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철학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심강현 지음 / 궁리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몇 년 전에 보건의료 누리망 신문에 인문분야의 책을 소개하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인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같이 공부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쉬운 분야는 없었습니다만, 역시 철학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기회가 되는대로 철학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여전히 어렵기만 합니다. <시작하는 철학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를 읽은 것도 철학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습니다. 책을 쓴 심강현 선생님은 정신과를 전공하는 의사선생님입니다. 뒤늦게 인문공부를 시작한 저와는 달리 의과대학 시절부터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 내공을 바탕으로 철학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를 써내는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저자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 철학자는 스피노자와 니체였다고 합니다. 두 철학자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하여 서양 철학사의 흐름을 따라 공부왔던가 봅니다. 저자는 <시작하는 철학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를 통하여 서양철학사의 사표라 할 만한 분들의 철학을 살펴보았습니다. 플라톤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데카르트, 스피노자, 합리론과 경험론,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를 거쳐 니체에 이릅니다.

이 책은 플라톤의 저술처럼 대화체로 되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철학자들을 만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도우치라는 고슴도치입니다. 고슴도치 도우치는 꼬리를 자르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가 시간이 멈춰버린 철학자들의 숲에 들어서게 됩니다. 숲에 서 있는 나무에는 숫자가 적혀있는데 그 숫자는 서기로 표기된 년도입니다. , ‘시간이 멈춰버린 철학자들의 숲은 철학자 혹은 학파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로 안내하는 시간이동장치인 셈입니다.


도우치가 시간이 멈춰버린 철학자들의 숲에서 처음 만난 이는 영원의 빛 아래 비춰본 안경점의 주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철학자 스피노자였습니다. 도우치는 과거 시간대에 묶어 살고 있는 철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화두로 삼았던 철학적 사유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그러니까 저자가 공부한 철학적 지식을 요즘의 화법으로 설명을 하는 셈입니다. 옛 철학자들이나 고슴도치가 현대의 한글로 대화를 나누는 셈입니다. 대화하는 가운데 최근에 개봉된 영화를 비롯하여 유행어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인물이 그런 것들을 과연 알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서양철학사의 핵심인물들의 철학적 사유를 한권의 책으로 요약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습니다만, 저자는 그 일을 해냈습니다. 옛 철학자들과 만나 그들의 철학의 바탕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마지막에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을 붙여두었습니다. 살펴보니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아직도 읽지 못한 책들도 있습니다. 따로 적어두었다가 시간이 되는대로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중간 중간에 도우치의 꼬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도우치가 집을 나서게 된 이유, 즉 꼬리를 자르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붙들지 못했습니다아마도 니체가 도우치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이야기에 답이 있지 싶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이데아의 발밑에 드리운 초라한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들이 아니다. 그림자는 우리의 착각이었으며, 우리 자신이야말로 그 그림자를 만들어낸 원본이다. 너는 단지 모방품으로 만들어진존재가 아니라, 너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원본이란다. 왜냐면 너는 너 자신의 이데아니까. 네 삶은 하나의 작품이니까(357)”


결국 인간 하나 하나가 세계라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스스로를 평가절하하지 말고 스스로를 경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일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있게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 - 몽테뉴 수상록 선집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고봉만 옮김 / 책세상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문학평론가이자 프루스트 전문가인 앙투앙 콩파뉴의 <인생의 맛>을 읽고서 미셀 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었습니다. <인생의 맛><수상록>에서 고른 40개의 주제에 대한 역사성과 현대에서도 통하는 바를 재해석한 내용입니다. <수상록>의 곳곳에서 의사에 대한 불신을 읽을 수 있다는 콩파뉴의 귀띔으로 <수상록>을 읽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무실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읽을 요량을 하였던 것이 완독하는데 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다.


<수상록>에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당시 유럽을 휩쓴 페스트와 전쟁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아야 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임의로 연습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백성들의 무심함이야말로 참된 지혜를 이루며 기꺼이 독배를 받아든 소크라테스의 무심함만큼이나 고귀하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라고 적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상록><인생의 맛>과 같은 수많은 2차 저작물을 낳았다고 합니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신 고봉만교수의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도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상록>에서 나이 듦죽음에 관한 글을 뽑아 엮은 책이니 엄밀하게 말하면 2차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아하게 늙어가기품위 있는 죽음이 저의 관심사이니만큼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을 읽고서 뭔가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이 들어왔습니다. 고봉만교수님은 불문학을 전공하신 만큼 <수상록>의 원본에서 가려 뽑은 대목을 직접 번역하셨지만, 불어를 배우지 않은 저는 이미 번역된 <수상록>에서 가려 뽑을 글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몽테뉴의 사유의 깊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시대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볼 여지는 있지 싶습니다. 특히 몽테뉴가 소장한 자료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 혹은 로마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금언을 인용하고 있는 점도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저자는 1나이 드는 것은 죄도 벼슬도 아니다에서 나이 듦과 관련된 7가지 주제에 해당하는 글들을, 그리고 2죽음의 철학에서 삶의 철학으로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2가지 주제에 해당하는 글들을 뽑았습니다. 3부에서는 <수상록>26장에 실려 있는 훈련에 대하여32장에 실려 있는 후회에 대하여를 담았습니다. 이어지는 해설-몽테뉴, 죽음에서 삶으로에서는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다룬 노화와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정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몽테뉴는 자연이 우리에게 죽음을 학습할 수단을 마련해주다고 말한다. 그것은 노화다. 청춘에서 노년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이러지는 과정이 단절 없이 계속 진행되는 노화를 통해 우리는 서서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287)”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어디서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으니, 어디서든 죽음을 기다리자. () 죽는 법을 알면 모든 예속과 속박에서 벗어난다(119)”라는 <수상록>의 대목을 인용합니다.


읽어가다 보면 이런 글이 나이 듦과 관련이 있을까 싶은 대목이 없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이 어찌 보면 나이 듦이라고 한다면 살아가는데 필요한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수상록>에 적힌 모든 대목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생애 단 한번의 여행
카차 뷜만 지음, 강혜경 옮김 / 현문미디어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우한 폐렴 사태로 2년여 여행을 멈추고 있습니다. 일상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국내여행도 자제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여행에 관한 책읽기도 뜸해지고는 있습니다만, 가끔은 눈길을 붙드는 책이 있으면 읽기도 합니다. <내 생애 단 한 번의 여행>도 그런 이유로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뒷표지에 적혀있는 삶과 사랑,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난 15인의 여행자, 그들이 발견한 여행의 기적’”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는 카차 뷜만입니다. 자신의 여행이야기가 아니라 여행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있었던 15명의 여성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엮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막막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그런 느낌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50여일을 집에 처박혀 빈둥거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여행을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생애 단 한 번의 여행>의 뒤표지에 적혀있는 다음 구절이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여행자는 자신의 수레바퀴를 벗어난 순간 진정 가슴 뛰는 삶을 찾을 수 있었다. 여행을 통해 삶에 필요한 용기를 얻었고, 더 너그러워졌으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비로소 여행자가 여행의 기적을 발견한 것이다


물론 어떤 이야기는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고 변화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가 심리변화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는 여유를 찾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단 한 번의 삶, 단 한 번의 여행이라는 모두 글에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 책에서 만날 여성들은 여행을 좋아하며 여행 중 사람들 말고도 특히 사물 그 자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본성을 발견했고 여행을 자신과 세계의 관계 정립을 위해 이용했다.(7)”


대부분의 여성들이 여행을 좋아해서 많은 여행을 하는 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단 한 번의 여행은 아니지 싶었습니다. 삶이 막막할 때 숨통을 트여주었던 특별한 여행에 관한 기억이라고 하는 편이 옳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디트라고 하는 방송인의 사례를 읽으면서는 위험한 여행은 피해야겠다는 교훈을 새겼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아무리 직업적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목숨을 내놓은 도전에 나서야 했을까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루트와 베르너 부부의 삶도 참고할만한 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세상을 두로 주유했던가 봅니다.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여행을 떠났는데, 한번 갔던 곳을 다시 간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내기엔 삶이 너무 짧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업무로 여행을 다니던 일을 접고 나서부터는 갔던 장소를 다시 간 적은 아직 없습니다. 시간은 없고 가야할 곳은 많아서입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해보니 이 책에 실린 15명의 여성들에게 있어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단 한 번의 여행은 대체로 반려자를 만난 여행을 꼽는 것 같았습니다. 반려자와 함께 하는 여행에서도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만, 코리나와 에릭의 경우는 특별했습니다. 자가 대처 조치를 준비한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싸워 헤어지게 될 경우 정확하게 일주일 후에 다시 처음 장소로 되돌아오기로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자기를 돌아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번역에 관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흔히는 영어로 알고 있는 지명을 독일어로 적어놓아서 헷갈리는 경우가 더러 보였습니다. 차라리 현지어로 적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지 홍신 세계문학 16
펄 벅 지음, 이강빈 옮김 / 홍신문화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펄 벅의 <대지>를 읽었습니다. 20세기 초반의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를 무대로 해도 전혀 낯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근근이 먹고 사는 왕 룽이라는 청년은 성안의 황 부자집 종 오란과 결혼하는 날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옛날부터 사람을 잘 들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만, 왕 룽과 오란은 열심히 농사를 지어 황부자네 논을 살 수 있었습니다. 비도 적당한 때에 내려주어 풍년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까지나 사람들의 풍족한 삶을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설상가상이라는 말처럼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면서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지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의 사태에 이르면서 왕 룽은 남쪽에 있는 도시로 떠나기로 합니다. 작가가 이야기의 무대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않습니다만, 안후이(安徽) 성의 동쪽에 있는 장쑤(江蘇) 성으로 옮겨간 듯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400리 길을 남쪽으로 갔다고 하니 안후이성의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장쑤성에 있는 난징이나 쑤저우 혹은 상하이까지 내려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남쪽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는 동안 비럭질도 하고 인력거도 끌어 자선가가 베푸는 급식소에서 끼니를 이어가던 중에 일어난 난리 통에 사람들에 휩쓸려 들어간 부잣집에서 은과 패물을 얻는 횡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왕 룽 일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몰락한 황부집의 논을 사들여 지주가 되었습니다. 왕 룽이 살면서 가장 잘 한 일은 오란을 부인으로 맞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란은 세상의 온갖 쓴맛을 보면서 성장한 탓에 주관이 뚜렷한 여성이었지 싶습니다.


졸부가 되면 흥청망청하다가 다시 몰락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왕 룽 역시 찻집의 기녀 렌화를 들여 첩을 삼기도 합니다. 농한기가 문제인 것이지요. 하지만 왕 룽은 여느 졸부와는 달리 언제까지 첩에 빠져있지 않고 다시 땅으로 돌아갑니다. 땅에 대한 왕 룽의 생각은 어쩌면 우리네 농부와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말미에 두 아들이 아버지의 땅을 팔아 나누자는 의논을 하는 대목에서, “땅을 팔기 시작하면 집안은 마지막이야. 우리는 땅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땅을 갖고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땅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는 말도 있지요. 누구나 제가 할 몫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거리입니다. 큰 아들은 문약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잇속을 챙기는데 선수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아버지가 일군 땅을 이어받아 농사짓기를 거부하고 군인이 됩니다. 어쩌면 둘째 하나만 왕 룽이 생각한대로 커갔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자녀들이 반목하는 대목, 특히 첫째 며느리와 둘째 며느리는 노골적인 반목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오란이 없어 상황이 더 나빴을 수도 있습니다. 왕 룽은 농사짓는 일 이외에는 크게 관심을 쏟지 않는 듯합니다. 집안의 대소사도 혼자 생각에 따라 결정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메뚜기 떼가 날아들면 땅 위에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만, 메뚜기 떼의 침입에 맞서는 마을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 대목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안후이 성은 양쯔(揚子)강의 하류에 있어 홍수 피해를 입는 대목이 이해되지만 가뭄에도 속수무책이라는 대목은 조금 이해되지 않습니다. 왕 룽이 사는 곳에도 마적이 출몰한다는 대목도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습니다. 북쪽 지방에서나 세를 떨쳤다고 생각한 마적이 중국 땅 어디에서도 활개를 쳤던 모양입니다.


오란이 중병에 들었을 때 부른 노의사가 맥을 짚고 진단을 내리는 대목입니다. “비장이 부었고, 간장도 나쁘오, 복부에 사람 머리만한 돌이 있소. 위장도 헐었소. 심장은 겨우 움직이는데 어쩌면 회충이 있는지도 모르겠소.” 요즈음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환자가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완쾌를 보증하는데 은전 천 닢을 요구했습니다. 당시에는 완쾌를 보증한 환자가 죽으면 의사가 처벌을 받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던가 봅니다.


땅에 모든 것을 맡겨야 했던 그 옛날의 풍경을 되새겨보는 책읽기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기억 1~2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도 제가 오랫동안 쥐고 있는 화두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 거리로 삼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면 아무래도 줄거리 혹은 작가가 깔아둔 장치에 대하여 언급할 수밖에 없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소설을 읽기 전에는 다른 분의 독후감을 피하는 편입니다.


사실 이 책은 기억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원제목은 <판도라의 상자(LA BOITE DE PANDORE)>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더 이야기와 어울리는 제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르네 톨레다노선생은 과학을 가르키는 동료여교사 엘로디와 함께 유람선 판도라의 상자에서 열린 최면서 오팔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오팔의 최면술의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시작됩니다. “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13)” (출판사에서는 최면술사의 상투적인 꼬임말에서 이 책의 제목을 가져온 것은 아닐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전생을 만나는 최면이기 때문에 잊힌 기억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지금도 재방송이 나오면 열심히 보는 연속극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 나오는 저승사자는 사자를 저승에 보낼 때 차를 내놓습니다. 이승의 기억을 모두 지워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팔은 르네에게 최면을 걸어 기억의 심연에 잠겨있다는 전생들을 만나도록 해줍니다. 르네는 112번째 생을 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만난 전생의 비참한 최후에 놀라 공연장을 뛰쳐나온 르네는 살인을 저지르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오팔을 다시 찾아가 자신의 전생을 뒤져보기로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르네는 첫 번째 전생, 12천 년 전에 아틀란티스에서 살았던 게브를 만나게 됩니다. 대서양에 있는 아틀란티스 섬에 살고 있는 게브는 인간보다 열일곱 배나 큰 거인이었습니다. 전해지기는 아틀란티스는 대서양에 있던 대륙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섬으로 이야기됩니다. 물론 화산의 폭발로 섬이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것은 전해지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사라진 전설의 아틀란티스 문명이 실재했다고 생각한 르네는 전멸 위기에 있는 아틀란티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그들이 실재했다는 증거를 남기도록 하고, 그것을 발견해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르네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쫓기는 신세가 됐고, 르네의 망상을 걱정한 엘로디는 르네를 정신병원이 입원시켜 살인사건의 용의점을 해명하려는 기획을 했지만 오히려 정신병원에서 전기충격치료를 받게 됩니다. 치료결과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르네는 전생의 도움을 얻어 정신병원을 탈출하고, 오팔을 만나 함께 이집트로 도망칩니다. 아틀란티스의 게브를 이집트로 이주시켜 그곳에서 만나려는 의도입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르네는 게브가 남긴 아틀란티스의 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증거물을 세상에 알려 고고학계의 공인을 받는 과정은 수월치 않았습니다. 결국 엘로디의 도움을 청하게 되고, 엘로디는 대학시절 친구인 고티에와 함께 르네가 발견한 아틀란티스의 유물을 생방송으로 세상에 알리기로 합니다.


하지만 생방송 중계진이 현장에서 발견한 것은 어지럽게 찍한 발자국 말고는 파피루스 기록도 아틀란티스 거인의 유해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집트 경찰이 몰려와 일행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고 말았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점은 현장이 누군가에 의하여 파손되었다면 게브와 다시 연결하여 유물을 남기는 장소를 변경하는 등 대응방안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았구요.


작가는 세상에 알려진 전설과 신화를 꿰어 맞췄지만 조금은 거친 느낌이 남았습니다. 최면을 통하여 전생을 만나고, 그들의 능력을 빌어서 현생에서 써먹는 것도 너무 소설적이라서 쫌 그랬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