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이유 - 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밥장 글.그림.사진 / 앨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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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라는 부제를 보지 않더라고 뭉게구름을 막 벗어나는 비행기를 배경으로 한 ‘떠나는 이유’라는 제목이 벌써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목차를 보면, 출발과 도착 사이에, 행운, 기념품, 공항+비행, 자연, 사람, 음식, 방송, 나눔, 기록 등 10개의 주제를 늘어놓은 것을 보면 비행기를 타고 떠난 여행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블랙홀을 끌어다가 시작한 머리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헷갈립니다. 블랙홀을 죽음과 연결하고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살아온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는 둥, 살면서 실컷 놀았으니 됐다는 둥,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축제뿐이라는 둥, 그 축제는 길 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라는 마무리가 도대체 연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행의 출발, 아니 책읽기의 출발에는 작가의 역마살을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자주 시청하는 <세계테마기행>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인도네시아의 순다열도라는 오지였던가 봅니다. 아르헨티나에 이어 두 번째 출연하는 것이라 합니다. 사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떤 분이 출연의 행운을 얻는지 궁금했는데, 제작진과 인연이 닿는 분이 출연하는 듯합니다. 사실 작가가 써주는 내용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낼 수 있는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여행경험도 많고, 책도 많이 읽었구나하는 느낌을 얻습니다. 읽는 호흡도 좋은 것을 보면 본업인 그림그리기에 더하여 필력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주제인 ‘행운’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패키지여행이 싫어서 자유여행을 떠난다고 했지만, 결국은 론리플래닛과 같은 여행관련 서적에 매달려야 하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합니다. 결국 여행가이드북이 안내하는 길을 벗어나야만 ‘초행자의 행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의외의 위험한 상황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주제를 두고 여행지의 빛과 색을 이야기하면서 유적을 감상하는 법에 관하여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유적을 즐기는데 꼭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 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잠자코’와 ‘잠시’이다. 가능하다면 두 시간쯤 잠자코 앉아 있는 것이 좋다. 그러면 2천 년, 혹은 3천 년, 4천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이 눈앞에 굴러다는 것이 보인다.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사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공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유적의 이력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유적이란 현대미술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현대미술작품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화가에 대하여 작품의 제작과정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그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인용한 “우리가 가보지 않은 장소들은 꿈이나 백일몽처럼 기능하며, 무의식적 환상들을 펼치고 억압을 제거하기에 더없이 적당한 공간을 제공한다(155쪽)”라는 구절도 그렇습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세계테마여행> 같은 여행프로그램을 보는 것과 직접 현장에 가서 보는 것은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에서 본 것하고 똑 같네’라고 하시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여행에 관하여 기록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공감할 점이 분명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다거나 저자처럼 그림을 그려 남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어떻든 저에게는 여행이란 배움의 기회가 되고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것은 물론 다녀와서 수집한 다양한 정보를 담아 여행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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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바람이 되다 - 집시처럼 떠돈 289일, 8만 3000Km 아메리카 유랑기
김창엽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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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늦바람이 불어 세상구경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25년 전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틈만 나면 가족들을 차에 태우고 대륙을 누비며 구경에 나서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미국을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이야기를 써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주로 자연경관을 보러 다녔던 것 같습니다. 본토의 48개 주 가운데 오른쪽 위아래 귀퉁이 몇 곳을 제외하고는 서른 몇 개의 주에 발자국을 남길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녔는데, 가족들과 함께 하다 보니 볼거리를 찾아 구경하는 것 말고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그런 여행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려 289일 동안 미니밴을 타고 8만3천km나 되는 길을 혼자서 한 여행을 담은 <글 위의 바람이 되다>를 읽고서는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어쩌면 서울과 부산 거리의 세배나 되는 거리를 하루에, 그것도 혼자서 운전해서 달린 기억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300km도 안되는 거리를 달린다면 크게 무리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하나의 차이는 누군가를 만나 공동의 화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젝 케루악의 <길 위에서>보다는 존 스타인벡의 <찰리와 함께 한 여행>에 더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당연히 자연경관에 대한 느낌과 함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이 책의 큰 줄거리입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사진도 볼거리입니다.

가보지 않은 땅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 일단 저질러놓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모험심이 넘치는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표시를 이렇게 나타냈던가 봅니다. LA에서 시작한 여정은 북동쪽으로 나가 미네소타에서 북쪽 끝에 도달한 다음 동쪽으로 나아가 미국 동부해안을 따라 내려왔가가 뉴올리언즈에서 미시시피강을 따라 북상해서 다시 미네소타에 갔다가 내려와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멕시코국경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서해안에 도착해서는 알래스카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워싱턴주에서 끝나는데, 몇몇 도시에서는 만나지만, 제가 지나갔던 길과는 거의 겹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땅덩어리를 누비고 다녔기 때문인지 저도 겪었던 그런 상황을 맞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멕시코국경 인근 마을에서 생각지도 않게 여권제시를 요구받는 상황 같은 것입니다. 국내여행이라서 별 생각 없이 여권을 집에 모셔두고 떠난 여행길 고속도로에서 여권을 보여달라는데 답답한 노릇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것도 마치 뺑소니를 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끝이라서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서 휴일에 누구와 연락을 취할 사람도 없었죠. 결국 사정사정을 해서 양해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도 천행입니다.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하다가 미끄러져 길가 도랑으로 빠진 것도 꼭 같은 상황입니다.

아쉬운 점은 유타주의 국립공원 가운데 브라이스 캐년, 캐년랜드, 자이언캐년 등을 그저 전설 가득한 ‘마법의 땅’이라고 정리해버리기엔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장소라는 것입니다. 여행길에서 만난 흑인들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고 했습니다만, 제 경우는 그들마저도 우리를 차별대우하는 것은 씁쓸한 추억도 적지는 않습니다. 제 경우는 사우스다코타에서 대평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실감했습니다만, 저자는 캔사스가 그랬던 모양입니다. 동화 <오즈의 마법사> 탓이었을까요? 대평원에서 바람을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대평원의 바람이 전하는 말은 거의 예외 없이 원초적이다. 때론 부드럽게 쓰다듬듯 말하고, 때론 광폭하게 절규하듯 얘기를 풀어놓는다. 그러나 그 물음의 요지는 언제나 ‘산다는 게 무엇이냐’ 한가지로 들린다”라고 했습니다. <길 위에서 바람이 되다>라는 제명이 여기에서 나온 모양입니다.

자연에 관하여, 아니면 유적과 역사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다보면 건조할 수밖에 없는데, 역시 사람들과 만난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따듯함이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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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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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는 영문학에서 마르지 않는 창작의 샘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욤 뮈소의 장편소설 <종이여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과 칼라테아 사이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공전(空前)의 인기작품으로 등단한 작가가 후속작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운동에서 치면 ‘2년차 불운’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종이여자>의 주인공은 ‘천사 3부작’으로 인기작가의 반열에 들어선 톰 보이드가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오로르와의 사랑이 깨지면서 갑자기 글쓰기를 더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이 책에서는 ‘작가의 백지 공포증’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당연히 기획담당자로서는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상황이지요. 설상가상으로 그 역할을 해오던 죽마고우인 밀로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두 사람은 파산할 지경입니다. 새 소설을 써야만 문제가 해결될 터인데, 톰은 오로르를 잊지 못해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더는 추락할 곳이 없는 상황에서 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빌리라는 여성이 나타납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셈입니다. 상황은 인쇄 과정의 실수로 소설이 중간까지만 인쇄된 것인데, 중단된 이야기가 완성이 되지 않으면 사라질 존재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종이여자>로 정한 것 같습니다. 빌리는 소설을 완성해달라는 주문을 하고 그 대신 오로르와의 사랑을 되돌려주기로 합니다. 떠난 사랑을 되돌리는 방법도 있나요?

톰으로 하여금 다시 글을 쓸 수 있도록 밀로는 정신상담을 받도록 예약을 했지만, 톰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탈출을 하고 빌리와 함께 오로르가 새 애인과 있다는 멕시코로 향합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출입국관리가 그토록 허술할까 싶습니다만, 어떻든 무사히 멕시코에 입국을 하게 되고, 오르르도 만나게 됩니다. 파산지경인 톰이 들고 온 그림 한 점을 팔아서 경비를 마련한다는 것도 가능할까 싶은 설정입니다.

멕시코에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빌리를 진찰하는 과정이나 프랑스로 데려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 등에서 톰은 빌리가 소설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실제 사람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는 없었을까요? 판타지소설이라면 가능하겠습니다만, 그렇지 않다면.... 기욤 뮈소의 소설의 특징 가운데 영화처럼 깜짝쇼와 같은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처럼 이라고 적고 보니, <종이여자>가 영화화되었다는 소문도 있는 것 같습니다. 2012년작 <루비 스팍스>라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영화의 구성을 보면 백지 공포증에 빠진 2년차 불운에 빠진 작가가 창조한 여성 등장인물과 사라에 빠진다는 설정이 <종이여자>와 흡사한 듯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 책에서는 책읽는 이에 대한 저자의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책은 읽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서 생명을 얻는거야. 머릿속에 이미지들을 그리면서 주인공들이 살아갈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것, 그렇게 책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가 바로 독자들이야” 그래서 저자는 ‘책이 서점에 깔리는 순간부터 나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 독자들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배려도 볼 수 있습니다. 잘못 인쇄된 책들을 모두 수거하여 파쇄했지만, 빌리가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로 남겨놓은 한 권의 소설책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한국여성 박이슬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로마의 스페인광장 23번지에 있는 바빙턴의 티룸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는군요. 로마에서 시간이 되면 저도 바빙턴의 티룸에 한번 가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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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국사 - 아는 역사도 다시 보는 한국사 반전 야사
김재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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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역사는 열심히 읽으면서도 우리나라 역사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언젠가 공부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역사란 과거의 사건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인 것 같습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또한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찌라시 한국사>는 제목이 독특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찌라시는 일본어 散らす(지라스 - 뿌리다)라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뿌리는 것’이라는 의미로 증권가에서 통용되는 정보지를 그렇게 부르는데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신뢰할 수 없는 정보인 경우가 많아서 얕잡아 보는 의미가 섞인 것 같습니다. 속어로 쓰는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전단지 등 같은 의미의 용어로 순화시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찌라시 한국사>가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을 서문에서 절절하게 쏟아놓았습니다. 회사의 느닷없는 좌천에 대한 퇴사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시작한 글쓰기였다고 합니다. 평소 좋아하던 역사 이야기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들려준다는 생각으로 써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카페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오마이뉴스>, <딴지일보>에서 연재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출판제의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책을 내면서 첫째,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보세요, 둘째,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에게 지배받는 것이다, 라는 말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본문은 전쟁과 외교, 권력과 암투, 왕의 사람들, 반전의 야사,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등 다섯 가지 주제에 해당하는 35건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35건의 사건은 유사한 주제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분모가 없어 보입니다. 역사를 적는 방식은 역사적 사실을 연대기순으로 기록하는 편년체,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한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기전체, 사건을 중심으로 역사를 묘사하는 기사본말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찌라시 한국사>는 기사본말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정사와 야사를 넘나들면서 선택한 자료를 자기만의 해석과 표현방식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표현방식은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대로 쉽게 읽히고 이해되는 방식입니다. 즉 딱딱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딱딱하게 서술되어 있는 우리의 역사도 이렇게 쉽게 쓰면 잘 읽힐 것 같습니다. 물론 지나치게 쉬우면 깊이가 없는 안타까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녀노소, 상하좌우, 친문반문까지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맛깔난 ‘진퉁’ 한국사 이야기”라는 출판사의 홍보성 문구대로 좌충우돌하나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미덕’이 느껴집니다. 과거 어느 시절에는 이런 경우를 사쿠라(이 또한 벚꽃을 의미하는 일본어인데, ‘여당과 내통하는 야당의 사이비 정치인이나 사기를 쳐 그릇된 짓으로 남을 속이는 사람을 조롱하여 이르는 말)라고 비아냥거리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의 해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찌라시 한국사>가 정통 역사 논문은 아닐 것이며, 이 책을 읽고 그 당위성을 따지는 것 역시 책 읽는 이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범위가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로, 현대사가 빠져있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는지 책소개에서 등장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광해군의 공통점은?’이라는 질문에 해당하는 답을 책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점이 궁금한 점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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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의 진리다 -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진심
이동용 지음 / 이담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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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사람이 아름답다; https://blog.naver.com/neuro412/221200052374>을 쓴 이동용님의 신작 니체연구서입니다. 저자가 니체에 천착하는 이유는 머리말 처음에 ‘반복의 미학’이라고 저자가 규정한 니체철학의 속성에 빠져든 탓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너의 진리다>에서 저자는 ‘바그너에 대한 니체의 진심’이라는 부제처럼 한때 바그너에게 애정을 바쳤던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하게 된 이유를 따지고 있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를 만났던 것은 23살 때였고 38살이 되던 1882년 바그너가 그리스도교적 모티프를 많이 인용한 <파르지팔>을 발표하고 국수주의적이고 반유대적 성향으로 기울면서 결별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별에 관하여 니체가 발표한 글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있을 뿐, 니체와의 관계에 관하여 바그너가 발표한 글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교유를 맺는 동안 주고받은 편지도 많았음에도 바그너의 편지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프랑스 여류화가이자 시인 마리 로랑생은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던 남자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바그너가 죽은 뒤에까지도 할 말이 많이 남았던 니체는 정말 바그너를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요?

저자 역시 그런 무엇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지만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사랑하지만 인연의 끈을 끊어야 한다. 사랑하지만 멀어져야 한다. 사랑하지만 등을 돌리고 가야 한다. 돌아보면 안 된다. 다시 사랑할까 두려워서다.” 그래서 저자는 니체와 바그너의 관계를 다시 조명해보기로 한 것 같습니다. 비록 알려진 바그너의 심중은 없지만, 니체가 남겨놓은 글의 행간을 읽다보면 니체의 본심이 읽히지 않을까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반시대적 고찰>의 네 번째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의 경우>, <니체 대 바그너> 등 니체의 저술가운데 바그너에 관한 것들을 분석하게 된 것입니다.

제1장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철학적 글쓰기’부터 제8장 ‘사랑해야 할 때’까지 여덟 개의 소제목으로 분석을 펼치고 있지만, 니체가 바그너를 만나 빠져들게 된 이유와 결별과 만남을 반복하게 된 이유, 결국 관계를 정리하게 된 이유에 이르기까지를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니체가 바그너를 경외하게 된 것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달리 신화를 주제로 선택하였고, 신들의 세계에서 흔히 말하는 신의 섭리에 따르지 않는 영웅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천재에게는 신의 섭리란 준재하지 않는다. 단지 일반 대중들과 그들의 곤경을 위해서만 섭리라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자기만족이고, 후에는 자기변명이다(47쪽)” 즉 당시까지 유럽을 지배했던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고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기존의 이성에 반대하여 새로운 이성을 구축하고, 기존의 도덕 너머에 있는 새로운 도덕을 추구한 니체의 생각과 잘 맞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혁명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바그너였지만, 니체의 마음에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것은 바그너가 변화무쌍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천재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일 수도 있습니다. 바그너에 빠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무엇이 콩깍지가 떨어지면서부터는 미심쩍은 부분이 조금씩 커져갔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바그너가 추종자들에 둘러싸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에 빠지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맹신자들에 떠받들어지면서 바그너는 추종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바그너 후기의 독일의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게 된 것도 한 몫을 했다고 합니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보좌로 빌헬름1세는 독일을 통일하여 제국으로 발돋움하고 나폴레옹에게 당한 패배를 되갚아주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바그너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국수주의적이고 반유대적 성향으로 변하였던 것이 니체가 결별을 결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니체는 바그너에 대한 사랑을 접는 과정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나는 너의 진리다’라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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