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론 범우문고 328
칼 야스퍼스 지음, 황문수 옮김 / 범우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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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카타르시스를 일으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슬픈 이야기에 빠지는 이유도 다양할 것입니다. <비극론>은 칼 야스퍼스가 비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배우는 책읽기였습니다.


실존철학의 기초를 닦은 야스퍼스가 비극을 통하여 인간의 참모습을 밝히려 한 것은 실존철학의 정수라고 옮긴이는 평가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서문에서 진리의 근저(根底)를 통찰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일이다(11)”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형상, 행위, 역사 등의 형태로 진리를 전달하는 근원적, 정신적 직관이 간직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철학적 사색은 이러한 직관 자체를 타자로 이해하면서도 자극하고 고양(高揚)시키는 등 직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직관은 근원적으로는 포괄적인 전체이며 인간의 생활을 형성하고 충족시키는 분리할 수 없는 일자(一者)라고 했습니다.


직관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종교,예술,문학이 갈라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는 일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는 자체의 제한점으로 철학적 사유의 목표가 되는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논하기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조형예술 역시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 만큼 형이상학적인 것의 계기가 되지 않는다 할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진리가 언어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인 만큼 언어를 요소로 하는 문학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자명한 방식으로 세계 공간과 우리들의 본성의 모든 내용을 파악하는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야스퍼스는 <비극론>에서 비극적인 것구제를 연결하였습니다. 먼저 호머 등 서양으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모든 민족의 영웅전설로 시작하여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의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칼레론, 라시누 등의 근대 비극, 레싱과 실러 등의 독일 비극을 거쳐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등에 이르는 비극적 지식을 살펴보았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기쁨에 대한 부분을 인용한 야스퍼스는 비극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곧 영혼의 카타르시스(淨化)라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분명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카타르시스는 인간의 자기 존재(存在)에 접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앞서 종교는 자체적인 제한점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제한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교적 구원은 비극적 지식에 대립된다. 독자적인 구원 가능성이 벗어날 길 없는 비극성을 소멸시킨다(32).” 그리스도교적인 비극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극적인 것의 근본적인 성격을 보면, 존재는 좌절속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존재가 좌절 속에서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초월 없는 비극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비극적인 것의 의미는 결코 한 가지 공식으로 나타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비극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구원에 대한 충동과 결합되어 있어 인간은 현존재로서는 소멸하면서 자기 존재의 행위 가운데에서 구원적 해방을 발견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해방은 첫째, 무지, 순수한 인내력, 확고부동한 의기로써 감내해 가는 힘으로부터 생기며, 둘째 비극적인 것을 비극적인 것으로 직시하는데에서 생기며 이때 비극적인 것은 스스로를 해명함으로써 정화작용을 하고, 셋째, 비극적인 것이 이미 직관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는 해방은 비극적인 것의 직관에 앞서서 달성된다고 했습니다.


특히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인용하여 그들의 비극적 숙명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이디푸스에게 지워진 운명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만, 오이디푸스의 좌절은 알 수 없는 운명의 참모습을 알고 끝없는 초월의 길을 더듬은 끝에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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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들
앤 카슨 지음, 황유원 옮김 / 난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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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곡을 찌르는 한 줄 문장이 가지는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한줄 문장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목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겠구나 싶어서 <짧은 이야기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짧은 이야기들을 지은 앤 카슨은 토론토에서 태어나 시인, 수필가, 번역가이자 고전학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생업으로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친다라는 역시 짧은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한다고 합니다.


45꼭지의 글의 제목은 모두 ‘~에 대한 짧은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 후기, 마거릿 크리스타코스의 발문, 심지어는 역자까지도 ‘~에 대한 짧은 이야기라는 소제목을 달았습니다. 제목을 훑어보면서 여행, 기차, 독서 등 저의 관심사에 대한 짧은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흥미를 끌었습니다.


시인은 서문에서 훌륭한 이야기에는 일어나는 모든 일에 원인이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끌어왔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별들은 있지만 말들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왜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는 것 같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어보았고, 그게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해진 모든 것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그 흔적들은 점차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을 이루어낸다고 했습니다. <짧은 이야기들>은 누군가가 말 한 것들을 받아적은데서 출발한 모양입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짧은 이야기들은 보통 대여섯 줄에 불과합니다. 단 한줄도 채우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가장 긴 글이라고 해도 한쪽을 넘어가는 것은 없었습니다. 정말 짧은 이야기다보니 선문답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여행을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의 경우, “나는 잔해만 남겨진 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곳에는 약간 열린 채로 선 대문 세 개와 망가진 울타리가 있었다. 딱히 무언가 특별한 것의 잔해는 아니었다. 한 장소가 그곳에 와서 추락했다. 이후로 그 장소는 잔해만 남겨진 곳으로 남았다. 그 위로 빛이 떨어졌다.(31)”


시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로마문명이 남긴 유적이 떠오릅니다. 정말 대문 세 개와 망가진 울타리만 남은 유적을 본 것도 같습니다. 어떠면 그곳은 제국 시절에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위로 빛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에서 설파한 바가 떠오릅니다. 유적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 된다는 것 말입니다.


왜 어떤 이들은 기차에 마음이 들뜨는지에 대한 짧은 이야기는 더욱 황당합니다.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들이 이어지고 있어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 헷갈립니다. 아무래도 시인에게 이 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곳곳에서 외워두면 좋을 것 같은 수사들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많이 사랑받는 기쁨에 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많이 사랑받는 기쁨(le bonheur d’être bien aimée)’이라는 주제는 에스파냐의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라 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가 한 이 땅의 모든 보물을 다 합해도 사랑받는 기쁨보다 값질 순 없다의 프랑스어 표현을 변형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페인어로는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노란 하늘 위대한 노라 하늘을 이해하기 위해서지라고 했다는 반 고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술을 마셔온 것이 이유도 없는 헛일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서에 대한 짧은 이야기는 아직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키 산맥에는 저도 가보았습니다만, 문화적 배경 탓일까요?


짧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긴 이야기는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에 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저도 아는 그림이라서 시인의 해석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려면 더 깊이 절개해야 합니다, 라고 데이만 박사는 뇌를 머리카락처럼 양쪽으로 가르며 말한다. 그 안에서 슬픔이 주변을 더듬으며 기어나온다.”는 대목입니다. 저도 뇌를 부검하곤 했습니다만,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과업은 세상을 위해 비밀스러운 짐을 나르는 것이다라고 한 나의 과업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과업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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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과학 - 뇌과학이 말하는 기억의 비밀
찰스 퍼니휴 지음, 장호연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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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제가 오래 동안 쥐고 있는 화두입니다. 기억력 상실이 주 증상인 치매를 공부하다보니 관심이 생긴 것인데,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점은 어렸을 적에는 기억을 참 잘한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어느새 옛날 기억들이 가물거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기억의 과학>은 영국 더럼대학교의 심리학교수 찰스 퍼니휴가 쓴 책입니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기억에 관한 연구들을 집대성한 것으로 보여 읽게 되었습니다. 목차를 보면, 기억의 규칙이라거나 최초의 기억, 기억은 정확한 것인지, 미래의 기억이라는 것이 있는지, 등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1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이 기억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기억에 관한 과학적 진실이라는 기획의도를 살리지 못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필자 역시 글을 쓸 때 저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편입니다만,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에 윤활유를 치는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구조는 흥미롭습니다. 우선 저자는 길 잃기라는 방식으로 자전적 기억을 되살려보려 합니다. 예전에 살았던 도시를 찾아 옛 기억을 되살려보려는 시도로부터 기억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기억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흔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인용하는 것처럼 감각이 기억을 되살리는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펴봅니다. 개인정보에 대한 보안이 강화되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접근이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서 접근이 거부되는 상황도 흔히 생깁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기억과 회상에 비유합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을 불러낼 때의 단서와 기억할 당시 부호화된 정보를 맞추는 과정.(31)”이라고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란 것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 말고도 누군가 전하는 것을 듣고 직접 경험한 것으로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틴 콘웨이는 인간의 기억에는 두 가지 힘이 작용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일어났던 사실에 충실하게 기억을 끌고 가려는 일치의 힘이고, 또 하나는 기억을 현재의 목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믿음에 모순되지 않도록 만들려는 일관성의 힘입니다. 결국 기억은 개인의 인생관이 반영되어 구성되는, 왜곡된 진실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미래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는 말씀을 앞에 드렸습니다. 바로 기억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7미래를 내다보는 기억입니다. 여기에서는 기억이 일어난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기 위해 진화한 것.(32)”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전적 기억과 미래의 사고는 같은 신경체제가 가동되며, 둘 다 일종의 상상력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11할머니의 기억에서 다루고 있는 노년의 기억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거리는 이유와 가물거리는 기억을 분명하게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이 책에서는 기억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성과는 그리 많이 반영되지 않아서 기억의 형성과 회상의 기전에 관하여 이해하는데는 큰 도움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기억에 관하여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어 앞으로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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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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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김탁환님이 <읽어가겠다>에서 소개한 책입니다. 201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단편집입니다. <디어 라이프>에는 10개의 단편과 표제작인 디어 라이프를 포함하여 어린 시절의 삶을 돌아보는 네 편의 글을 담았습니다. 김탁환님은 먼로의 단편은 늙은 개구리 같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3대 불가사의라는 우스갯소리를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럭비공이 튀는 방향, 개구리가 뛰는 방향, 그리고 여인의 마음은 정말 불가사의하다는 것 말입니다. <디어 라이프>에 실린 단편들은 읽는 이가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인다는 것을 개구리와 비유한 것입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와의 이별을 다룬 영화 <어웨이 프롬 허>의 원작을 쓴 앨리스 먼로는 1931년 생입니다만, <디어 라이프>에 실린 단편들의 시간적 배경은 더 옛날인 것들도 있습니다. <디어 라이프>를 읽게 된 것은 김탁환님이 소개한 일본에 가 닿기를기차등 두 작품이 열차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읽어보니 두 작품 이외에도 아문센에서도 기차가 등장합니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반전의 무대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다니곤 했습니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화물칸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열차를 타보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최근에는 캐나다의 태평양쪽에 있는 뱅쿠버에서 대서양쪽의 핼리팩스까지 연결되는 횡단열차을 타보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두 작품을 통하여 캐나다의 횡단열차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탁환님은 <디어 라이프>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 같다고 했는데,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임에도 남녀 사이의 관계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할 뿐만 아니라 함께 여행하고 있는 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가 그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가도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그와 같은 판타지는 동면에 빠지듯 하고 일상적인 애정이 변함없이 견고하게 되돌아왔다고 하는데,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습니다. 딸과 함께 토론토에 도착했을 때 그 남자가 기다리는 것을 발견한 여인은 놀라면서 반가웠던가 봅니다. 작가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는 케이티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손을 놓았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41)” 딸아이를 챙기는 일보다 만나고 싶었던 남자와의 관계가 흘러가는 대로 맡기겠다고 생각하는 어머니가 있을까요? 열편의 단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아니라 수 없었습니다.


부자집 외동딸과 혼외관계를 맺고 그녀의 재산을 빼돌리는 유부남의 이야기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충격적인 결말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등장인물들이 20세기 중반 캐나다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설을 보면, 작가는 단편 자존심의 마지막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화자의 집 뒷마당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부분은 아련하고 쓰라리지만 더 없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더 깊이,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시간의 매정함(혹은 너그러움), 산다는 것의 팍팍함(혹든 소중함), 생존한다는 것의 안쓰러움(혹은 거룩함), 곁에 있는 존재의 체온(혹은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의 체온) 등의 모순적인 것 같으면서도 잘 융화되어 녹아 있다(418-9)”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읽어내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 할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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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 - 1946년, 전후 독일의 현장 취재기
스티그 다게르만 지음, 이유진 옮김, 박노자 해설 / 미행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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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주축국 가운데, 전쟁 과정에서 저지를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인식에 있어 독일과 일본의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생각은 저만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이나 일본 국민들의 생각을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 <독일의 가을>은 그런 궁금증에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독일의 사정에 국한 된 것이기는 합니다.


1946년 스웨덴 일간지 <엑스프레센>은 패전 독일의 상황을 보도하기 위하여 스티그 다게르만이라는 23살 된 신예작가를 파견하였습니다. 반파시스트 경향의 다게르만은 독일여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친척방문이라는 목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015일 기차로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베를린, 하노버, 루르지방의 뒤셀도르프, 에센 그리고 쾰른,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뉘른베르크, 다름슈타트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에서 1210일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그가 방문한 지역은 전후 영국과 미국이 점령한 지역으로 점령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논조는 점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패전국의 국민들의 삶이 열악했음은 분명할 터이지만, 특히 독일의 대부분 지역은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주택들이 부서지는 바람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누울 자리도 태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패전 후 소련군의 점령지에서 쫓겨나 독일로 귀환하는 독일군과 국민들을 수용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에서 이들을 위한 대책마련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폭격에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지하실에는 발목까지 차가운 물에 잠겨있었는데, 그런 열악한 장소에도 여러 세대가 옹기종기 모야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독일제국에 반대한 사람들은 전후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멀쩡한 집을 살 여유가 없었지만, 제국에 협조한 사람들은 오히려 떵떵거리고 사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 치하에서 더 살기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생존을 위한 나치와의 타협이라는 변명으로 치부하는 경향입니다만, 흔히 전후 독일국민들은 나치제국에 부역하였다는 일반론적인 책임을 묻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치의 선동에 동조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독일 안에서도 나치에 맞서 내전을 펼친 강력한 반나치 행동조직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합국에서는 이들의 반나치 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후 재건과정에서도 이들을 위한 역할을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은 재건과정에서 독일국민들은 다양한 사상에 따라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다게르만의 기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미에 붙인 박노자의 작품해설을 읽으면 상황이 조금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은 이전에 일어났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한 수많은 전쟁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미서 전쟁을 비롯하여 제1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등은 도덕적 명분이 없는 침략전쟁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주축국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 때문에 이에 대한 연합국들이 수행한 전쟁은 좋은 전쟁(good war)으로 포장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연합국의 국내사정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도덕적인 면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독일제국에 비하면 차선 혹은 차악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하노버의 어느 화가와 패전과 새로운 독일 예술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하노버의 화가는 만일 제가 폐허를 그린다면요. 폐허라서가 아니라 폐허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리는 겁니다. 보기 흉했다가 폭격 후 아름다워진 건물들이 많이 있어요. 하노버 박물관은 특히 햇빛이 부서진 지붕을 뚫고 들어올 때 정말 폐허에 딱 맞게 보입니다.(178)”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에서 전한 건축물의 모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부합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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