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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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같이 갔던 동네도서관에서 아내가 고른 책입니다. 아마도 부엌이라는 공간을 지배하는 아내의 입장에서 부엌의 어떤 점을 말하려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키친>은 일본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쓴 꽤 오래된 단편소설집입니다. 작가가 23살 때 쓴  「키친」, 「만월」, 「달빛 그림자」라는 세 개의 단편을 담았습니다. 우리에게 소개된 것도 1999년이니 꽤 오래된 작품입니다

그녀의 책으로는 <막다른 골목의 추억; http://blog.yes24.com/document/6735948>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012년에 소개되었지만, 일본에서는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작가가 28살에 쓴 책이군요. 20대의 풋풋함과 상상력이 돋보이기는 합니다만, 삶에 대하여 농익은 무엇을 느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가볍다고 할까요?

「키친」과 「만월」은 등장인물이 같고, 시점만이 전후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세 번째 이야기는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뭐야?’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만월」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을 더하여 3연작으로 했더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공통적인 충격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키친」은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다소 억지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현실에서의 새로운 만남으로 풀어가고 있는가 하면,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달빛 그림자」는 제목처럼 죽은 사람과의 재회를 통하여 죽음을 기억으로 이전하는 과정을 밟는 것입니다.

「키친」의 주인공 사쿠라이 미카게는 부엌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심지어는 언젠가 죽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구역질이 날 만큼 더럽다고 하더라고 오랜 세월이 지나 손때가 묻은 부엌이라면 최선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남겨준 유산이라고는 집이 전부였던가 봅니다. 결국 집을 처분하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할머니의 장례식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다나베 유이치라는 젊은이인데, 할머니와 유이치 사이의 관계도 모호한데, 그가 미카게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이유도 분명치 않습니다.

한편 「달빛 그림자」의 주인공 사이의 관계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공 사츠키와 남주인공 히라기의 관계는 형의 연인, 연인의 남동생입니다. 히라기를 찾아온 애인을 형이 바래다주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모두 죽고 형의 연인과 동생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왜 형이 동생의 애인을 바래다주어야했는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젊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죽음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존재가 사라진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남은 자들이 살아가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방법일 터인데 굳이 환상이라는 묘한 장치를 도입한 작가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미카게는 전 남친이 있고, 유이치는 그를 따르는 여성과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같이 살게 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유이치의 엄마-사실은 아빠였는데, 엄마가 사고로 죽은 다음에 성전환수술을 받아 여자가 되었다는 것도 작가의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그녀마저도 싫다는데 쫓아다니던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유이치와 미카게에도 새로운 충격을 더하는 잔인함을 보여줍니다. 「만월」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기 위한 설정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지나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든 작가와 저는 나이차가 10년에 불과할 정도이니 세대차를 논할 수준은 아닌 듯싶지만, 생각하는 세계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지 싶습니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하나 둘 터득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는 합니다만, 그런 과정 없이도 어른이 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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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
장석주 지음 / 마음서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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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들고 보니, <조르바의 인생수업>으로 만났던 장석주 시인의 새로운 산문집이었습니다. 글을 써 책을 내는 것도 독특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지렛대삼아 글을 써낸 것이 참 놀랍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권 분량의 글을 써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산문집 <내 몫의 사랑을 탕진하고 지금 당신을 만나>는 호주의 시드니와 뉴질랜드의 오크랜드에서 한 여름-우리나라가 한 여름이었고 그곳은 한 겨울이었답니다-의 몇 날을 보내면서 써낸 글이라 하니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저자는 노트북을 열면 한 꼭지의 글을 술술 써내는 마법 같은 글쓰기를 할 수 있나 봅니다. 다섯 번째 글에서 블루마운틴에 온 지 이틀째 아침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하루에 네 꼭지의 글을 써낸 것 같습니다. 글마다 다양한 책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가 들고 간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을 감안하여 참 대단한 기억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시드니의 블루마운틴과 오크랜드의 바다풍경에서 얻은 느낌을 바탕으로 글을 써내려가면서도 여행기나 여행안내서가 아니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저 ‘지도 없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하며 떠도는 여행자의 사유 모음집’ 혹은 ‘살아 있음의 가장자리에 존재의 존재함에 대한 숙고를 보여줄 뿐(27-28쪽)’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너무 멋있으려고 뽐내는 것 아닌가요? 나아가 이 산문은 ‘당신에 관한 상상과 사유의 책’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월이라는 안감 위에 아로새겨진 무늬와 같이 사랑한 ‘당신’, 혹은 사랑할 뻔 한 ‘당신’들 얘기가 새겨져있다(28쪽)”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한 꼭지의 글이 끝날 때마다 ‘당신, 잘 있어요’라고 마무리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신의 정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신은 서울에 있다가, 혹은 시드니에 있다가 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이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문에 보면, 저자는 헤어진 지 오래된 누군가에게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쓰듯 이 글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부재의 존재로써 저자의 마음에 그리움의 깊이를 만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젊었을 적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를 여러 통 쓰기도 했습니다. 깊은 밤 무엇엔가 홀린 듯 써내려갔지만, 다음 날 아침 읽어보면 도저히 부칠 용기가 나지 않는 그런 편지 말입니다. 그런 편지에는 내밀한 마음의 한쪽이 담겨있기에 누구에게 읽어보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호주나 뉴질랜드는 아직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도 제대로의 느낌이 살아나지 않았던 것이 아쉽습니다. 때로는 읽는 흐름이 고르지 못한 탓도 없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숲속 여러 군데에 까만 캥거루 배설물들이 흩어져 있는데, 아침이나 저녁 무렵이면 서른 마리 안팎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고 해요. 캥거루들의 출현이 썩 잦은 듯해요. 그러니 이토록 많은 곳에 크고 작은 캥거루 배설물이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33쪽)“ 캥거루도 그렇고 배설물에 대한 설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물지 않게 마주치는 생경한 느낌의 외래어도 그렇습니다. 제 경우는 어색하더라도 대부분의 외래어를 우리말로 써내려고 애를 쓰는 편이라고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적폐세력이라는 단어도 적절하게 쓰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지 않은 여행길에 한 권 분량의 생각을 글로 풀어낸 저자의 글쓰기와 사유의 깊이는 분명 놀라운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책읽기에서 나온 내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 제목에 담긴 의미는 책을 모두 읽고 나서도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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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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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고야 하면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를 떠올리는 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기울어가는 스페인 왕조의 카를로스3세, 카를로스4세, 페르난도 7세 시절 궁정화가의 전통을 이은 고전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가이자, 전통적 양식의 회화형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작한 근대적 화가라고도 합니다. 년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에 갔을 때, 물론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도 감상했습니다만, 그의 초기작품과 말기 작품을 두로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 연작은 나폴레옹의 침공에 대하여 무기력한 스페인 교회와 귀족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폴레옹이 그의 형 조세프를 스페인의 왕으로 세우자 그를 위한 그림을 그렸고, 영국의 웰링턴공이 들어와 나폴레옹을 몰아내자, 역시 그를 위하여 그림을 그렸다고도 합니다.

밀로스 포만과 장 클로드 카리에르가 쓴 <고야의 유령>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로렌조신부와 무역업을 하던 빌바투아 가문의 딸 이네스 빌비투아 등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고야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을 엮었습니다. 영화화할 것으로 고려하여 쓴 소설작품이었으니 영화로 친다면, 로렌조의 비중이 크지만 고야와 투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당시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스페인 교회는 종교재판을 강화하게 되는데, 그를 주도한 로렌조가 오히려 이에스 빌바투아와 엮이면서 파멸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고야 역시 <옷 벗은 마하> 등의 작품이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를 아끼는 고위층이 돌보아서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티치아노가 샤를 켕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붓을 떨어뜨리자 황제가 붓을 직접 주워주었다거나 티치아노가 교황의 초청으로 로마를 방문할 때 마차의 행렬이 7킬로미터에 달했다거나, 라파엘로가 산책할 때, 추기경들이 곁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목소리를 죽여 안내했다거나, 다빈치는 프랑수와 1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는 등의 회화의 대가들에 얽힌 이야기도 나옵니다.

빌바투아 가문과 로렌조는 고야를 고리로 악연이 엮이게 되는데, 종교재판에 회부되는 사례들이 모호한 죄목으로 붙들어다가 일상적인 심문이라는 이름의 고문을 가하여 자백을 유도한 것인데, 막 열여덟이 된 어린 여성이 일상적인 심문을 견뎌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렌조가시행한 일상적인 심문을 아네스의 아버지 토마 빌바투아는 로렌조에게 가하는데, 그도 별 수 없이 짜여진 내용을 자백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구명운동이 오히려 로렌조로 하여금 이네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감옥안에서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결과 이네스는 임신을 하고 그녀를 닮은 여자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토마의 구명운동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결국 로렌조는 종교재판소에서 쫓겨나게 되지만, 프랑스로 달아나서 구명을 하고 오히려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스페인 공략을 도와주고 조제프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를 자문하는 역할을 맡아 과거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게 되지만, 이네스에게 저지른 악행이 결국은 그의 발목을 잡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한편 고야는 토마 빌바투어의 부탁으로 이네스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그녀에게서 느끼는 독특한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소개로 상황이 꼬여가는 것이 안타깝고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로렌조에 대한 종교재판 결과 사형이 집행되고 그 곳에는 고야를 비롯하여 이네스, 그녀의 딸 알리시아도 참관하게 되는데, 로렌조가 처형된 다음에 고야의 유령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나옵니다. 이네스가 그의 유령이었다는데, 작품을 구상할 때 가다듬었던 이미지들은 작품이 완성되면 망각으로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네스의 경우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들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이런 존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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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인간 Homo Viator - 정신과의사 문요한이 전하는 여행의 심리학
문요한 지음 / 해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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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시간을 내어 세상 구경에 나선 것이 회갑이 되던 해입니다. 그 전에는 출장이나 회의 등으로 짜인 일정의 틈에 한나절 정도 숨을 돌리는 정도였습니다.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것이지요. <여행하는 인간>의 저자는 그래도 47살이 되던 해에 숨을 돌리는 안식년을 가졌다고 하니, 저보다는 훨씬 깨인 분 같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유럽여행을 같이 한 것을 시작으로 혼자서 히말라야로, 남미로,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경지를 터득하고, 그것들을 독자와 공유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여행을 통하여 깨우친 것들을 ‘새로움, 휴식, 자유, 취향, 치유, 도전, 연결, 행복, 유연성, 각선, 노스탤지어, 전환’이라는 열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천착하였던 결과를 담았습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은 왜 여행을 갈망하고, 여행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지 살펴보고, 이 시대에 ‘여행하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개인적인 여행기라기보다는 여행의 내면을 들춰보는 ‘여행의 심리학’이라 하였습니다.

각 주제마다, 먼저 여행하면서 써두었던 일기를 모두에 가져온 다음, 주제에 따라서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 특히 여행을 통하여 얻은 것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제와 관련된 대표적 사전을 주제별로 한 두컷 담고 있는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만, 이 책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사진은 오히려 번잡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자유’를 주제로 한 글에서 저자는 ‘여행이란 질서로부터의 일탈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일탈이다’라고 정의합니다만, 모든 여행을 그렇게 정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기분은 혼자서 여행할 경우라는 단서가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경우에도, 그 여행이 공적인 임무를 띄고 있는 경우에는 일탈을 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치유로서의 여행의 경우도 일부 공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만, 여행을 통하여 오히려 상심에 매몰되는 경우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주제를 풀어내면서 여행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인요하고 있는데, 저도 읽어본 자료가 있는가 하면 처음 접하는 자료도 있어서 견식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언급은 ‘여행 후 증후군’입니다. “나는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마음의 병을 앓았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와서는 알프스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곳을 다시 걷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무엇에 홀린 듯 히말라야로 떠났다(284쪽)”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두어 주일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둥지로 돌아오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효과는 석 달 정도 유지되고, 다시 찾아갈 곳을 찾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합니다.

물론 다녀온 곳에 대한 미진함이 있어 다시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보고 싶은 새로운 곳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행을 일종의 앎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로 삼고 있고, 특히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에 대한 갈증이 큰 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기묘묘한 자연을 찾아보려는 생각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만, 우선 순위에서 조금 밀리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나오는 글에서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의 한 구절을 변조하여 만들었다는 “좋은 여행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속 풍경을 바꿔놓는 것은 물론 때로는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331쪽)”라는 구절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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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김인순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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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인 오스틴의 소설 <설득; http://blog.yes24.com/document/10128036>을 읽으면서 유럽 귀족들의 삶을 엿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흔히 귀족하면 멋진 성에서 살면서 호사스러운 삶을 살 것으로 짐작을 했던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언론인 폰 쇤부르크가 쓴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은 그들의 삶의 진면목을 조금 더 깊세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데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알려준다고 해서 읽게 된 것이지만, 사실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방법인지를 배우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귀족인 저자는 재산은 별로 없었지만, 독일의 유력한 언론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만큼 부를 쌓아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불어 닥친 불경기에 해고통지를 받고 급박한 상황을 맞게 되면서 살아남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저자의 선조는 도적떼를 막아달라면서 제공하는 금품으로 부를 쌓아 튀링겐의 잘레 강변에 쇤부르크성을 처음 세운 이래로 물덴란트로 세력을 확장하고, 18세기 무렵에는 작센의 남서부 지방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제후자리를 차지한 베티너 집안의 도전에 무너지고 말아 1803년에는 작센왕국에 봉토를 넘겨주어야만 했고, 150년이 지나지 않아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든 성을 빼앗기고 말았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부모세대는 상실을 감내하기 위하여 절약을 하는 방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저자가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난해지는 데 뛰어난 역량을 지니셨다고 말할 수 있다(17쪽)”라고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여전히 부를 누리고 있는 친척들 덕분에 우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무섭다고 부유한 귀족들도 가난한 친척들을 거두는 일이 만만치 않았음인지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차 한 잔 마시겠다고 나타나서 30년 동안 머물러 사는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자 자신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근검절약을 체득한 부모에게 반발했던 저자는 친척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흉내내기를 하다가 부모님께 야단을 맞기도 여러 차례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저자가 해고통지를 받고는 드디어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를 정리한 것이 이 책입니다. “지나친 소비에 대처하는 삶의 지혜를 기를 수 있도록 몇 가지 도움을 주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적은 돈을 다루는 법을 제때에 배우는 사람은 곧 주변의 부러움을 사는 엘리트 계층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저자는 망해도 의연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배울 점을 정리합니다. 다양한 부문에서 절약을 하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먼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을 줄이고 인생을 즐기라고 권합니다. 집, 외식, 자동차, 휴가여행, 등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것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닏. 그리하려면 남의 시선을 무시할 필요도 있는데, 모름지기 귀족이라고 하면 타인의 시선에 민감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므로 대범하게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3부에서는 돈, 즉 부가 행복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음과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설명 가운데 사도 바울이 말한, ‘너희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라!(191쪽)’는 구절과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말한 ‘사치는 부유함이나 화려한 치장이 아니라 천박하지 않음에 있다(213쪽)’라는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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