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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없는 나는?
기욤 뮈소 지음, 허지은 옮김 / 밝은세상 / 2009년 12월
평점 :
<당신 없는 나는>은 기욤 뮈소의 2009년작 소설입니다. 신출귀몰하는 도둑을 아버지로, 그 아버지를 뒤쫓는 경찰을 첫사랑으로 둔 여인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요?
이야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젊은이가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소르본 대학을 졸업한 마르탱은 미국을 공부하기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왔던 참에 버클리 대학의 카페테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버클리대 학에 다니는 가브리엘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 사나이답지 않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미국 체류 마지막 날에서야 겨우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전합니다. 다음날 공항에 나간 가브리엘은 ‘조금만 더 있어 줘’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그 열흘을 바쳐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지만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브리엘에게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마르탱은 애써 모은 돈으로 샌프란시스코-뉴욕 왕복 비행기표를 가브리엘에게 보내고, 자신은 파리에서 출발해서 뉴욕으로 갑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뉴욕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식은 건지, 아니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작가가 너무한거죠...?
그리고 세월이 흘러 경찰이 된 마르탱은 몇몇 부서를 거쳐 OCBC(프랑스 문화재 밀거래 단속국)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고흐의 자화상을 훔치려하는 세기의 도둑 아키볼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흐가 남긴 마흔 점이 넘는 자화상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기 1년 전 생레미드프로방스의 요양원에서 그린 자화상이라고 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들은 고흐의 병세와 내면의 혼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시간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반 고흐가 금박을 입힌 나무액자 안에서 걱정 어린 시선으로 아키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대의 눈길을 찾아 헤매는 것도 같고, 왠지 피하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이었다. 음영이 들어간 붓 자국이 고흐의 무뚝뚝하고 여윈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화가의 얼굴을 덮은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불꽃색깔의 수염 그리고 환각의 세계를 표현한 듯 소용돌이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었다.(48쪽)”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아키볼드는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로 그린 고흐의 자화상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정신을 놓을 만큼 고심했던 한 화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키볼드를 잡기 위해서 마르탱은 강박증이라 할 만큼 아키볼드에게 집착했다고 합니다. 아키볼드처럼 생각하고,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갔고, 아예 아키볼드 맥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백 명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잡기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수사방식을 읽으면서 JK 롤링의 환상소설 <해리 포터> 연작의 두 주인공 해리 포터와 볼드모트가 대비됩니다. 선과 악의 양 끝에 있는 두 사람이 의외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가 볼드모트의 생각을 엿본다거나 볼드모트 역시 해리 포터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등의 이야기 말입니다.
어떻든 쫓고 쫓기는 입장의 아키볼드와 마르탱이 결국은 ‘천국의 열쇠’라는 이름의 저주받은 다이아몬드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신 없는 나는>에서는 환상적인 요소, 즉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대기하는 공간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죽음으로 향하는 비행기와 삶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탑승대기구역을 마련한 것입니다. 탑승대기구역에서 삶과 죽음이 몇 차례씩이나 뒤바뀌는 묘미가 있습니다. 운명은 아키볼드와 마르탱,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