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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 - 1946년, 전후 독일의 현장 취재기
스티그 다게르만 지음, 이유진 옮김, 박노자 해설 / 미행 / 2021년 10월
평점 :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주축국 가운데, 전쟁 과정에서 저지를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인식에 있어 독일과 일본의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생각은 저만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독일이나 일본 국민들의 생각을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 <독일의 가을>은 그런 궁금증에 어느 정도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독일의 사정에 국한 된 것이기는 합니다.
1946년 스웨덴 일간지 <엑스프레센>은 패전 독일의 상황을 보도하기 위하여 스티그 다게르만이라는 23살 된 신예작가를 파견하였습니다. 반파시스트 경향의 다게르만은 독일여성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친척방문이라는 목적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0월 15일 기차로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베를린, 하노버, 루르지방의 뒤셀도르프, 에센 그리고 쾰른,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뉘른베르크, 다름슈타트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에서 12월 10일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였습니다. 그가 방문한 지역은 전후 영국과 미국이 점령한 지역으로 점령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논조는 점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패전국의 국민들의 삶이 열악했음은 분명할 터이지만, 특히 독일의 대부분 지역은 연합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주택들이 부서지는 바람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누울 자리도 태부족이었습니다. 게다가 패전 후 소련군의 점령지에서 쫓겨나 독일로 귀환하는 독일군과 국민들을 수용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에서 이들을 위한 대책마련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폭격에서 파괴되지 않고 남아있는 지하실에는 발목까지 차가운 물에 잠겨있었는데, 그런 열악한 장소에도 여러 세대가 옹기종기 모야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독일제국에 반대한 사람들은 전후에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멀쩡한 집을 살 여유가 없었지만, 제국에 협조한 사람들은 오히려 떵떵거리고 사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일부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 치하에서 더 살기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생존을 위한 나치와의 타협’이라는 변명으로 치부하는 경향입니다만, 흔히 전후 독일국민들은 나치제국에 부역하였다는 일반론적인 책임을 묻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치의 선동에 동조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독일 안에서도 나치에 맞서 내전을 펼친 강력한 반나치 행동조직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합국에서는 이들의 반나치 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후 재건과정에서도 이들을 위한 역할을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은 재건과정에서 독일국민들은 다양한 사상에 따라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다게르만의 기사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미에 붙인 박노자의 작품해설을 읽으면 상황이 조금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전에 일어났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한 수많은 전쟁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미서 전쟁을 비롯하여 제1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등은 도덕적 명분이 없는 침략전쟁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은 주축국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 때문에 이에 대한 연합국들이 수행한 전쟁은 좋은 전쟁(good war)으로 포장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연합국의 국내사정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도덕적인 면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독일제국에 비하면 차선 혹은 차악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하노버의 어느 화가와 패전과 새로운 독일 예술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하노버의 화가는 “만일 제가 폐허를 그린다면요. 폐허라서가 아니라 폐허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리는 겁니다. 보기 흉했다가 폭격 후 아름다워진 건물들이 많이 있어요. 하노버 박물관은 특히 햇빛이 부서진 지붕을 뚫고 들어올 때 정말 폐허에 딱 맞게 보입니다.(178쪽)”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에서 전한 건축물의 모습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부합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