는데, 터키에 관한 이야기는 한 줄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아하게 늙어가기’라는 또 다른 관심주제에 관한 내용이어서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터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딱 한 줄입니다. “담당의사가 (성형) 수술하기 전에 심전도검사를 받으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검사결과가 부정맥과 심장판막에 이상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나왔어요. (…) 심전도 검사결과로는 성형수술을 하게 되면 죽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는 거였으니까요. (…) 주름수술할 돈으로 터키와 그리스로 여행을 다녀왔어요.(96-97쪽)” 저자는 주름수술할 돈이 있어서 터키여행을 했지만, 저는 주름살을 수술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터키여행을 다녀올 돈을 따로 마련해야만 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입니다.

 

저자는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빌어먹을. 벌써 쉰이네.’하는 생각이 들 때 집어 들고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특히 폐경기에 접어든 장년의 여성들에게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나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면 현재의 자신뿐 아니라 다음 단계의 자신까지 속이는 것이다.(8쪽)“라고 조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성들 역시 나이 먹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이 드는 것에 대하여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서문이 아니더라도 저자는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하여 무수히 많은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그 결과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나이듦을 정의하고, 청춘과 중년은 단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이겨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인터뷰한 사람들의 의견을 너무 많이 인용하다보니 저자의 견해가 무엇인지 모호해지는 것 같습니다. 머리염색에 관한 내용을 잠시 보면, 30대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던 여성은 일찍부터 염색을 해서 흰머리를 가렸는데, 50이 되면서 흰머리를 그대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20대부터 새치가 많았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염색을 하면 젊어 보일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는 있지만 생긴대로 살겠다는 생각 때문에 염색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은 없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미국여성들이지만 요즈음의 추이를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열정의 불을 지피자’라는 주제에서 보면 중장년 여성들이 성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특히 폐경기에 접어들면 임신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는 한편 성욕도 그런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반면에 남성들의 상대적으로 성기능이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괴리가 생길 수도 있어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로의 진심을 터놓고 의논을 하면 의외로 좋은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역시 <인생학교 섹스>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성문제는 의외로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데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요즈음의 화두는 성형수술을 받거나 보톡스를 찾는 등 들어가는 나이를 거슬러 보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런 대세와는 달리 나이듦을 인정하고 나이듦에 따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인생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수많은 중장년 여성들을 만나서 얻은 결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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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인문학 - 제자백가 12인의 지략으로 맞서다
신동준 지음 / 이담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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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진우 교수의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http://blog.joins.com/yang412/13720719>을 소개하면서 동양의 <손자병법>과 서양의 <전쟁론>을 비교한 신동준박사의 견해를 인용한 바 있습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재해석하면서 이진우교수가 내세운 화두는 ‘21세기는 총칼이 난무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방식의 전쟁이 벌어지면 새로운 전술로 승리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인데, 역시 지금까지 나온 전쟁에 관한 이론들 가운데서 탁월한 것들로부터 배울 점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동준박사의 <난세의 인문학> 역시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신동준박사는 21세기를 G2 즉 미국과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경제전의 시대로, 난세에 해당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난세에 살아남는 방식은 아무래도 치세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세에 살아남을 수 있는 해답을 난세 중의 난세라고 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삼천년 가까운 세월의 차이가 있고, 당시의 사회상과 현대의 사회상이 크게 다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때의 이론이 지금에도 유효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다양한 이론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수도를 호경에서 낙양으로 옮겨 동주라고 부르게 되면서 주나라의 황실이 쇠약해지고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들이 발호하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제후국들이 각축을 벌이던 550년의 세월을 춘추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제후국들은 일시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가도 순식간에 몰락하는 등 부침이 심했고, 약소국을 병탄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렇듯 불확실성이 컸던 시기인 만큼 제후들은 나라를 잘 다스려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이 평안할 수 있는 방법을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수많은 재사들이 등장하여 난세를 다스릴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의 이론을 내세우거나 다른 이들의 주장을 비판한 일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합니다.

 

춘추시대 말기에 등장한 공자를 제자백가의 효시로 합니다. 공자는 은나라와 주나라의 민족신앙에 뿌리를 둔 예(禮)를 발전시켜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 유가의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그런데 공자의 예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측면이 있었던지 제후들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하였습니다. 제후국들이 난립하면서 상호견제와 대립이 치열해진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치세의 방식에 대한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이런 요구를 만족시킬 다양한 생각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백가쟁명하던 제자백가들을 여러 유파로 분류하였는데, 그 가운데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법가(法家), 잡가(雜家) 그리고 농가(農家) 등의 9개 유파(流派)가 대표적인 학자집단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신동준박사는 550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야말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난세 중의 난세였기 때문에 기모기책(奇謀奇策)이 무수히 쏟아졌고, 이런 방략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실제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제자백가들의 백가쟁명 가운데에서도 작금의 난세에 적용이 가능한 이론을 선별하고 재해석하여, 특히 우리나라가 21세기 동북아의 허브국가로 도약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제자백가들 가운데 유파의 안배 없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열두 명의 사상을 골랐습니다.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공자(孔子)의 신사론(紳士論), 순자(荀子)의 명실론(名實論), 한비자(韓非子)의 정략론(政略論), 귀곡자(鬼谷子)의 협상론(協商論), 손자(孫子)의 화전론(和戰論), 상자(商子)의 변법론(變法論), 관자(管子)의 부민론(富民論), 묵자(墨子)의 복지론(福祉論), 맹자(孟子)의 도덕론(道德論), 노자(老子)의 문화론(文化論), 열자(列子)의 허무론(虛無論), 그리고 장자(莊子)의 자유론(自由論)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담은 열두 명의 이론들은 배열한 순서는 어디에 근거하는지 분명하지 않아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자백가의 효시인 공자를 제일 먼저 내세운 것은 그렇다고 쳐도, 사상사적으로 볼 때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을 하나로 녹인 최고의 정점에 서 있다고 평가한 <도덕경>을 쓴 노자는 공자보다 1세대 정도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맨 앞도 아니고 맨 뒤도 아닌 중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열두 명의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30쪽 내외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먼저 출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족적을 문헌에 근거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손자병법>을 썼다는 손무가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잘라 말합니다. 손무가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손자병법>은 후대인들이 전해오는 병법이론들을 손무의 이름을 빌어 요약한 것이라는 설과 손무 자체가 가공인물이라는 주장들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손자병법>은 조조의 <손자약해>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입니다. 조조는 82편이나 되는 <손자병법>들을 수집하여 요약하면서 정밀한 주석을 붙인 <손자약해>를 썼다고 합니다. 손무가 가공인물일 것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저자는 <손자병법>이 최고의 병법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심지어는 서양에서 최고의 병서로 치고 있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난삽하고 전쟁 자체를 즐기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는 전략가가 아니고, <전쟁론> 역시 내용 자체는 과거의 전사를 전투상황별로 기록한 전사 사료에 가깝다고 평가합니다.

 

저자는 사상가들의 대표적인 저서의 핵심 내용을 요약할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의 계보를 짚고 있습니다. 또한 그 핵심적 내용을 근, 현대의 사건들과 연관시켜 재해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 일고 있는 인문학 열풍을 단순히 치부의 기술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계하면서 공자의 인(仁)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공자가 생각한 ‘인(仁)’은 머리나 책 속에 있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의 다양한 인간관계에 내재해있는 실천적 개념으로, 인간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선행되어야만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문명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과학기술 문명을 이루기는 했지만 인간과 국가사회의 상호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논하면서 동서고금의 다양한 학문적 성과들을 연결하여 설명의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공자가 세운 유학의 전통을 맹자가 계승한 것으로 이해해왔습니다만, 저자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은 순자이며, 맹자는 겉으로만 공자사상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을 뿐 내막을 보면 묵자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공자에 이어 순자를 논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곳곳에서 조선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에 매몰되어 그 틀을 뛰어넘지 못한 우를 범했다고 비판합니다. 성리학(性理學)은 12세기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학파로서 학문의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입니다. 학문을 하는 이유가 국리민복하고 부국강병에 기여하는데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선비들은 그저 자신을 위하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잃는 결과를 자초했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하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학의 해석이 잘 못된 것이라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제가백가를 살펴 오늘날에 대처하기 위한 요체를 찾아보라는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읽히는 부분은 관자의 부민론(富民論)입니다. 경제학이 핵심요체입니다.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전에서 클린턴 후보가 현직대통령인 아버지 부시를 꺽고 대통령에 당선된 원동력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한 마디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대 경제는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아시아 사회에서는 경제활동은 그리 귀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환공을 도와 최초의 패업(霸業)을 이룬 관자는 일찍이 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관자』「팔관」편에 “나라를 다스리는 데 사치하면 국고를 낭비하게 되어 인민들이 가난하게 된다. 인민들이 가난해지면 간사한 꾀를 내어 나라를 어지럽히게 된다.(202쪽)”라고 적었습니다. 관자는 부국강병을 염원하는 제환공을 달래 부민을 관철시킨 연후에 부국강병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필선부민(必先富民)을 관철했다는 점에서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저자는 관자의 경제학에 담긴 금융정책이나 재정정책이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이론이나 케인즈의 재정이론에 다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나아가 최근 주목받고 있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부등식 이론’ 역시 관자경제학의 21세기판 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이 스스로 증식해 얻는 소득이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을 웃돌기에 소득 격차가 더 벌어진다고 진단한 피케티는 극소수의 최고 소득자에게 지금보다 더 높은 세율로 과세하는 방안과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부과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박탈감에 빠진 민중들을 열광케 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적극 개입하여 부상대고의 폭리를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관자의 경제학의 요체와 흡사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피케티의 해법을 적용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본 노무현 정부의 포플리즘 정책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호황 속에서 한국만 저성장을 거듭한 것도 뼈아픈 일인데, 국민들이 둘로 쪼개져 대립하는 양상을 야기한 것은 실로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는 단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글로벌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 시대, 새로운 시각으로서의 난세를 살아가는 해법을 춘추전국시대에서 구하는 한편, 저자는 동서고금을 통한 다양한 이론과 역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제자백가들의 이론이 현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가에서 경제의 기본틀로 삼고 있는 자본주의는 크게 3번의 변환기를 거쳤다고 보는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아나톨 칼레츠키의 견해는 관자의 경제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석합니다. 첫 번째 변환기는 애덤 스미스가 내세운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로 자본주의 1.0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있어 정부의 역할은 세금을 징수하고 관세장벽을 세우는 정도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러시아혁명과 대공황의 위기가 찾아온 1930년대 무렵으로 경제가 정치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인식에서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여 경제를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케인즈를 대표로 하는 경제학자들의 이론이 주류를 이루던 자본주의 2.0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대처와 레이건이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강세를 이루던 시기로 밀턴 프리드먼이 역설한 통화주의가 주류 경제이데올로기였던 자본주의 3.0의 시기입니다. 이때는 정치가 경제의 한 분야로 다루어졌습니다. 정부는 언제나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시장이 부패한 정치인들을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되었습니다. 자본주의 3.0은 반정부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노정되면서 지속적으로 힘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칼레츠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 4.0은 유능한 정부가 있어야만 효율적인 시장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 2.0과의 차이점은 정부의 역할은 커지되 작은 정부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관자경제학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저자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문학, 역사, 정치, 외교, 군사, 법률, 경제, 사회, 윤리, 인류학, 철학,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와 연계하여 재해석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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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종교와 문화 중남미지역원 학술총서 19
박종욱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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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남미를 돌아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도 해서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듯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중남미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공부하고 있기도 합니다. 중남미지역원에서 학술총서의 일환으로 내놓은 박종욱교수의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문화> 역시 그런 목적으로 읽었습니다. 종교부문은 제가 제일 어렵게 생각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만, 중남미국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탓에 가톨릭을 주로 믿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제국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선주민들이 믿던 신과 종교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문화>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던 분야인 이 지역의 종교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이 책이 ‘라틴아메리카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선은 그들의 종교문화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라는 믿음으로 기획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종교문화적 인식태도와 유형을 이해할 수 있다면, 보다 본질적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핵심적 소통경로를 찾알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한국사람을 이해하려면 단군신화와 그 속에 녹아있는 천지인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요약한 것처럼, 이 책은 크게 네 갈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을 통해 이문화(異文化) 혹은 타문화(他文化)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두 번째는 라틴아메리카의 고유의 종교문화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니까 토착신앙을 다룬 셈입니다. 세 번째는 유럽제국의 침략에 따른 가톨릭의 복음화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톨릭이 식민지배의 사회문화적으로 미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현대의 일상문화에서 드러나는 라틴아메리카 사람듥의 종교행위와 의례들을 기술합니다.

 

라틴아메리카지역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신앙을 역사적으로 구분해보면, 우선 고대문명에 해당하는 마야와 아즈텍 그리고 잉카문명을 관통해온 토속신앙이 있을 것입니다.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가 있을 것이고, 그 신화가 종교로 분화되어 정치와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제국의 침략에 따른 식민지배 시기에 복음을 전달한다는 목적으로 들여온 가톨릭과, 침략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과 침략자를 따라 들어온 전염병의 만연으로 줄어든 인력을 대체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부터 끌어온 흑인 노예들이 들여온 아프리카 토속신앙인 요루바 신앙이 상호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가톨릭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토착신앙을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없애야 할 나쁜 전통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전통제의에서 희생자를 바치는 인신공양의례는 가톨릭의 시각에서 보면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5세 미만의 초경을 치르지 않은 소녀를 희생양으로 하는 인신공양을 통하여 사회가 간절하게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집단의례는 나름대로의 윤리와 이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즉, 집단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협의로서 구성원들 사이에 양해가 이루어진 긍정적 역할이 있었을 것입니다.

 

남미의 선주민들이 믿은 창조신화는 대체적으로 그들의 주업이던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들의 이름이나 신들이 인간과 동화되는 과정이 우리네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어 개념을 정리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이해는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쿠바에서 볼 수 있는 아프로-아메리카의 혼합된 형태의 종교문화인 산테리아, 멕시코에서 보는 죽은자들의 날과 조상숭배의례 등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에서 볼 수 있는 변형된 종교의례들이 생소하지만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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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찾는 엄마만이 꿈꾸는 아이를 키운다
김미영 지음 / 알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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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뭐하지만 제 나이쯤 되면 자기계발서 읽기보다는 자기계발서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직은 빠른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꿈을 찾는 엄마만이 꿈꾸는 아이를 키운다>는 현직 경찰인 저자가 직장과 가정 모두를 지키면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를 꿈꿀 수 있었다는 성공담을 통하여 같은 고민을 하는 여성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문제를 들여다본다는 것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읽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과연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최치원선생께서는 양 손에 붓을 들고 처음과 끝에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가운데서 마무리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같습니다. 우리말로 다중작업이라고 하는 멀티태스킹도 이 수준에 이르면 경이에 가깝다 하겠습니다만, 최치원선생과 같은 초능력자가 아닌 범인(凡人)이 다중작업을 수행하는 경우 어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중작업의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누구나 다중작업을 할 수 있다고 격려(?)해서 범인들을 헷갈리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범인들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욕심을 내지 않는 현명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중작업의 초능력자라는 분들을 보면 결국은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초능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주변에 계신 분들 역시 초능력을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동기가 강한 분에게 양보하는 바람에 자신이 초능력자가 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초능력을 발휘하는 아내를 적극 지원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부군께서는 참 좋은 남편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다스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분 역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내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닐까요?

 

저자 역시 다중작업에 한계가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가진 여성들의 고민을 이렇게 정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모두 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 둘째,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한두 가지를 선택하라. 셋째, 선택한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137-138쪽)’ 이런 입장을 보면 전체의 맥락에서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보면 나름대로의 독특한 무엇을 하나 정도는 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놓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다중작업의 달인들이 쓴 자기계발서의 핵심을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붙여두고 있는데, 특히 자기계발서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책읽기의 성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자의 독서성향을 내비친 대목이 나옵니다. “도서관에 들어가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 소설책들이 꽂혀있는 코너로 접어들면, 고서만이 가진 독특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그 향기가 좋아 늘 그곳을 지나쳤다. 내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든 건 자기계발서와 에세이가 가득한 코너였다.(199쪽)” 편식적 책읽기를 하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저는 오래된 책의 묵은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고전읽기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전은 자기계발서보다는 정신적 자양분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아서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같은 고민을 하는 직장여성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찰이라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여경들의 고단한 삶의 현장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저자의 기획의도대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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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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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면서 지니가 ‘뿅’하고 나타나고, 양탄자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런 세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판타지물이 인기몰이를 하는 것을 보면 환상세계를 동경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저승사자와 내기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 <에프라시압 이야기; >를 쓴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의 첫 소설 <안개 낀 대륙의 아틀라스>를 읽었습니다. 17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모험소설이라고 해서 관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뷘야민이라는 젊은이인데, 주인공이 비교적 늦게 등장하기 때문에 엉뚱한 인물이 주인공인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1681년의 어느 날 콘스탄티노플 뵌야민의 외종조부 아랍 이흐산의 전함이 할리치만으로 들어오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포탄과 총탄에 망신창이가 되어 힘겹게 항해해온 전함은 조선소 부두에 접근하려는 찰나 용골이 바다 밑바닥에 닿아 좌초하고 맙니다. 마치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를 암시하듯 말입니다. 오스만 투르크는 슐레이만1세(1520-1566년)가 통치하던 시기가 황금기였다.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헝가리를 빼앗고, 트리폴리를 병합했으며, 남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렀고, 동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슐레이만1세에 이어 술탄에 오른 무라드3세 통치시기에도 카프카스를 점령하고, 이란으로부터 아제르바이잔을 빼앗는 등 영토를 넓혔지만, 오스만 투르크는 쇠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는 유럽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민족국가들이 오스만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외종조부 아랍 이흐산이 귀국한 뒤에 뷘야민은 아버지 우준 이흐산 에펜디가 건네주는 세계지도를 들고 모험을 떠납니다. 우준 이흐산 에펜디는 꿈을 통하여 세계를 발견하려고 했는데, 이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들은 세상에 직접 부딪혀보라고 권한 것입니다. 뷘야민이 죽어서 매장됐다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땅굴 부대장 와르다페트를 따라나선 뷘야민은 소피아 공격에 참가합니다. 공격은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진행되었지만, 핵심 작전은 땅굴을 파서 성안으로 잠입한 다음 붙잡혀 있는 첩자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엮여 복잡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주제는 오스만 제국을 움직인 핵심세력은 세상으로부터 수집하는 정보를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는 정보담당부서가 결국은 술탄의 위세보다도 더 커지더라는 점과, 당시 이스탄불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 같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술탄에게 정보의 중요성을 일깨운 자가 프랑스의 첩자였다는 것입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14세가 통치하던 유럽의 강자였습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는 이미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정보팀이 허술할 리가 없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뷘야민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 소피아에서 구하려했던 첩자로부터 건네받은 동전은 자신은 물론 아버지까지 화가 미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나선 뷘야민이 결국은 정보기관의 수장 에브레헤를 만나게 되고, 정보기관에서 일하게 되지만, 곁가지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고 줄기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듯 하여 핵심이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합니다. 지나치게 환상적 요소를 뒤쫓다 보니 정작 파악해야 할 핵심요소를 놓친 책읽기가 되고 말았던 것 같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작가는 우준 이흐산 에펜디가 뷘야민에게 남긴 편지내용을 공개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와 장자의 호접몽을 서로 엮어 존재의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만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어서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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