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인문학 수업 : 뉴노멀 -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표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 퇴근길 인문학 수업
김경미 외 지음, 백상경제연구원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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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꾸는 매일의 작은 발걸음’이라는 소박한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독특함이 돋보이는 기획입니다. 일정한 주제와 관련된 글을 매일 5~9쪽씩 읽을 수 있도록 이어가는 형식은 드물지 않습니다만, 열두 꼭지의 작은 주제들은 큰 주제의 범주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큰 주제를 묶어 시즌제로 연결하고 있는 점도 독특합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 시즌 1은 ‘멈춤’, ‘전환’, ‘전진’ 등을 큰 주제로 삼았고, 시즌2는 ‘관계’, ‘연결’, ‘뉴노멀’ 등 세 개의 주제어로 구성하였습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이 개설될 때의 큰 주제 ‘멈춤’은 우선 신선하였습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에 시즌2를 마무리하는 주제어 ‘뉴노멀’은 지금까지 두 글자였던 큰 주제어를 세 글자로 바뀌었다는 점부터 새롭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말이 아니라는 점 역시 새롭다 할 것이나, ‘좋은 우리말을 골라보았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경우는 가급적이면 외래어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이라는 기획이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고는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시즌’, ‘뉴노멀’이라는 외래어를 쓰면서도 불편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 뉴노멀>은 금년 초 세계를 강타한 우한폐렴의 영향을 고려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이 질환이) 세계를 휩쓸면서 경제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 사람과의 관계와 소통도 비대면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전례 없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라고 한 서문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업무가 주로 사람들을 만나 공동의 관심사에 대하여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라서 우한폐렴 사태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대면회의를 서면심의나 화상회의로 대체하고 있습니다만 사안에 대하여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한폐렴의 사태를 일찍 종식시키고 원래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새로운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우한폐렴이 종식된 뒤에 옛날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우한폐렴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입한 새로운 방식이 그대로 굳어질 것인가는 지금 고민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 뉴노멀>은 ‘기술과 행복’, ‘우리의 삶’, ‘생각의 전환’을 중간 제목으로 정하고 각각 네 꼭지의 세부 주제로 강의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번 기획에 참여한 필진은 저에게는 생소한 느낌이 있습니다. 생소하다는 느낌은 곧 새로운 시각을 가진 분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뉴노멀이라는 큰 주제어에 맞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 할 디지털기술을 바탕으로 한 ‘초연결’이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미래를 고민하는 자체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재에 충실한 것으로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주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백년 미만의 짧은 인생을 굳이 주류에 편승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퇴근길 인문학 수업>에 실린 강의들을 읽으면서 나름 생각거리를 찾아내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 뉴노멀>에서도 많은 생각거리들이 있었지만 한문학자 안나미교수의 첫 강의 ‘중국 명산 탐방으로 시간을 넘다’에서는 제가 하고 있는 글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찾아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누구나 중국에 가보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부여된 업무를 수행하는 이외에도 중국의 문물을 볼 기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명산 탐방으로 시간을 넘다’에서는 1712년 북경에 다녀온 김창업이 남긴 연행일기를 중심으로 그보다 100년 앞선 1616년에 북경 인근의 명산, 각산, 여산, 천산을 처음 오른 이정귀의 <삼산유기>, 김창업보다 100년 뒤인 1833년에 여산에 오른 김경선이 <연원직기> 등 세 편의 여산 기행문을 비교하였습니다.

안나미교수는 100년씩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여산이라는 같은 장소를 방문한 세 조선의 선비들은 어떤 느낌을 얻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결론은 ‘조선의 선비들은 앞 세대가 남긴 기록을 가지고 답사하며 선배와 공감하려고 노력했다’로 정리합니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공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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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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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이야기는 집중해서 읽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시간여행은 드마마나 소설에서 자주 만나는 환상적인 요소인데, 뮈소 역시 즐겨 사용하는 편입니다. 환상의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경우는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의 이야기라면 시간여행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때는 특히 마무리가 잘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시간여행인 듯 시작하였지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맥락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여행은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처럼 등장인물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고, 영화 <백 투더 퓨터>에 등장하는 자동차처럼 특별한 조건을 갖춘 물건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웜홀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시간이동이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케이프코드에 있는 오래된 등대의 지하실에 있는 방에서 시간여행을 시작합니다. 그 방에서 시간여행이 시작될 뿐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불특정의 시간대와 장소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하는 변화가 생긴다는 설정입니다. 주인공이 현시간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 정도, 즉 하루인데,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은 1년을 기준으로 길수도,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루가 지나면 현실에서 1년이 자나는 셈입니다. 그 1년 동안 시간여행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코드곶에 있는 등대의 이름은 ‘24방위 바람의 등대’입니다. 지형적 특성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변화무쌍한데서 붙인 이름 같습니다. 바람의 방향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경우에 저는 동서남북풍이라고 부릅니다만, 뮈소는 바람의 방향을 더 세밀하게 구분한 것 같습니다. ‘24방위 바람의 등대’ 지하에 있는 시간여행이 시작되는 방에 있는 풍향도에는 라틴어 경구가 써있다고 했습니다. “postquam viginti quattuor venti flaverint, nihil jam erit.” ‘24방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리라.’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야기의 초반에 주인공의 조부가 등대에서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는데, 사실은 조부에게 등대의 소유권을 판 사람 역시 사라졌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매사추세츠의 코드 곳에 있는 등대의 지하에 있는 방에서 시간여행을 떠난 주인공, 아서 코스텔로는 처음 뉴욕으로 시간과 공간이동을 하게 됩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성 패트릭 대성당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여행에서 도착한 장소는 줄리아드 학생인 엘리자벳 에임스가 목욕을 하고 있는 욕실이었습니다. 결국 이야기는 엘리자벳 에임스와 시간여행자 아서 코스텔로가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얻은 두 아이가 교통사고로 숨진 비극적 사고로 인하여 생긴 갈등을 풀어가기 위한 과정을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것입니다. 사고 이후 엘리자벳과 아서는 각각 자살을 시도하는 등 불안증세를 보였지만, 결국은 이를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간여행은 스물네 번 반복되는 것으로 설정되었고, 스물네 번의 시간여행이 끝나면 시간여행을 통해서 겪은 모든 일이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24방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리라.’라는 주문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아서의 마지막 시간여행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는 마무리되지 않은 미완성의 이야기로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서가 쓴 시간여행의 이야기의 끝은 시간여행에 묶여있는 운명적인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운명을 거스를 수 없고,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라는 아서의 이야기는 어쩌면 뮈소의 철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뮈소의 다른 소설 <내일: https://blog.naver.com/neuro412/221913977617>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사는 사람과 컴퓨터를 통해서 교신하게 된 주인공이 비극적 사고를 막으려는, 즉 운명을 바꾸어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344쪽

2015년 12월 01일

밝은세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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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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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의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입니다. 책을 고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얄팍한 책 두께도 한 몫을 한 듯하고, 책표지에 담은 사진이 눈을 끈 것 같기도 합니다. 침대, 내복차림의 여성, 창밖을 지켜보는 모습 등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것이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이유는 희곡 <관객모독>을 쓴 작가라는 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가 대학에 다니던 1977년에 연극이 초연되었는데, 파격적이라는 점에서 꽤나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읽는 동안은 물론 감상을 정리하는 지금도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합니다. 이야기는 제목처럼 ‘짧은 편지’와 ‘긴 이별’이라는 작은 제목의 글로 구성되었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어느 시점일 듯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화자가 미국을 방문했는데, 방문 목적은 분명치 않습니다. 옮긴이는 사라진 아내를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만, 화자의 아내 유디트는 화자보다 나흘 먼저 미국에 도착한 것은 맞지만, ‘그녀가 무슨 돈이 있어서 여행을 떠났지?’하는 의문을 품은 것이나, 그런 아내의 흔적을 뒤쫓는데 몰입하는 것 같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작가가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는 것인지 금세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옮긴이는 ‘한 인간의 내적 성장을 기록한 발전소설’로 해석합니다. 서두에 등장하는 유디트의 짧은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11쪽)” 주인공은 유디트가 묵었다는 뉴욕의 호텔로 향하기는 합니다만,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도착한 보스톤에서의 행적을 보면 딱히 유디트를 찾아나선 미국방문이라는 느낌이 와닿지 않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받은 압박감이 불안을 조성하는 느낌, 그런가하면 초면인 사람들과 노름에 휩쓸리기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행태를 보입니다.

뉴욕에 도착해서는 아내가 남겼다는 카메라를 찾고서는 생뚱맞게도 3년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만나 잠자리를 같이한 클레어 매디슨이라는 여자를 찾아 필라델피아 인근의 피닉스빌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딸과 함께 간다는 세인트루이스까지 동행합니다. 그들과의 여행을 보면 적극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매디슨의 딸 베네딕틴을 돌보는 일이 중심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 과정에서 아내 유디트와의 관계가 어땠는지 살짝 보여줍니다. ‘유디트와 나는 지난 반년 동안 깊은 증오심으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해왔다.(86쪽)’ 매디슨을 만난 이유가 누군가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아내를 뒤쫓을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이야기의 말미에는 드디어 만난 아내 유디트가 화자에게 권총을 겨누고 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짧은 편지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내가 쏜 총에 맞는 순간 이야기는 존 포드 감독과의 조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보면 유디트와의 만남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야기의 전반에 걸쳐 언급되는 카를 필리프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와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와 계보를 같이 하는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보면 페터 한스케가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개인의 성장과정인 듯합니다. 아내 유디트와의 관계를 청산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온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이라는 생소한 장소를 여행한다는 것은 과거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쉽게 녹아들어가지 못하고 불안이 고조되는 것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극복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이 책에서 언급한 카를 필리프 모리츠의 <안톤 라이저>와 고트프리트 켈러의 <녹색의 하인리히>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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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는 나는?
기욤 뮈소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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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는 나는>은 기욤 뮈소의 2009년작 소설입니다. 신출귀몰하는 도둑을 아버지로, 그 아버지를 뒤쫓는 경찰을 첫사랑으로 둔 여인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요?

이야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젊은이가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소르본 대학을 졸업한 마르탱은 미국을 공부하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왔던 참에 버클리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버클리대 학에 다니는 가브리엘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나이답지 않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미국 체류 마지막 날에서야 겨우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합니다. 다음날 공항에 나간 가브리엘은 ‘조금만 더 있어 줘’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그 열흘을 바쳐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지만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브리엘에게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마르탱은 애써 모은 돈으로 샌프란시스코-뉴욕 왕복 비행기표를 가브리엘에게 보내고, 자신은 파리에서 출발해서 뉴욕으로 갑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뉴욕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식은 건지, 아니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작가가 너무한거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경찰이 된 마르탱은 몇몇 부서를 거쳐 OCBC(프랑스 문화재 밀거래 단속국)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고흐의 자화상을 훔치려하는 세기의 도둑 아키볼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흐가 남긴 마흔 점이 넘는 자화상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기 1년 전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요양원에서 그린 자화상이라고 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들은 고흐의 병세와 내면의 혼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시간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반 고흐가 금박을 입힌 나무액자 안에서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키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의 눈길을 찾아 헤매는 것도 같고, 왠지 피하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이었다. 음영이 들어간 붓 자국이 고흐의 무뚝뚝하고 여윈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화가의 얼굴을 덮은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불꽃색깔의 수염 그리고 환각의 세계를 표현한 듯 소용돌이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었다.(48쪽)”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아키볼드는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로 그린 고흐의 자화상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정신을 놓을 만큼 고심했던 한 화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키볼드를 잡기 위해서 마르탱은 강박증이라 할 만큼 아키볼드에게 집착했다고 합니다. 아키볼드처럼 생각하고,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갔고, 아예 아키볼드 맥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백 명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잡기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수사방식을 읽으면서 JK 롤링의 환상소설 <해리 포터> 연작의 두 주인공 해리 포터와 볼드모트가 대비됩니다. 선과 악의 양 끝에 있는 두 사람이 의외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가 볼드모트의 생각을 엿본다거나 볼드모트 역시 해리 포터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어떻든 쫓고 쫓기는 입장의 아키볼드와 마르탱이 결국은 ‘천국의 열쇠’라는 이름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신 없는 나는>에서는 환상적인 요소, 즉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대기하는 공간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죽음으로 향하는 비행기와 삶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탑승대기구역을 마련한 것입니다. 탑승대기구역에서 삶과 죽음이 몇 차례씩이나 뒤바뀌는 묘미가 있습니다. 운명은 아키볼드와 마르탱,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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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경에 기대어
이민철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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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전문의 시험을 같이 치렀던 동기 두 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전남대학교 병리학교실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은 이민철교수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해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병리학 공부를 막 시작하던 해에 학술모임에서 처음 만난 두 분은 모두 대학을 지키다다 지난해 은퇴를 하였고, 이러저런 이유로 대학을 떠난 저는 다른 분야에서 현장을 지키고 있기는 합니다.

<현미경에 기대어>는 자리를 마련한 이민철교수가 선물로 준 책입니다. 정년을 맞으면서 썼다고 합니다. 살아온 날들을 회고하면서 병리학, 특히 세부전공인 신경병리학 분야에서 해온 연구업적도 정리했는데, 전문용어들이 많아 다소 어렵다는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책을 받아 책장을 넘겨보았을 때는 현미경 사진을 비롯하여 병리표본 사진들이 많이 곁들여있어서 병리학 교과서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친숙한 것들이라서 흥미로웠지만 일반 독자들이라면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저 역시 이민철교수처럼 신경병리를 세부전공으로 공부를 하였던 바라, 책에서 여러 번 소개된 전미 신경병리학회 등 국제학회에도 여러 차례 같이 참석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이교수와 해외학회에서 처음 만났던 것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전미 신경병리학회였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학회가 끝나고 세인트루이스의 명물 게이트웨이 아치에도 올라가 도시의 전경을 굽어보고, 마크 트웨인의 족적을 따라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는 유람선을 같이 타보기도 했습니다. 해외학회에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누군가 같이 가면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책내용을 보면, 이교수가 병리학을 공부하게 된 과정, 특히 신경병리학을 공부하게 된 인연을 먼저 소개하고, 신경병리학이 다루는 다양한 연구 분야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대학에서 일하는 병리학자들은 진단과 실험 그리고 학생교육 등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소개하고 싶은 사연들이 많았음 직 합니다만, 충분히 흥미로운 내용들만 잘 골라낸 것 같습니다.

제 경우는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신경계질환을 공부하였는데,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무렵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신경병리학적으로 접근할만한 사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때 착안했던 뇌은행사업은 외국에서는 오래전에 시작해서 많은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부검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어떻든 그런 인연으로 전공한 분야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써냈으니 저도 할 만큼은 해온 것 같습니다.

제가 전공했다는 퇴행성 신경계질환 분야에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이교수가 이 책을 쓰기 위하여 많은 자료를 섭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억 등에 관한 최신 연구동향을 소개한 부분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자료를 모으면서 준비해온 기억에 관한 책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현업에서 물러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살아온 날들을 정리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책의 말미에 이르면 병리학, 특히 신경병리학을 전공하면서 후학을 키워내던 40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논문이 유수한 학술지에 실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이민철 교수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라는 것이 요즘들어 우한폐렴사태로 주목받게된 코로나바이러스 진단시약이나 치료제를 개발하는 분자생물학 분야라고 하니, 앞으로도 연구에 더 매진하여 좋은 연구성과와 논문을 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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