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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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저자의 책을 읽기는 <문학속의 철학>이 처음입니다. 사실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다보니 문학 책을 읽으면서 철학적으로 고민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문학속의 철학>은 같은 주제로 진행한 강의를 묶은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 친숙하면서도 마주 보는 관계인 문학과 철학이 저자의 오랜 관심사였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주보는 관계라는 저자의 설명이 맞나싶습니다.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 작품으로 시(詩),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아우르는 것이 문학(文學)이고 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인 철학(哲學)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문학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함께 문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사유에 자극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공감할만합니다.

저자는 일곱 개의 문학작품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정리했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는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를,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는 ‘악이란 무엇인가’를,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는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인가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에서는 ’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논하였습니다.

물론 하나의 책을 각각의 철학적 주제의 중심에 놓기는 했습니다만, 해당 책을 쓴 저자의 다른 작품은 물론 비슷한 상황이 등장하는 다른 문학작품은 물론, 영화를 비롯한 미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용을 통하여 논조에 탄력을 더합니다. 이미 읽어본 네 작품의 경우는 대체로 이야기의 틀이 쉽게 이해되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의 경우는 아무래도 생각을 더해가면서 읽어야 했습니다.

처음 다룬 <안티고네>는 저도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화두입니다. 이 작품에서 저자가 인용한 철학적 주제는 ‘동등한 권리를 지난 두 원리’, 즉 ‘가족의 법’과 ‘국가의 법’ 내지는 ‘사적인 윤리’와 ‘공적인 법’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어쩌면 저자는 이미 안티고네의 편에 서기로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크레온의 ‘국가의 법’은 크레온 자신도 철회한 것처럼 동의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크레온이 내세운 ‘국가의 법’이 타당할 수도 있다는 입장에 더 가까운 편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처럼  저자는 ‘국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은 필요하지만 모든 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소크라테스조차도 ‘악법도 법’이라면서 사약을 기꺼이 마시지 않았습니까?

<안티고네>에서는 크레온왕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분위기인 것도 사실입니다. 딱히 그래서 제가 크레온왕의 입장을 더 헤아려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품 속에서는 크레온이 갑이고, 안티고네가 을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크레온이 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것은 신이 정해놓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이디푸스 왕>이나 <안티고네>에서 지탄은 비극의 씨를 뿌린 신에게 돌아가야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의 비극은 라이오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라이오스가 왕자 시절 왕위계승문제로 피사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피사의 왕 펠롭스의 아들 크뤼시포스를 살해하였기 때문에 헤라로부터 저주받게 된 것이라 합니다. 오이디푸스가 태어났을 때, 라이오스의 처남인 크레온이 아폴론신전에 신탁을 받으러 갔던 것도 짚어볼 일이 아닐까요?

저자가 ‘문학속의 철학’라는 주제를 두고 천착한 것은 문학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철학적 주제들, 즉 철학 자체가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문학작품에 들어온 철학이 어떻게 변형되는가 혹은 문학이 철학을 어떻게 자기화하는가 하는 문제라고 했습니다. 책은 읽는 이 마다의 생각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문학 속의 철학>을 통해서 철학적 시각으로 문학작품을 읽는 방식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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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미중전쟁 1~2 세트 - 전2권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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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상 돌아가는 게 꼭 막혀있는 느낌입니다. 만연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할까요? 그 불안감에는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만, 결정적인 것은 북한발 위기가 결정적입니다. 북한이 이어가고 있는 미사일 발사실험과 핵실험은 벼랑 끝 전술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북한의 미사일이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위협이 된다고 본 미국이 북한에 선제타격을 가해 핵위협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될 터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미국의 선제타격을 반대한다는 우리 정부의 목소리는 오히려 공허하기까지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계가 1950년 6월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없지 않습니다. 북한이 쳐들어오면 바로 격퇴할 준비가 되어 있다던 우리 국군은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낙동강 전선으로 밀려버렸던 불행한 전쟁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불안을 지울 수 있는 속 시원하고 정확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김진명 작가의 <미중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면서 팩션의 힘을 실감한 바 있습니다. 그때처럼 2권으로 된 <미중전쟁>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이미 언론을 통하여 알고 있는 사실과 저자가 창조해낸 이야기가 잘 섞여들면서 실제상황으로 전개되는 듯한 착각까지 들고, 현 상황이 그가 내린 결론으로 발전해갔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작가의 말’에 ‘나는 정말 두려운 건 북핵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보복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우리가 분명한 시각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저 눈치만 본다는 사실이다.’라고 적은 김진명 작가의 고백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영흥도에서 일어난 낚시배 침몰사고에서 희생된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대통령님께서 사고 직후 곧바로 상황통제에 나섰다는 것을 언론에서 보는 것보다는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풀기 위하여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태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북한과 미국에 대한 입장표명에서 단호함이 읽히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요?

작가 역시 그런 점이 안타까웠던 모양입니다.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가 ‘말로는 북한 핵은 절대 안된다면서도 실제로는 시간만 보내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드사태를 둘러싸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나 공무원들이 보인 행태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1부에 등장하는 백악관 상황실에서 검토하는 가상전쟁의 상황은 너무 긴박하게 돌아가 마치 실제상황 같은 느낌을 주는데, 1부의 말미에 작전개시 몇 초전에 실행을 중단하는 실제상황 같은 훈련을 벌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죽음의 백조라는 별명의 B-1B편대가 F-22 랩터와 함께 한반도 상공으로 전개했다는 소식을 차용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성배기사단이 한반도에서 시작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중국의 기세를 잠재우려는 속셈을 드러내고, 그들의 작전을 역으로 이용해서 상황을 종료시키는 묘수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민족은 중국의 대군을 격퇴한 대단한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반대로 왜적과 청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는 분열되어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인 안타까운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작금의 상황은 당장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니나 그에 버금가는 위기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만, 안타까운 역사는 잊어버리고 빛나는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야 할 때입니다.

 

- 이 리뷰는 쌤앤파커스의 <미중전쟁>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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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 8 (반양장) - 아놀드 토인비, 완결 59클래식Book
아놀드 조셉 토인비 지음, D.C.서머벨 엮음, 김규태.조종상 옮김 / 더스타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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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편인 <역사의 연구8>에서는 새로운 주제인 ‘문명의 시간적 접촉’, ‘역사의 법칙과 자유’ 그리고 ‘서구문명의 전망’을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문명의 시간적 접촉’을 르네상스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통상 르네상스라 함은 중세말기 헬라스문명의 정신을 되살린 현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서구 중세의 르네상스가 사멸한 문명이 살아 있는 문명에 영향을 끼친 유일한 예가 아니므로 저자는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역사의 흐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이해되기를 희망합니다.

저자는 성장한 문명이 오래 전에 사멸한 부모문명의 ‘망령’과 만나는 르네상스는 흔하면서도 비정상적인 현상이며 대체로 유해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단정합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국 <햄릿>에 등장하는 부왕의 망령이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공멸을 가져온 것처럼, 저자는 정치적 사상과 제도, 철학, 언어와 문학, 시각예술, 종교적 이상과 제도 영역에서 다양한 르네상스의 사례를 들어 그 부정적 효과를 설명합니다. 이런 접근방식은 때로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 자신이 세워놓은 가정에 부합되는 현상에 무게를 두고 부합되지 않은 현상은 인용하지 않거나 비중을 낮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어느 정도는 접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사의 법칙과 자유’라는 주제에 관하여 저자는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는 법칙을 자연의 법칙과 신의 법칙으로 구분합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형이상학적 법칙을 ‘신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과, 획일적이고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비인격적인 법칙으로 보는 ‘자연의 법칙’으로 구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개념의 차이가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어 놀랄만큼의 성공을 이루었는데, 그 결과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스스로를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신의 법칙’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해석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을 신에게 의지하는 신의 법칙을 적용해왔다면 이제는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이를 활용하여 발전을 이루었다면 거꾸로 ‘신의 법칙’을 탈피하여 ‘자연의 법칙’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논의가 이 지점에 이르면서부터는 연구에서 다루고 있는 문명이 스무 개 남짓하기 때문에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내는 것이 어렵다는 면피용 선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인 법칙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아예 논의를 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의의 시작에서 전제로 두었던 도전과 응전을 적용한 일반적인 법칙을 다시 반복합니다. ‘성장은 하나늬 도전이 하나의 성공적인 응전을 불러일으키고 그 응전이 또 새로운 도전을 불러일크틸 때 일어난다(91쪽)’

마지막 주제는 ‘서구문명의 전망’입니다. 서구적 시각을 탈피한다던 초심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집니다. 저자의 말대로 “서구문명은 ‘사회’라는 종 전체 중 하나의 표본일 뿐인데, 그 서구문명의 장래를 전망하면서 종 전체의 역사의 진상을 올바로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156쪽)”하는 걱정이 앞섰다는 고백도 충분히 납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읽다보면 인도의 무굴제국을 영국이 지배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팔이 안으로 굽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짚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문명만이 유일하게 해체의 조짐을 보이지 않을 뿐 현존하는 7개의 문명가운데 분명 쇠퇴의 기미를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긴 <역사의 연구>가 세상이 나온 순서를 보면, 1934년에 제1~3권이, 1939년에 제4~6권이 간행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후속연구가 미루어졌다가, 1954년에 제7~10권을 간행했고, 1960~1961년에 제11~12권을 간행되어 마무리가 외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완간 이후로도 56년의 세월이 흘러, 세계 역사의 흐름 자체도 달라졌기 때문에 <역사의 연구>를 읽는 이의 시각에도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점입니다. 옮긴이들 역시 <역사의 연구>가 완벽할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역사의 연구>를 읽으면서 토인비의 허점을 찾다보면 고전을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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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 7 (반양장) - 아놀드 토인비 59클래식Book
아놀드 조셉 토인비 지음, D.C.서머벨 엮음, 김규태.조종상 옮김 / 더스타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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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7>에서는 전편에서 문명의 기승전결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 ‘세계국가’와 ‘세계교회와 문명의 관계’를 논한데 이어, ‘교회의 생애에 대한 문명의 역할’과 ‘지상 전투에의 도전’을 설명하고, 영웅시대에서 비극의 4가지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문명의 공간적 접촉’을 주제로 하여, ‘연구 영역의 확장’, ‘동시대 문명 간의 만남의 개관’, ‘동시대 문명 간 만남의 과정’과 ‘동시대 문명 간 만남의 결과 등을 논하였습니다.

 

‘교회의 생애와 문명의 역할’에서는 문명의 용어로 교회를 다루지 않고 교회의 용어로 문명을 다루어보는 접근방식을 취합니다. 앞서는 교회를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을 낳는 번데기 역할로 생각했던 것을 이번에는 부모문명은 새 교회 출현을 위한 서곡이며, 지식문명을 이룩한 높은 정신 수준으로부터의 역행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만을 논의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계교회에 관하여 ‘지상전투에의 도전’을 논한 것은 교회가 신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무력까지도 사용해야 하는 세속적인 해결방법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교회야말로 진리의 창고이며, 완전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제시해주는 온전한 진리의 유일한 창고라는 잘못된 생각은 교회를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영웅시대는 문명의 해체기에 들어선 세계국가와 야만국가 사이에 경계가 분명해질 때 나타나는 사회적, 심리적 결과입니다. 대치국면에서 특히 야만국가가 문명국가의 군사기술을 습득할수록 증가하는데, 특히 야만족을 용병으로 기용하는 경우 이들이 결국 문명국가를 전복시키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만족의 성공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잠시의 영웅시대가 끝나면 새로운 문명을 일으킬 힘이 없는 야만족은 스스로 무너지고 암흑시대가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공백기를 거쳐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것이므로 영웅시대는 문명과 문명 사이에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역사연구7>의 마지막 주제인 ‘문명의 공간적 접촉’은 문명을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단계로 구분하였을 때, 특히 해체단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주제였다고 합니다. 역사의 흐름을 볼 때, 특정 지역에서 문명의 공간적 접촉이 확연하며, 특히 인근에 고등종교의 발상지가 존재하고 있음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근대 서구문명과 동시대의 다른 모든 문명들 사이의 만남을 살펴보는 것으로 문명의 공간적 접촉을 개관하였습니다. 1600년을 경계로 하여 이전에 일어난 항해기술의 습득과 이후에 일어난 서구 그리스도교회의 분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분석한 근대 서구문명과 만난 주변 문명들로는, 러시아, 인도, 오스만, 유대사회, 중국과 일본 등 극동문명, 남북 아메리카 문명 등입니다. 여기에는 동방정교와 힌두, 이슬람, 유대교, 불교 및 아메리카의 토착 신앙 등을 곁들여 고찰합니다. 그리고 중세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서구 기독교사회와 시리아의 이슬람세계의 접촉으로,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헬라스 문명이 주변 문명과의 접촉으로 거슬러 갑니다.

특히 동시대 문명간의 만남의 과정과 결과를 도전과 응전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어느 한 쪽의 문명이 군사적 도발을 하면 다른 쪽에서도 대응을 하게 되고, 그러다 균형을 회복하면 다시 반격이 이어져 번갈아가며 보복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군사적 대응만이 유일한 방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러시아는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군사력을 보강한 바 있습니다. 문명 간의 만남에서 공격이 실패로 끝난 경우 문명이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때로는 양측이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공격이 성공한 경우에도 서로의 문화가 자신들의 삶으로 스며드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이 도약의 계기가 될 수도 침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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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 6 (반양장) - 아놀드 토인비 59클래식Book
아놀드 조셉 토인비 지음, D.C.서머벨 엮음, 김규태.조종상 옮김 / 더스타일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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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구6>에서는 ‘문명의 해체’와 관련하여 ‘영혼의 분열’과 ‘해체기 사회와 개인의 관계’을 논한 전편에 이어 ‘해체의 리듬’과 ‘해체의 리듬’에 대하여 논하고 이어서, ‘세계국가’에 대하여 ‘목적과 수단’, ‘불멸의 환영’, ‘누구를 위하여’에 대하여 논한 다음, ‘세계교회와 문명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논하였습니다.

 

저자는 해체의 리듬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쇠퇴에는 쇠퇴에 따른 리듬이 시작되므로 새로운 응전은 도전을 극복하지 못한다’라고 전제하면서도, 도전은 여전히 계속되고, 도전을 극복하려는 노력 또한 계속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노력이 성공하면 다시 성장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해체기 사회는 하나같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계급으로 분열하고, 그 세 계급 모두가 제각기 창조적 사업을 성취하는데, 지배적 소수자들은 철학을 창시하고 세계국가를 세우고, 내부 프롤레타리아는 하나 같이 세계교회에 스스로를 구현되기 위해 고등종교를 발견하며, 외부 프롤레타리아는 하나 같이 전투단체를 결성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논리는 로마제국이 멸망과정에서 찾아낸 요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들을 다른 제국 혹은 문명의 멸망과정에서도 유사한 요소가 있다는 주장이나 과연 그러한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로마제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왕국에서는 이슬람교가, 중국에서는 대승불교가 각각 세속적인 자기목적 달성을 위해 제국건설자들이 만든 주둔 부대와 식민지를 이용했다.(109쪽)고 정리했는데, 로마제국의 경우 제국의 전성기를 지나서 그리스도교가 은밀하게 전파된 것은 맞지만, 이슬람교의 경우는 왕국건설의 이념으로 출발한 차이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중국의 경우 왕조가 이어졌고 실크로드를 따라 전파해들어왔기 때문에 부대와 식민지를 이용했다는 설명이 타당할까 싶습니다.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논지가 산만해지면서 주제 또한 분명치 않아지는 경향이 느껴집니다. 세계국가편에 들어가면 ‘목적과 수단’, ‘불멸의 환영’편은 분량이 짧은 탓인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조차 쉽게 정리되지 않는 듯합니다. ‘누구를 위하여’에서도 ‘세계국가의 전파’와 ‘평화의 심리학’ 역시 비슷한 경향을 이어가는데, ‘제국의 여러 가지 유용성’에서 논하는 교통수단, 주둔부대와 식민지, 지방 제도, 수도, 공용 언어와 공용문자, 법률제도, 역법과 도량형 그리고 화폐, 상비군, 관료제도, 시민권 등 제국의 형성과 유지에 필요한 요소들의 변화가 잘 정리되고 있기는 합니다.

문명의 해체기에서 세계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종교가 국가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하였다면서 이는 잘못된 관점이라고 비판한 저자는 사회적 의무감을 파괴하기보다 오히려 증폭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문명은 오히려 종교를 연결고리로 하여 이전의 세대와 동화될 수 있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리하여 ‘문명의 흥망과 사멸은 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일으킨 바퀴의 혁명에 비교할 수 있다(270쪽)’라고 정리합니다.

그리하여 현대사회에 들어 종교가 쇠퇴하고 있는 것은 현대과학과 종교의 충돌이 야기한 결과라는 진단입니다. 과거 철학의 일부였던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서구기독교의 이념과 충돌을 빚어내고 사람들의 관념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므로 ‘종교는 과학이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지식 영역에서 물러나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진실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이라크의 쿠르드, 영국의 스코틀랜드 등이 독립을 위한 구체적 운동에 들어가는 등, 최근 지구촌에서는 국가가 분화되어가는 경향이 가속화되는 듯합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인간은 본래 극기 작은 사회에 알맞도록 만들어진 존재다.’라는 전제아래 열린사회와 모든 문명에 의하여 예시되는 닫힌 사회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고, 정신적 비약을 하지 않으면 그 간격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한 견해를 인용하여, 저자는 ‘신의 개입 없이 인류의 통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굳이 인류가 통일을 이루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작은 사회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는 없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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