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작 - 잠 못 드는 사람들 / 올라브의 꿈 / 해질 무렵
욘 포세 지음, 홍재웅 옮김 / 새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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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작가의 작품으로는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욘 포세 3부작>을 읽게 된 것은 잠 못 드는 사람들이라는 중편의 제목에 끌렸던 까닭입니다. 헨릭 입센과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작가라는 이유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욘 포세 3부작>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등 세편의 연작 소설로 구성되었습니다. 3부작이라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이야기의 맥락이 연결되고 있으니, 한편의 장편소설이라고 불러도 되지 싶습니다.


3부작을 구성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노르웨이 서남부 해안의 피오르드 안에 숨어있는 벼리빈(지금의 베르겐입니다)을 무대로 펼쳐집니다. 뒬리아에 살던 아슬레와 알리다는 열일곱 남짓한 젊은이들인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알리다가 임신을 하여 출산을 앞두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아버지가 폭풍에 실종된 이후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아슬레는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트하우스의 주인이 나타나 집을 비워달라 하고 합니다. 알리다 역시 아슬레를 집으로 들일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무작정 벼리빈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벼리빈에서도 역시 결혼하지 않은 두 젊은이들에게 하룻밤 묵어갈 방을 내줄 정도로 따듯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여관마저도 다 찼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결국은 막아서는 노파의 집에 우격다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리다는 출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두 사람은 지지리 복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 부모로부터 충분히 돌봄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물려받은 것도 없오 빈털터리로 벼리빈까지 흘러든 셈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아슬레는 올라브로, 알리다는 오스타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바르멘에 살고 있다고 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여전히 벼리빈에 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올라브라고 하는 노인이 등장하는데, 올라브라고 주장하는 아슬레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노인은 뒬리아에서 두 건의 변사사건이 있었다고 아슬레에게 이야기합니다. 보트하우스의 주인과 알리다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2부의 말미에는 이야기가 더 확장되면서 올라브가 두 건의 변사사건과 연관이 되어있지 않느냐고 추궁합니다. 그리고는 맥주를 한 잔 살 것을 요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올라브가 살고 있는 집의 주인 노파가 실종된 것과도 연관지으려 합니다. 올라브는 맥주집에서 노르웨이 북단에 있는 섬 뫼소이에서 왔다는 오스가우트를 만나게 됩니다. 올라브는 오스가우트가 약혼자에게 주려고 샀다는 금팔찌에 이끌립니다. 그리고 오스타를 위하여 금팔찌를 사고 싶어 합니다. 결국은 오스가우트의 도움을 받아 금팔찌를 사지만 거리의 여자에게 도둑을 맞습니다. 오스타가 기다리는 집에 돌아온 올라브는 벼리빈을 떠나기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을을 떠나기 전에 노인의 고발에 따라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의 화자는 알리다의 딸 알렉스입니다. 알렉스는 알리다와 오슬레이크 사이에 태어난 딸입니다. 그러니까 아슬레가 처형당한 뒤에 의지할 데가 없는 알리다를 발견한 것은 오슬레이크였습니다. 알리다가 어렸을 적 뒬리아에 살던 오슬레이크는 벼리빈에서 발견한 알리다에게 비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해달라고 합니다. 갈곳이 없던 알리다는 오슬레이크를 따라 비카로 갔고, 그와 같이 살게 됩니다.


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작품해설을 보고서야 알았지만, 쉼표있으나 마침표가 없는 글이었던 것입니다. 작가의 이런 의도는 마침표가 없으면 모든 텍스트는 사람들이 내적으로 생각하고 고심하는 모습을 담아낸 길고 긴 덩어리의 형식(263)”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이 반복되지만 아슬레가 벌이는 행적이 미심쩍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작품해설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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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뜨개 - 첫 코부터 마지막 코까지 통째로 이야기가 되는 일 아무튼 시리즈 37
서라미 지음 / 제철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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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수필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은둔형이라는 별도의 분류방식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번역가인 서라미님이 뜨개에 빠진 사연을 정리한 책입니다. 독후감을 쓰면서 보니, 이 책은 뭔가에 빠진 분들의 사연과 그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글을 다루는 아무튼이라는 기획이 서른일곱번째 책이고, 지난 12월까지 서른아홉번째 책이 나왔다고 합니다. 예스24에서 확인한 주제를 최근 순으로 나열해보면, 인기가요, 후드티, 뜨개, 목욕탕, 반려병, 연필, 달리기, 언니, 여름, 산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제도 다양한 것을 보면 저자의 제안으로 책이 나온 것인지, 아니면 기획한 쪽에서 집필을 의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나라면 무슨 이야기를 글로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들이 모두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제철소, 위고, 코난북스, 더블엔 등 4개나 되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라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도 20177월에 <아무튼, 피트니스>가 처음 출간되고도 4년째 들어 서른아흡번째 책을 내놓은 것을 보면 저력이 있는 기획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저도 독특한 화두를 붙들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튼, 뜨개>번역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떠다니다 우연히 뜨개의 세계로 흘러들어왔다는 번역가 서라미님의 뜨개 예찬입니다. 모두 열여섯 꼭지의 글 가운데 뜨개에 빠지기 전에 하던 번역과 뜨개를 연결하는 글, ‘뜨개를 안해보셨군요뜨개는 실로 하는 번역이다를 제외한 나머지는 오롯이 뜨개의 매력을 소개합니다. 뜨개에 대한 저의 무지를 일깨우는 책읽기였습니다.


뜨개예찬에 지나치게 몰입하신 것 아닐까 싶은 대목도 없지 않았습니다. 번역을 하셨다면 당연히 책을 뜨개보다 앞에 두셨을 것 같습니다만, ‘뜨개를 안해보셨군요라고 하신 것을 보면 뜨개에 방점을 찍은 듯합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단 한 권의 책이라는 문구를 인용해서 뜨개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이야기한 대목입니다. 이 문구를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없다고 하셨지만, 누리망 검색을 해보면 금세 답이 나올 일입니다. 잭 캔필드와 게이 헨드릭스의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그리고 <뜨개질 클럽>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여 선풍적 인기를 끈 앤 후드의 소설 <내 인생 최고의 책>도 있습니다.


저의 본업은 주로 앉아서 일을 하는 시간이 많은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엉치가 배겨 오래 앉아있기도 어려웠는데, 작가님이 소개하신 무중력 의자라는 것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좋은 정보는 역시 책에서 나온다니까요. 이 책의 출간기획서를 준비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작가께서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 채택이 된 다음에 편집자와 의논을 통하여 기획방향을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한번 뭔가를 준비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뜨개를 번역과 비교한 것은 좋았습니다만, 우주로까지 확장한 것은 조금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뜨개질이란 용어를 사용한 기사를 읽은 작가님의 반응을 보고 뜨아했습니다. 평양에 있다는 평양 수예연구소를 뜨개질 연구소라고 하면서 공예 미술 창작 기관으로ㅡ주로 자수와 뜨개질 기술을 연마하는 곳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뜨개질 연구소라고 한 것은 뜨개를 폄하하는 정서가 담긴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라는 접미사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나무위키를 보더라도 같은 맥락의 설명이 나옵니다.


하지만 뜨개와 뜨개질을 찾아보면 해석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역시 나무위키를 보면 뜨개질이란 실과 바늘, 가위 등을 이용해 편물을 결여서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뜨개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기는 쉽지 않았지만, ‘손으로 뜨는 일뜨개질 하여 만든 물건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영어의 ‘knit’에는 뜨다’, ‘뜨개질을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와 편물이라는 명사로 사용례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편물을 뜨는 일을 뜨개질이라고 하니, 뜨개질에는 뜨개를 폄훼하는 의미가 담겼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뜨개질은 뜨는 행위를 뜨개는 그렇게 만든 편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해도 무난할 듯합니다.


끝으로 작가님이 번역을 하시는 분이라 해서 덧붙이는 말입니다만, 저는 요즈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외래어 사용을 줄이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미 우리 생활에 자리 잡은 외래어까지도 좋은 우리말로 나타내는 노력을 글 쓰는 이라면 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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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황예지 지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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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를 너무 건조하게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바꾸어 보기 위하여 다양한 형식의 수필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가족사진과 초상사진 작업을 통해 위로를 전하려는 젊은 사진작가 황예지의 수필집입니다. 사진작가라는 특정한 분야와 젊은이의 감성을 느껴볼 수 있는 책읽기를 기대했습니다.


수집과 기록을 좋아하는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시작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뜻 모를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놓고 집을 나간 어머니가 10년 만에 돌아올 때까지는 사랑하지만 아픔이었던 가족들을 찍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온 뒤부터 가족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진을 통하여 아픔을 직시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입니다가족들에 얽힌 이야기들 사이에는 가족들의 모습을 비롯하여 이야기와 관련된 장면을 담은 사진이 곁들여졌습니다.


가족들의 모습이라고 해서 예쁜 모습이 아닌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진솔한 모습이 담겨있어, 읽어가다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역시 작가의 솔직한 심정이 담긴 원고를 최대한 살린다는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전후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나타나면 읽는 흐름이 흩어지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아빠의 얼굴로 빼곡하다(13)’는 부분에서 빼곡하다라는 단어를 끌어온 이유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빼곡하다라는 형용사는 사람이나 물건이 어떤 공간에 빈틈없이 꽉 찬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식의 얼굴이 필자의 얼굴에 아빠의 얼굴이 빈틈없이 꽉 차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의 모습이 아빠의 얼굴 그대로 닮았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빼다 박았다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땅에 박혀 있는 물건을 빼내서 다른 곳으로 옮겨 박았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빼닮다혹은 빼쏘다라는 우리말을 쓰면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이를 가졌을 때 누군가를 깊게 미워하면 그 얼굴을 닮는다라고 했다는 엄마의 말에 이어진 생각입니다. 흔히 자식들의 모습이 부모의 모습을 빼닮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엄마의 얼굴을 닮는 자식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의 엄마는 임신했을 때 자신을 깊게 미워한 것일까요?


양치할 때 잇몸에서 피가 샐쭉 튀어나왔다는 대목도 샐쭉이라는 단어가 어떤 감정의 표현으로서 입이나 눈을 한쪽으로 샐긋하고 움직이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제자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친구와 부하직원의 배신으로 망했을 때도, ‘우리 집은 한순간에 풀썩 주저앉았다라는 표현보다는 우리 집은 한순간에 폭삭 망했다라고 보통 말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뭔가 다른 느낌을 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사업실패에 이어 미국 이민, 어머니의 가출, 아버지의 수감생활, 아버지의 교통사고 등등 작가의 가족들이 겪어내야 했던 신산한 삶의 궤적들은 연대기를 꿰맞출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적당히 감추고, 포장하고 싶을 수도 있었겠지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적으면서 이를 극복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작가의 생각이 읽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후기를 대신하여 이 책을 읽은 독자에게 전하는 친애하는 당신에게라는 글을 말미에 달았습니다. 그 끝을 보면, “이제는 슬픔을 곁에 두고자 합니다. 그 또한 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전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던, 끝내 들리고 싶은 모습을 이 책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저의 시간을 드릴게요. 이 책을 덮으면 당신의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 것이에요. 아린 마음과 함께 우리가 다정한 세계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런 작가의 마음과 달리 독후감을 그리 다정하게 쓰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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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만찬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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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의 문학 대사라고 하는 이스마일 카다레가 2009년에 발표한 <잘못된 만찬>을 읽었습니다. 사실 알바니아는 저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나라입니다. 지도를 보면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 해가 이오니아 해로 나가는 길목을 감시(?)하는 요지로 보입니다. 바다건너는 장화모양으로 생긴 이탈리아의 뒷 굽과 함께 아드리아 해의 폭이 좁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년전에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하는 발칸반도를 여행하면서 아드리아 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알바니아까지 포함하는 상품이 없었습니다. 구경거리가 없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유사 이래로 알바니아는 독립을 유지한 시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는 고대로부터 일리리아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일리리아 사람들은 기원전 1200년 무렵 발칸반도의 서쪽 아드리아 해의 북쪽 끝에서 지금의 알바니아 부근에 이르기까지 진출했다고 합니다. 물론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는데, 기원전 167년 로마제국에 점령된 이후로는 중세에는 비잔틴제국으로 이어서 오스만제국으로 지배세력이 바뀌었습니다.


1912년 알바니아 사람들이 봉기하여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왕국들이 발칸동맹을 맺어 오스만제국에 맞선 발칸전쟁에서 오스만제국이 패하였고, 발칸동맹군이 알바니아에 진주하였지만, 그해 1128일 알바니아는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혼돈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국제통제위원회의 관리를 받던 알바니아는 공국-공화국을 거쳐 1928년에는 알바니아 왕국이 성립하였습니다. 하지만 1939년에는 이탈리아왕국에 합병되었고,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자 나치 독일이 알바니아를 점령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반에는 민족주의자 세력과 공산세력이 대립하는 내전상태에 빠졌습니다. 전후에 공산세력이 민족주의세력을 진압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습니다.


<잘못된 만찬>은 제2차 세계대전 후반,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독일군이 알바니아를 점령하던 시기부터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기까지의 혼란하던 시기가 시대적 배경입니다. 무대는 그리스로부터 멀지 않은 산간마을인 지로가스트라 시입니다. 발칸반도의 지역적 특색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산간마을들은 서로 냉랭한 관계였던가 봅니다. 작가는 그런 분위기를 이렇게 나타냈습니다. “남쪽으로는 강을 따라 골짜기 곳곳에 그리스 소수민족 부락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멸시를 받으면서도 다른 이웃들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이 도시의 정신적인 균형을 교란했다.(18)”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로, 그리스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이 알바니아를 점령하기 위하여 진주해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독일군의 진주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독일은 코소보와 차머리아를 알바니아에 통합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인데, 막상 지로가스트라 시에 진주해가던 독일군을 맞이한 것은 저격병의 총탄세례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짐작은 하였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습니다. 독일군은 탱크를 앞세워 포격을 하면서 도시로 진입하다가 포격을 멈추었는데, 누군가 흰 천조각을 들어올려 항복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시가를 점령한 독일군의 지휘관은 프리츠 포 슈바베 대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로가스트라 시에 친구가 있었습니다. 구라메토 그로스. 뮌헨대학에서 수학할 무렵 동무였다고 합니다. 슈바베 대령을 만난 구라메토 박사는 알바니아의 전통 손님맞이법, 베사(‘신의라는 알바니아의 관습법)에 따라 슈바베 대령의 일행을 집에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군이 잡아들인 유대인들이 차례로 풀려나게 됩니다. 피는 피로 갚는다는 알바니아 전통의 두카지니법에 따르면 독일군이 진주할 당시의 저격으로 입은 피해를 피로 보상해야 할 상황인데 말입니다. 이날 만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훗날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된 다음 체포된 구라메토 박사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드러나게 됩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는 때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2차 세계대전 말혼란스럽던 알바니아의 국내사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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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아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07
맬컴 라우리 지음, 권수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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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책에서 소개된 것을 읽고서 찾아읽은 꼬리를 무는 책읽기였습니다. 아마도 전에 알코올 의존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과, 멕시코 중남부 콰우나우악(모렐로스 주의 주도 쿠에르나바카의 옛 이름)을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 끌려 고른 책입니다. 본문 530쪽에 이르는 긴 이야기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피네간의 경야>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그려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어려운 책읽기였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화산 아래서>1938112일 멕시코 축일의 하나인 죽은 자의 날(디아 데 무에르토스, Día de Muertos; 11월 첫째날과 두 번째 날로 죽은 친지나 친구를 기억하면서 명복을 비는 행사를 합니다)2시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12시간이라고는 하지만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멕시코 주재 영국 영사 제프리 퍼민을 회상하는 두 사람의 대화로 시작하여 1년 전 퍼민의 죽음과 관련된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퍼민은 영국과 멕시코가 국교를 단절하면서 영사직은 내놓고 두 개의 화산이 보이는 콰우나우악으로 낙향하여 살게 됩니다. 상심한 그는 술에 의존하여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아내 이본, 이복동생 휴, 그리고 어린 시절의 친구 자크 등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것 같습니다. , 술에 절어서 살고 있는 퍼민에게 실망한 이본이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가 복잡했을 것이라는 암시가 곳곳에 깔리면서 퍼민 역시 그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국 주변인물들이 퍼민의 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1년 전에 이들은 나락에 빠진 퍼민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을 방문하였습니다. 특히 이본은 남편을 설득하여 관계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지만, 결국 퍼민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안타까운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저 역시 젊어서는 술을 좋아해서, 해가 설핏 기울면 술이 당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요즈음에는 술을 마시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불쾌한 시간들을 견디기가 어려워지고 있어서 술 마시기를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술을 멀리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합니다.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들이 뒤섞이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율리시스> 등에서 보는 의식의 흐름을 토대로 하여 작가 나름의 주관적 방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작가 멜컴 라우리는 이 소설의 구조를 추리게레스코 양식의 멕시코 성당에 비유했다고 합니다. 17세기 스페인에서 나타난 바로크 양식을 말하는데, 화려하면서도 소용돌이와 같은 복잡한 구조가 특징이라고 합니다.


작가가 서술하는 풍경이 인상적인 대목이 많습니다. 이야기의 말미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눈보라가 이스탁시우아틀의 정상을 따라 형성되어 정상의 모습이 희미해진 반면, 전체적으로 뭉게구름이라는 수의를 입은 모습이었다. 깎아지는 듯한 포포카페테틀 덩어리가 계곡을 따라 구름과 함께 움직여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기이하고 침울한 빛이 작은 묘지가 있는 언덕을 비추고 있었다. 묘지는 사람들로 가득했으나 보이는 것은 촛불뿐이었다.(466)” 죽은 자들의 묘지풍경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꼬리를 무는 책읽기를 이어갈 다음 작품을 소개받았습니다. 장 콕토의 <지옥의 기계>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인데, 여기에서는 “Oui, mon enfant, mon petit enfant(그래, 내 아기, 내 작은 아기)”라는 대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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